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chapter 2: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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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시간이 지났다.
모델 자세를 잡고, 꿈쩍도 안 하며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몸이 좀 뻐근하면 잠시 거실의 쇼파에 앉아 쉬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림은 좀 어떤가요?”
뻐근한 몸을 쇼파에 맡기고 쉬던 내가, 전신을 풀며 다시금 그의 작업방으로 들어가자, 문득 얼마나 그렸는지 궁금해져서,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이젤의 근처로 다가가 물었다.
그의 캔버스에는 연필로 선을 이은, 한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가련하게 의자에 앉아, 정면을 주시하는 여자.
이게 내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사진과는 다른, 그림으로 그려진 모습이었기에, 역겨운 감정은 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물화를 그리는 것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한 부분이 많네요...”
“....화가는 대단하네요.”
그는 머쓱 거리며 자신의 그림을 깎아 내렸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주 훌륭한 그림이었다.
예술가들은 역시 자기 작품에 엄격한 점수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그리고 싶기는 한데,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그의 말마따나, 시간은 어느새 오전 6시 30분.
곧 그가 나를 구매를 한 후 대여 시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지금 다시 그린다고 해도, 고작 몇십 분 남아있는 시간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 뻔했다.
“....그렇기는 하네요.”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분명 나는, 손님들과 만나며 언제나 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뭘까?
아쉬움?
어째서?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어째서 나는 이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돈도 더블로 주고, 가랑이를 벌리지도 않아서 그런건가...’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남자랑 있지만, 그는 내 육체를 탐하지도 않았고, 시끄럽게 욕지거리와 강압적으로 짓누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돈 또한 두 배였으니,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잠시간의 침묵을 유지했다.
“저....혹시 말이죠.”
“....네?”
어색하고, 뭔가 답답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바로 내가 아닌 남자였다.
“며칠 뒤에, 한 번 더 와서 모델 일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아..아아! 물...물론 지금과 변함없이 가격은 그대로 하고...네....”
뜨문뜨문 말을 더듬으면서도, 어떻게도 다시금 모델의 일을 제안하는 남자.
“...미영.”
“....네?”
“김미영, 그게 제 이름이에요.”
그의 제안에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그에게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름을 말해주었다.
“아...미영 씨.....아! 저...저는 현수, 차현수라고 합니다!”
“현수...네, 다음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현수 씨.”
“아...! 감사합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음번에 만날 것을 약속하자, 그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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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거리며 나는, 그 남자, 차현수가 있던 아파트를 나와, 박 실장이 오기로 한 장소로 걸어갔다.
높디높은 아파트가 태양을 가려서, 아파트 단지에는 넓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간은 6시 52분.
약속 시간보다 8분이나 빠르게 내려왔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언제나 약 10분 정도 일찍 약속 장소에 와 있었고, 지금 내 눈앞에 검은 밴은 그것을 증명하듯, 익숙한 듯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처음에는 무거워서 열기 힘들었던 차 문도, 요령을 찾아서 그런지 금세 여닫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자리에 털썩 앉은 나는 내 앞에서 잠시 졸고 있는 그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 돈은?”
조용하게 골던 코골이가 흠칫하며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선글라스를 올린 박 실장은, 나를 보자마자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
“.....손님이 5만 원으로 줘서, 잔돈이 없어요.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잔돈으로 바꿔올게요.”
“뭐, 알았다.”
내가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 거슬러 주겠다고 하자, 그는 별 말없이 고개를 다시 돌려, 밴을 운전하여 아파트 단지를 나왔다.
“여기 편의점이면 되냐?”
“아뇨, 제가 살 게 좀 있어서, 우리 동네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쯧....진작에 말할 것이지...”
차를 몰던 박 실장이, 근처에 보이는 편의점 갓길에 차를 대려다가, 여기가 아닌, 동네 편의점으로 가자고 하자 혀를 차고는 성질을 부리며 거칠게 핸들을 다시 꺾었다.
