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이든의 피로해소제
프리온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제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젠트와 샤밀을 배려해 최대한 컨디션에 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나도 최고급 숙소를 찾아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물론 공작가보다는 좋을 수 없지만, 그게 어딘가 싶을 정도로 잠이 쏟아져 기절하듯 잠이 들곤 했다.
공작저에 들어서자 멀리서 칼튼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프리온과 제국의 국경선에 발을 들이자마자 공작저로 연통을 먼저 넣고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에서 내려 다가서자 칼튼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이든은 저택에 있나요?”
“아니요. 그날 이후로는 저택에는 거의 잠만 주무시러 오셨습니다. 아직도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주인님이 오신다고 전서를 보냈으니 받으셨으면 일찍 돌아오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젠트와 샤밀을 소개 시켜주었다.
“칼튼 이쪽은….”
“도련님들이시군요?”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이 아젠트와 샤밀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두 분 다 강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젠트와 샤밀이 부쩍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칼튼을 바라보았다.
“집사님. 저희는 더 이상 딜리아 사람이 아닙니다. 그 성을 버리고 프리온제국의 평민으로서 살아 온 지 오랜 세월입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칼튼은 상체를 세우고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게 도련님들은 영원한 딜리아가의 도련님들이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하고 덧붙인 칼튼이 현관문을 열고 안쪽으로 손을 들어 가리켰다.
아젠트와 샤밀은 어색한 얼굴로 저택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칼튼과 눈을 맞추고 싱긋 미소지었다.
“고맙습니다, 집사님.”
“제가 해드려야 할 말입니다, 주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집을 나가신 이후로… 각하께서는 여러 방면으로 동생분들을 찾으셨으니까요.”
“그랬군요….”
아젠트와 샤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지요.”
칼튼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이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칼튼에게 손님을 방에 안내 해달라 부탁하고 2층 부부 침실로 들어갔다.
목욕 시중을 받고 프리온에서 선물 받아온 홈드레스로 갈아입었다.
확실히 프리온의 의복이 제국 것보다 상체가 달라붙지 않아서 그런지 더 편하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조금 더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저택 복도를 에릭과 거닐고 있는데 칼튼이 와서 아이든이 저택에 들어섰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가 1층 로비에 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고 아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서 와요, 아이든.”
아이든이 서류 가방을 칼튼에게 넘겨주고 내게로 빠르게 걸어왔다.
내 앞에 멈춰선 그가 내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보고 싶었어.”
나는 수줍게 웃었다.
“저도요. 오늘도 잘생기셨네요. 아이든.”
“누가 할 말을. 올라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든의 손을 잡고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든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계단 위에서 아젠트와 샤밀이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아이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적잖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이든. 저분들은….”
“그대가 데리고 왔어?”
아이든이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헤아려 보려고 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안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어서 나는 몹시 긴장이 되었다.
“네. 제가 저분들을 찾아서 모시고 왔어요.”
“찾아서…?”
“저분들이 프리온의 대신전 개인 기도실에 매일같이 찾아와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래서 나를 떼어놓고 혼자 가겠다고 했나?”
아이든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렸다.
나는 비로소 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화가 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 아이든.”
그가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우선 좀 씻고 싶군. 얘기는 나중에 해.”
“아이든, 저는 나쁜 의도는 없었….”
“그대의 의도가 어떤지는 상관없어.”
아이든이 짓씹듯 뱉어내고 아젠트와 샤밀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나는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가 애써 미소 지으며 아젠트와 샤밀에게 다가갔다.
“이해해 주세요. 오랜 세월 오해 속에서 살아왔잖아요. 방으로 돌아가 계시면 제가 아이든과 얘기를 나눠 볼게요.”
아젠트와 샤밀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든과 잡았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뿌리친 건 처음이었다.
“…좀 충격이네.”
***
피로회복에 좋은 차를 부탁해서 직접 들고 계단을 올라 부부침실로 들어서니 막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는 아이든이 보였다.
샤워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나를 보고 우뚝 멈추어 섰다.
나는 티 테이블 위에 찻잔이 올라간 쟁반을 내려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니 그에게서 기분 좋은 비누 향이 났다.
“미리 상의하지 않아서 화가 나신 거죠?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아이든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그가 내 팔을 붙잡아 내 몸을 떼어 냈다.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몹시 괴롭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과하지 마, 릴리아나.”
“하지만….”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 순간 불현듯 어린 시절 아이든이 침대 옆 구석에 웅크리고 빌었던 말들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나는 사과해야겠어요. 아이든이 내 손을 뿌리쳤잖아요.”
아이든이 커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 울어…?”
“울지 않아요!”
나는 아이든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내리고 손을 들어 눈을 닦아냈다.
“나는 그냥… 아이든이 더는 과거에 매여 살지 않기를 바랬어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고요. 그분들을 환영을 통해 본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하… 릴리아나.”
아이든이 한숨을 내쉬고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내게 서프라이즈라도 하고 싶으셨다?”
“…제가 먼저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요. 혹시라도 아이든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 오해가 아니라 진짜면 괜히 서로를 만나게 했다가 트라우마를 더 증폭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하아… 들고 들어온 건 뭐야?”
아.
하고 탄성을 내뱉은 나는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피로 해소에 좋은 차래요. 바쁜 업무로 몹시 지치셨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쟁반을 빈 의자 위에 치우고 테이블 위에 찻잔을 올려두며 말하자 아이든이 내게 다가와 입에 입 맞추었다.
“난 이거면 됐는데.”
아이든의 말에 수줍게 웃으며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그야 키스는 몇 번이고 해드릴 수 있지만….”
“그래?”
아이든이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로 가서 눕히고 위로 올라왔다.
