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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9/39)

외전

태초의 세상에는 아직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고, 대지는 푸른 생명력을 꽃피워 풍요로움이 가득했으며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일라즈신은 신의 땅에서 천사들과 함께 존재했으며, 스스로 존재한 신이었다.

그리고 세상과 신의 땅 중간에 위치한 공간이 있었으니 일라즈신은 그곳을 봄의 언덕이라 불렀다.

사시사철 각양각색의 꽃이 피고 푸른 풀들이 자라나며, 정 중앙에 위치한 나무는 언제나 푸르른 땅.

봄의 언덕은 자연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자, 일라즈신이 이따금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날, 일라즈신은 봄의 언덕 위에서 두 개의 영혼을 창조했다.

그 영혼은 봄의 언덕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자연의 거대한 생명 에너지와 일라즈신의 힘의 파편을 심장에 지닌 채로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

검푸른 머리칼에 금안을 지닌 사내와 흑발에 금안을 지닌 여인.

마치 쌍둥이처럼 서로를 닮은 두 사람은 고귀하고,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일라즈신은 사내로 태어난 자의 이름을 로긴 아델르크, 여인의 몸을 입고 태어난 자에게 릴리아나 아델르크라는 이름을 하사해 주고 더없이 큰 사랑을 나누어주었다.

로긴과 릴리아나는 인간의 몸으로 지음 받았으나, 천사들의 것과 같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천사들 못지않은 신성력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늙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로긴 아델르크는 봄의 언덕에서 기나긴 세월을 보내면서 마치 운명처럼 릴리아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로긴보다 더욱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태어나 언제나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성품은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했으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오라버니! 안개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었어요!”

안개꽃을 꺾어 한아름 품에 안고서 그녀는 해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로긴은 들판에 앉아 자연을 감상하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했다.

“예쁘구나.”

“제가 화관을 만들어 드릴게요! 분명 아름다우실 거예요!”

네가 만든 것이라면 무엇인들.

로긴은 중얼거렸다.

릴리아나가 후다닥 반대편으로 달려가 여러 색의 꽃들을 꺾는 모습을 지켜보며 로긴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이지 빛 그 자체였다.

곁에 있으면 누구라도 그 빛에 물들어 버릴 만큼 강력한 빛.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도도도 달려온 릴리아나는 손에 예쁜 화관을 든 채로 아름답게 웃었다.

“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내가 만들었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의지와 상관없이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로긴은 그녀에게 머리가 보이도록 고개를 숙여주었다.

“직접 씌워주렴.”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탓에 그는 계속해서 피식피식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릴리아나는 로긴의 머리 위에 화관을 예쁘게 씌워주고 만족한 듯 웃었다.

로긴이 고개를 들자, 그녀가 손바닥을 마주 잡으며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오라버니!”

“그건 네게 해야 할 말인 것 같구나.”

로긴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하자 릴리아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요!”

로긴은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풋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십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처음처럼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한 것임을 로긴은 언제나처럼 잊지 않았다.

***

어느 날엔가, 일라즈신은 로긴과 릴리아나를 신의 땅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창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를 통해 내려다보는 세상은 실로 충격적이고 놀라웠다.

로긴과 릴리아나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곳에는 없는 신기한 것들이 있기도 했고, 자신과 같은 형태를 지닌 존재들이 자신과는 다른 형태의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이게 다 무엇입니까? 저들은 어째서 등에 날개가 없죠?”

넋을 놓고 세상을 구경하는 릴리아나와 달리 로긴은 고개를 돌려 일라즈신을 바라보았다.

신은 로긴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들은 ‘인간’이라 칭하는 존재들이란다.]

인간.

로긴은 작게 중얼거려보았다.

맘에 드는 어감이었다.

[저 아래 세상에 살아가기에 날개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야. 그들은 누구도 날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단다.]

일라즈신의 설명에 로긴과 릴리아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넋을 놓고 창을 바라보았다.

신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희가 저들과 함께 살길 바라시나요?”

릴리아나가 중얼거리듯 물었고, 로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안, 내 아가야. 내가 너를 어찌할까 봐 겁이 나는 게로구나.]

릴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일라즈신을 바라보았다.

이내 몸까지 완전히 돌린 그녀가 일라즈의 품으로 파고들어왔다.

“아버지. 저는 로긴과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곳이 좋아요. 정말이에요.”

일라즈신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릴리아나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로긴은 그 둘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있는 것과 저곳에서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일일지 생각해 보았다.

고민은 깊고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릴리아나는 그 이후로는 별다른 고민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로긴은 일라즈신에게 많은 것들을 묻고 답을 요구했다.

신은 그들이 로긴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지만 로긴의 생각은 달랐다.

창을 통해 바라본 인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본연의 모습을 점차 잃어버렸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처럼 동일한 자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들이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째서 자신들에게 그들을 보여주셨는지 신의 뜻을 전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릴리아나는 처음에 인간들을 바라보며 흥미로워하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들은 피폐해져 갔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분노했으며 끊임없이 다투고 논쟁했다.

릴리아나는 슬퍼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

봄의 언덕 정중앙에 위치한 노송나무 아래에서 릴리아나는 꽃송이를 손에 들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평소 곁에만 있어도 함께 반짝거리는 것만 같던 생기도 그 빛을 잃어갈 만큼 그녀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긴은 그녀 곁에 서서 의아한 듯 물었다.

“리안. 어째서 그렇게 슬픈 것이냐?”

릴리아나는 손에 들린 꽃송이의 꽃잎을 한장 한장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감정은 매우 치졸하고 나쁜 것일까요…? 애초에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을까…?”

“…글쎄.”

“어째서 귀중한 시간을 서로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데에 허비하는 거야…? 그들의 생은 너무나 찰나의 것인데….”

맞다. 그들의 생은 너무나 찰나의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살아도 조금도 늙지 않고 생명력을 잃지 않는 로긴과 그녀와는 달리 그들은 허무하리만치 빨리 죽어버렸다.

가까운 사람을 미워하기엔 너무나 짧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서 슬픈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사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로긴의 입에선 의지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들을 사랑해?”

릴리아나가 손에서 꽃송이를 떨어뜨리고 로긴을 올려다보았다.

쏴아아.

바람에 나뭇잎과 풀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긴과 릴리아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의 새하얀 치맛자락이, 로긴의 새하얀 롱 조끼가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릴리아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엉망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걷어 귀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로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느낌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느냐?”

릴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이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면… 다신 창 앞에는 가지 않을까 봐요. 너무 속상해서 자꾸만 눈물이 터져나와요.”

“리안….”

로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어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가 지금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런 것뿐이니까.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무엇이라도.

분노.

그것은 처음엔 한, 두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가 아주 작은 불꽃이 결국 큰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인간들의 감정을 좀 먹으며 퍼져나가 점점 더 그 크기를 불려나갔다.

결국 인세에는 ‘분열’과 ‘전쟁’이 일어났고, 그 모든 것 위에 악신이라는 꽃이 피어나고야 말았다.

신은 분노하고 절망하고 슬퍼했으며, 릴리아나는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다.

감정은 참 아이러니하고 미스터리한 것이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며 그 크기를 불리는 것은 비단 분노뿐만은 아닌 모양인지, 신과 그녀의 슬픔은 로긴에게 건너와 더욱 거대해져 버렸다.

그에게로 온 슬픔은 곧 이름을 바꾸어 절망이 되었다.

로긴은 다시 맑고 아름답게 웃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언제나 다정하고 기쁨이 넘치시던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행복하고, 사랑스러움이 가득히 묻어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영영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로긴은 제가 알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격통을 느꼈다.

그는 이 두려운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매일같이 아팠다.

