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chapter 3: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5)
* * *
삐리리리!
이제는 점차 익숙해져가는 벨소리.
시끄럽게 울리던 벨소리가 이내 잦아들자, 문 너머로 급히 현관으로 다가오는 듯한 목발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철컥.
두텁디 두꺼운 철문이 끼익하면서, 열렸다.
“.....미영...씨?”
덥수룩한 머리칼, 면도되지 않아 듬성듬성 자라난 수염, 삐딱한 뿔테안경.
마치 처음 보았을 때처럼, 부스스한 몰골이었던 그는, 이 시간에 찾아온 나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피.”
“..네?”
“죄송하지만, 커피 한 잔, 내려 주실래요?”
미친놈.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작 모델 일을 하면서 가끔 커피나 내려 주던 우리 사이에, 이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 커피를 내놓으라는 미친놈, 아니 이젠 년인가.
그게 지금 내 모습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허나 그는, 살짝 열려 얼굴만 내놓던 철문을 활짝 열어, 나를 반겨 주었다.
아.
그의 집에서 비치는 밝은 빛이, 너무나도 밝아서.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내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고마워요.”
나는 그가 열어준 문틈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정말 죄송하지만, 샤워실 좀 써도 괜찮을까요?”
“네? 아 네, 마음껏 쓰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민폐인 부탁을 하자, 그는 관대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축축하고, 전신엔 빨간 흔적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으며, 가랑이 사이에 눅진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발...”
저번에도 봤던 별 모양의 샤워커튼을 제치고, 곧바로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올렸다.
쏴아아
상당히 고급진 아파트라서 그런걸까, 온수 방향으로 틀자, 잠깐의 차가운 물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곧바로 따뜻한 온수가 나와, 내 몸을 적셨다.
“...하...”
역겨워.
그제서야 따뜻한 온수와는 다르게, 차갑게 식어가는 내 마음이 아우성을 치고 말았다.
더러워.
시발.
강간마 새끼.
이제 그만.
벽에 걸린 샤워 타올에, 근처를 둘러보다 발견한 바디워시를 가득 적셔, 잔뜩 거품을 내고는 전신을 박박 씻었다.
그의 정액이 들어찼던 질 안도, 손가락을 넣어 휘저어가면서, 꼼꼼하게 씻어 내었다.
끈적하게 손가락에 들러붙는 정액의 감각이 소름 끼치게 역겨웠다.
그렇게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있던 나.
똑똑.
“아...! 네...?”
가벼운 노크 소리에 곧바로 정신이 돌아온 나는 잠시 쏟아지는 물줄기를 끄고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저기...일단 사이즈는 잘 모르겠지만, 갈아입을 옷을 문 앞에 놔두었으니, 입어주세요.”
“아....고마워요.”
“뭘요, 그럼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갈아입을 가져다준 현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나는 샤워실을 나와 걸려있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었다.
“....하하...진짜....이 사람은....”
몸을 다 닦아내고, 화장실의 문을 살짝 열어 손만 삐죽 내밀어 현수가 가져다 놓은 옷을 집어 오자, 내 몸에 걸치기에 약간 큰 옷이었지만, 그것보다 이 우산 모양의 무늬들은 뭔지...
자꾸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여전히 변함이 없구나.
대충 옷을 걸치자, 상반신만 옷을 입었을 뿐인데, 상당히 커서, 거의 무릎 바로 위 까지 가려졌다.
그가 바지 또한 건네주기는 했지만,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렸기에, 대충 팬티만 입기로 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 테고, 딱히 이 정도 가지고 수치심을 느끼는 단계는 이미 지나버렸다.
“아, 나오셨....바지는...요?”
“사이즈가 너무 안 맞아서 뭐....”
“아 그...렇군요? 일단 커피 한 잔 내렸는데, 드시겠어요?”
화장실에서 나오자, 이미 커피를 다 내려놓고 기다리던 그는,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자꾸만 시선을 아래로 돌리며 말을 더듬었다.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런 그가 앉아있던 곳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털썩 앉은 나는, 막 내려 따끈한 커피로 데워진 컵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아.
포근하다.
따뜻하고, 몸이 녹아버릴 것 같다.
아.
맛있어.
“저기요....”
“네?”
“어째서, 어째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나는 줄곧, 마음속에서 응어리진 말 한마디를 꺼냈다.
그는 그저, 돈 잘 버는 화가이고, 나는 몸이나 파는 여자.
우리 둘의 접점은 그저 모델과 고용인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걸까.
“..........”
“나는 그냥....나는.....그냥 돈이나 밝히고 그걸 위해서 몸을 굴리는...그런...사람일 뿐...인데...흐윽....어째서....어째서....”
역겹다.
오늘 밤, 나를 덮친 그 녀석도 역겹고, 돈에 환장한 박 실장도 역겹고.
그런데도,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이대로 죽어버리기 너무 싫어서.
그 사이에서 아등바등 버티는 나도, 역겹다.
“아씨....왜 자꾸...흐윽...나와..”
어느새 터져버린 눈물샘은 마를 생각 없이 눈물이 흘러나오자, 그 모습이 약간 부끄러워진 나는 얼굴을 가리며 연신 손으로 닦아내었지만, 자꾸만 흘러내렸다.
“....제가 미영 씨의 상황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라서, 무어라 말하기는 주제넘긴 하지만요.”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영 씨는, 미영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쇼파 바로 옆에 세워둔 목발을 들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글쎄요, 고작 두세 번 보았던 제가 미영 씨의 대해 무엇을 안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는, 저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미영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타각. 타각.
목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울리면서, 그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제가 보기에 미영 씨는, 커피를 좋아하고, 살짝 오래되었지만, 감성적인 노래를 좋아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인걸요.”
어느새 바로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그는, 몸을 굽혀 바로 내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괜찮아요. 제가...음...무어라 위로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던 그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나를 폭, 끌어안았다.
“하...진짜...”
나를 끌어안고, 어색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나를 안았던 다른 남성과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났다.
달콤한 섬유유연재 냄새와 묘하게 섞인 커피의 냄새.
아.
이게 너의 냄새구나.
달콤하고, 포근해서, 쭉, 이대로 쭉 있고 싶어지는, 냄새가 났다.
나는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