〈 35화 〉 chapter 3: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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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햇볕이 창가를 통해 나를 감싼다.
칙칙거리는 원두가 볶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 카페는 볶아진 원두를 사는 것이 아닌, 직접 볶아서 커피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가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담긴 컵으로 손을 뻗었지만,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바라보고는 왼손으로 덮어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오른쪽 팔목에 아직도 선명한 상처 자국이 눈에 들어와, 질끈 눈을 감고 앉아있는 쇼파에 몸을 푹 기대었다.
두렵다.
내 전신이 요동치며 울부짖는다.
도망가라고, 그냥 이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는 오지 말자고.
“저...누나, 괜찮으신가요?”
“....어, 괜찮으니까, 네가 할 일이나 해.”
“....그래도...”
“괜찮으니까, 가.”
“...네.”
그런 내 모습이 멀리에서도 많이 티가 나는지, 여기에서 일하고 있는 호준이 슬쩍 다가와 나에게 안부를 묻자, 나는 그를 밀어내었다.
나는 지금, 호준이 일하는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내 끔찍한 기억의 원흉이자, 트라우마를 안겨준 장본인.
나는 오늘, 박민준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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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 미칠 것 같던 나는 현수의 집에서 간신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던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현수의 말에,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그는 너무나도 상냥한 사람.
그러나 그가 만약, 내가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아도 똑같을까?
나 같아도 아직, 이 모든 것을 믿기 힘든데.
오래 지낸 사이도 아닌, 그가 내 이야기를 믿어줄까?
믿어줄지도 모른다.
아니, 믿어준다.
설령 그의 속마음은 아닐지라도, 그는 내 말을 믿어주는 시늉을 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게 싫었다.
너무나도 상냥해서, 거짓말을 하고 마는 그를, 나는 보기 싫었다.
나를 대할 때마다 말은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저 정신병 걸린 여자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싫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그런다면 더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힘이 났다.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는, 그의 온기가 너무나도 따뜻해서,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다.
공기계가 아닌, 슬라이스 폰을 꺼내 번호를 입력한다.
몇 년이 지났지만 내 뇌는 우습게도 정확히 그 녀석의 번호를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자판을 눌러, 민준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만약, 그 일 이후로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면, 이 번호가 확실할 테지.
그렇게 번호 입력을 끝내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멈칫거리고 말았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손이 떨렸다.
전화, 전화는 아닌 것 같아, 문자를 남기자.
[내일 오전 11시, XX동 XX카페로 와, 김상국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 신중하게 입력해, 나는 민준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이 카페는 저번에 나를 도와준 호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공장소에서는 민준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와 문자가 미친 듯이 휴대폰을 울렸지만, 나는 싸그리 무시한 채, 내일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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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키자, 손의 떨림이 조금이지만, 줄어드는 감각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았다.
현재 시간은 10시 57분.
곧 그 녀석이 도착할 시간이다.
어찌 된 영문일지 모르지만, 민준은 과거의 나, 김상국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내가 보낸 문자를 보고,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딸랑.
카페의 출입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손님에게는 언제나 깍듯한 호준이 출입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눈치채고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그는 아주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박민준.
그가 카페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까지 달려서 도착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다, 나를 발견하고는, 내가 앉아있는 창가에 있는 자리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내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온 민준은 나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내가 앉아있는 쇼파 바로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김상국 그 새끼 어디 있어.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아주 침착한 듯이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게 입을 열고, 말하는 거야.
“일단 하나만 묻자, 왜 김상국을 찾는 거야?”
“몰라서 물어? 친구, 친구니까!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가, 한순간에 증발하듯이 사라졌는데, 찾지 않으면 이상한 거 아니야? 그래서, 김상국 어디 있냐고!”
“....친구?”
하.
하하, 진짜 골 때리네.
내게 엄청난 악몽을 박아 넣은 녀석이, 나를 찾고 있다.
친구라서.
그 친구한테 너는 무슨 짓을 했는데.
“그리고 너 말이야, 참 뻔뻔하네 시발련아? 3년 전, 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게 만들고는, 내 지갑을 털어갔으면서 말이야. 그래놓고는 대충 땅바닥에 날 던져놓고 사라져?”
“....뭐?”
“맞잖아! 내 마지막 기억으로는 분명, 너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거리의 가로수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고, 내 주머니에 있던 지갑은 사라졌다. 씨발 그럼 니가 범인이지 누가 범인이야?”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그러니까, 너는 그날 밤 일이....하...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정말....단 하나도.....아...!”
맞아.
기억이 났다.
박민준은 보통 때는 몰라도, 술에 완전히 취해버리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버리고는 했다.
내가 남자였을 때는, 대충 그 녀석 자취방에 던져놓고는 했던 기억이, 이제야 떠올랐다.
“하....하하....하하하하...흐하..”
“뭘 쪼개는 거야 시발! 그래서 김상국 어디 있냐고!”
어째서,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기는 걸까.
나를 3년 동안 괴롭히게 만든 장본인은, 그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며, 여태까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남자였던 김상국을, 여태까지.
진짜, 어이가 없네. 하하.
“김상국이 어디 있냐고? 난 알려줬어, 3년 전, 그날. 너에게 강간당한 내가, 김상국이라고.”