그러는 동안에도 인세에는 여전히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수많은 인간들이 한줌의 재로 흩어졌다.

릴리아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가엾게 여겼고, 로긴은 더이상 이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라즈신이 마침내 인간들을 만든 것을 후회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로긴은 결단했다.

그는 신이 봄의 언덕에 찾아왔을 때 그의 앞에 부복해 엎드렸다.

그리고 신의 발에 입맞춤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요청했다.

“세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돕고 싶습니다.”

***

로긴이 세상에 간 온전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릴리아나와 아버지가 행복을 되찾는 것.

허락이 떨어지고, 세상에 내려가는 조건을 들었을 때에도 로긴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날개가 사라질 것이고, 이곳에서의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릴리아나는 자신을 언제라도 지켜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세상으로 내려갔고,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구멍 난 독에 물을 붓듯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여자들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언제나 잠이 들면 그의 입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만이 흘러나왔다.

“릴….”

[릴리아나…!]

일라즈신은 언제나 그 모습만큼은 릴리아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

릴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일라즈신을 바라보았다.

신은 다정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여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는 것이냐.]

하마터면 그 장면을 볼 뻔했다.

신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데려다 줄 것이다.]

릴리아나는 말없이 신을 올려다보았다.

일라즈신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프냐?]

“무엇이요…?”

[그가 다른이를 품는 것이 말이다.]

릴리아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알고는 있지.]

“…그가 선택한 거예요. 나보다, 일라즈님보다… 저 곳을 선택한 거라구요.”

일라즈신은 로긴이 세상으로 가겠다고 말했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릴리아나는 그날 그를 크게 오해하고 말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로긴 앞에 주저앉았다.

“나는요…? 그럼 나는…? 왜 그런…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예요? 왜?”

로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괴로워하고 있음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라즈신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로긴의 청을 들어주었다.

세상에는 이제 참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 줄 것이었다.

로긴이 세상에 내려가는 날이 되었을 때, 그는 릴리아나를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사실 채비랄 것도 없었다.

늘 하나로 질근 묶고 생활했던 종아리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는 것뿐이었으니까.

짧게 잘라 단장을 마친 로긴이 마침내 봄의 언덕과 신의 땅을 연결해주던 다리 위에 섰을 때, 멀리서 릴리아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보기에도 릴리아나의 표정이 얼마나 절망과 간절함으로 범벅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뺨은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로긴은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같은 대지의 태를 가진 자여. 영원히 그 빛을 잃지 않기를….”

로긴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간발의 차로 다리에 도착한 릴리아나가 아래로 손을 뻗으며 눈물로 절규했다.

“오라버니! 안 돼!”

일라즈신은 회상에서 벗어나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로긴은 언덕이고, 나무고, 꽃이고, 풀이며, 바람이고, 비였으며, 태양이었을 것이다.

그가 없는 삶은 감히 상상해볼 수조차 없는.

그래서 릴리아나는 한동안 처절하게 고통스러워하고, 슬픔이라는 구렁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오지 못했다.

오라버니가 저의 세상이었는데, 진짜 세상이 오라버니를 빼앗아갔다고 절규하기도 했다.

그녀는 더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곧 모든 것을 체념해버렸다.

신은 그녀가 다시 창을 내려다 보며 삶의 희망을 찾아가기를 바랬다.

세상에는 희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역시 보여주고 싶었다.

신의 바람대로 그녀는 곧 다시 창 앞에 앉았다.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서.

[그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릴리아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일라즈신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동안 그렇게 바라만 보던 그녀가 마침내 꺼낸 말은 신이 예상했던 지극히 아픈 말이었다.

“그래도 저는 그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

***

로긴은 세상에서 150년 동안 장수했다.

그의 영혼은 가장 아름답던 봄의 언덕의 모습 그대로 들어 올려져 일라즈의 품에 안겼다.

세상에는 더이상 전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로긴 이후로 1대 황제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그 밑으로 내려갈수록 세상의 피와 섞이면서 황제들은 다시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세상에는 다시 악이 팽배해졌다.

로긴 이후 2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일라즈 신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신의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릴리아나는 로긴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입 맞추었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그녀는 자신이 인간들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도록 여전히 그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정말 마음이 없었더라면 절대 그 창 앞으로 다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창 앞에 앉아있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들로 인해 슬퍼하는 아버지의 고통을 자신이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녀는 비로소 오라비의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350년이 지나고 나서야.

“할게요. 제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더욱이 오라버니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릴리아나는 눈물을 흘리며 세상으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로긴이 들었던 경고와 같은 말을 들었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면 기억을 모두 다 잊을 것이라는 것.

어째서 그냥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곧 그만두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그렇게 하자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일라즈신이 로긴을 그녀만큼이나 사랑해왔었다는 사실을.

신은 모든 때와 날을 선택해 가장 릴리아나가 태어나기 적합한 날을 골랐다.

그리고 로긴의 영혼이 태어날 날까지도.

일라즈신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영면에 든 로긴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빛 덩어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이것이 네게 적합한 보상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부디, 행복해지거라. 너의 리안과 함께.]

***

[네 어머니가 드디어 출산했단다. 아이의 이름은 멜라니라고 지었어. 여동생이 생겼구나, 아슬란. 축하한다. - 아버지가.]

아슬란은 편지를 든 손을 조용히 내리고, 제 기숙사 방을 다시 돌아보았다.

언제나 정갈하지만 쓸쓸함이 배어 있는 곳.

저택으로 돌아가면 이 마음을 모두 채워 넣을 수 있을 만큼 충족감을 느끼게 될까?

이전에 아버지께서 출정 중이실 때 어머니는 늘 자신을 품에 끼고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부어주곤 했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투정도 부리고, 어린아이처럼 굴어가며 그 사랑을 가슴에 더욱 밀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엔 멜라니가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자 아슬란은 급하게 머릿속 어딘가로 생각을 치워버렸다.

괜찮다. 그래도 아직은 딜리아니까.

아카데미가 방학을 맞아도 기숙사에서 가장 느즈막히 나서는 것은 언제나 아슬란이었다.

그는 매사에 급한 법이 없었다.

태생이 황족이어서일까?

여유롭게 행동하는 데에서 배어 나오는 귀족적인 품위는 아카데미의 그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는 그였다.

그러나 이번엔 그도 좀 달랐다.

여동생이 태어나고 반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가는 저택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슬란은 간단한 짐만 챙겨서 부리나케 마차에 올랐다.

“이렇게 빨리 간다고? 네가?”

아슬란은 마차 문을 잡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에게 고개를 돌렸다.

“문 닫아, 르윈.”

“칫. 아슬란다운 대답이네. 뭐, 어차피 제국의 여름은 짧으니까.”

르윈의 투덜거림 끝에 마차 문이 닫혔다.

아슬란은 슬그머니 미소 짓고는 창문을 살짝 열고 마부에게 말했다.

“출발.”

덜크덩 거리며 마차가 출발하고, 아슬란은 여동생에게 줄 선물로 산 장난감을 손으로 쓸었다.

***

아슬란은 항상 노력했다.

장난감을 사다 바치기도 했고, 답지 않게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놀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에 걸친 부단한 노력도 낯가림 심한 아기 앞엔 부질없는 모양이었다.

매일같이 저택에 함께 머물렀다면 낯가림이 아무리 심해도 금방 그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조금 친해지려고 하면 방학이 끝나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 방학이 되어 돌아오면 멜라니는 줄곧 유모 뒤에 숨어들곤 했던 것이다.

“아슬란. 멜라니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어머니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아슬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슬란은 속으로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미소 지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또 그렇게 섭섭할 건 무엇이 있나 싶었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가정 안에서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은 것이었고, 감사해야 할 이유였다.

