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chapter 1: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날.(4)
* *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끄응...”
배려라고는 1도 없는 밋밋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알람을 끄자, 시간은 오후 2시.
시간을 확인한 나는, 저 멀리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클러치 백을 열어, 작은 약상자를 하나 꺼냈다.
상자에 들어 있는 약을 꺼내니 21개 정도 남아있던 약의 개수가 4개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한 나는, 마저 하나를 꺼내 삼켰다.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개수를 먹어야 했지만, 만약의 경우 일어날 최악의 사태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콘돔을 사용한다 해도, 100%라는 것은 없으니까.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은 나는 한 대를 꺼내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온 방을 뒤덮는다.
그 자리에서 연거푸 세 대를 피운 나는, 필터까지 피운 담배를 종이컵에 처박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몸에 들어온 니코틴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보통 이 시간에 집을 나서지는 않지만, 얼마 남지 않은 피임약과 담배, 그리고 약 이틀 동안 한 끼도 먹지 않은 것을 깨달은 나는, 겸사겸사 어제 번 돈도 저금할 겸, 집을 나서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담배 냄새와 땀에 절어져 구린 냄새가 후드티에서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굴러다니는 방향제를 몇 번 뿌린 뒤, 걸쳐 입었다.
휘날리는 머리칼을 대충 고무줄로 묶은 뒤, 집을 나섰다.
대낮이라 그런지, 아니면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지, 집을 나온 뒤 3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불쾌하게 등이 땀으로 젖어가기 시작했다.
약국은 집 근처 4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진 상가의 1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약국에 먼저 들렀다.
“어서 오세요~”
약국 특유의 약 냄새가 풍겨오자, 나는 자연스럽게 코를 찡그렸다.
약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발명품이고, 나도 언제나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이 냄새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찾으시는 게 있으신지...?”
“....사전 피임약 하나 주세요.”
“...네. 잠시만요...”
이미 검은 머리는 한 톨도 찾아보기 힘든 노인 약사가 나를 친절하게 반기며, 찾는 것을 묻자, 나는 피임약 하나를 찾았다.
그러자 약사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잠시 움찔거리며 굳는 표정을 숨기지는 못한 모양이다.
시발.
“만 이천 원 입니다.”
뒤로 돌아 서랍을 뒤적거리던 약사는 내가 늘 먹던 익숙한 사전 피임약이 들어 있는 통을 하나 꺼내, 내 앞으로 밀었다.
“...예.”
피임약의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약사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자꾸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그....학생...아직 어려 보이는데...피임약의 과다 복용은 몸에 안 좋아..”
더듬지만 나를 생각해서 챙겨주는 한마디.
시발.
“.....아 예...”
좆같다.
이 거지 같은 동정도.
어차피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입만 나불대는 저 아가리도.
“저도 뭐....이딴 거 처먹고 싶지도 않거든요.”
“어..? 그게 무슨...”
최대한 인상을 구기면서 띠껍게 한 마디 쏘아 붙인 나는,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듯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늙은 약사를 무시한 채, 약국을 나왔다.
그딴 눈으로 바라보지 마.
안쓰럽다는 듯이 보지 마.
그냥 제발, 나를 내버려 둬.
시발.
시발. 시발!
“....후...침착...침착하자...”
한창 씩씩대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잠시 멈춰 크게 숨을 골랐다.
쓸데없는 감정 낭비는 더 피곤하게만 만들 뿐이다.
죽이자, 마음을 죽이자,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빨강.
초록.
빨강.
초록.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보도블록의 패턴을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금 발을 옮겼다.
어디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패턴들을 보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을 느꼈다.
웃긴 영상도 아니고, 인터넷 서핑도, 맛있는 음식도 아닌, 이딴 걸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보니, 내 머리도 여간 맛이 간 게 아녔다.
그렇게 걷다 보면, 지하철 3번 출구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틈에 섞여, 천천히 지하철에 들어간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내가 섞여 있다는 이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냥 평범한 여자애처럼 보일 것 같아서.
원래 남자였다가 여자가 돼서, 신분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잃어버린 체, 몸이나 파는 창녀가 아닌, 그저 지나가는 여자 A 라고 생각할 테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나는, 곧바로 지하철 락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23번.
