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chapter 2: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6)
* * *
“저...저기....조금 쉬어도 괜찮을까요?”
이 자세로 앉아있는 것도 이제 1시간이 넘어갔다.
모델조차도 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을 힘들어하는데, 생초짜인 내가 하려니, 전신이 찌뿌등하고, 많이 힘들었다.
특히 내가 앉아있는 의자가, 푹신한 의자가 아닌 삭막하고 딱딱한 나무 의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엉덩이가 돌처럼 딱딱해지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집에는 특이한 물건이 참 많은데, 의자는 어째서 이런 의자를 내어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모델분을 그려본 적이 없어서....그림에만 너무 열중한 것 같네요....그럼, 조금 쉴까요?”
한참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가,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 또한 상당히 집중력을 소모했는지, 손으로 두 눈가를 문지르며 휴식을 제안했다.
“혹시,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담배..요?”
“네.”
여기까지 올 때부터, 현재 그림 모델을 할 때까지, 단 한 개비도 피지 못했기에, 내 몸과 뇌가 담배를 격렬하게 바라는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야 손님과 있으면 담배에 정신이 팔릴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제가 담배를 안 펴서 잘 모르겠지만, 발코니에서 피시면 될 것 같아요. 아, 발코니는 방을 나가서, 바로 오른쪽으로 돌면 나와요.”
“감사합니다.”
그는 잠시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있다가, 나에게 발코니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담뱃갑과 라이터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방 밖으로 걸어 나와 발코니로 향했다.
거실과 발코니를 잇는 창문에는, 거실에 있는 화려하고 이상한 물건들과는 다르게, 아주 어두운 암막 커튼이 달려있어, 금세 눈에 띄었다.
대충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발코니로 나왔다.
바닥에 있는 슬리퍼가 눈에 보여, 대충 신고 질질 끌면서 난간에 팔을 기대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내뱉던 나는, 밤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불빛이, 내 아래에서 수없이 반짝거렸다.
저 반짝거리는 불빛들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아, 저 빌딩에는 불이 하나만 들어와 있네, 야근일까?
그리고 멀리서도 보이는, 욕망으로 얼룩진, 유흥가들의 불빛 또한 반짝거렸다.
새하얗게 빛나던 다른 불빛들과 다르게, 유흥가의 네온사인들은 마치 무지개처럼 여러 색깔로 반짝거린다.
마치 덫을 놓고 먹잇감이 잡히는 것을 바라던 사냥꾼처럼, 수많은 유혹을 이용해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
그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피던 담배를 대충 짓이겨, 혹시나 남을 불씨를 완전히 제거한 뒤, 대충 던져버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곳이, 저 욕망이 꿈틀거리는 저곳이, 내 일터이자 내 삶의 구원줄 이라는 점이, 너무나도 싫었다.
“아, 다 피우셨나요?”
거실로 발을 들이자, 남자는 마침 커피 머신 앞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다리도 불편한데, 절뚝거리면서도 커피를 내리는 것을 보면, 여간 커피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으시면, 한 잔 하실래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잔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저도 한 잔 주세요.”
앉아만 있어서 정신이 피로하기도 했고,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던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머신이 좋으세요? 아님. 핸드드립?”
“핸드..드립이면....직접 원두 콩을 갈아서 마시는 거요?”
“네, 그쪽도 기계랑은 다른 맛이 나서 두 종류를 마시고는 한답니다.”
대충 커피머신 버튼을 눌러서 만들 줄 알았는데, 의외인 질문이 나에게 들어왔다.
“....그럼 핸드드립으로...”
“그래요? 잠시만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직접 손으로 가는 핸드드립 커피를 골랐다.
아까 막 이 집에 도착했을 때 받았던 커피가 커피 머신에서 뽑은 커피 였다는 점도 있지만, 손으로 직접 원두 콩을 갈아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나였기에, 조금이나마 흥미가 돋았다는 게 컸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이 빠르고 간편하지만, 저는 핸드드립을 더 좋아해요.
갈리는 원두 크기에 따라 맛도 달라지기도 하고.”
그는 자기 머리 위의 선반에 팔을 뻗어, 원두 콩이 담긴 색이 진한 지퍼백을 꺼내었다.
그의 오른팔은, 자기 몸을 지탱하는 목발을 잡고 있어, 단 한 손으로 선반에 손을 올리는 모습이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능숙하게 지퍼백을 꺼냈다.
“진한 맛을 좋아하시나요?”
“음...네.”
“그런가요? 후후, 저와 비슷하네요, 그럼 원두를 조금 더 넣을게요.”
잠도 깰 겸, 진하게 커피를 내려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커피 그라인더에 원두를 몇 숟갈 퍼 담았다.
그르륵. 그르르륵.
원두를 다 담은 그가, 천천히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원두가 갈려가기 시작했다.
