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악신과 신성제국의 탄생
황태자의 모든 이야기가 끝마친 후, 집무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창밖에 스산한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투옥된 마법사들의 살아갈 터전과 일자리만 해결해 주고 나면 이젠 정말 내 할 일이 끝나는 걸까.
아… 그 전에 프리온의 황제도 만나야 하는구나.
아이든의 형제 건도 남아 있었어.
하고 생각하는 데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었다.
이런 건 좀 더 로맨틱하게 아이든과 단둘이서 맞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은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눈은 참 예뻤지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신의 딸’인 ‘아델르크’가 릴리아나다…?”
처음 입을 연 사람은 아이든이었다.
그의 물음에 몸을 돌려 아이든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든과 황태자 역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리안.”
나는 등 뒤로 커튼을 여며 창가를 가리고 난 후 다시 소파로 걸어가 아이든의 옆에 앉았다.
“창조주는 태초에 인류가 만들어지기 전에 단 두 사람을 먼저 창조했어요. 남자와 여자 각 한 명씩이었죠. 창조주는 그들에게 각각 하나씩 자신의 조각을 떼어 내 심장에 심어주었어요.”
아이든과 황태자는 별다른 대꾸나 질문 없이 내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그리고 각각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죠. 로긴 아델르크와 릴리아나 아델르크.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어요.”
실제로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그때에도 릴리아나라는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던 거 같다.
일라즈 님이 그 이름으로 나를 불러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으니까.
“창조주는 그들을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세계에 두고 그와 함께 생활하도록 했어요. 그리고 곧 창조주는 세상을 창조해내었고, 인류를 만들었어요. 그들에게 창조주의 조각을 심어주지는 않았지만, 창조주는 그들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사랑했어요. 모두 그의 손에서 빗어진 피조물이니까요.”
아이든과 황태자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나를 보고 말했다.
“로긴 아델르크. 그자가….”
“프리온을 건국한 황제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세상엔 악이 없었어요. 세상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행복했어요. 그들은 일라즈 님과 함께 늘 세상을 내려다보며 행복해했고, 흡족해했어요. 일라즈 님은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모든 걸 주고 싶어 하셨죠. 하지만 곧 세상은 변했어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것을 탐하여 칼을 겨누고 서로의 안식처에 불을 지르고 끊임없이 전쟁하여 목숨을 앗아갔던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참혹하고 잔인한 모습에 괴로워져 나는 두 눈을 감았다가 뜨고 기억을 머리에서 흩어버렸다.
“사람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했고, 커진 욕심을 먹고 어둠이 생겼어요. 어둠은 더욱 그 크기를 불렸고, 거기에서 악신이 탄생했어요. 세상에 ‘악’이 생겨나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세상에 ‘악’이 팽배해졌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질투하고, 죽였어요. 그들은 서로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는데도요. 일라즈 님은 슬퍼하셨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어요.”
“어째서? 그는 신이지 않은가?”
황태자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신이기 때문이에요, 전하.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녔고, 그걸 준 것이 바로 신이었어요. 창조주는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간섭할 수 없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세상에 어둠이 가득해졌을 때, 로긴 아델르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물로 신에게 호소했어요. 세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돕고 싶습니다. 창조주는 이것을 허락했고, 로긴은 사람의 배를 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세상으로 내려갔어요.”
“그것이 프리온의 건국 황제였군.”
아이든의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프리온이 생긴 후에 전쟁이 줄어들고 많은 국가가 생기고 전보다 많은 평화가 찾아왔지.”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 처음으로 생긴 국가가 프리온이었고 그 후로 수많은 국가가 생겨났고 국가 간에 평화협상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고 지도자의 밑에서 전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대가 ‘그 아델르크’라면 어째서 사람의 배를 타고 태어난 거지? 로긴과는 다르잖아.”
“애초에 왜 태어나야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창조주는 오랜 세월 동안 프리온과 제국이 전쟁을 치른 것을 지켜봤어요. 건국 황제 때와는 다르게 그 후대의 후대로 점점 내려갈수록 피는 세상 사람과 섞였고, 황제들은 신의 음성을 더 자주 들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들은 자기 좋은 대로 판단하고 프리온을 통치했고 사람의 욕심을 내세웠어요. 어쩌면 마법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 역시 프리온 황제의 욕심 때문에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죠.”