한 달에 한 번씩, 락커를 비워야 했기 때문에, 나는 한 달 즈음 되면 원래 있었던 락커의 옆자리로 옮긴다.
처음에는 1번이었지만, 어느새 23번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사라진 내 생일, 0829.
띠띠띠띠 하는 기계음과 함께, 잠겨있던 락커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골판지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상자가 들어 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5만 원짜리 4장을 꺼냈다.
골판지 상자를 열어, 다시금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틈새 하나 없이 5만 원 권으로 이루어진 내용물이 어떻게든 내 목숨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꾸깃꾸깃한 5만 원 권을 잘 펴서, 상자 안에 가지런히 넣었다.
이번에 넣은 돈, 20만 원.
앞으로 남은 돈, 473만 원.
곧.
이제 정말로 곧 이었다.
절망의 구덩이에서 간신히 손을 걸친 나는,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며, 다시금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했다.
이젠 상반신까지 구덩이의 밖으로 걸치는 데 성공한 시점.
약 5천만 원이라는 돈이, 내 인생의 구명줄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이 돈으로 신분을 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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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만 원.”
한층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말하며 손에 들린 담배를 이어 피우는 이 남성이 내게 요구한 금액.
젤로 머리를 한창 넘긴 그는, 치렁치렁한 금반지와 금목걸이, 그의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시계와 거구에는 맞지 않아 보이는 비싼 정장을 억지로 몸에 끼워 맞춘 듯 보였다.
“뭐....우리도 위험 부담이라는 게 있거든? 솔직히 니가 다른 나라에서 도망을 쳐왔든,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하든, 단 하나는 바뀌지 않는 것이 있지.”
“이 대한민국은 신분이 중요하고, 너는 없다는 것.”
남성은 다 피운 담배를 유리로 만들어진 투명한 재떨이에 비비적거리며 불을 껐다.
“그리고 나는 그 신분을 가지고 있고, 그걸 팔 마음이 있다는 것.”
“정말...5천만 원만 있으면...신분을 살 수 있나요?”
“그럼! 애초에 이 신분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 걸 훔치는 거거든.”
“...예?”
“예를 들면 보자....어, 1994년생 박지영. 27살 여자.
가족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실종 됐지만 아무도 모르지. 만약 니가 이 신분을 사면, 너는 그날부터 이 여자의 신분, 그대로 살아가면 쫑이야. 간단하지?“
“....그 신분의 주인은요...?”
불길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주인?...아아~ 이 년? 우리가 사채도 같이 하거든? 근데 이년이 돈을 빌려놓고 갚지를 않는 거야. 그거 생각하면 좆같네....아무튼 돈은 이미 수십 배로 불어났고, 우리는 그 돈을 받아야 하는데....어라? 여태까지 빌린 돈 전부 하우스에 다 꼬라박았네? 그럼 어떡해?”
“..........”
“우린 어떻게든 받아 내거든.”
그 남자는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비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짝거리는 금으로 코팅된 앞니가 그의 욕망을 증명하듯 반질거렸다.
“뭐...그 뒷내용이 궁금해? 들려줄 수는 있는데?”
“...아뇨...”
“....재미없기는, 아! 신분 사려는데 돈이 없어? 그럼 언제든 이쪽으로 연락주고.”
그는 지갑을 꺼내, 그 사이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24시간 상담 환영! 급히 돈이 필요하다면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01056871841.........]
“박 실장 소개니까, 이자는 좀 싸게 해줄게. 뭐, 까짓거 좀 대주면 더 싸게 해주고....”
“....그럼 이만.”
“.....그래, 이만 나가봐, 박 실장한테 안부나 좀 전해주고?”
역겨운 욕망을 드러내는 그의 말에 나는 침묵을 고수하고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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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면 되...”
5천만 원.
난 그 돈을 모으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
그 남자가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
5천만 원을 냈더니, 그 돈만 쏙 빼먹고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
최악은, 나도 ‘그녀’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내려온 동앗줄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게 튼튼한 동앗줄인지, 아님 삭아서 금세 끊어져 버릴지 모르는 동앗줄이라고 해도 나는 매달릴 것이다.
고민만 하다가는 순식간에 따라붙은 절망이라는 호랑이에 꿀꺽 삼켜지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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