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39)

35. 이반 아델르크와 아이든의 형제

마담 클레어가 가져다준 모피코트를 걸치고 안쪽은 털로 되어있는 가죽장갑을 찼다.

검은색으로 코팅된 를 끼고 털모자를 쓰고 나니 추위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코에 느껴지는 바람의 찬 기운은 시큰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야 뭐.

대문 앞에 대기 중인 마차 앞에 서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도 겨울의 저택을 멀리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함박눈이 내렸을 때는.

하얗게 변해버린 저택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얼음 요정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반짝거렸고, 아름다웠다.

제국의 겨울은 춥고 길다.

프리온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저택은 눈을 뒤집어쓴 채로 나를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마님, 곧 눈보라가 칩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세요. 감기 걸리셔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짐 마차에 싣고 나서 말하는 리제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그럴까. 이제 가야지.”

마중 나왔던 칼튼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주인님.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각하께서도 잘 다녀오시라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아이든….

고개를 들어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아이든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연히 바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네… 잘 다녀오겠다고 전해주세요, 칼튼.”

“예, 주인님.”

눈을 감고 황궁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몸을 돌려 에릭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는 의자에도 털방석이 깔려 폭신하고 따뜻했다.

먼저 타 있던 헨델 사제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릴리아나 님.”

이젠 공작부인이라고도 하지 않는구나.

리제가 뒤따라 마차에 오르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 신호를 알렸다.

리제와 헨델 사제가 서로 목례로 인사를 마쳤다.

나는 헨델 사제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 하문하십시오.”

헨델 사제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눈을 반쯤 내리깔며 떠보듯 물었다.

“아델르크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신가요?”

“프리온의 사제들은 황실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헨델 사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건국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헨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국 황제라면… 로긴 아델르크 님에 대한 것을 하문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대답 없이 헨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답했다.

“프리온의 사제들은 그분에 대해서는 역사로서 배움을 얻지는 못합니다만… 예.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릴리아나 님.”

“역사로서 배움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알고 있죠?”

“저희 가문은 처음부터 로긴 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에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런 거지요.”

아. 그런 가문이 있을 수 있었겠구나.

“제드 로즈보르는 어떤 자죠? 그자도 건국 황제에 대해 알고 있나요?”

“제드 경… 그자를 알고 계셨군요. 예. 제드 경 역시 건국 황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였어.

둘이서 무언가 모의하기에 딱 좋은 관계.

“로긴 아델르크의 외모가 어땠는지 알고 있나요?”

헨델은 놀란 듯 다시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분께서는… 검푸른 빛깔의 머리칼과 금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말없이 헨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난처한 듯 눈길을 돌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릴리아나 님과 매우… 닮으셨지요.”

그래. 나와 매우 닮았지.

애초에 일라즈 님은 마치 형제처럼 닮게, 우릴 그렇게 지어 놓으셨거든.

“후….”

“릴리아나 님…?”

내 한숨에 헨델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나를 불러왔다.

“현재 황제 자리에 오른 황자에 대해 말씀해보세요.”

헨델은 입을 다물고 나를 조심스레 살펴보는 듯했다.

그러나 를 끼고 있는 나를 떠보기란 쉽지 않겠지.

예상대로 헨델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 아델르크. 서자 출신이나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검푸른 머리칼에 누구보다 아델르크로서의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권력에 욕심이 많고 여자를 좋아합니다. 소유욕 또한 있는 자입니다. 자기 것을 빼앗기는 걸 몹시 싫어합니다. 성격은 평소에는 온화하나 수가 틀리면 잔인하게 변모할 수 있는 자여서 조심하셔야 합니다. 검술이 뛰어나고 신성력도 나쁘지 않습니다. 특이한 재능이 있는데 다른 이들이 쓰는 신성력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릴리아나 님께서 제국에서 사용한 신성력을 느끼시는 것처럼요.”

“제국에는 사제님도 계시지 않나요?”

“제 미약한 신성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분명 다르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나름대로 황제로서의 재능도 지도력도 모두 갖추었다는 말이구나.

게다가 아델르크로서의 외모라.

이들은 아델르크로서의 외모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나 할까?

“다시 로긴 아델르크 이야기로 돌아가보죠. 사제님은 그자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대체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던데.”

헨델은 다시 한번 놀란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분에 대해 알아보셨군요.”

“대답.”

“예. 그분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요. 게다가 그분의 등에는….”

등…?

“등에는 뭐죠?”

“…전해 내려오기로는 마치 양쪽 날갯죽지에 날개가 있었던 것 같이 그을린 털이 있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문의 조상께서는 그분이 천사가 아니셨을까 하고 생각하셨답니다.”

천사… 아니라고도 할 수 없으려나.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음 받았어.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나요?”