아니. 아마도 분명 그럴 것이다.
애석하게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니까.
“마법사와 프리온이 대적해 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라즈 님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슬퍼하셨어요.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첫아들은 세상에 내려가 사람과 함께 살다가 세상 사람들과 점점 같아져 생명이 줄어들어 죽어버렸고. 물론 그 영혼은 일라즈 님과 함께 하게 되었지만, 이전과는 같을 수 없었어요. 로긴이 신의 세계에 있었던 기억을 모두 잃었거든요. 릴리아나 아델르크는 그걸 모두 지켜보면서 괴로워했어요.”
나는 그 감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손을 들어 가슴 언저리를 꾹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의 잔상이 너무 뚜렷해 마치 내가 그 일을 겪은 듯 괴로워졌다.
“그녀는 결국 창조주에게 당신의 뜻하는 대로 행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알고 있었거든요. 창조주가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아마 조금만 더 지났더라면 창조주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모두 쓸어 버렸을 거예요.”
[때가 되면 너를 위해 마련한 태를 타고 태어날 것이고 이곳에서의 기억을 잃을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그토록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 속에 내가 비춰 보였다.
“나는 때를 기다려 신의 세계에서 입었던 육신을 버리고 이 땅에 다시 태어났어요. 그 과정에서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었고,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았죠. 그저 한 가정의 평범한 영애로서, 그렇게요. 만약 아까 황자님의 몸을 장악한 악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여전히 그 기억을 잃은 채로 살았을 거예요. 풀지 못한 의문을 가슴에 끌어안고 신을 이해할 수 없었겠죠. 내 삶이 너무 엉망진창이 되었잖아요.”
말을 모두 마치고 나니 아이든이 내 두 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말없이 탁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부인에게 아까 돋았던 그 날개는….”
아. 그 날개.
그래 돌이켜 보았더니 그 날개는 원래 내가 가졌던 날개가 맞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세계에서 가졌던 육신엔 날개가 있었던 것이 맞아요.”
“그렇다면 프리온 건국 당시 황제에게 날개가 있었단 이야기가 없는 건 어떻게 된 거지?”
“저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땅으로 내려가고 난 후 날개가 타서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라도 다시 신의 세계로 돌아올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그가 원했다고 하더라도요. 제게 이렇게 날개가 돋아난 이유는 저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원인을 모르겠거든요.”
“이거 정말… 이야기가 스펙터클 하구만.”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나는 마침내 긴긴 이야기 끝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곳에 태어난 목적을 다 이루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공허하다.
내 존재의 가치는 오직 그것뿐이었던 걸까?
“받아들이기가 몹시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황태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 역시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져 왔다.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까 실성한 것처럼 웃어서 미안해.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어. 아까 내가 본 장면들 전부 다 말이야.”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하. 그보다 더한 반응이 나왔어도 그러려니 했을 거예요.”
황태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대는 그냥 릴리아나일 뿐이잖아.”
“!”
나는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런 과거를 지녔다고 해서 지금 그대가 릴리아나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 물론 이게 같은 이름이라 전혀 그런 느낌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대는 그냥 아이든 딜리아를 사람처럼 살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고, 내가 아는 릴리아나일 뿐이라고.”
황태자가… 옳은 말을 할 때가 다 있네.
오늘은 좀… 사람이 괜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뭐. 그대 표정이 딱 목적을 다 이루었으니 삶을 다 포기하고 곧 죽어버릴 표정이었다고. 이상한 생각은 안 했으면 해서 한 말이야.”
내 오묘한 표정을 읽은 것인지 황태자가 머쓱해 하며 말했다.
그리고 아이든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릴리아나.”
아이든이 엄마 잃은 강아지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존재의 가치가 없다니.
나는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이제 그저 아이든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면 되겠군.”
일라즈 님께서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죽을힘을 다해 행복해지라고.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태자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든을 사람답게 살게 해주었고, 아이든은 나를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매 순간 서로에게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내 물음에 아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쁜 생각을 할까 봐. 그대가, 나를… 나를 두고….”
흔들리는 눈빛 속에 어린아이가 있다.
그의 시간은 마치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던 어린 시절에서 멈추어 버린 것만 같다.
늘 내가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에 떠는 그가 못내 시리고 아프다.
마치 태에서부터 함께였다가 태어나 서로의 아픔을 가장 기민하게 알아채는 쌍둥이처럼.