그 아카데미 때문에 여동생과 친해지지 못한다고 해서 섭섭한 감정을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아슬란은 그해 여름방학을 끝으로 다시는 멜라니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분명 르윈을 비롯한 제 친구들은 그 결정에 크게 반가워할 터였다.

다음으로 돌아오는 방학 때부터는 저택으로 편지 한 장을 보낸 후, 친구들과 제국 여행을 다녔다.

제국은 꽤 땅덩어리가 넓어서 이쪽 끝과 저쪽 끝은 국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문화 자체도 다른 국가인가 여길 정도로 달랐다.

아슬란은 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탐방하며 배우고 얻는 것이 많아 저택에 있는 것보다 천만 배쯤은 훨씬 더 낫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국경선 인근에서 황실 근위대가 제국민들의 일감을 돕고, 국경선을 약탈자나 침입자들로부터 지키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졸업하는 즉시 황실 기사단에 지원할거야.”

르윈 듀스가 말했다.

“내가 먼저 생각한 건데.”

“나도. 짜식. 생각도 통하고 그러냐.”

네드 휴젠버그와 페이튼 슈스만이 말했다.

아슬란이 조용히 미소짓자, 르윈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넌 어때, 소공작님?”

아슬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어유, 얘 또 빼는 거 봐라. 항상 혼자 샌님이다.”

“어허. 소공작님께 말버릇이 좋지 못하다.”

“쟨 그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잖냐. 결국 거기도 따라올 걸.”

친구들의 조잘거림에 아슬란은 피식 웃으며 가방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친구들 앞에 팔랑거리며 흔들었다.

“이거 뭐야? 근위대 입단 신청서?”

“너 근위대에 들어갈거야?”

아슬란은 서류를 친구들에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내 성을 말해주니까 아까 어떤 근위기사 한 명이 내게 이것부터 들이밀던데.”

아슬란의 말에 르윈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딜리아는 그럴 만하지.”

아슬란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근위대엔 만족 못 하지. 알다시피 난 딜리아니까.”

“와. 이 자식 봐라.”

“인정. 딜리아잖냐.”

친구들의 말에 아슬란은 묘한 뿌듯함마저 느꼈다.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아버지의 평판이 워낙 지하 저 밑에 있어서 정말로 놀랐었는데 어느 샌가 제국내에서 딜리아라는 성을 말하면 모두가 다 이런 반응이었다.

딜리아 성 하나면 어딜 가도 거칠 것이 없었다.

제국 전역에 퍼진 공작의 명성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아슬란은 피식 미소 지었다.

“이왕 할 거면 황실 기사단 단장까진 올라가 줘야 하지 않겠냐.”

***

멜라니는 아버지의 검푸른 머리에 어머니의 금안을 타고 태어났지만,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외모를 더 많이 닮아갔다.

아버지는 언제나 멜라니를 볼 때마다 아내가 어릴 땐 이렇게 생겼겠구나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사용인들도 날이 갈수록 이 작은 주인님의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곤 했다.

어느 날 멜라니는 복도를 지나다가 사용인들끼리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누가 봐도 두 분의 자녀는 멜라니 아가씨뿐인데 아슬란 도련님께 소공자님이라니…! 그럼 차후 가주 자리에도 소공작님을 앉힐 거란 말이야? 믿을 수가 없다 정말.”

“각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 아슬란 도련님은 그저 입양된 아들일 뿐이잖아. 친자식도 아닌데 그런….”

멜라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져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또래의 평균치보다 늘 좀 더 명석하고 똑 부러졌던 멜라니가 오라버니의 앞에만 서면 아기처럼 유모 뒤에 숨게 되어버렸던 것은 아슬란에게서 나는 묘한 슬픔의 향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슬란이 싫은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가 상냥한 사람이란 걸 멜라니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라버니가 내 오라버니가 아니야…?”

멜라니가 그렇게 충격에 허우적대는 동안 제국에는 기나긴 겨울이 찾아왔고, 아카데미도 겨울 방학을 맞았다.

그러나 저택에는 편지 한 통만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게 되어 이번에는 저택에 들르지 않을 예정이라고 전해주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고 난 후에도, 싱그러운 봄이 지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고 방학 시즌이 되었을 때에도 아슬란은 저택으로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멜라니는 의식하지 못한 새에 자기 방 창가에 앉아 아슬란이 오는지 내다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다.

사용인들이 아슬란에게 입양아라고 손가락질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저택에 한 번도 오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아슬란은 어째서 오지 않아?”

7살의 여름 시즌에도 아슬란이 돌아오지 않자 멜라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웃으며 멜라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라버니라고 해야지, 멜라니. 아슬란은 이번 시즌에도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라더구나.”

어머니는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분명 어머니 역시 아슬란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젠 그 아이도 그럴 나이가 되기는 했지.”

하지만 멜라니는 어머니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사용인들 때문에 저택에 오지 못하고 있는 거야.’

불쌍한 아슬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슬란을 한 번도 남처럼 대한 적이 없었는데.

‘흥. 그깟 사용인들이 뭐라고.’

멜라니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창은 이제 그만 쳐다보고. 어머니랑 이곤을 보러 가지 않겠니?”

이곤은 작년에 태어난 멜라니의 남동생이었다.

그 아이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와 똑같이 닮아 태어났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멜라니가 보기에도 이곤은 정말이지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아직 아가였음에도.

“네, 좋아요!”

릴리아나가 손을 내밀자, 멜라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자서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멜라니는 아기가 아니에요! 이제 다 컸다고요!”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동생 돌봐주는 것도 아주 잘할 수 있어요!”

릴리아나는 풋 웃음을 터트리며 작고 귀여운 따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저택에는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1년 반 동안 저택에 발걸음 하지 않았던 아슬란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 것이었다.

아슬란이 17살이 된 어느 가을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됐어.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들 봐.”

아슬란이 다가오는 사용인들을 물리고 계단을 오르자 릴리아나가 옆에서 팔짱을 껴오며 말했다.

“아슬란.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좋구나.”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어머니.”

“그런 말은 됐다. 얼굴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야.”

“어머니께서도요.”

아슬란은 미소 지으며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갈하게 청소되어있는 방을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재킷은 벗어서 이리 주렴.”

“아.”

아슬란은 돌아서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어머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차이 나게 커버린 탓이었다.

일 년 반 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자신을 보호해주던 어머니는 이제 제게 보호해야 할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건 사용인을 부르면 돼요, 어머니.”

“어머나. 내가 직접 해주고 싶어 그러는 거야. 불만 있니, 아슬란?”

어머니의 흘겨보는 눈을 보고 아슬란은 피식 웃어버렸다.

“아뇨. 그럴 리가요.”

***

아슬란은 즉시 재킷을 벗어 어머니의 손에 건네주었다.

“넥타이도 주렴.”

그는 고분고분하게 느릿한 동작으로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갈 예정이니?”

아슬란은 그의 손을 잡아 내리고 직접 넥타이를 풀어주는 어머니를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바로 갈 거예요.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어서 온 거예요.”

“기숙사가 불편하니?”

“제 방이 불편하다기보단 잠들기 전까지 절 안 보면 병이 나는 인간들이 있어서요.”

아슬란이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어머니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들은 어딜 가도 인기가 많은 모양이네. 그래도 미리 말해두자면 절대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어, 아슬란. 우린 언제나 네 편인 거 알고 있지?”

어머니가 팔에 걸친 재킷 위에 넥타이를 올려놓고, 다시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아슬란 역시 어머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예, 어머니.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럼 됐다. 아버지는 오늘 일이 많으셔서 못 들어오신대. 혹시 배가 고프니? 저녁을 차리라고 할까?”