헨델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가능한 이야기라고 믿고 있어요. 그분이 나타나시기 전엔 세상에 신성력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고, 평화롭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로긴이 세상에 내려오기 전의 세상.

그래. 평화롭지 못했지.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았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러니까 헨델도 제드 로즈보르도 로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로구나.

“게다가.”

헨델의 목소리에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분은 금안이셨지요. 사람들은 금색을 신의 색이라고 여기니까요.”

맞아.

그런데 언제부터 금색을 그렇게 여기기 시작했을까?

세상을 내려다보고 늘 즐거워했지만,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로긴 이후로 금안으로 태어난 자가 있었나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그렇게 태어났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헨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자는 없었습니다, 릴리아나 님.”

나는 눈을 감고 손을 들어 를 벗으면서 말했다.

“로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말이로군요.”

“예… 그렇습니다만… 건국 황제를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되….”

눈을 뜨고 헨델을 바라보자 그녀는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멈추었다.

다리를 접어 리제에게 건넸다.

리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 드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헨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그 역사가 뒤집히겠군요. 그렇죠?”

***

기나긴 여행이었다.

몸은 물 먹은 듯 무겁고 정신은 피로했다.

노숙 없이 꼬박 이틀을 걸려 도착한 프리온은 제국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제국의 건축 양식이 벽돌이나 시멘트를 사용해 조금 투박해 보인다면 프리온은 온 마을의 건물들이 전부 새하얀 색이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황궁에 도착해 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쌓여 완전한 모습은 보기 힘들었지만, 사이사이 보이는 검푸른 색상의 지붕과 새하얀 색상의 건물이 어우러져 깔끔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심플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신성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는 바로 숙소로 안내받았다.

무거운 몸은 앉을 자리만 찾으면 바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서니 황궁의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내 눈을 보고 적잖이 놀란 듯했지만, 황급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목욕 시중을 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리제도 방을 따로 배정받은 차였고, 그녀 역시 씻고 쉬어야 할 것 같았기에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중을 받아 씻은 후에는 옷시중을 들어주었다.

“가져온 옷이 있는데….”

중얼거리는 말에 시녀 하나가 허리 숙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리온의 의복을 입어 달라 청하셨습니다. 물러갈까요?”

“아….”

옷이야 리제 없이 나 혼자 꺼내 입기도 어렵고….

굳이 원한다는데 고집부릴 이유도 없긴 하겠지?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게요.”

프리온의 양식에 맞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말리고 나서야 모든 시녀들이 물러갔다.

나는 그대로 침대로 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노곤해진 몸이 반응하듯 정신이 아득하게 침대로 꺼져 들어갔다.

다음 날, 또다시 몰려 들어온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황제를 알현할 준비를 했다.

제국의 드레스가 코르셋으로 상체를 조여 드레스 역시 상체는 딱 달라붙고 치마가 퍼지는 유형이었다면 프리온의 드레스는 형태가 달랐다.

목이 파여 있고, 가슴을 잡아주며 그 바로 밑에서부터 치마가 하늘하늘하게 떨어져 내렸다.

연한 블루 색의 드레스는 잔잔하게 펄이 들어가 요정이 내려앉은 것처럼 예뻤다.

목과 귀에는 진한 청색의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달고 하얀 벨벳 장갑을 꼈다.

머리는 반만 땋아 올려 묶고 진주가 달린 장신구를 꽂아 주었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오자 호위 기사들과 헨델 사제, 리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 하나가 내 뒤로 와 털 자켓을 어깨에 걸쳐주었다.

오며 가며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워 다시 선글라스를 끼고,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잠자리는 평안하셨습니까?”

헨델 사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로가 풀리니 좋네요.”

“제가 굳이 따라올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마님.”

리제의 말에 주먹 쥔 손을 들어 풋 웃었다.

“드레스도 가져올 필요가 없었고 말이지? 뭐 어떠니. 너도 이 기회에 귀빈 대접 좀 받으렴.”

“마님도 참….”

알현실 앞에 도착하자 시종장으로 보이는 자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허리 숙여 인사해왔다.

“귀한 발걸음 곧 폐하께 아뢰겠나이다.”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해주고 고개를 한 번 끄덕하자 시종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기다리면서 에릭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에릭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리제는 허리 숙여 내게 인사하고 문 옆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시종장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알현을 응하셨사옵니다. 들어가시지요.”

“내 호위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시종장이 뒤에 선 볼턴 경과 윈터 경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 검은 제게 맡기시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호위를 맡기는 이유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나는 겁이 많은 잡니다.”

“송구하나 황실의 법규가 그러하니 따라 주시지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 윈터 경과 볼턴 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옷 안에 작은 단도를 숨기고 있는 걸 미리 보고 출발했고, 뭣하면 어딘가에 숨어들 휴와 노아도 있다.