그와 나는 무언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심장이 아려 와서 쓰게 웃었다.
“아이든. 저를 두고 당신이 먼저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하셨던 것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염려 마세요.”
아이든이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께서는 저를… 정말 있는 그대로 봐주시는군요.”
미소 지으며 말하자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른 가슴에 손을 얹고 황태자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하. 제 바보 같은 생각을 일깨워 주셨어요.”
“크흠흠. 뭐,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생색은 내지 않을게.”
주먹 쥔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풉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께서는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좋은 지도자가 되실 겁니다.”
황태자가 놀라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황태자가 새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뭐. 그대 덕에 오늘 황제의 자리에 한층 더 다가간 것 같기도 하고.”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바라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2황자를 더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 물론 그마저 오늘 망한 것 같지만.”
아. 그랬었나?
그 공공연한 비밀을 난 왜 몰랐지….
“2황자가 악신과 계약한 것 때문인가요?”
“아바마마는 마법사들을 정말로 싫어했어.”
“일라즈신에 대한 충성도가 어마 무시했었지.”
“신앙심이라고 해주겠나?”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이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제게….”
“뭐. 그렇지. 그러려니 해 두라고. 황제를 발아래 둘 수 있는데 좋지 않아?”
“그럴 리가요. 전 그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전하.”
“그대는 참 욕심이 없어.”
나는 조금 전 아이든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2황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황태자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배다른 형제를 정말로 아끼고 있었던 걸까?
“유폐될 거야. 2황자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벌써 황명이 떨어졌으니 시간문제야.”
미안함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악신에게 잠식당해 본래의 자아를 잃게 되었을 거예요.”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가 왜 죄송하지?”
“네? 그, 그게… 전하께서 슬퍼하시는 것 같아서….”
황태자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하나도 안 슬픈데? 경쟁자를 치웠으니 얼마나 통쾌해? 이제 아바마마 앞에서 행여나 더 눈 밖에 날까 노심초사하며 눈치 볼 일도 없잖아? 후계라곤 나 하나뿐인데 당신이 뭘 어쩌겠어?”
“…아하하… 그, 그렇군요….”
미안했던 마음 취소.
한순간이나마 그를 배다른 형제이자 경쟁자마저 챙기는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도 취소.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황실이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나저나 마법사들은 언제 사면해 줄지 데려가면 뭘 어떻게 정착시킬 생각인지 회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황태자의 말에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차차 상의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보고 싶은데. 부인 몸이 약한 편이라서 말야.”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나도 되겠지? 봐야 할 국정 업무가 좀 밀려 있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 무릎 굽혀 인사했다.
“예, 전하. 살펴 가십시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뜨자 아이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 내밀었다.
“우리도 그만 갈까?”
“네. 그래요, 아이든.”
아이든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
저택에 돌아온 뒤에는, 아이든이 마법사들의 거취 문제와 밀린 일상 업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내가 벌여놓은 일에 아이든이 수습을 하고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끼니때마다 식사를 들고 직접 찾아가 챙기고 오곤 했다.
이틀 뒤에는 아슬란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기쁜 마음에 머리를 묶는 것도 잊고 엉덩이까지 오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한달음에 아이든에게 달려가 편지를 보여주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군.”
아이든의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뾰로통해진 얼굴로 편지를 건네받았다.
“아슬란이 아카데미에서 늘 수석이라는데 할 말이 그게 끝이에요?”
아이든은 서류에 도장을 찍고, 손을 계속 움직이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나도 어릴 적에 단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어.”
“아이든!”
소리를 꽥 지르자 아이든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옆쪽에서 우당탕탕 거리며 칼이 ‘아,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하고 연신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아이든을 강렬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단 한 번도 칭찬 따위 받아본 적 없이 자란 게 그렇게도 좋으셨어요? 진심으로? 그래서 똑같이 이렇게 무심하신 거예요?”
아이든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손에 들린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지를 다시 아이든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답장은 아이든이 쓰도록 하세요. 그리고 꼭 겨울방학이 되거든 집에 좀 오라고 하시고요. 꼭이요!”
“…아슬란이 보고 싶은가?”
“당연하잖아요!”
하고 소리치며 책상에 손바닥을 쾅 내리치자 아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손에서 펜을 놓치고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래. 꼭 그렇게 적도록 하… 지….”