“아니요. 좀 쉬고 싶어요. 필요하면 제가 내려갈게요.”

“그럴래? 그럼 푹 쉬렴.”

아슬란은 자신을 토닥여주고 돌아서는 어머니를 급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멜라니에겐 굳이 제가 왔다고 알려주진 마세요. 그 아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어머니는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아슬란을 돌아보았다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슬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멜라니는 널 불편해하지 않아.”

“하지만….”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 식사라도 함께 하자. 멜라니가 좋아할 거야.”

“예, 어머니….”

아슬란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가 쉬라는 말과 함께 사라지고 나자, 커다란 방 안에 아슬란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몸을 깊숙이 묻고 머리를 기댔다.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침실의 천장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반가웠다.

아슬란이 입을 열지 않으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고요한 적막까지도.

기숙사에선 항상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늦은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원체 말수가 많지 않은 그로서는 상당한 에너지가 요하는 생활이었다.

단 이틀이라도 좋으니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해질 만큼.

이 외로움이 좋아지는 때가 오다니 정말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그는 작게 속삭이듯 옅은 한숨을 토해내고 지친 듯 두 눈을 감았다.

***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아슬란은 잠옷 위에 오버사이즈의 봄 카디건을 걸쳐 입었다.

보송하게 말라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손으로 흩트리곤 소리 없이 옅게 미소 지었다.

아카데미에서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유일했다.

그에게 포마드는 스스로 만들어낸 일종의 주문 의식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존재가 딜리아에게 흠이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슬란은 언제나 그런 무게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씻고 나온 뒤 흐트러지는 앞머리에는 항상 묘한 해방감이 뒤따랐다.

그는 목이 말라 주방에 다녀오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잠든 사용인들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벽에 간간이 달린 등에서 뿜어나오는 은은한 빛에 의지해 복도를 걸었다.

그는 곧 어느 방문 앞에 멈추어 서서 문에 붙은 작은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귀여운 리본 그림과 함께 삐뚤삐뚤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멜라니 아가씨의 방. 노크할 것.]

자신을 삼인칭 따위로 적어놓은 것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소리 없이 웃던 그는 곧 그 글씨 밑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또 있다는 것을 발견해 냈다.

[아슬란 집에 데려오는 사람 노크 안 해도 됨.]

아슬란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 글씨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도 아니고 그냥 아슬란?

“허….”

아슬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는 검지로 도화지를 느린 동작으로 쓸었다.

멜라니 딜리아.

그리고 이곤 딜리아.

그들은 ‘진짜’였다.

딜리아의 피가 흐르는.

영원히 저는 그 언저리도 가보지 못할 자리에 이 작은 아가씨와 도련님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올라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심술이 나거나 질투가 나진 않았다.

감히 그런 걸 엄두 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저를 진짜 딜리아처럼 대해 주신다고 해도 절대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은혜를 입은 거리의 소년일 뿐이니까.

아슬란은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맹세컨대 평생 널 지킬 거야.”

멜라니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의 목표는 그것뿐이었다.

아슬란은 문득 처음 딜리아 부부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날이 없었더라면, 두 분이 아니었다면 아슬란은 절대 사람답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게 내가 은혜를 갚는 방식이거든.”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터였다.

아슬란은 다시 한번 멜라니의 도화지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짧게 속삭였다.

“잘 자. 작은 아가씨.”

***

다음 날 아침, 아슬란은 7시가 되자마자 잠에서 깨어 홀로 외출 준비를 했다.

사용인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 저택에 들어오고 아카데미에 가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을 머무른 것이 아닌데다가, 아카데미에서는 늘 홀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사용인들의 시중이 그에겐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슬란은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고정했다.

오전 10시부터 강의가 잡혀 있었다.

교사가 매우 까다로운 성격이어서 지각은 금물이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넥타이를 매만지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슬란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사용인 한 명이 들어와 고개 숙였다,.

“아침 식사 준비되어 있습니다, 도련님.”

아슬란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여덟 시.

속도를 빨리하면 아침 식사를 거르지 않고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모인 가족 식사일 텐데.

게다가 어제 어머니께서 아침을 먹자고 하실 때 수긍했던 게 떠올랐다.

아슬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곧 내려가지.”

사용인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라졌다.

아슬란은 전신거울을 통해 넥타이가 제대로 됐는지, 의상에 구김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 한 뒤 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려고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 방에서 나오던 멜라니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슬란은 순간적으로 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곧 바보 같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같이 식사해야 한다.

“안녕, 멜라니.”

아슬란의 인사에 멜라니가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슬란?”

멜라니의 중얼거림에 아슬란이 피식 웃어버렸다.

‘역시나, 오라버니라고 불러주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별안간 멜라니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슬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멜라…!”

그가 손을 뻗으며 멜라니를 부르려다가 제게서 뒷걸음질 치는 아이를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슬란의 미간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어째서 계속 슬퍼하는 거예요?”

멜라니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아슬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곳에 있는 게 그렇게 슬퍼?”

그럴리가! 아냐! 아니야, 나는!

아슬란은 다급하게 뭔가 말하려다가 또다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이지? 7살 꼬마를 상대로?’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정말로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대체 뭘?

일곱 살짜리가 대체 뭘 이해할 수 있지?

길거리를 전전하며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해 죽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슬픔?

저 아인 그냥 좋은 가문에서 좋은 부모를 두고 태어나 그런 고통을 알 리가 없다.

근데 왜… 그 눈빛은 대체 뭐지?

혼란스러워졌다.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을 만큼 경직되어 버렸다.

손톱이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고, 손등에 핏줄이 붉어질 만큼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슬란은 그럼에도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멜라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구나. 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다.”

***

아슬란은 덜크덩 거리는 마차 안에서 손을 주먹 쥐었다 피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입에서 저절로 다 참아내지 못한 한숨이 토하듯이 터져 나왔다.

[솔직해지지 않으려거든 내 곁엔 오지 마. 아슬란 때문에 내가 다 아픈 거 같아.]

당돌한 일곱 살 꼬마에게서 나온 말에 아슬란은 무너져 내리기 전에 급하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침 식사고 뭐고 떠올릴 틈조차 없었다.

심장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주먹 쥔 손으로 심장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흑.”

아슬란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마차 창문을 다급하게 열어젖혔다.

찬 공기가 들어오니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꽁꽁 감춰둔 자신만이 알던 감정이었다.

그 모든 슬픔은 자신 안에 묻은 채로 오직 딜리아 가문만을 위해 헌신하며 살리라 마음먹었다.

‘그 저택에 있는 것이 그렇게 슬프냐고?’

그 저택은 그에게 빛이자 구원이었다.

양부모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도 길거리를 전전하며 비렁뱅이마냥 빌어먹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그가 거대한 성이자 요새 같은 딜리아 저택에 돌아가는 것을 꺼렸던 것은 멜라니가 저를 불편해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 속에 자신이 속해 있지 못함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존재했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딜리아가를 만나기 전까지 제대로 된 건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는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저택에서 어머니가 마지막 밤을 보내셨다.

괜찮다고 다 이겨낼 수 있다고 했고, 단 한 순간도 양부모님 앞에서 티를 내본 적은 없지만, 그에게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장면은 평생 기억에서 밀어내지 못할 트라우마로 자리해버렸다.

그 저택이 마냥 편하고 행복하기만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단코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들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대상이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아슬란은 실소했다.

“더 이상 일곱 살짜리 꼬마가 아닐지도.”

자신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순간 깨달았다.

그 아이는 무려 아이든과 릴리아나의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이 곁에 다가갈 때면 느껴졌던 청량한 기는 아마도 어머니께 물려받은 신성력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능력이 이상하게 느껴질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슬란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한 뒤 그는 결심했다.