윈터 경과 볼턴 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집 채로 풀어내 시종장에게 건넸다.

곧 문이 열리고 시녀가 내게서 털 재킷을 벗겨 주었다.

알현실 안으로 헨델 사제와 내가 앞장섰고, 윈터 경과 볼턴 경이 뒤를 이어 들어섰다.

“공작부인을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폐하.”

헨델 사제가 사제복의 양옆이 갈라진 겉치마를 들었다가 놓으며,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래. 수고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합니다. 제국의 릴리아나 딜리아라고 합니다.”

나 역시 무릎을 살짝 굽히고 예를 취하며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무릎을 펴고 정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들자 다리를 꼬고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려 턱을 괸 황제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녹안을 제외한다면 멀리서 보기에도 이목구비가 나와 몹시 닮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이자벨 황녀님도 꼭 이렇게 생기셨을까?

마치 핏줄이라도 만난 것처럼 묘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서 오만하고 위압적인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한쪽 입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황제를 알현하러 온 사람치고는 복장이 참으로… 화려하십니다. 그 눈에 쓴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나를 프리온의 황족이나 다름없게 대하고 있다.

기분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이제서야 피부에 체감이 되면서 실감이 났다.

내가 이자벨 황녀님의 자손이라는 것이.

“…….”

나는 말없이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긴의 후손. 오라버니의 자손… 이반 아델르크.

이것을 무슨 느낌이라고 칭해야 할까.

아델르크로서의 기억을 전부 가진 나로서 오라버니의 자손을 바라보는 마음.

그리고 인간 릴리아나, 나 역시 로긴의 자손으로서 황제를 바라보는 마음.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좀 웃긴 일이네.

아이러니하고 상황이 참 그래.

나는 눈을 감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지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폐하.”

그리고 눈을 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곧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기나긴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반은 한동안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대다가 말했다.

“그래, 그래요. 그래! 그런 거였어! 신탁의 아이로도 모자라 금안이라니! 어떻게, 내가 지금 이 자리를 그대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

나는 그저 말없이 이반을 바라보았다.

이반은 웃음을 그치고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꼬았던 다리를 내려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한번 말씀해보십시오. 오는 내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해 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 어째서 제게 존대를 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일국을 다스리는 군주십니다.”

“그대도 프리온의 황족이지요. 이자벨 황녀님의 핏줄이시고. 신탁의 아이시고. 금안을 가지셨고! 내가….”

이반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대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와는 흐르는 피조차 다른 그대에게!?”

가엾은 이반.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폐하. 지금 그 보위에 앉아 계시는 분은 폐하십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우십니까?”

“나를 아십니까?”

니가 뭘 알아!

하고 뻗대는 꼴이 정말 사춘기 소년 같다.

물론 나보다야 어려 보이긴 하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 황위에 욕심이 없습니다, 폐하.”

“내가 그것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오른손을 들어 팔을 걷어 올렸다.

손목에는 아이든이 언젠가 내게 사주었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 장신구를 내게 선물한 사람 때문이지요. 폐하, 사랑은 사람을 때때로 정말 바보로 만들기도 한답니다.”

손을 내리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국의 검으로서 일평생을 살아왔고 자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어찌 그에게 제국을 버리고 제게 와 달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해서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욕심낸 적이 없습니다, 폐하. 내가 그의 옆에 있고 싶으니까요.”

황제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이조차 제 변명으로 들리십니까?”

“믿을 수 있는 변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슨 말을 한들 의심하기 위해 의심을 하면 아무것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태어나서부터 금안이셨습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전보단 안정을 되찾은 것 같은 이반이 중얼거렸다.

“물론 그랬겠죠. 우스운 질문을 했군요.”

나는 그대로 드레스를 살짝 들고 황제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황제가 놀라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시니까요. 제 진심은 이것입니다, 폐하. 지금 그 자리에는 폐하께서 앉아 계시고 저는 일개 공작부인일 뿐입니다. 폐하와 저의 위치가 지금처럼 이러합니다.”

“허나 그대는…!”

“예, 저는 신탁의 아이지요. 그런데 신탁의 내용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뭐라구요…?”

“제가 그 보위를 빼앗을 것이라 하던가요? 황제목이 태어날 것이라 하던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폐하, 저는 신탁의 아이가 마치 영웅같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오명 하나 때문에… 오랜 세월 마법사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내 간절한 목소리가 이반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리고 비로소 악신의 아이가 죽고 나서야 프리온과 마법사들의 역사가 어떠했는지 알았습니다. 제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제 남편은 저를 위해 기꺼이 전쟁에 나갔고, 저는 남편이 다치지도 죽지도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허나 그것이 어찌 황좌를 욕심낸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신성력을 각성한 것이 중차대한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러지 못했다면 제가 죽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여전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만 벙끗댈 뿐 무어라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보십시오. 그 결과 제 남편도, 저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저는 악신에게 남편마저 빼앗길 뻔했어요! 그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면 저는… 저는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를 잃을 뻔했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세요.”