“좋아요.”
책상에서 손을 떼고 떨어진 펜을 집어 그의 손에 들려주곤 빙긋 웃었다.
“수고하세요, 각하.”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아이든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좀 웃기기도 해서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뒤를 돌아 나가는 길에 칼과 눈이 마주쳐 찡긋 윙크를 날려주자 칼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쉬십시오, 부인.”
칼의 인사를 끝으로 집무실을 나와 침실로 돌아가며 콧노래를 부르자 뒤를 따르던 에릭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슬란이 돌아올 예정이에요. 곧 겨울방학이거든요.”
“키가 많이 자라 있으시겠습니다. 그맘때 남자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죠.”
“그런가요?”
키가 훌쩍 자란 아슬란을 상상해 보았다.
역시 상상이 잘 안 돼.
“아슬란은 아직 제겐 아기 같은걸요.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기 어려울 것 같아요.”
“아기… 는 아니지 않습니까?”
에릭의 표정이 오묘하게 이상해져서 웃음을 터트렸다.
“어미 눈엔 자식이 팔십을 먹어도 아기 같아 보인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그런 말이 있습니까?”
“물론 내가 지어낸 말이지.”
침실 앞에 도착해서 풋 웃으며 말하곤 문을 열었다.
“그치만 분명 에릭의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도 아기 같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을 거예요. 그럼 오늘도 경비 잘 부탁해요.”
“…예.”
에릭이 커다래진 눈으로 복도 바닥을 바라보며 뒤늦은 대답을 했다.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창가 옆 가구 위에 올려진 탁상 달력을 바라보고 티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흘 뒤면 프리온으로 떠나야 하는데.
아슬란의 방학이 그로부터 5일 후니 그 전엔 돌아와야 할 텐데.
가능하겠지…?
***
다음 날, 오전에 재정 업무를 끝낸 후에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칼튼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에요, 칼튼?”
“황제 폐하께서 주인님을 제국의 성녀로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주인님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 들진 않을지….”
“집사.”
아이든의 부름에 칼튼이 그를 향해 목례했다.
“말씀하십시오.”
“듣는 귀가 많아. 입은 조심하는 게 좋겠군.”
“아. 송구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이든과 눈이 마주쳐 어깨를 으쓱해 주었다.
황제가 만약 그런 행보를 보인다면 그건 이용하려 드는 게 아니라 정말 너무나 나를 추켜세우고 싶어서겠지.
이러나저러나 나는 다 싫긴 하지만.
내가 만약 그에 대응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황명을 어긴 것이 될까?
아이든은 냅킨을 들어 입 주변을 정리하고 식탁 위에 냅킨을 내려놓았다.
“부인은 그 어떤 정치적인 행보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제국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지도 않을 거야. 제국민들의 동태는 어떻지?”
칼튼이 외알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모두들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공작부인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하층부터 상류층까지 모두가 말입니다.”
“그건 황명이 떨어지기 전에도 그랬어. 다들 제 이익을 위해 한 번이라도 공작저 땅을 밟아보고 싶어 했지. 오늘 이후로도 마찬가지야. 누구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거야, 집사. 뭣하면 내가 몹시 못마땅해하고 있노라고 전하면 돼.”
“예. 알겠습니다, 각하.”
아이든은 나를 바라보고 싱긋 미소 지었다.
“오늘은 산책이나 좀 할까, 부인?”
나 역시 냅킨으로 입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아이든과 함께 실내 정원으로 갔다.
그와 손을 맞잡고 걷는데 아이든이 정원의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 나에게 내밀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이든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대에게 꽃을 건넨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아….”
얼떨결에 그에게서 장미 한 송이를 건네받았다.
코에 꽃잎을 가져다 대고 향을 맡자 싱그러우면서도 묵직한 장미향이 온몸을 휘어 감았다.
“고마워요, 아이든.”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아이든이 내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다.
“별말씀을. 고개 들어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다정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장미꽃을 빼앗아 들더니 가시를 다 부러뜨리고 줄기를 짧게 꺾어 내 머리에 꽂아 주었다.
“누가 꽃인지 모르겠네.”
“앗. 그런….”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부끄러워진 마음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점점 능청스러워지시는데요.”
아이든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
그리곤 손가락으로 내 턱을 잡아 들어 올리고 짧게 입 맞추었다.