우스갯소리로 황실 기사단의 단장까진 가야 한다고 했던 말을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곳에도 역시 기숙사가 있으니까.

아슬란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앙다문 입에 강력한 결심과 의지가 서려 있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간 아슬란은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저택에는 단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의 찬 기운이 녹아들어 거리와 들판, 숲의 곳곳에 생명이 움트는 시기가 되었을 때 열여덟 살의 나이로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장을 손에 쥐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2년이나 빠른 졸업이었다.

하지만 저택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께 졸업장을 안겨드리고 축하 인사를 받은 뒤에는 한 시간 만에 다시 외출 준비를 하고 나와 황실 기사단으로 향했다.

입단 신청서를 내고 테스트를 받고 난 뒤, 합격통지를 받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황실 기사단 B기숙사에 배정받았고, 곧 저택에서 짐을 챙겨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다.

멜라니와는 저택에서 마주칠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인 결과였다.

***

제국에는 양날의 검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군을 움직일 통솔권한을 가진 총사령관 아이든 딜리아 대공이었고, 또 다른 하나의 검은 제1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인 아슬란 딜리아였다.

제국민들 사이에선 역시나 대공의 아들이다,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아슬란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기사단장 자리를 거머쥐고 수많은 전투에 나가 공을 휩쓸었다.

제국의 영토는 이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크기가 되었고, 그만큼 아이든에게 돌아가는 영지가 많아졌다.

아이든은 그중 몇 개의 영지들을 아슬란에게로 주고 그가 가진 수많은 작위 중 후작위를 물려주었다.

덕분에 아슬란은 기사단을 이끄는 것 외에도 일거리가 늘어나 하루하루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기사단장을 거머쥐기까지의 5년은 아슬란의 의지대로 저택에 발걸음 하지 않았지만, 그 후 3년은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아카데미에서 그를 잘 따랐던 친우들이 같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데다 모두가 자신의 보좌관을 자처해 환상의 호흡으로 일을 분배해 처리하니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아카데미 내내 혼자 있지 못해 괴로웠던 보람이 있는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도 들어오지 않을 테냐?”

아이든의 질문에 기사단원들 훈련을 지켜보고 있던 아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분간은 아마 힘들지 싶습니다.”

“아슬란.”

“예, 사령관님.”

“…아버지로서 부른 것이다.”

“…예, 아버지.”

아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아슬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네 어머니가 언제까지 젊지는 않다는 걸 명심해라. 네가 리안에겐 첫아들이고 첫정이라는 것도.”

아슬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든이 집무실로 돌아가고 난 후에 아슬란은 속이 답답한 듯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곧 검을 꺼내 들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서 외쳤다.

“대련한다! 한 명씩 빠릿빠릿하게 튀어나와!!”

***

흐트러진 머리칼에서 땀이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지고 하얀 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을 때쯤이 되어서야 아슬란의 대련은 끝이 났다.

모든 단원이 항복을 선언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아무도 대련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슬란은 기숙사로 돌아가 깨끗하게 씻고 새 제복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뒤로 넘긴 뒤에 딜리아 저택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어머니는 언제까지고 젊지 않으시다.

그의 삶을 구원해준 빛이었던 분.

그분을 이렇게 속상하게 해 드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저택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서 사용인에게 건네주고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머니를 뵈면 꼭 사과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옆 정원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슬란…?”

우뚝 멈추어선 그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닮은 듯 다른 소녀가 정원에 서서 꽃봉오리에 손을 올려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소녀의 손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오며 장미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소녀가 움찔 놀라며 얼른 손을 떼어 내고 다시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멜… 라니…?”

아슬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멜라니를 바라보았다.

못 본 새에 자신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날 만큼 자라버린 멜라니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 그 자체였다.

아슬란은 순간적으로 멍해진 자신에게 크게 당황했다.

그것을 의식하고 나자 속절없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미간을 왈칵 구기며 손을 주먹 쥐었다.

“도련님!”

집사 칼튼이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슬란은 멜라니를 한번 바라보고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만나서… 반갑구나.”

그리고 다급하게 몸을 틀어 칼튼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멜라니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장미꽃 줄기를 꺾어버리곤 놀라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줄기에 있던 가시에 박힌 손바닥에서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멜라니는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흠칫 놀라며 다른 한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진짜 아슬란이야…?’

***

아슬란은 자신의 침실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어린 여동생 앞에서 도망치듯 뛰어온 꼴이라니.

정말 우스운 꼴을 보이고야 말았다.

게다가 아까 함께 식사할 때도 그랬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그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속절없이 뛰어대는 심장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여동생이다.

앞으로 평생 동안 지켜야 할 대상이다.

어쩌면 평생 멜라니의 밑에서 그녀를 주군으로 섬겨야 할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가주가 된다면 황실 기사단장은 그만두고 온전히 그 아이만을 위한 기사로 살아갈 작정이었다.

홀로 수없이 되뇌었던 마음속의 결심이었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고, 가져서도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저 너무 아름다운 겉모습에 홀린 것이리라.

잠시간 올 수 있는 젊은 날의 치기 같은 것이리라.

아슬란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문 같은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리고 얼마 전 제 친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교 파티라도 나가서 누구라도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아슬란의 삶은 너무 많은 일로 빡빡하게 짜여 있었고, 그에게 삶의 즐거움이란 일과를 마친 뒤에 마시는 한잔의 보드카뿐이었다.

그래.

이건 너무 오랜 기간 영애들을 만나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

다음 날 기사단으로 출근한 아슬란은 온종일 저기압이었다.

단원들도 친우들도 도대체 그가 무슨 일로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 것인가에 대해 수군거리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다가가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모두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슬란은 지금 괴로운 상태였다.

정원에 서 있던 멜라니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멜라니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미칠 것 같았다.

너무 강렬해서 기억에 남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 삼아 보려고 해도, 사실은 다시 한번 더 그 아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끔찍하도록 더럽게 느껴졌다.

‘여동생이다. 여동생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꾸짖어 봐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만약 사교파티에 나가 어느 집안의 어떤 영애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면 그건 이런 느낌이었을까?

만약 저택에 계속 머물면서 매일같이 그 아이와 마주했더라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까?

우린 가족이니까…?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자신이 정말로 그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만 같아서 더 가슴이 아팠다.

그 저택에 살면서 매일같이 그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기숙사로 나오게 된 것인데, 정작 오랜만에 찾아간 저택에서 뼈저리게 다시 느끼게 되고 만 것이었다.

결국 그는 절대 딜리아 가문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언정… 이건 양부모님을 배신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니 눌러 참고, 견디고, 없는 감정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줄곧 슬픔을 견디고 참아왔던 것처럼.

***

아슬란은 시종장의 부름을 받고 황제 집무실로 향하면서 불안함을 애써 감추려 노력했다.

대체 황제가 일개 기사단의 단장에게 볼 일이 무엇이 있을까?

기사단에게 하명할 것이 있을 땐 항상 총사령관인 아이든 딜리아 대공을 통해 하달했다.

이건 단순 하명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불안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황제 눈에 띄지 않으려고 그가 산책을 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부리나케 기숙사나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꽤나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영원히 그럴 수는 없었던 걸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슬란이 두려움에 쌓인 고민을 하는 동안 집무실 앞에 도착했고, 시종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 보게.”

아슬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풀러 시종장에게 맡기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집무실은 상당히 넓고 크고 화려했지만, 그만큼 황제의 외모 또한 몹시 화려하고 붉은 머리칼이 강렬해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 역시도 황제였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폐하.”

아슬란의 말에 고개를 든 황제가 그제야 짧은 감탄사를 뱉어내고 말했다.

