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대였어, 그렇지?
의원이 나간 후 침대에 맥없이 누워있었다.
타조 고기 향의 여운이 아직도 코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곧 아이든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운 속을 눌러 삼키며 상체를 일으켜 앉자 아이든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툭 하고 묻었다.
의사가 나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이 맞습니다, 부인. 혹여 식사 중 술을 드시지는 않으셨지요?]
식전 주로 올라왔던 화이트 와인을 채 먹기도 전에 구역질이 올라온 탓에 마시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프리온에서도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구나.
아이든이 나를 살며시 끌어안고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고마워.”
아이든의 목소리가 조금 고양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 일말의 우려와는 달리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그대는 존재만으로 내게 한 줄기 빛 같아.”
그가 나를 놓아주어, 아이든과 눈을 맞추었다.
“제가요?”
아이든이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 내 손을 살포시 잡아주었다.
“내게 와주어서 고맙고, 내게 형제들을 돌려주어 고맙고, 이렇게 내 아이까지… 임신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알고 있어. 어머니가 형제들을 임신했을 때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으니까. 그대가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길 바란 건 아닌데도… 이게 이상하게 기쁘네.”
여전히 속은 불편하고 울렁거리긴 했지만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는 말도, 내 손을 잡은 그의 손도 몹시 따뜻하고 포근했다.
“당신이 내게 알려줬잖아요.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걸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 주었잖아요. 나한테 그건 구원이었어요, 아이든. 그래서 당신 역시… 과거에서 그만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든이 눈을 반쯤 내리깔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아젠트와 샤밀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내가 어느 정도는 오해한 부분들도 있었어. 바보 같게도.”
그건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가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키스하고 부드럽게 엄지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그대가 하는 말은 늘 옳아.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거부해도 결국엔 말이야.”
“그걸 이제서야 아셨군요?”
내 말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게. 내가 정말 바보 같군. 그대는 마치 사춘기 아들을 키우는 기분이겠어.”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감정을 존중하는걸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현명한 아내가 되어주어서 고마워, 릴리아나.”
미소 지으며 그의 품에 다시 안겼다.
“하지만 임신 기간 동안엔 현명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요.”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면 너무 쓰레기 아닌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어느새 속은 조금 진정된 듯 편안해졌다.
타조 고기 향은 잊혀지고 그의 살갗 냄새만이 가득해져 안정감이 일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라면 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다 토로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 나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가 말하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 얘기를 믿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사실은… 지금 이게 두 번째 삶이에요, 아이든.”
아이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천천히 그에게 회귀하기 전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빌 커티스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아버지의 재산을 커티스가 모두 탕진하고 아버지가 빈털터리가 되었던 일, 빌 커티스가 내연녀와 함께 나를 불러내어 모욕을 주고 이혼을 요구한 일, 결국 크리스티나의 손에 들린 단검이 내 심장에 꽂힌 일, 눈을 떠보니 과거로 회귀해 있던 일까지.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표정을 살피었으나 그는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그저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회귀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빌 커티스의 편지를 받아 드는 순간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려 손을 씻고 또 씻었던 일과, 머릿속에 온통 그를 떨쳐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찼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자 아이든이 여전히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내 눈을 바라보며 확인했다.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헛웃음을 토해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잠시간 말없이 내게 등을 보이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새끼부터 죽이고 올게.”
나는 너무 놀라서 아이든의 손을 그러쥐고 당겨 그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이없게도 내 입에서 푸훗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아이든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려 했다.
“아이든. 고마워요. 내 말을 믿어 주어서. 그리고 이렇게 화를 내주어서요. 당신을 말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솔직히 너무 기쁘네요.”
아이든이 완전히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서로 해야 할 말들이 아주 많겠군.”
“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내 옆으로 다시 걸터앉았다.
“이제 내 이야기도 들어 주겠어?”
***
아이든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우리는 새벽녘의 희미한 빛이 창가를 통해 침실에 비춰 들어오는 시간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임신으로 인해 잠이 몰려들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의 이야기가 놀라운 것이어서 그랬는지 잠은 오지 않았다.
꿈에서 내 회귀 전에 죽는 장면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꿨다는 그는 그 이후로도 내 생명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어김없이 꿈을 꾼 것 같았다.
마치 아이든이 스펠른에 출정했을 때 내가 꿈을 통해 아이든의 죽음을 보았던 것처럼.
이것 역시 신의 은총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빌 커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둘을 맺어주기 위함이었을까?
불현듯 결혼식장에서 헨델 사제가 우리 둘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단단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든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이야기 또한 털어놓았다.
그의 트라우마가 어디에서 근원 된 것이었는지.
솔직히 나는 꿈을 통해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아는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올라가 이야기하면서 때로는 괴로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적잖이 놀라게 되었다.
그가 침대에 웅크려 괴로워할 때 만났던 천사 이야기를 할 때에, 그 역시 뭔가를 깨달은 듯 나를 멍하니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배에 검을 찔러 넣고 죽어갈 때에 나타나 그를 살려 주었던 천사의 이야기를 할 때도.
부모가 죽고, 형제가 떠난 뒤 마음을 독하게 먹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모두 끝마친 뒤에 그는 한동안 무언가 놀라운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웃으면서도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그러는지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의 웃음에 화답해 웃어주었다.
“그대였어. 그렇지?”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든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아침이 밝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곤히 잠들어 늦은 시간까지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