“당신에겐 이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겠는걸.”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요.”
“아… 이런.”
아이든이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티가 났나…?”
내가 풋 웃음을 터트리자 아이든이 곁눈질로 날 보더니 덩달아 예쁘게 미소 지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좋네.”
아이든이 계속해서 나와 속도를 맞추어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요 몇일 그대 낯빛이 너무 어두워서. 걱정거리가 있으면 내게도 좀 기대, 리안. 우린 부부잖아.”
“아….”
나는 고개를 숙여 나와 맞잡은 아이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보다 두 배는 더 큼직하고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 있는 아이든의 손이 왠지 모르게 따스하고 든든해져서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가 언제나 내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이 봄날의 꽃밭처럼 마음에 달큰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럴게요, 아이든.”
아이든이 내 손을 더욱 꼭 잡아주어서 고개를 들었더니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 지어 준 뒤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대가 워낙 말도 안 되게 강해서 내가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이든은 존재만으로도 제게 큰 위안이 되는걸요.”
“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든이 뭘 해도 좋지만, 그냥 제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너무 든든해서…!”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다가 아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어….”
그리고 그의 표정을 확인하자마자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놀리신 거군요.”
그가 큭큭대고 웃으며 걸음을 멈추어 서서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곤 내 머리를 흩트려 놓으며 귀여워 죽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머리 망가져요!”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며 투덜거리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묶지도 않은 머리잖아.”
“하지만 빗었단 말이에요!”
아이든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대 기분이 풀렸으면 해서 그랬어.”
칫. 하고 혀를 차고는 아이든을 힐끗거렸다.
“그나저나… 마법사들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머리를 다시 한 손으로 정리하면서 묻자 아이든이 신중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아직 논의 중이야.”
“마법사들은 아직 감옥에 있는 거죠?”
“그렇지.”
“일단 거처를 먼저 마련해 주고 나서 대책회의를 하면 어때요? 그리고 사실 그들의 재능을 살리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각자에게 맞는 일을 찾아주고 일정만큼의 세금을 공작령에 내도록 하면 되잖아요.”
“일일이 그들에게 맞는 것만 찾아 줄 수는 없어, 리안.”
“물론 그렇지만….”
“그보다 릴리아나. 프리온에 내가 동행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네?”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난색을 보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빅엿을 주리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말이지….”
무슨 말이지?
“일을 처리하는 대로 뒤늦게라도 따라갈 수 있으면 갈게. 지금 황실 분위기가 좀 이상해. 이러다가 황위가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아.”
“네에? 아니 왜요?! 황제 폐하께서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
“쉿. 목소리가 너무 커.”
합.
“황자가 그때 악신과 계약한 걸 알게 되고 나서 황후 마마는 몸져누우셨고, 폐하께선… 카이의 말에 따르면 좀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더군.”
“네? 왜요? 나 때문이야?”
“아니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보단 믿었던 아들에게 발등 찍힌 게 더 클 거야. 카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황태자 자리가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황실 내에선 공공연하게 돌았거든. 전쟁에 큰아들을 내몰고 작은아들은 황실에서 어화둥둥 하며 황위를 물려 줄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거지.”
세상에…!
어떻게 그런…!
“그러다 큰아들이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길 바랐을지 누가 알겠어? 사실 누구보다 다음 대 황위에 어울리는 사람은 카이였지. 대신들의 추천이 컸고 카이의 외가가 힘이 컸어. 그런데 어쨌든 황후의 자식이 황자라서… 말하자면 카이는 서자인 셈이지.”
그런…! 전혀 몰랐어!
“카이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아무 여자나 가볍게 데이트만 하고 다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아무 여자나 황태자비로 맞아들여서 황실의 외가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해.”
그랬구나….
난 한없이 깃털 같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
“황자는 예정된 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악신과 계약했던 걸까요?”
아이든은 티 테이블 근처에 다다르자 의자를 빼 주었다.
“앉아.”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설렁줄을 잡아당긴 아이든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아마도 자신보다 뭐든 잘난 형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황제가 보위를 물려준다고 약속했다 해도 그건 말뿐인 약속이야, 리안.”
“아아….”
하지만 말만 들어봐도 온갖 사랑을 전부 독차지했을 것 같은데….
