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chapter 1: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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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다 왔다.”
어느샌가 잠이 들었는지, 박 실장이 내 귀에 꼽혀있던 이어폰을 당기며, 나를 깨웠다.
감겨있던 눈을 뜨니, 이미 나를 실었던 자동차는 시동이 꺼진 채 골목길의 구석에 멈춰져 있었다.
감겼던 눈을 부비적 거리며 차에서 내린 나는, 박 실장을 따라 자그마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4층의 작은 오피스텔 302호.
그곳이 지금 내가 머무는 집이다.
“오후에 손님이 잡히면 연락하지. 쉬어라.”
맞은편의 301호의 도어락을 열던 박 실장이 나에게 말을 남기며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나에게는 신분을 증명할 민증도, 그 어떤 서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 이다.
그렇기에 박 실장의 명의로 되어있는 이곳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박 실장과 마찬가지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두드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작은 원룸 정도의 오피스텔이었지만, 그마저도 너무 휑한 느낌이 들었다.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냉장고와 접이식 식탁.
그리고 기껏 해봐야 옷들이 들어있는 장롱과 화장대.
그것이 전부였다.
남자였을 시절, 항상 게임을 즐기던 컴퓨터도, 티비도,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들여놓지 않는 것이지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파우치 백에서 현금만 빼낸 뒤, 대충 바닥에 던져놓고, 냉장고로 향했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를 내뿜는 냉장고 역시, 내가 살고 있는 방처럼 거의 텅텅 비어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초록색 병으로 장식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안주도, 잔도 꺼내지 않고, 뚜껑을 연 나는 그대로 병을 들이켰다.
이가 아릴정도로 차가운 술이, 이상하게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술병에 든 술의 2/3 정도 남을 때까지 벌컥벌컥 들이킨 나는, 대충 방구석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이제는 능숙해진 손길로 담배를 하나 물은 나는, 잿떨이 용으로 챙긴 종이컵 또한 같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순간만이 나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담배를 뻑뻑 피다보면, 이 현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의식은 점점 몽롱해지고, 이 작은 방이 마치 우주처럼 넓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대로 기절하듯 쓰러져버린 나는, 거친 숨을 색색 몰아쉬며 내 방의 침대에서 일어날 것이다.
식은땀에 축축한 옷을 갈아입으며, 주방으로 나온 나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반겨주겠지.
그런 부모님에게 오늘 참 요상한 꿈을 꾸었다며, 마치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를 설명하듯, 꿈에서 있었던 일을 거창하게 이야기 하겠지.
“있지....내가 오늘 꿈을 꿨거든? 근데 진짜 신기하더라....내가아... 여자가 됐더라니까아...?”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엄마...아빠....이거 꿈 맞지...? 그렇다고 해줘...제발.....”
그러나,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의 위가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눈을 뜨고, 내 옆에는 그 누구도 없으며,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다.
이 일들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다시 일어나면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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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수개의 담배를 태운 나는, 일단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사이즈도 맞지 않고, 목이 다 늘어나 간신히 상반신을 가리고 있는 옷과 손으로 잡고 있지 않으면 금세 흘러내릴 것만 같은 반바지.
사람들이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이해할 만큼, 노골적인 노출광 같은 옷차림이었다.
이 자리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고, 어디든 가야 하니, 지금 문제는 이 옷차림을 바꿔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 차림으로 있기에는 나 자신도 매우 불편했다.
분명히 이 거리 근처에 옷가게가 있는 것을 떠올린 나는, 아직 불이 붙은 꽁초를 바닥에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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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약 5분 거리의 옷가게.
원래였다면 여유롭게 느긋이 걸어가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마치 가시가 수북하게 꽂힌 고통의 길처럼 느껴졌다.
부풀어 오른 가슴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위아래로 출렁거렸고.
항상 느껴지던 고간의 존재가 사라진 어색한 사타구니가 자꾸 거슬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대놓고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시선을 힐끔거리며 내 유방과 다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당할 수 없는 치욕감이 느껴졌다.
남자였을 시절, 이쁜 여자들을 그녀들 모르게 힐끔힐끔 쳐다보고는 했는데,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어디로 꽂히는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끔찍한 순간을 버텨가며 가까스로 도착한 옷가게.
다행히 지금 문을 열어놓은 상황이었다.
나는 벌컥 문을 열어, 나에게 인사하는 종업원을 가볍게 제치고, 내 몸매를 가릴만한 큰 사이즈의 회색 후드티와 하반신의 사이즈를 몰랐기에, 여러 가지 사이즈의 청바지들을 대충 골라 탈의실로 달려갔다.
“하아...”
딸깍하고 탈의실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낼 수 있었다.
“시발...진짜 시발...이게 뭔 꼬라지야 도대체...”
탈의실 안에 부착된 거대한 전신거울.
그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에 나는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듬직한 어깨는 작고 가냘픈 몸이 되었고, 팔다리는 가는 데다가 털 한털 없었다.
늘어난 티셔츠 덕에 가슴이 짓눌려 생기는 가슴골이 보이자, 소름이 돋았다.
신데렐라 거울도 아니고, 21세기의 과학으로 이루어진 과학 거울도 아닌, 평범한 거울.