“소파에 가서 앉아.”

아슬란이 고개를 숙였다 들고 소파로 가서 앉아, 황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뭐 마실 거라도 가져다줄까?”

아슬란은 황제가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폐하.”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어. 난 그런 거 싫어해. 게다가 그대라면 더더욱.”

“예?”

아슬란이 당황해서 되묻자, 황제가 씨익 미소 지으며 설렁 줄을 잡아당겼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들어오자, 황제가 짧게 명령했다.

“차 두 잔.”

시종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자, 아슬란은 몹시 당황스러워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 황제가 예의 그 귀족스러운 인사치레를 몹시 싫어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잠깐 당황하여 집무실을 둘러보는 동안 빠르게 시녀 장이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두 잔 올려 두고 나갔다.

“마셔.”

황제의 명에 아슬란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교육을 정말 잘 받은 모양이네. 길거리를 전전한 아이였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겠어.”

아슬란이 표정을 굳히자, 황제가 느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아이든한테 전부다 들었으니까.”

“!”

아슬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아버지가 황제에게 모든 걸 털어놔?

나는 버림받은 것인가?

그다음으로는 그런 생각이 몰려 들어왔다.

심장이 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절망감과 충격이 온통 머리와 심장을 헤집는 동안 황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미소 지었다.

“원래 이름은 뭐였지? 그대를 낳아준 어미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있을 것이 아니냐.”

아슬란은 혼란스러웠다.

황제가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대답하지 않을 셈이냐? 아니면 놀라서 그런 것이냐?”

아슬란은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의 어디에도 적의감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불충하게 눈을 맞추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나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아슬란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주먹 쥐면서 황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저를 죽이실 겁니까?”

별안간 묻는 말에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널? 왜?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폐하. 펠른 황제께서 저희 할아버님을 죽이지 않으시고 내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펠른 황제.”

황제는 느른하게 미소 지으며 아슬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려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이따 나가는 길에 벽에 걸린 액자라도 한번 보고 가. 그대가 닮은 황제니까.”

아슬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두 눈을 질근 감았다가 떴다.

이젠 모르겠다.

어차피 다 까발려진 마당에.

“피츠로이. 로건 피츠로이라고 합니다.”

“피츠로이! 하! 피츠로이였어!”

“…저를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황제는 한참을 소리내어 웃다가 아슬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널 왜?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널 그런 의도로 부른 게 아니다.”

“허면 어째서 굳이 절 부르셨습니까?”

“궁금하니 우선 네 얘기부터 듣자꾸나. 내 알기로 피츠로이는 성뿐만 아니라 꽤 나쁘지 않은 재산을 떼어 받고 궁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거리를 전전했지?”

아슬란은 찻잔만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그 모든 재산을 노름에 탕진하셨습니다. 결국 빚은 늘어가고,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몰려와서 아버지를 데려갔습니다.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어린 저를 두고 어머니는 홀로 남의 집에 가서 일하기 시작하셨고, 너무 이른 나이에 병에 드셨습니다. 결국 제가 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일자리마저 잃으셨고, 거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황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노름을 좋아하는 피는 어딜 가는 게 아닌가 보구만.”

“예?”

아슬란이 당황해 고개를 들고 되묻자 황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펠른 황제는 원래부터 여자와 놀음을 좋아한 황제로 유명했다. 모르지 않을 텐데?”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전 또 폐하께서 그러신다는 줄로….”

아슬란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해 입을 다물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기울여 강조하듯 말했다.

“진지하게 말해두는데, 나는 돈 놀음도 여자 노름도 싫어해, 인마. 걱정 마.”

“…아… 예.”

“그럼 이제 이름도 성도 바꿔야 할 때가 왔네.”

“?”

아슬란이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황족이면 황족다운 이름을 가지고 교육도 제대로 받아야지.”

“하지만 폐하, 저는 딜리아 사람입니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슬란이 입을 다물자 황제는 피식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제국에 황후 자리가 공석이야. 다들 빨리 결혼해서 후사를 보라고 난리가 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럴 생각이 없어. 잘못된 가문이 제국의 황후 가문이 되면 정말 피바람이 불거든. 역사적으로도 그래왔고.”

아슬란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앉아 있어. 할 말 아직 다 안 끝났어.”

“…예.”

황제가 서류 한 장을 가지고 돌아와서 소파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텐 이렇다 할 후사가 없다는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아슬란은 황제가 내민 서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종이의 상단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입양신청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좀 작성해볼까 싶은데 말이야.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거 같아서.”

아슬란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이것은…!”

“물론 아이든의 동의도 얻어야겠지만. 그건 솔직히 차후의 문제라고 생각해. 그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할 테고.”

“하지만 저는 좋은 황제가 될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폐하.”

황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지도자의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지?”

“민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빠른 상황 판단력과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

“좋아. 그런데 그대는 기사단원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다독여 줄 줄도 알았고, 그들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환경도 제공해 주었고, 어떤 전투에 나가도 빠르게 상황을 판단해 실행에 옮겨 항상 승리를 거머쥐었지. 안 그런가?”

아슬란이 크게 당황하자, 황제가 씨익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 모든 것이 모여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는 재목이라 여겨지는데?”

“폐하…!”

황제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들어 다시 그에게 건네주며 미소 지었다.

“들고 가서 곰곰이 생각해. 원하거든 동의란에 도장 찍어 가져오면 돼.”

아슬란이 당황하여 서류와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자, 황제가 눈썹을 치켜뜨며 턱짓했다.

“들고 나가.”

***

아슬란은 눈앞에 환하게 미소를 짓고 서 있는 멜라니를 보고 절망했다.

이게 벌써 열한 번째였다.

처음엔 어머니의 심부름이라며 도시락을 가지고 찾아왔고, 그다음부턴 그냥 밥 먹듯이 황궁을 드나들며 그를 만나러 찾아왔다.

황제의 제안을 고민해볼 새도 없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후작령의 일들과 기사단 훈련만으로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았는데, 멜라니가 그에 더해 아슬란의 머리까지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멀리해보려고 그 날 이후로 저택에 찾아가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런 것이 다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멜라니는 더 이상 그에게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묻지도 그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사실 황궁에서 여인과 무슨 시간을 어떻게 즐겁고 아름답게 보낸단 말인가.

결국 그는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그리고 나면 남은 하루 동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가 밀려들었다.

[아슬란, 나도 바쁘지만 온 거예요.]

멜라니는 이런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그다음 날에도 찾아왔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되려 문제라면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행복에 익숙해지지도 도취 되어서도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내일은 찾아오면 안 돼, 멜라니.”

아슬란의 말에 멜라니는 입술을 삐죽였다.

“어릴 땐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노력했으면서. 이제 나랑은 안 놀아주겠다는 거예요? 너무하네, 정말.”

아슬란은 당황해 흔들리는 시선으로 멜라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나랑 좀 놀아줘요! 나는 아직 친구도 뭣도 없고, 가진 거라곤 아슬란밖에 없단 말이에요!”

하. 뭐라고?

아슬란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멜라니를 바라보았다.

‘가진 것’이라니.

기가 막혔다.

이 아이 머릿속에 나는 그런 존재구나.

어쩌면 당연하게 사랑받고 부족함 없이 다 가지면서 자라온 이 아이에겐 이게 당연한 사고방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그는 속이 쓰려졌다.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멜라니.”

“나한테 한 시간도 못 내줘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된 거 아닌가….”

이런 논쟁은 그에게 너무 불리한 것이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아이처럼 투정을 부려오면 그로선 정말 아무런 대항도 할 수가 없어졌다.

미워할 수조차 없는 이 아가씨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그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다.