“폐하.”

“부디 일어나십시오.”

내가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황제가 다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금안이라는 것.”

뭐? 알고 있었어?

아… 설마.

나는 내 목욕 시중과 옷시중을 들었던 시녀들을 떠올려 보았다.

단순히 시중을 들라는 목적이 아니었구나.

…어쩐지. 굳이 프리온의 의복을 입으라고.

황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자포자기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실제로 믿진 않았습니다. 설마 그걸… 하…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

설마!

“금안도 모자라 등엔 화상 자국까지 있다지요…?”

하.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그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리라고는 차마.

내가 안일했어.

무슨 생각으로 목욕 시중을… 하….

헨델 사제도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을 내리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치 로긴 아델르크가 살아 돌아온 것 같지 않습니까…?”

이반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폐하, 그것은…!”

“아니요. 이제 와서. 변명할 생각은 마십시오.”

나는 허탈감에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토록 이반에게만은 숨기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아니, 헨델 사제에게도.

한숨을 토하듯 뱉어냈다.

“내 눈으로 금안을 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등의 화상 자국도 진짜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

“이 자리에 욕심이 없으시다고 하셨습니까? 허면 말씀해 주십시오. 들어야겠습니다.”

망했구나.

프리온에 와서 이반의 오해도 풀고 헨델 사제와 제드 경의 맹목적인 추종도 끊어내고 싶었는데.

“사제들은,”

내가 대답이 없자 이반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프리온 제국의 역사를 로긴 황제 다음 대부터 교육받습니다. 그러나 황실은 아니지요. 우리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구나.

황실 일원은 로긴에 대해 교육받고 알고 있었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거 아십니까? 로긴 아델르크는 평생 동안 한 여인만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다고 하지 않았나?

“잠결이면 늘 한 여인만을 애달프게 불렀다고 하죠. 릴리아나. 릴리아나. 하고 말입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를 통해 로긴을 바라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

그는… 아니, 오라버니는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했는데… 어째서…?

왜 나를… 어째서 내 이름을…?

“그대가 처음 자신을 릴리아나라고. 그렇게 소개했을 때, 그리고 금안을 확인하고 나서. 내가 무슨 상상을 했을지 알겠습니까? 이제 대답해 보십시오. 이 자리를 탐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내게 보이세요.”

내가 대답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어.

입술을 질근 깨물고 눈을 감았다.

“딜리아 공작부인. 나는 인내심이 좋지 않습니다.”

“…로긴 아델르크는… 그대들의 예상대로 날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맞습니다.”

눈을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예상한 대답을 들은 듯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천사는 아니었죠. 창조주께서는 첫 번째 피조물을 만들 때 인간을 창조했고, 날개를 주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신의 세계에 함께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그는 강대한 신성력을 지닐 수 있는 몸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이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신성력을 지닌 군주가 될 수 있었지요.”

“첫 번째 피조물…?”

이반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상의 황폐함을 보았고, 누구보다 기뻐하고, 땅을 사랑했던 만큼 슬퍼했습니다. 그에게 땅은 첫사랑 같은 것이었을까요…?”

나는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가 무엇보다 땅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땅으로 간 줄 알았어.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땅으로 가기를 청했고, 대가로 날개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기억도….

“창조주는 첫 피조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고 그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그 후 땅을 창조했고 두 번째 피조물로 세상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황제 이반과 헨델 사제가 모두 크게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폐하. 저는 제국의 데일 가문에 영애로 태어나 데일 가의 사람으로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금안과 화상 자국… 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신다고 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델르크’가 맞습니다. 로긴과 같은 ‘아델르크’지요.”

“아델르크….”

이반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사람의 육체를 타고 태어났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면 등의 화상은 어째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있습니다.”

“무엇이…?”

“날개가요. 제게는 있습니다, 폐하.”

이반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 같이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숨길 수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화상 자국이라고….”

헨델이 당황한 듯 되물어서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헨델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냥 평범한 공작부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냥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 주면 좋을 텐데.

고개를 돌려 이반을 바라보았다.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잘 알지는 못합니다, 폐하. 제가 아는 것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날개가 돋았고, 금안과 날개가 일라즈 님의 선물이었다는 것뿐. 큰 신성력을 필요로 할 때 날개가 돋습니다. 며칠 전 제국의 황자가 악신과 결탁해 계약을 맺었고, 숙주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를 제압하는 데에 신성력을 사용했고, 폐하께서도 느끼셨으리라 예상합니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었습니다. 나는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저는 애초에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폐하. 그것이 신의 세계에 함께 하기에 필요한 것이었을 테고,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폐하. 그런 엄청난 에너지를 지녔는데 언제 어떻게, 갑자기 마음을 변절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반의 옆에 서 있던 재상으로 보이는 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자를 바라보았다.