“........”
“....좀 더 가까이에서 구경하실래요?”
“예? 아..아니...그러니까....네....”
실제로 직접 커피를 가는 것을 처음 보았던 나는, 탁자의 반대편에서 목만 쭈욱 내놓고 멍하니 커피 그라인더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남자가 흘낏 보았는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겠냐고 묻자, 그제야 내 몰골을 눈치챈 나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지만, 궁금하기는 궁금했었기에, 탁자를 돌아 바로 그의 옆자리에서 그라인더를 바라보았다.
마치 맷돌을 가는 것처럼 돌아가는 그라인더는, 위가 뚫려 있어서 원두 콩이 갈리는 것을 직접 바라볼 수 있었다.
상당히 크던 원두 콩이 부서지고, 작은 알갱이들이 아래로 쏟아지며 희미하게 고소한 향이 났다.
“조금 진하게 타기 위해서, 보통보다 좀 더 곱게 갈았어요.”
이내 원두 콩이 다 갈렸는지, 그라인더 손잡이에서 손을 뗀 그가 그라인더 아래에 서랍처럼 생긴 통을 꺼내더니, 나에게 들이대었다.
분명 금방까지 자갈 같던 원두 콩이, 모래알처럼 곱게 갈려져 있었다.
“이제 커피를 내릴게요.”
어느새 물을 끓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를 들고 온 남자가, 종이 필터를 깔때기에 넣고, 물을 부어서 한번 적셔준 뒤, 금방까지 갈아두었던 커피 가루를 넣었다.
어느 정도 평평해지게 깔때기를 탁탁 두드리던 남자는, 이내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부었다.
“저는 커피를 내릴 때, 새어 나오는 진한 커피향기를 좋아해요.”
그의 말처럼, 뜨거운 물을 붓자, 강렬한 커피 향이 확 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을 머금은 커피 가루가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팍하고 꺼졌다.
쪼르륵. 쪼록. 하고, 커피가 내려가며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은은하고, 좋은 커피의 향기가, 그의 손을 타고 올라와, 이윽고 내 콧잔등에 머무른다.
“.....커피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대뜸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질문을 하자마자, 나는 나 스스로 매우 놀랐다.
여자가 되고 나서 약 3년.
나는 손님은 물론이고, 거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이 물어보는 질문은 형식적으로 대답하거나, 마트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
그럴 때가 아니라면 나는 누군가와 말을 섞지를 않았다.
애초에 내 주변에서 대화할 사람들이 없었고, 손님들과는 대화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침묵을 지키던 내가, 자기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에 매우 놀랐지만, 외관상으로 놀란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저, 밤을 지새울 때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그런 내 질문을 들은 사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계속해서 물을 부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카페인 음료나 커피를 마시면서 일하다가, 제 그림을 구매하신 분께서 운이 좋게 구했다며, 원두를 비롯해 그라인더랑 주전자를 선물로 주셔서 한번 직접 내려서 마셔보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점점 커피에 빠져서...하하.”
그는 이런 질문이 익숙하지 않은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커..커피는 원액으로 드시겠어요? 아님. 아메리카노로?”
“.....원액으로 주세요.”
어느새 커피를 다 내렸는지, 그가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먹을 거냐고 묻자, 나는 잠시 고민하고 원액을 골랐다.
커피라고는 체인점 아메리카노 아니면, 커피믹스만 마신 나였기에, 원두에서 갓 내린, 그것도 직접 갈아서 내린 커피의 순수한 맛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사..상당히 쓴데, 괜찮으시겠어요?”
“뭐....소주보다는 덜 쓰겠죠.”
“풉..! 아...죄..죄소.옹...끅끅...”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센 원액이라 혹시나 싶었던 그가 나에게 묻자, 나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취향에 직구였는 모양이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끅끅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예술가들은 다 이런 건가 싶었다.
한참이나 웃던 그가 진정되고, 나는 커피잔을 들어 거실에 있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원래는 그가 들고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한 손에 목발을 짚고 있어서, 두 손 멀쩡히 쓸 수 있는 내가 옮겼다.
그가 쇼파에 앉자, 나도 반대편의 쇼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까지 앉아있던 딱딱한 나무 의자 대신, 부드러운 쇼파에 기대자, 상당히 편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들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맛보았다.
쓰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쓴맛이 강하게 났다.
하지만, 진득하게 맛을 보니, 고소하고, 뒷맛의 살짝 남는 산미가 상당히 괜찮았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앞을 바라보자, 그 또한 마찬가지로 커피의 맛을 즐기는 듯 보였다.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며 코를 킁킁거리자, 거실에는 커피 향과, 내가 폈던 희미한 담배 냄새가 얽혀서 복잡한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가 자연스레 거실에서 나는 것처럼, 나도 어느새 이 남자의 집에 녹아들어 갔다.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