“지, 지금 낮이에요, 아이든.”
“알고 있어.”
“아젠트와 샤밀이 기다리고 있….”
“그것도 알아.”
아이든이 내 옆머리를 쓸러 넘겨주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내 피로해소제는 먹고 가야지.”
나는 환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만나 보시겠다는 거죠?”
“그래. 부인의 명대로. 그러니 얌전히 있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팔을 뻗으며 싱긋 웃었다.
“피로해소제 여기 있어요, 아이든.”
***
아이든이 아젠트와 샤밀을 만나러 나간 뒤, 나는 서재로 발걸음 했다.
한동안 보지 못한 제정가계부와 일거리를 찾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칼튼을 불러 함께 일 처리를 끝내고 보니 창밖이 어느덧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단열공사를 한 뒤로 저택이 생각보다 춥지 않네요.”
칼튼이 서류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예. 그러니 더욱 밖에 나가실 땐 따뜻하게 입으셔야 합니다. 실내외 공기 온도 차가 심하면 더 감기가 잘 걸립니다.”
“그런가요?”
칼튼을 바라보며 되묻자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 보아도 따뜻하고 인자한 느낌이 있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럼요.”
“저택만 따뜻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꼭 명심할게요, 칼튼.”
“예, 주인님.”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집무실은 어느새 서류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더 짧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서 그런 걸까.
회귀 전의 커티스 가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지독하게 길고 추웠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칼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은 아직도 형제들과 있나요?”
“아마도 그러실 겁니다.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으실 테니까요.”
“그와 형제들과 함께 먹고 싶어요. 다이닝 룸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겠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인님.”
칼튼이 서류를 정리해 놓고 집무실을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침실로 돌아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곧 침실로 리제가 들어왔다.
“리제. 너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못했겠구나.”
“저는 괜찮아요, 마님. 워낙 튼튼해서요.”
그리고 바보같이 소리 내어 웃는 리제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그래. 튼튼해 보이는구나.”
“그나저나 왜 부르셨어요, 마님?”
“옷을 갈아입고 싶어. 저녁 식사에 손님들과 함께할 건데 좀 단정하게 꾸미고 내려갔으면 해서.”
“네! 맡겨 주세요, 마님.”
리제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모습에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밝고 예쁜 아이다.
나까지 에너지 업이 되는 기분이야.
리제가 침실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아이든에게 선물한다고 꽤 오랫동안 수놓아 놓고 주지 못한 손수건이 있었다.
오늘은 그것도 아이든에게 꼭 선물해야지.
에릭에게 손수건을 매달아 줬던 것이 여간 신경이 쓰여서 아이든에게도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나는 서랍에서 고이 간직했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심플하지도 않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말아 올린 채 다이닝 룸에 내려가니 예상대로 아직 아무도 내려와 앉아 있지 않았다.
형제들이 앉을 자리를 생각해 평소에 앉던 끝 쪽이 아닌 그 옆으로 가서 의자에 앉으니 사용인이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음료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화이트와인으로.”
“예, 마님.”
사용인이 주방으로 향하고 난 후, 칼튼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주인님과 도련님들께서 내려오는 중이십니다.”
칼튼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때를 맞추어 사용인들이 나와 식탁에 음식을 한가득 차려 놓았다.
“알겠어요.”
칼튼이 고개를 숙였다 들고 나가자마자 아이든과 두 형제가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든과 형제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해묵은 감정을 털어낸 아젠트와 샤밀 모두 눈가가 붉었지만, 다행히도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아이든 역시 편안한 표정이어서 긴장되어 쿵쾅거리던 심장이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다.
아이든은 미소 지으며 내게 와 나를 안아주었다.
“오래 기다렸어?”
“저도 방금 내려왔어요. 앉아요.”
아이든이 내 입술에 입 맞추고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앉았다.
아젠트와 샤밀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짓고 우리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앉았다.
사용인이 다가와서 메인 요리의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큼직한 타조 구이가 반들반들한 윤기를 내뿜으며 고상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용인이 타조 구이를 해체한 뒤 조금 크게 조각내어 손님의 앞 접시에 먼저 올려두고 그다음으로 아이든의 접시에, 마지막으로 내 접시에 올려 주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아젠트와 샤밀을 바라보았다.
“저희 주방장님 요리 솜씨가 아주 좋아요. 어서 드셔보세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표한 뒤에 음식을 포크와 나이프로 잘게 잘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이든이 아직 먹지 않고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왜요, 아이든?”
“그냥. 어서 먹어, 리안.”
“네.”
웃음기 어린 대답을 하고 나 역시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고기를 작게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코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타조 구이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헛구역질이 밀려들었다.
“우욱!”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 헛구역질을 하고 난 후 다른 손으로 답답한 가슴을 누르면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속이 안 좋은가? 갑자기 왜 이러지?”
말을 마치고 숨을 들이켜는데 이번엔 접시에 놓인 타조 구이의 향과 다른 음식의 냄새가 한데 섞여 코를 파고들었다.
“우우욱!”
안될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젠트과 샤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냄새가 너무 역해서 못 먹겠어요! 미안해요, 아이든. 나 먼저 올라가 봐도 될까요?”
손으로 코를 틀어쥐고 말하자, 아이든이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리안?! 어디가 아파?! 속이 안 좋아?! 괜찮은 거야?! 내가 부축해 줄까?”
다급하게 다다다 물어오는 말에 정신까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다시 밀려 올라오는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은 뒤에 고개를 필사적으로 가로저었다.
아젠트와 샤밀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앉아 있다가 동시에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임신이다!”
“임신이네!”
나와 아이든이 모두 놀라 아젠트와 샤밀을 바라보았다.
지… 지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