그자의 마음 안에 가득한 욕심과 욕망 또한 보았다.

그것은 붉은색을 띠고 넘실대는 기운으로 그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헛웃음을 뱉어내고 이반을 바라보았다.

“사람 보는 눈은 좀 없으신가 봅니다, 폐하. 저자는 재상으로서 덕목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이, 이보시오! 어디 감히 폐하 앞에서 그런!”

“재상!”

이반이 호통치며 재상을 노려보자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재상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자 이반이 짜증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재상이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며 겉옷 속에 손을 숨겨 단검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저자는 내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저자는 필시 욕심이 많아 황제도 잡아먹으려 할 자다.

물론 도로 잡아먹히겠지만.

재상이 내게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단검을 빼 들었다.

뒤에서 볼턴 경이 재상의 손목을 그러쥐고 단검을 빼앗았고, 내가 손을 뻗어 재상의 목을 그러쥐었다.

모든 일이 몇 초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알현실에 전에 없던 냉기가 감돌았다.

헨델 사제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고, 황제 이반 역시 놀란 나머지 황좌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재상을 똑바로 노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감히… 겁이 없구나.”

“커헉…!사, 살려…!”

“살려달라…? 내게 검을 들이밀고도 살길 바라느냐?”

“끄어억…!”

재상의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갛다가 파랗게 질려갔다.

“공작부인!”

이반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황실 경비대가 몰려 들어와 검을 빼 들었다.

“모두 물러서! 검 치우게!”

이반의 명에 경비대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곧 검을 집어넣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다시 재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이야기를 헛들었구나. 쯧. 이렇게 두려움이 없어서야.”

“너… 너, 너는…! 프, 프리온의… 이물….”

“이물질이다?”

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웃긴 말이다.

내가 이물질이라.

표정을 굳히고 그를 노려보았다.

“너희 모두 아델르크의 비호 아래 이만큼 명을 유지해 왔건만. 이물질이라?”

“노, 놓아라…! 끄으윽!”

“로긴이 아니었으면 너희는 벌써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알겠느냐? 너 같은 작자들 때문에 창조주께서는 세상을 피바다로 만드실 뻔하였다!”

저자 같은 자들 때문에 로긴이…!

나는 유일한 가족 같았던 오라버니를 영영 잃었는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전 신의 세계에 있었던 아델르크로서의 감정에 충실해지자 이성의 끈이 탁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라 모든 힘을 개방해 터트렸다.

등에서는 뜨거운 작열감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날개가 돋아났다.

재상이 충격받은 듯 커진 눈으로 내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것들!”

“부인! 진정… 진정하십시오!”

이반이 나를 말리려는 듯 손을 뻗고 외쳤다.

“끄으윽…!”

재상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 그를 경비대 쪽으로 던져 버렸다.

경비대의 갑옷에 부딪혀 주르륵 주저앉은 재상이 목을 손으로 붙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 목숨을 잃어버리는 나약한 인간들.

그러나 내 아버지, 일라즈 님은 늘 그들을 사랑하셨다.

어찌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들을 위해 제 첫아들을 희생시켰다.

우리는 언제까지 저들을 참고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용서하고 용서해야 할까.

가족을 잃은 나의 슬픔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끊임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혀 왔다.

슬픔에 무너져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너희로 인해 로긴을 잃었어…. 내 슬픔은 어찌해야 하지…?”

한동안 알현실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나는 눈물을 닦고서 고개를 돌려 이반을 바라보았다.

“폐하. 저자는 재상의 덕목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필시 등에 검을 꽂을 자이니 내치십시오.”

“…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법사들을 배척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악신과 손을 잡지 않은 무고한 자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공작령의 주민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들과 제국 간에 쌓인 모든 것들을 이 순간부터 무로 돌려주십시오. 앞으로 두 번 다시 후대로 내려가며 복수가 복수를 낳는 참극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뜻이기도 하니 따라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황좌에 욕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프리온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

이반은 눈을 내리깔고 온순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이반의 뺨을 한번 쓸어주며 미소 지었다.

“로긴의 아이를 본 것은… 매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폐하. 부디 강녕하십시오.”

이반이 커진 눈을 들어 나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뒤를 돌았다.

볼턴 경에게 의지하며 비틀거리는 동시에 날개는 사라져 없어졌고 그제야 등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부인…!”