아슬란은 한숨을 내쉬고 재킷을 걸쳐 입고 장갑을 꼈다.

“오늘 제르광장에서 꽃축제가 열린다더군. 딱 한 시간만 있다가, 돌아가야 해.”

아슬란의 말에 멜라니의 표정이 곧 환해졌다.

“와아!! 아슬란! 너무 좋아요! 그런 정보까지 알아보면서! 역시 날 기다린 거지? 그치?”

“하아…….”

아슬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곧 눈앞에 도착한 마차 문을 열고 멜라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기나 해, 말괄량이.”

“와, 너무 신난다!!”

멜라니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타며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외치자 아슬란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역시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마차 창문을 통해 석양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슬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한 시간 후에는 집에 돌려보내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어째 항상 멜라니에게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쏟아질 폭풍 같은 로윈의 잔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저 이제 곧 있으면 데뷔당트예요, 아슬란.”

고개를 돌려 앞에 앉은 멜라니를 바라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성인식 치르는구나.”

“…그게 진짜 성인식이라고 생각해요?”

멜라니가 고개를 돌려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냥 결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는 증거일 뿐이에요. 개새끼 목에 목줄 매듯이 허리를 잔뜩 조여 매고 기괴한 머리 장식을 매달고 나가서 나랑 결혼해달라 구걸하는 거라고요.”

아슬란이 커다래진 눈으로 멜라니를 바라보았다.

그저 사교모임 정도나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결혼이라니.

정말로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멜라니는 또다시 쓸쓸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데뷔당트를 치르면 약혼을 원하는 영식들이 저택으로 편지를 하거나 찾아올 거래요. 그러면 그중 하나를 골라서 난 시집을 가야 해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거든요. 여자로서 제 나이에 결혼하지 못하는 건 귀족사회에서 매장이나 마찬가지예요. 물론 어머니는 원하지 않으면 데뷔당트를 치르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거냐구요.”

아슬란은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충격에 정신이 멍해졌다.

애써 무시하고 감춰왔던 감정은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 한없이 흔들렸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멜라니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이건 멜라니가 너무 자주 자신을 찾아온 탓일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이 아이와 보낸 탓일까?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렇게 약하게 굴어서는 안 되었는데.

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감정은 더 이상 절제하지 못할 만큼 널뛰면서 아슬란을 뒤흔들고 있었다.

악문 잇새로 작디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어떻게 널 밀어내고 포기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그는 주먹 쥔 손에 핏줄이 붉어질 만큼 힘을 주면서 멜라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배신자가 되어 평생을 속죄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의 사전에 결정한 일에 있어서 후퇴란 있을 수 없었다.

***

아슬란의 편지와 함께 온 황제의 칙령에 딜리아 저택이 발칵 뒤집어졌다.

멜라니 역시 충격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땅에 떨어진 황제의 칙령이 적힌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슬란 딜리아는 이 시간부로 딜리아가 아닌 로데우스로서 살아갈 것이며 그의 이름은 현 시간부로 로건 드 로데우스가 될 것이다. 이는 당사자도 받아들인 사항이니 딜리아의 가주는 황명에 순응할 것.]

멜라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실로 달려 올라갔다.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고 황실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섭섭함과 원망,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그녀를 괴롭혔다.

아슬란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내일은 황태자궁이 새 단장을 마칠 것이고, 아슬란 역시 황태자궁에서 생활하라는 명을 들었다.

오늘은 기사단의 단장 자리를 내려놓고 기숙사와 집무실의 짐을 정리하면 일과는 모두 끝이 날 예정이었다.

아이든과 릴리아나, 양부모님의 반응이 가장 걱정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조금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었을까.

자신은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고, 더 이상 그 집안의 울타리 안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괴로울 일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솔직히 해방감마저 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알고 나면 엄청난 비난이 몰려들겠지만….

비뚤어진 목적의식이라 비난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그따위 것들쯤은 뭐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아이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아슬란은 자신의 앞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멜라니를 바라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또 내 앞에서 이렇게 울고 있을까.’

아슬란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었다.

멜라니는 그가 내민 손수건을 가져가 눈물을 연신 닦으면서도 울음 섞여 뭉그러진 발음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랬어? 왜 그랬어? 그럼 나는? 어머니는? 아버지는? 곤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어떻게 그래? 왜 그랬어?”

다른 이들이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었다.

딜리아 가문으로부터 돈만 빨아먹고 내뺐다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견디는 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가 말하는 것은 다르다.

이 아이의 비난 섞인 말과 원망 어린 눈빛은 다르다.

아슬란은 심장을 누군가 쿡쿡 찔러대는 것만 같아서 인상을 찡그렸다.

참는 게 가장 잘하는 특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아이와 관련되기만 하면 이렇게 표정 관리도, 마음 관리도 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멜라니.”

“딜리아 영애라고 불러요!! 아슬란은 이제 딜리아도 아니라면서!”

“아슬란도 아니지.”

아슬란은 쓰게 웃었다.

“…더는.”

어머니가 붙여주신 그 이름이 좋았다.

로건이라 불리지 않아도, 조라도 불리지 않아도 좋았다.

“그래요! 정말 잘났어!”

“…멜라니.”

아슬란은 애써 모든 감정을 억눌러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인내심은 곧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를 돌려보내야 했다.

“나는 좋았는데! 나는 아슬란이 좋았는데!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있어…!”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감정을 모조리 그에게 쏟아부어 대는 멜라니를 보면서 아슬란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눌러 삼켜야 했다.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등 뒤로 숨기며 아슬란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엉망진창으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렇게까지 원망하고 비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저 아이는 자신을 볼 때마다 단 한 번도 오라버니라고 불러준 적이 없었으니까.

어째서 이제 와서 이렇게 배신당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정말 자신을 오라비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

황궁에서 사람이 나와 각 지역을 돌며 황태자 책봉을 알리는 칙령서를 소리 높여 읽었다.

곧 황태자 책봉은 제국 곳곳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에는 황궁 바로 앞에 있는 큰 채릴른 광장에서 화려하게 황태자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멜라니는 속이 상해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그것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마지못해 저택을 나와 광장으로 향했다.

군중 속에 섞여 멀리서 보기에도 금색으로 뒤덮인 새하얀 제복을 입은 아슬란은 홀로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세상에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게다가 그의 머리칼은 더 이상 금색이 아닌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색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자신과는 너무나 머나먼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멜라니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애썼다.

그녀가 일곱 살이었을 때, 아슬란에게 어째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따져 물은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것이었다.

너는 입양아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저택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아?

하고 따져 묻고 싶은 심술궂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저택에 발걸음 하지 않는 아슬란을 보면서 멜라니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죄책감은 그녀의 마음을 양분 삼아 집어삼키고 곧 그리움으로 피어났다.

아슬란이 보고 싶었다.

미안했다고, 내가 정말로 나빴었다고.

그렇게 사과하고 싶었다.

열다섯 살의 늦봄, 다시 만난 그는 못 본 새에 너무 아름답고 멋있는 남자로 자라 있었다.

지난 과거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고 남모르게 안도했고, 멜라니는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에게서 여전히 느껴지는 슬픔의 향기는 이제, 마치 그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듯했고, 그런 향을 뿜어내는 그가 좋았다.

더 이상 그 슬픔에 전이되어 감정이 폭발하는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멜라니는 충분히 그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뭘 어떡해…? 이미 잃은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느끼는 이면에 깔린 것은 그동안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를 가졌다고 느꼈던 것에 기인한 것이었을까?

오직 나를 향해서만 웃어주고, 다정한 그를 보면서 안도하고 기뻐하며 만족했을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는 걸까?

내 것을 빼앗겨버린 것에 기인한 분노? 질투?