그는 언제나 화가 가득하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싶으면 온몸을 꿈틀거리며 표현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게 상대방에게 하는 위협인지, 아니면 그냥 습관처럼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그 성격이 참 싫었다.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며, 나를 때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뇌로는 알고 있지만, 내 연약한 몸뚱이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이미 3년째인데도, 이런 일에는 역시 익숙해지지 않았다.
남녀의 힘 차이와, 수많은 폭력은, 나를 이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쭈욱 침묵을 지키며 동네로 향했다.
그리고 항상 내가 사용하던 편의점 앞까지 도착한 벤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잠깐, 내가 항상 피던 걸로 한 갑만 사와.”
“네..”
그러자 차 창문을 내리던 박 실장이 나를 불러, 자신이 늘 피던 담배 한 갑도 요청했다.
대충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마저 편의점 출입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저기, 이것 좀, 만 원짜리 네 장이랑, 5천 원짜리 두 장으로 바꿔 주실래요?”
일단 먼저 어제 받았던 5만 원 지폐 중, 한 장을 꺼내, 편의점 알바에게 들이밀며, 거스름돈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55만 원의 30%면 165,000원, 5만 원권 세 장이랑 만 원 이랑 오천 원 각각 1장씩.
이러면 오늘 수익의 몫은 끝이다.
거스름돈을 바꿔 준 알바에게 돈을 받고, 다시금 한번 꼼꼼하게 세어, 정확한 액수가 맞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편의점을 돌아다녔다.
일도 끝났고, 술이나 한잔 하며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굳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편의점으로 찾아왔다.
여자로 변한 지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외모는 여전히 고딩 외모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아직까지 아무 편의점이나 들어갔다가, 재수 없으면 민증 검사를 당했기에,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마트나 편의점을 다니는 것이 편했다.
그렇게 소주가 들어있는 냉장고를 찾아 내부를 둘러 다니고 있을 때.
“.....이건...”
그런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편의점 제 커피였다.
아메리카노, 콜드브루, 카페라떼, 카랴멜 마키아또 등, 여러 가지 커피 종류가 가득한 것을 보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메리카노 음료를 하나 집었다.
현수의 집에서 마셨던 커피가 유독 맛있었기에, 내 몸은 커피라는 글자에 반응하고 있었다.
“....뭐, 하나 정도쯤은 사도 되겠지.”
그렇게 나는 소주 한 병과, 아메리카노, 내가 늘 피는 담배 두 갑과 박 실장이 시킨 담배 또한 구매를 끝내고 편의점을 나왔다.
“돈은?”
“...여기요.”
돈 귀신이 붙었는지, 박 실장은 내 얼굴만 보면 돈타령부터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손에 들린 지폐를 선글라스를 걸친 면상에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평범하게 건네주었다.
“담배도 여기 있어요.”
“그래. 어서 타라.”
“아...아뇨, 집이 가깝기도 하고, 그냥 걸어갈게요.”
“뭐....알아서 해.”
내가 사 온 담배의 포장지를 벗기며 새 담배를 물던 그가 차에 타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가급적이면 저 박 실장이라는 인간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페달을 밟으며 그대로 가버렸다.
“.....저 새끼 담뱃값도 안 줬네....시발 새끼...”
자기는 돈 돈 이 지랄을 떨면서, 정작 나에게는 등골조차 빨아먹는 지독한 인간이었다.
그런 박 실장의 태도에 신경질을 내던 나는 마찬가지로 담배다 한 대 피우면서 집으로 걸어가려고 했다가, 금방 편의점에서 산 커피가 생각났다.
검은 봉투에서 꺼내자, 용기에는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투명한 용기 덕에 까만 아메리카노가 잘 보였다.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넣은 나는,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고,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목으로 넘어가자, 아침이라고는 해도 약간 후덥지근한 몸에 달궈졌던 몸이 식혀져서 상당히 괜찮았다.
그래도.
“......거기서 마신 것보다는 맛이 없네...”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원두 콩을 갈던 현수가 건네준 커피에 비하면, 이 커피는 밍밍해서 그다지 맛은 없었다.
“.....다음에도 커피를 내려주려나..?”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나는 마저 커피를 홀짝거리며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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