그곳에 비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대로는 있을 수 없었던 나는, 티셔츠를 벗어 던지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거울을 등진 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거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바지는 손을 내리자 금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언제나 사타구니를 지켜주던 튼실한 물건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상상하기도 싫은 균열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둘러서 큼직한 후드티와 여러 번 입어서 대충 크기가 맞는 청바지로 갈아입어도, 얇은 하반신의 곡선과 가려지지 않은 가슴이 고통스럽게 시야에 보였다.
후드티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서 살들이 쏠리기는 했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속옷 매장에 가서 속옷을 입을 바에야 그냥 이렇게 다니는 것이 더 나았다.
암담한 나 자신의 상태에 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후드티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탈의실을 나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결재하고는 옷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찾아오는 불안감.
집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당장 오늘 밤에 지낼 곳도 막막한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복잡해진 머리와 바삐 움직이는 손이 지문 대신 저장해둔 패턴으로 휴대폰의 잠금을 푼 나는, 연락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라면...”
그리고 한 연락처에서 손가락을 멈춘 나는, 이내 휴대폰 자판을 두들기며 문자를 송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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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때 행했던 경솔한 행동을 영원토록 후회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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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가 김상국...이시라고요?”
시끌벅적한 소음들 사이로, 고소하게 익어가는 삼겹살의 냄새가 가게를 뒤덮는다.“
어느새 해가 진 저녁이 된 시간, 나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삼겹살 한 점을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어, 자고 일어나니 이 꼬라지가 됐더라.”
“....김상국 이 새끼는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지...”
“자.”
밝게 물들인 갈색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휘날리는 이 녀석은 박민준, 내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다.
연신 징징 울려대는 휴대폰을 꺼내자, 박민준한테 몇십 통의 착신이 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걸 왜 니가 들고 있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민준에게 들이밀었다.
“.....상국이한테 얼마 받으셨어요? 그 새끼 저번에 내가 장난 좀 쳤다고 좀 스케일 크게 몰카치는 것 같은데.....참....새끼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나...”
“아뉘 시발아! 나 맞다고!”
“아 씁...! 일단 입에 있는 것부터 다 드시고 이야기하시죠.”
씹고 있던 삼겹살이 튀어나올 정도로 성질을 부리자, 민준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자....다시금 당신이 말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당신은 26년산 내 부랄친구 김상국인데, 자고 일어나니 지금의 당신처럼 여자가 되었다......계속 장난치는 거면 나는 일단 일어나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일을 천천히 정리하면서 읊던 민준은 이런 시답잖은 장난에 어울리기 싫다는 듯이 겉옷을 주섬주섬 챙기며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민준의 마음을 이해한다.
나 같아도 어떤 여자가 자신이 민준 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딴 병신 같은 소리에 속냐? 하며 나를 놀래 키려던 녀석을 찾아내어 죽탱이를 날려 줄 테니까.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
“...?”
“니 새끼가 만든 컨닝 페이퍼 쫄린다고 나한테 몰래 숨겨서 사이좋게 귀싸대기 처맞고, 교무실로 끌려간 거, 기억 안 나냐?”
“.......이 개새끼가 10만 원 주고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그걸 불어?”
“아 씨발 진짜 나라고오!”
나와 민준,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 이야기를 털어놔도, 민준은 비밀 이야기를 공유했다는 사실에 분개할 뿐, 나를 전혀 나로 인지하지 않았다.
“하....저기요! 소주 하나 주세요!”
현 상황에 복잡해지는 머리는 자연스레 술을 찾게 되었다.
“아니 술은 왜 시켜요?”
“시발 일단 마셔!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하....”
그렇게 나온 소주 한 잔, 두 잔.
꽉꽉 하게 막힌 머리에 알코올이 들어가며, 뻣뻣하게 굳은 혓바닥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야, 이거 몇 컵처럼 보이냐?”
“최소 C.”
“그치? 시바 맘마통 존나 크네 아하하하하!!”
“미친 소리 줄여!”
어색하기만 하던 우리 둘의 대화도, 마치 내가 남자였을 때처럼 매끄럽게 이어가기 시작했다.
존댓말로 나를 대하던 민준도, 어느새 실제 나를 대하는 것처럼 반말과 욕을 섞어가며 낄낄거렸다.
“하....난 이제 어쩌지....”
“....아직도 몰카 타령이냐?.....야. 너 상국이랑 무슨 관계냐? 사귀냐?”
“아이 씨바알...내가 나랑 어떻게 사귀어 병신아아....”
“.........”
뜨거워진 머리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더니, 이내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지금 갈 곳도 없어, 엄마랑 아빠는 날 알아보지도 못해. 남자였을 때의 지문도 달라.....”
“오늘 밤은 어쩌게?”
“아 그거 이야기 하려고 불렀지이...”
“왜.”
“나 당분간 너네 집에서 좀 재워줘...”
“...? 돌았냐? 무슨 여자애가 위험하게 처음 본 남자 집에 오려고 해?”
“이 씨이발.....당분간 살 곳이 없다고, 부탁 좀 하자아...친구 좋다는 게 뭐냐?”
“아니 그렇게 말한들 그게 되겠냐고.”
“아....왤케 어지럽냐...고작 한 병 반 정도 마셨는데....아....”
핑 도는 머리가 점차 각막을 억지로 닫기 시작했다.
의식은 저 너머로 넘어가며, 근육이 이완되었다.
이윽고 나는, 술집의 식탁에 머리를 박고는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하 시발...얘를 어쩐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바라보던 민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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