볼턴 경이 나를 부축하며 외쳤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볼턴 경의 팔을 붙들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에, 에릭을 불….”

에릭을 불러줘요….

“부인!”

너무 큰 힘을 사용했다.

쉬어야만 해.

“하아….”

***

나는 방으로 돌아와 2시간 정도 침대에 누워 기력을 회복했다.

등의 작열감이 사라지고 고통도 없어지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그간의 행보를 보았을 때, 쓰러지지도 않았으니 이 정도면 내가 정말 건강해지긴 하였구나 하고 느낄 만한 시간이어서 얼떨떨했다.

황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씻고 나온 뒤, 편한 홈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빗었다.

황제는 내게 프리온의 외출 드레스와 홈드레스 각각 5벌씩 보내며 부디 받아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내가 제국에서 프리온의 드레스를 입을 만한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난 원래 유행에 민감하지도 유행을 선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몸단장하고 나서는 리제를 방으로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

나를 어지간히도 걱정했던지 리제는 내가 견딜 수 없는 타는 고통에 쓰러질 뻔한 것을 알고 자기 일처럼 몹시 속상해하며 눈물을 훔쳤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매번 저렇게 눈물을 흘려 대니 내가 다 민망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으로 나온 시원한 아이스 셔벗을 먹었다.

어린 시절 축제에 나가 부모님과 함께 먹었던 그 셔벗이었다.

시녀의 말로는 이것의 이름이 아이스 홍시라고 했다.

제국으로 수입해 먹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아이든에게 꼭 이야기해 봐야지.

차를 마시며 셔벗을 먹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내 물음에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릭입니다, 주군.”

아!

그가 명을 수행하고 왔구나!

셔벗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급히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에릭. 함께 왔나요?”

“예. 주군이 회복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아…! 꽤 오랜 시간 기다리셨겠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뒤를 돌아 리제에게 셔벗을 치우고 차를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리제가 일어나 티 테이블을 정리해 빠르게 방을 나섰다.

그 후, 에릭과 함께 따라 들어온 남자 두 명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어딘가 아이든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아이든이 서늘하게 생겼다면 이 두 명은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색하게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에게 나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저는 아이든 딜리아 공작 각하의 부인 릴리아나라고 합니다.”

그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릭이 데리고 올 때 내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꼬셔서 데리고 온 거지…?

“아, 아이든… 형님…?”

“형님의 부인 되시는…!”

그들은 빠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아젠트라고 합니다.”

“이런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뵈어 송구합니다. 샤밀이라고 합니다.”

성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딜리아 성을 버린 것일까?

오랜 세월 그들이 딜리아라는 성 없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표 내지 않고 싱긋 미소 지어 주며 티 테이블 의자를 권했다.

“아니에요. 저도 편한 옷차림인걸요. 앉으세요.”

둘이 의자에 앉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제가 티세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는 석 잔의 찻잔과 찻주전자가 올라갔다.

나는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례차례 절반 정도 차를 따랐다.

따뜻한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차가운 샤베트를 먹고 따뜻한 차를 마셔도 괜찮은 걸까 싶어 나는 입술만 적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희를 만나고자 하신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다, 부인?”

아젠트가 느릿한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실 동안 샤밀이 내게 물어왔다.

둘의 성향이 극명하게 갈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저도 허례허식 없이 솔직하고 과감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귀족의 허례허식이 몸에 맞지 않아서요.”

“귀족 자제가 아니십니까…?”

찻잔을 느릿하게 내려놓던 아젠트가 놀란 듯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찻잔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저는 데일 백작 가문의 여식입니다, 아젠트 님.”

“아아. 데일가셨습니까?”

“예. 제가 두 분을 뵙고자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작 각하 때문이에요.”

아젠트와 샤밀이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여 형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것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둘이 안도하는 표정을 보고 덧붙였다.

“물론 스펠른 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잃을 뻔하기는 하셨으나… 두 분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 무탈하게 돌아오셨답니다.”

“저, 저희가 형님 기도를… 어찌 아셨습니까?”

샤밀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혹여 모르셨습니까? 저는 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대답에 샤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젠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 녀석은 세간의 소문에 약합니다. 저는 프리온까지 닿은 부인의 소문을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신탁의 아이시라고요.”

아젠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샤밀은 놀란 듯 아젠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탁의 아이시라고요?!”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외치자 아젠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앉아, 샤밀.”

아젠트의 만류에 자리에 털썩 앉은 샤밀이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탁의 아이셨단 말입니까…?”

“예.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신께서는 두 분이 개인 기도실에 매일같이 찾아와 기도드리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셨어요.”

아젠트와 샤밀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이들이 아이든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 오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을 뵙고자 한 것은… 아이든의 상처 때문이에요. 그는 여전히 자신이 부모에게도 형제에게도 사랑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과거의 잔재가 그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답니다.”