애초에 그는 한 번도 멜라니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사실 멜라니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내일은 오지 말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못내 귀찮거나 떨쳐내고 싶었을까?

그저 슬픔을 삼켜 숨겼던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을 또 그렇게 삼키고 숨기면서 웃어줬던 걸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멜라니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프고 속상해졌다.

고작 이런 것에도 이만큼 소용돌이치는 슬픔에 휩싸이게 되어 버리는데….

그는 부모를 모두 잃고 그 모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숨기면서 웃고만 있었을까?

멜라니는 다시 한번 자신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고야 말았다.

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흑… 괴로워… 아파….”

***

로건 드 로데우스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술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이 많아졌다.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대는 한 여자와 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토록 기나긴 나날 동안 그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을까.

쇼핑을 함께하고, 꽃구경을 함께 가고, 함께 디저트를 먹고, 함께 말을 타고, 그 외에도 참으로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빌어먹게도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해 버렸다.

황태자가 되겠노라, 마음먹은 것도 그녀를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 아이는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비난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이 꼬인 매듭을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용서해 줄 수 있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시 티 없이 웃으며 다가와 줄까.

그는 이제 시내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 모든 길목마다 멜라니의 숨결이 느껴질까 봐.

그녀가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하게 될까 봐.

언질이라도 줄 것을.

이렇게 할 것이라고.

널 위해서 그러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랬다면? 그 아이는 도망가지 않았을까? 이 일방적인 감정을 그 아이는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여 줬을까?’

그는 우선 황태자가 되어 그 아이 앞에 당당해지고 싶었다.

오라비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다시 다가가고 싶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천천히 스며들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얻어가면 될 것이라 여겼다.

바보 같게도.

그 아이는 대체 무슨 감정으로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왔을까?

단 한 번도 오라버니라고는 불러주지 않은 주제에.

로건은 자신이 그 아이에게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너무 여러 번 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심장이 아플 리가 없었다.

로건은 빈 술병을 내려놓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내일 역시 몹시 고단한 하루가 될 터였다.

사실은 오히려 그편이 더 좋은지도 몰랐다.

그 시간만큼은 이 지독하게도 마약 같은 여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

멜라니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아픈 사람들을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기도 하면서 다른 것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더더욱 뼈저리게 깨달아갔다.

시내 곳곳에, 그와 함께한 추억이 묻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싫다는 그에게 찾아가 굳이 데이트를 해버렸을까.

그랬다면 이런 추억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을 텐데.

멜라니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는 걸 깨달았다.

몹시 낯선 감정이었고, 괴로운 감정이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평범한 오누이에게서 생길법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이 애달픈 그리움이 어떻게 오라비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일 수가 있을까?

그가 보고 싶다.

함께 시내를 구경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싶다.

마차에서 마주 앉아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싶다.

어쩌면 멜라니는 그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를 오라비라고 여기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어째서 딜리아를 버렸느냐고 따져 물은 주제에.

어쩌면 아슬란도 자신의 그런 태도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다지도 쉽게, 딜리아를 버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와 데이트할 때마다 매번 틈만 나면 지어 보이던 그의 특유 표정이 있었다.

무언가 내리눌러 참는 듯하면서도 몹시도 고독하고 몹시도 아픈 표정.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멜라니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당신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냐고.

내게도 조금만 나눠준다면 함께 짊어져 보고 싶노라고.

멜라니는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깊고도 슬픈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그리워서 미칠 것만 같아.

머릿속이 온통 그에 관한 생각뿐이야.

“정말 어쩌면 좋아 멜라니….?”

***

로건은 황태자 집무실에서 높디높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숙취에 괴로움을 느꼈다.

어제는 평소보다 너무 많은 양의 술을 마신 탓이었다.

숙취에 좋다는 차를 내오라 지시하고 다시 서류에 부지런하게 서명을 하고 있는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또다시 한 뭉텅이 서류를 품에 안은 르윈이 들어왔다.

로건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일을 만들어서 가져오는 거지?”

로건의 짜증 섞인 말에 르윈이 서류를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말했다.

“내 말이 그 말. 어휴, 더워. 언제 여름이 왔담. 시간도 빠르지.”

로건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이 창문으로도 느껴질 정도니, 밖은 정말이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더울 것이 분명했다.

로건은 커튼을 확 쳐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이나 해.”

“그 소식은 들었어?”

“또 무슨 소릴 하려고.”

로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손에 들고 말했다.

르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황태자 전하께서 워낙 세상 돌아가는 데에 관심이 없으시니까.”

로건은 서류에 서명하던 손을 멈추고 르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데뷔당트 있었잖아. 그것도 몰랐지? 어휴. 딜리아 영애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대. 다들 서로 그 집 사위가 되어 보겠다고 혈안이라던데. 어떻게든 한 번 더 딜리아 영애 얼굴을 보고 치근덕대보려고 난리가 난 모양.”

로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서둘러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르윈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뭐야. 어디가? 서류 쌓인 거 안 보여? 뭘 하든, 일과는 끝내고 가셔야죠, 전하!!”

“닥쳐, 르윈.”

로건이 집무실을 나가버리자, 르윈은 인상을 찌푸리며 울상이 되어 버렸다.

“넌 인마, 누가 봐도 대공 아들이다! 이 나쁜 자식아! 으아아!”

***

로건은 딜리아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집사 칼튼이 놀란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 전하.”

“멜라니는?”

“예?”

“멜라니 어디 있냐고!”

로건이 다급하게 묻는데 등 뒤 현관문 앞에서 멜라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슬란…?”

다급하게 뒤를 돌자, 멜라니가 정원에서 꺾어 만든 꽃다발을 양손에 들고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로건은 빠르게 다가가 멜라니의 손목을 붙잡고 현관 밖으로 이끌면서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해.”

멜라니는 순식간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갔다.

정원의 입구까지 걸어 나온 로건이 멜라니를 놔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오신…!”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건이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아, 아슬란…?”

“사랑해.”

“!”

“그러니까 다른 남자는 안 돼, 멜라니.”

멜라니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로건은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로건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멜라니의 얼굴이 이미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멜라니…! 왜, 왜 울어…?”

“흐어엉! 좋아서요! 좋아서!! 이 바보야!”

“뭐…?”

“보고 싶었어요! 흐어엉! 보고 싶었다고! 왜 진작 오지 않았어요, 왜!”

로건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했다.

“조… 좋다고…?”

“그래, 이 멍청한 남자야!”

로건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하지만 곧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안고서 그녀의 머리를, 등허리를 끊임없이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멜라니…!”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흐어엉…! 사랑해!”

로건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면서 키스해왔다.

멜라니는 두 눈을 감고 로건을 온전히 느꼈다.

이것이었다.

자신이 간절히 원한 것이.

멜라니는 다시 한번 확신에 차게 되었다.

그는 절대 제 오라비가 될 수 없음을.

그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사교계에 매장당한다 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오랜 시간 이어진 키스를 끝으로 서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멜라니는 자신이 아까 꺾어왔던 꽃다발을 로건에게 내밀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아직도 연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받아주실래요, 황태자 전하?”

로건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위에 입 맞추고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서로 다급하게 끌어안으며 잔뜩 꺾여버린 꽃다발은 이미 초라해져 버렸지만 둘은 그것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신성력으로 회복이라도 시켜야겠어요.”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멜라니. 충분해.”

로건은 다시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평생 널 지키겠다고 다짐했었어. 네가 잠든 방문을 바라보면서. 네 옆에서 언제까지고 그럴 거야, 멜라니. 맹세해.”

“먼저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전하. 정말로요.”

로건은 멜라니와 이마를 맞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 황태자비가 되어 줄래?”

“물론이에요, 전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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