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행복 하자. 죽을힘을 다해
“축하드립니다, 부인.”
“첫 아이라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저희가 좀 더 그럴듯하고 큰 선물이라도 드려야 하는데….”
며칠 동안은 칼튼과 함께 돌아올 아슬란을 위한 방을 꾸미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나를 찾아온 아젠트와 샤밀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아기 신발이며 옷들을 예쁘게 포장한 상자를 선물하며 축하해 주었다.
“이것으로도 충분해요, 샤밀. 정말 고마워요, 아젠트. 하지만 저희에게는 첫 아이는 아니랍니다.”
내 말에 아젠트와 샤밀은 놀란 얼굴을 했다.
“아이가 있으셨습니까?”
샤밀의 물음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아이든이 들어와 말했다.
“아들이 하나 있어.”
아이든의 말에 아젠트와 샤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셨군요. 저택 분위기가 그래 보이지 않아 전혀 몰랐습니다.”
“저희에게 조카가 있었군요?”
나는 둘에게 아슬란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그 아이가 황족이라는 것에 대해선 제외하고 이야기했다.
아이든과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되니까.
아이는 죽기 전까지 딜리아 가문 사람이어야 했다.
둘은 다행히도 아슬란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이해해 주었다.
방학이 되어 돌아올 아슬란과 현재 꾸밀 예정인 방에 대해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난 후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든이 내게 다가와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다.
“속은 좀 어때?”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식 냄새를 맡지 않으면 괜찮아요. 당분간 다이닝 룸에는 내려가지 않으려구요.”
아이든은 안 그래도 말랐는데 정말 큰일이라며 나를 걱정하는 말을 몇 차례 잔소리처럼 늘어놓았다.
하지만 결국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도 동의해야만 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내게 토로한 이후, 아이든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는 더는 꿈을 꾸지 않고,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더 이상 크리스티나의 환영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치료제였던 것이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젠트와 샤밀은 종종 우리를 보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이틀 뒤에 프리온으로 돌아갔다.
입덧은 점점 더 심해져서 한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결국, 링거를 팔에 꽂고 수액을 맞아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나마 잠이 비정상적으로 미친 듯이 쏟아져 침대에 누워있는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든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지루해서 견디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아이든이 나를 위해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제국은 아직 황제가 갈아 치워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든 정무를 이미 황태자 혼자 보고 있었고, 그가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황위를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대귀족들도 이미 대부분 이에 동의한 상태라고.
아이든이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이유는 정무를 보는 황태자를 옆에서 보좌할 최측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고, 어차피 선위 받을 자리인지라 틈틈이 계속해서 즉위식 준비도 함께 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법사들은 사면되었다.
한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은 그에 맞는 직업을 주었고, 나머지는 각자 원하는 농사를 지을 땅을 배분해 주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제국에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2주 정도가 지나고 나니 조금 살 만 해져서 새콤한 과일주스 정도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주사 없이 생활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침대에서 일어나 마음껏 저택을 활보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게 놀랍도록 좋았다.
이 작은 것 하나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거동이 가능해지자, 저택으로 간간이 마법사들이 찾아와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돌아갔다.
나는 감사 받아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들은 지금 삶에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불행해졌던 건, 프리온과 제국 때문이었는데도.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마법사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라즈 님은 아마도 그들이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자들임을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프리온에서는 고마움을 느낄 줄 모르고 뻔뻔한 작태를 보이던 재상을 보며 신은 어째서 이런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셨는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을 보면서 나는 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가고 있었다.
이틀 뒤에는 오랜만에 아이든과 오붓하게 손을 잡고 외출을 감행했다.
나를 위해 국정 업무도 제쳐 놓고 함께 해준 아이든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물론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쯤 난리가 나셨겠지만… 후후.
제국에서는 이제 아이든의 평판이 전처럼 나쁘지 않았다.
공작가 마차를 발견해도 더 이상 사람들은 숨지 않았다.
나는 이제 시내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마음껏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변화인지 그도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시내를 아이든과 걸을 때에는 많은 이들이 다가와 아이든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공작가에서는 공작령을 하사받은 이후로 꾸준하게 어려운 이들을 위해 손을 뻗고 있다고 했다.
아이든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받은 영향 덕분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더 이상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운운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삶의 가치관을 통째로 바꾼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변화가 존경받아 마땅한 대단한 것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아이든에게 감사를 표한 이들은 공작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든은 힘들어할 나와 배 속의 아이를 위해 끊임없이 앉을 곳을 찾아다니고 쉼 없이 노력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구두로 인해 발바닥이 조금 아픈 것을 제외하면 전혀 힘들거나 하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슬란을 위한 선물을 샀다.
아이의 방에 놓으면 예쁠 것 같은 장식품과 아카데미에 가서 쓸 만년필을 구매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목욕 시중을 받아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머리 빗는 시중을 받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내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아이든이 문기둥에 기대어 섰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새삼스럽게 노크는 왜?”
내 말에 아이든이 싱긋 웃으며 고갯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나는 아이든의 옆에 아무도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런데 곧 문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슬란!”
“…어머니.”
눈을 휘어 예쁘게 웃으며 선 아슬란이 나를 불렀다.
새하얀 아카데미 교복이 잘 어울렸다.
전보다 키는 배가 더 커지고 얼굴도 훨씬 더 성숙해져서 더 이상 10살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렴, 아슬란.”
아이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살포시 나를 안아 주었다.
벌써 내 키의 반 이상을 넘어선 아이가 기특하고 예뻤다.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어 주자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머리가 헝클어집니다, 어머니.”
꼭 아이든과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아슬란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입을 열었다.
“임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아이에게 충분한 신뢰를 안겨 주지 못했던 걸까?
나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손을 잡아주었다.
“아슬란. 내게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네가 내 아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야.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아낀단다. 그걸 의심하지는 말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아슬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아슬란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고 아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마침 좋은 시간대에 도착했구나.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오렴.”
“어머니께서는요?”
“리안은 지금 입덧 중이라 식사를 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상큼한 과일 주스를 갈아서 가져다드릴 수는 있을 것 같구나. 어떠니?”
아이든이 뒤에서 다가와 말하자 아슬란이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제 손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아버지.”
“그래. 그러자.”
아이든이 내게 입 맞추어 주었다.
“다녀올게, 리안.”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든과 아슬란이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다이닝 룸으로 내려간 후, 나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가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데이트 하는 내내 내리지 않던 눈이 갑자기 소리 없이 내려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했다.
창가에 두 팔을 교차해 올리고 턱을 기대었다.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된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 공작’의 아내로 사는 것은 그렇게 무섭고 불행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든의 계약 결혼 제시에 마지못해 응했던 과거의 나를 듬뿍 칭찬해 주고 싶었다.
물론 그는 또다시 제국의 부름에 응해 전쟁이 나갈 수도, 누군가의 목을 베고 돌아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공작’의 아내로서 사는 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분명 모든 것을 잘 해낼 것이다.
이제 창조주에게 약속했던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마쳤고, 나는 아슬란과 아이든과 배 속 아이와 함께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라즈 님의 말씀처럼, 죽을힘을 다해.
다시 찾아올 봄에는 아이든과 아슬란과 함께 꽃놀이라도 다녀와야지.
꽃이 만발한 들판에 앉아 아이든과 아슬란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 먹을 거야.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벌써 봄이 온 듯 마음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팔을 내려 아랫배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아가야. 듣고 있니? 엄마는 지금 너무 행복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다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국의 겨울은 몹시도 길다.
회귀를 하기 전, 지난 생의 겨울은 내게 항상 춥고, 시리고, 싸늘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아니다.
올겨울은 몹시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