아젠트와 샤밀이 급속도로 어두워진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든은 오랫동안 제국의 검으로서 또한 공작가의 주인으로서 살아왔지만, 누구에게도 곁을 쉽게 내어주지 못했어요. 그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둘의 주먹 쥔 손 위에 내 손을 각각 올려놓으며 따뜻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두 분께서 이렇게 형님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을 보고 아이든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분명 신께서도 그가 모든 오해를 풀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고 계실 겁니다. 제게 두 분을 보여주셨으니까요.”

둘은 자신들 손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바라보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젠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둘의 손 위에서 내 손을 거두어들이고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아버님께서는… 형님을 진심으로 아끼셨습니다.”

아젠트가 입을 열었다.

그의 기나긴 이야기는 이러했다.

전대 딜리아 공작은 아이든을 아끼고 사랑해서 그가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을 어엿한 공작으로서 성장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더욱 엄격하게 교육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늘 공포에 질려 있는 첫아들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고 한다.

자신의 방법이 옳다고 믿었고, 첫째 아들이 지금보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거라고.

그에 비하면 아젠트와 샤밀에게는 무엇을 해도 오냐오냐하며 사랑을 주셨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엄격함보다도 더욱 무서운 무관심이라는 걸.

둘은 언제나 아이든이 안타까우면서도 그를 부러워했다.

어머니는 아젠트와 샤밀을 사랑했지만, 마음의 병이 깊으셨다고 했다.

대외적으로 완벽하기만을 바랐던 아버님은 늘 부인에게도 완벽함만을 요구했고, 따뜻한 사랑을 준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마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편을 보고 어머님은 절망감을 느끼셨다.

첫아들이 남편에게 인정을 받으면 자신에게도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고 바란 어머님은 그렇게 아이든에게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그만큼 아젠트와 샤밀도 찬밥 신세가 되었다.

아이든만이 사랑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젠트와 샤밀도 정상적인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지 못한 가엾은 존재들이었다.

그릇된 사랑은 자식들을 절망과 어둠으로 더욱 밀어 넣었을 것이다.

부모는 각자의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식들의 상태를 완전히 인지하지 못했을 거고….

어머님은 결국 정신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이들의 말에 따르면 정신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애정을 담아 부른 이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든이었다고 했다.

내 사랑하는 아가. 가엾은 아이든.

하고.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아젠트와 샤밀의 심정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아픔이다.

아젠트와 샤밀은 그럼에도 자신들은 그나마 서로가 있어 괜찮았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천방지축으로 놀 수 있을 만큼 의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이든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이 없었을 것이고, 어느 사이 그들은 정신마저 망가져 무너져 가는 형님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전대 공작은 아이든의 정신이 망가지고 나서야 크게 후회했다.

그는 매일같이 방에서 홀로 아이든을 위해 눈물을 터트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그 후, 아이든이 자신의 배에 검을 꽂아 넣었고.

내가 꿈에서 보았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형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시기 전까지 매일같이 복도를 거닐면서 중얼거리셨어요. 나는 괴물이야. 나는 괴물이야.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슬픔에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처음 나를 밀어낸 것은 바로 그 트라우마 때문이었어.

스스로를 괴물이라 부르며 모든 걸 밀어내고 산 거야…?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혼자서…?

그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외로웠던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아이든에게로 달려가 그를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어머니는 늘 아이든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고 한다.

[너 때문에 불행해! 다 너 때문이야! 너를 낳아서 내가 이렇게 되었어! 너는 사랑할 자격도, 받을 자격도 없는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나는 샤밀의 말을 듣는 내내 당장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끔찍한 심경이었다.

“아아아…!”

손님을 앞에 두고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없어 입을 틀어막았어도 잇새로 울음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가치관도 자존감도 자의식도 그 어느 무엇 하나 제대로 올바르게 생성되지 않은 상태인 어린아이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에 도대체 그 마음은 어땠을까…?

그 아이는 결코 올바르게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나였어도, 나였어도 내 배에 검을 찔러넣고도 남았을 거야.

아아, 가엾은 아이든…!

“아버님과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를 찾아왔었습니다.”

샤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 분명 어머님은 정신이 멀쩡하셨어요. 마지막이라 직감적으로 인지하셨던 것인지 무엇인지… 가엾은 첫째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형님에게 부모가 주지 못한 사랑을 듬뿍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아버님은 저희에게 용서를 비셨습니다.”

아젠트는 슬픈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까지도 두 분은 계속해서 형님을 안타까워하고 걱정하셨어요. 어긋나고 그릇된 사랑이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쉽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아젠트가 고개를 들어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분명 두 분은 형님을 사랑하셨어요. 형님의 인생을 자신이 망쳤다는 생각에 견디기 힘들어하셨어요.”