“황태자 전하는 황실에 있는 게 가시방석이셨겠어요.”
“그러니 맨날 나돌아다녔지. 별거 아닌 일로 저택에도 찾아오고.”
아.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짠해진다….
“그럼 지금 황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데요?”
“칼에 의하면 곧 대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더군.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건데, 사실 있으나 마나 한 거야. 지금 황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카이 밖에 없으니까.”
“그럼 승계 업무로 더욱 바빠지시겠네요.”
“대관식도 그렇고 아마 그렇겠지. 뒤늦게도 못 갈 수도 있고… 대신 울프 하운드를 데려가.”
“네?! 그들 전부를요? 너무 많아요, 아이든! 누가 보면 전쟁 나가는 줄 알겠어요!”
아이든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고 혀를 찼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휴와 노아도 데려갈게요. 그리고 볼턴 경도 윈터 경도 데려갈 거잖아요. 걱정 마세요.”
아이든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마법사 문제도 그렇고 복잡한 일들이 얽히는구나….
“대관식이 끝나고 나면 빠르게 안정화 될 거야. 그 녀석 그래 보여도 일은 잘해.”
“아이든. 이제 황제가 되실 분인데 그 녀석은 좀….”
“우리끼리인데 뭐 어때.”
“그래도….”
“각하, 사용인이 왔습니다.”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릭이 다시 정원을 나가고 곧이어 사용인 한 명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여기 에프터눈 티 준비해 줘.”
사용인이 짧게 대답하고 정원을 나가고 아이든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프리온에 갈 때, 헨델 사제가 동행할 거야, 리안.”
“그녀가 아직도 황실에 남아 있었어요?”
“애초에 그대와 함께 갈 생각이었던 거 같아.”
아….
나는 마지막으로 헨델 사제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잔뜩 화를 내고 돌아섰었는데.
프리온에 갈 땐 무슨 얼굴로 그녀를 대면해야 하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녀에게 화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분명 화가 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헨델 사제는 잘 지내고 있나요?”
“뭐. 그럭저럭.”
“마지막으로 본 날에 제가 화를 심하게 냈거든요.”
아이든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려다가 멈칫하고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무슨 일로?”
“알다시피 아이든이 스펠른에 가 있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녀가 벌인 일이라서요. 전 정말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고요. 화가 너무 많이 나서 그만… 화해는 해야겠죠?”
“왜?”
“네?”
내가 당황해서 되묻자 아이든이 짜증 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릴리아나. 헨델 사제 혼자서 벌인 일이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제드 로즈보르. 프리온 황실 제2기사단장. 그자가 그대의 정체를 알고 있어. 아니, 그 이상이지. 아주 집착이 가득한 추종이더군. 남의 여잘 그런 식으로….”
아이든은 무언가 떠올린 것인지 으득 이를 갈았다.
나는 제드 로즈보르라는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자와 헨델 사제가 함께 모의한 모양이군. 그래서? 사과를 받아냈어?”
“어찌할 줄 모르고 벌을 내려 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벌을 내린다 한들 과거가 다시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 기분이 편해질지도 확신할 수 없고요. 그저 이미 일을 벌였으니 당신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 돌아와야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죠.”
아이든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리안. 전쟁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건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아이든의 손이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냥… 화가 너무 많이 나 있는 상태였고 그녀를 어떻게든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었나 봐요.”
눈을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언제부터였는지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리안.”
“네?”
아이든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그러쥔 채 들어 올려 손등에 입 맞추었다.
그의 따스한 눈빛처럼 손등에 내려앉은 입술의 감촉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나 역시 그에게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사랑해.”
“알고 있어요.”
내 대답에 아이든이 순식간에 풀 죽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내렸다.
“설마 그게 끝이야?”
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요. 그럴리가요.”
나 역시 그의 손을 반대로 그러쥐고 끌어당겨 손등에 입 맞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매달렸던 거 잊었어요?”
아이든이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려갔던 눈꼬리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랬었지.”
그의 손등을 내 뺨에 가져다 대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봄날에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처럼, 여름날의 태양처럼요. 언제나 그럴 거예요, 아이든.”
그가 다시 태양처럼 빛나는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그러니 그런 자에게 질투할 필요는 없어요.”
여보.
하고 덧붙이자 아이든이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 방금 뭐라고….”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여보.”
아이든의 얼굴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우스워서 나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