“....뭔 개소리야?”
민준은 내가 한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가 이 몸이 되었던 날, 나는 어떻게든 도움을 받기 위해 너를 불렀지, 내가 당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박민준, 바로 너뿐이었으니까. 이게 혹시나 꿈은 아닐까?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닐까? 생각하며 술을 마셨어, 어, 조금 많이 마셨어.”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그리고, 쓰러진 나를 너가 데리고는, 모텔에 데려가 나를 강간했지, 그래, XX모텔이었어, 지금까지도 그 모텔 이름이 기억나, 지금도 떠올리면 죽고 싶어질 만큼 괴로워. 그래도 잊을 수가 없어, 이 기억은 아마 평생토록 내 머릿속에 박혀, 나를 괴롭힐 거야.”
“적당히 해라....진짜 뒤지고 싶냐?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어서 김상국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
“어디 있기는, 여기, 네 눈앞에 있잖아. 김상국.”
민준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쥐어 탁자를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가 카페 전체를 울려, 카페 안의 손님들이 화들짝 놀라며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바라봤지만, 민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씨발 진ㅉ....”
“뭘 해줄까?”
“....뭐?”
“내가 김상국이라고 믿을 만한 증거 말이야.”
화가 나서 내 멱살을 잡으려던 민준에게 말하자, 그는 잠시 굳어버리더니, 이내 손에 힘을 풀고 쇼파에 털썩 앉았다.
“하....시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어이가 없네.....12년 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생물 시간 선생의 별명을 말해봐.”
잔뜩 화가 나 있던 민준은 내 말을 듣고 김이 새버렸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분명 머리가 벗겨진 50대 남자....코가 크고...앞니가 삐죽 튀어나왔던....
“가가멜, 그래 가가멜이었지, 처음으로 지었던 사람은 분명 너였어.”
“그래 알 리가 없....뭐?.....잠깐, 그걸 어떻게 알았지?...아니야, 뻔하지, 김상국한테 미리 전해 들었을 거야, 틀림없어......맞지? 그렇지?”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휘젓던 민준은 내 대답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침착해졌다.
“그럴 리가 없지, 하하, 나도 미쳐가는 것 같네, 어떻게 남자가 여자로 변해, 그것도 단 며칠 만에, 이런 질 나쁜 농담은 이제 그만해, 재미없으니까.”
“....네가 믿건 말건, 상관없어, 내가 바라는 건 딱 두 가지, 이젠 김상국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나를 찾으려고도 하지 마, 전화도 걸지 마, 문자도, 아니, 이제부터 너와 나는 서로 완전히 모르는 사이야, 난 그걸 전하려고 널 불렀어. 이제...이제 진짜 끝이야.”
“....진짜....진짜로 네가 김상국이라고...?”
“난 이제 간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보지 말자.”
아직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민준을 그대로 놔둔 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ㅇ...야..! 잠깐만!”
“만지지 마!”
그러자 생각에 빠져있던 민준이 퍼뜩, 고개를 들어, 내 손목을 잡으려던 것을 나는 전력으로 쳐냈다.
“...하아...하아...건들지...마....제발....”
닿는 것도 싫다.
끔찍해.
가까스로 버티던 다리가 이내 풀려버릴 것만 같다.
“아..알았어....그럴 일은, 네가 정말로 김상국이라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테지만, 하나만 말하게 해줘.”
“....뭐야, 어서 말해.”
내 행동에 놀랐는지, 그는 약간 떨어지고 나서,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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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끝이야, 나도 이제 포기하려던 찰나였어, 정말 우연히, 우연히 너를 길거리에서 만났지.”
“......”
“네가 정말로 김상국이라는 생각은 아직 안 들어, 그리고 내가 술에 취해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아, 모든 게......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그 얼빠진 얼굴로 실실 쪼개던 김상국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시발 진짜....”
그는 나에게 말을 남기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보다 빠른 속도로 카페를 떠났다.
“......우욱...”
그가 사라지자, 간신히 버티던 구토감이 목 끝까지 들이닥쳤다.
“우웨에엑...!”
후들거리는 다리를 미친 듯이 움직여, 간신히 카페의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를 붙잡은 채, 위장에 들어간 모든 것을 비워 내버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텼지만, 이미 내 정신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내 모든 것을 망쳐버린 민준은, 아직도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며 3년이 지난 최근까지 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친구.
그 단어가 자꾸만 뇌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민준이 남긴 말이, 날카로운 칼로 변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고등학교 때 가장 처음 친해진, 박민준.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놀면서 웃었고.
슬픈 일이 있으면, 집에서 몰래 훔쳐 온 소주를 같이 마시며, 위로해 주었다.
그때 그게 걸려서 아빠한테 줄창나게 빠따를 맞았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민준이 나였더라도, 그는 분명히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테니까.
다른 대학을 가서도, 공강이 되면 맨날 놀러 다녔고, 서로 다른 시간에 군대에 갔어도, 다른 한 쪽이 치킨을 사 들고 면회를 다녔다.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한 친구.
“괜찮아....괜찮아.....이걸로 끝이야.....다시는....볼 일 없을거야.....”
미끌거리는 화장실 바닥에 손바닥을 짚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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