“어머님이 잠깐 정신을 차리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셨습니다. 온몸이 칼에 베인 듯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하셨어요. 아마도 아버님은 그런 어머님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으셨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본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구나.

아들을 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제 아들을 망쳤다고 인정했다고 한들 이미 뱉어낸 말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든은 상처받았고, 이미 너무나 비틀린 거울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나로서는 도무지 눈곱만큼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만약 아버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고 아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더욱 큰 사랑을 주었다면….

어머니가 아우들이 아닌 아이든에게 직접 사과를 했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이든은 이렇게 살지 않았어도 되었을까…?

사람이란 참으로 연약한 존재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든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없어서 모든 것을 놓아버렸던 것처럼, 전대 공작 역시 죄책감과 슬픔을 견뎌내고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벌여놓은 수많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자신이.

무책임하고 비겁하지만, 이제와서 그것을 비겁하다 비난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젠트와 샤밀이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 아이든을 만나 주실 수는 없을까요? 부모는 몰라도… 동생분들께서 이렇게까지 형님을 아끼고 위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어요. 그 오해라도 풀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꼭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에게 이렇게 고개 숙이시면 안 됩니다!”

상체를 들고 아젠트와 샤밀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 무슨 심정으로 아이든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 역시 그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저를 진심으로 감싸 안아주었어요. 그로 인해 저는 이날까지 이렇게 숨 쉬며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게 아이든은 생명과도 같아요. 그를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꼭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아젠트와 샤밀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

리제가 짐마차에 황제가 선물한 드레스들과 가져온 짐을 싣는 동안 나는 당황한 낯빛으로 서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짐마차가 더 무거워지면 난감해지는데….

이반의 뒤로 늘어선 시종들이 하나같이 손에 크고 작은 상자들을 들고 있었다.

마침내 내 앞에 당도한 이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음?

내가 당황해서 손을 빤히 바라보자 이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프리온에서는 친분이 있는 사이에는 손을 마주 잡고 흔들어 인사해 호감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아아….

나는 손을 내밀어 이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반이 미소 지으며 내 손을 놔 주었다.

“부디 돌아가는 길 안녕하시기를 바랍니다.”

“예. 감사합니다, 폐하.”

이반은 뒤를 돌아 행렬을 보여주며 말했다.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폐하. 이미 의복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제발 도로 가져가 줄래…?

하루라도 빨리 아이든에게 돌아가고 싶은데 짐이 무거워 지체할 수는 없어….

이반이 싱긋 웃었다.

“그것은 그냥 선물이고. 이건 환송 선물이지요.”

나는 애써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폐하. 허나 이는 너무 많습니다. 짐마차가 무거워지면 길이 지체될 것이고 말도 힘들 겁니다.”

이반이 손가락을 튕기며 활짝 웃었다.

“그래서 제가 마차 선물도 준비했지요.”

“예에…?”

애써 유지해왔던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경악한 얼굴로 되묻자 이반이 내 왼편을 가리켰다.

잘 닦인 길을 통해 공작가 마차에 버금가게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가 저속으로 달그닥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사색이 되어 이반을 바라보았다.

“폐하. 대체 왜 제게 이렇게까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이반이 마차를 가리키던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의 의복은 공작부인께, 이번 마차와 보석들은 ‘아델르크’께 드리는 제 마음입니다. 건국 황제 로긴 아델르크 님의 자손으로서 드리는 제 '마지막’ 환송 선물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부디! 꼭! 받아 주십시오.”

알겠다.

그러니까 지금 다신 프리온에 발걸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구나?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 우려되어서?

“사실… 어제 아랫것들 앞에서 제가 좀… 너무 위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아델르크 님.”

이반이 가까이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렇게 제게 이것저것 선물하는 것도 누군가는 조공하듯 가져다 바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폐하? 저는 오해는 싫어서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귀빈께 드리는 제 마음이니 생각을 달리해 주십시오. 어차피 마지막 선물이지 않습니까?”

허.

나는 기막혀 웃으면서 이반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내가 부담스럽나 보구나.

하기사 안 그런 게 더 이상한 것이려나.

“예, 폐하. 그럼 선물은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내 인사에 시종들이 어느새 멈춰선 마차에 보석상자들을 가득히 실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황제에 대한 예를 취했다.

“부디 오래도록 강녕하셔서 꼭 선황으로 역사에 남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델르크 님.”

이반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까닥였다.

“일라즈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일라즈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서로 마지막 축복까지 마친 뒤에 나는 에릭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섰다.

리제는 짐을 싣고 난 후 먼저 마차에 올라 있었다.

나는 리제의 옆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제 부탁에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젠트와 샤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아이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프리온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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