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마침내 대면한 진실
마차를 끄는 말의 발굽에서 들리는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마차 문이 열렸다.
아이든이 먼저 내려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려서자 아이든이 마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전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는 거예요?”
“알현실로 갈 거야, 리안. 귀족이 황제를 만나는 곳은 그곳뿐이야.”
그렇구나.
아이든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법사를 어쩔 생각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든과 눈을 맞추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죽여야지.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그렇지. 그건 아이든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어요.”
“이제 정리해야 해.”
“…아이든. 마법사들이 갇힌 곳에 가보고 싶어요.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폐하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아이든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서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걸 왜 허락을 받아?”
“네?”
당황해서 되물었는데 아이든이 아예 몸을 틀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아, 아니 그래도 황실 감옥인데 그런…!”
“따라와.”
아이든에게 끌려가면서 고개를 돌려 알현실 쪽 건물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우리를 마냥 기다리고만 계실 텐데 이래도 되는 거 맞을까요?!”
다급하게 외치자 아이든이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난 한 번도 황제 말에 곧이곧대로 들은 적이 별로 없어. 이젠 그러려니 할걸?”
맙소사.
제국에서 안 쫓겨난 게 기적 아닌가 이 정도면…?
나를 끌고 간 아이든이 어느 건물 앞에 멈추어 서서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둘이서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아이든이 경비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고 거수경례를 했다.
아이든이 다시 돌아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갈까?”
“그냥 열어준대요?”
“응. 당연하지.”
“왜? 여긴 황실이고 난 황족이 아닌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아이든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가 딜리아니까.”
당당한 대답 앞에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졌다.
아이든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가자, 리안. 언제까지 바보 같은 표정 짓고 있을 거야.”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지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생각해보면 아이든 가문은 대대로 제국을 수호하고 황실을 수호한 가문이었다.
그 이름에는 그만큼 수많은 권력과 권리가 주어졌을 것이다.
황실 기사들마저 쉽게 어찌할 수 없는.
어찌 보면 당연한 걸까?
황제조차 아이든을 어찌하지 못하는 걸.
만약 아이든이 황제의 명을 받고 왔다고 거짓말만 능숙하게 한번 치면 그걸 거부할 수 있는 기사가 몇이나 될 수 있을까?
그러니 더더욱 황제가 아이든에게 무엇이든 더 주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일 테다.
절대 등지고 싶지 않은 자.
아이든은 그런 존재였다.
이 사람이 황좌에 무관심한 것이 황제로서는 무척이나 다행인 일인지도 몰랐다.
그를 따라 육중한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가득한 게 마치 저 땅속에 있는 지옥으로 이어졌을 것만 같았다.
아이든이 벽에서 횃불을 하나 꺼내 들고 낮게 말했다.
“내 손 놓지 마.”
“네.”
별것도 아닌데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두운 내부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아이든의 이끌림에 따라 계단을 천천히 한발씩 내딛었다.
계단을 다 내려서고 나자 길게 이어진 복도가 나왔다.
복도 왼편으로는 10평 남짓해 보이는 감옥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오른편 벽에는 적당한 빛을 뿜어내는 등이 감옥이 있는 곳마다 거리를 두고 달려있어 길을 알아보고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복도가 시작되는 곳 벽에 횃불을 꽂아 놓을 수 있는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아이든이 횃불을 그곳에 꽂아 넣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아이든을 따라 걸으면서 줄지어 이어진 감옥을 바라보았다.
벽 등은 복도뿐만 아니라 감옥 안에도 달려 있었다.
복도는 감옥과의 거리가 꽤 넓은 편이어서 벽에서 멀어지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시 감옥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감옥 안의 벽 등으로 인해 빛이 모여들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될 정도는 아니었다.
감옥 안에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들어가 앉아 있었다.
저러면 모두가 누워 잘 공간이나 날 수 있으려나 싶었다.
그래도 밤엔 잠을 자야 할 텐데.
“이들이 다 마법사는 아니죠?”
작게 속삭이자 아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더 가보자.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범법자들이야.”
범법자들이라는 말에 아이든에게 바짝 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의 음습한 기운 때문인지 죄수들의 표정이 더욱 음산하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바짝 긴장이 들어갔다.
감옥 문 세 개 정도를 더 지나고 나서 아이든이 멈추어 섰다.
나 역시 멈추어 서서 감옥 안을 바라보았다.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두 발자국 더 감옥에 가까이 다가갔다.
“마법사들인가요?”
내 목소리에 그들이 퍼뜩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표라고 할 만한 자가 있나요?”
내 질문에 그들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참. 내 소개를 해야지. 이자벨 황녀님께서 내 어머니의 외고조할머님이셨습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법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다른 감옥에 갇혀 있던 마법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내밀고 나를 보려고 혈안이 되었다.
“다, 당신이…!”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남자가 벌떡 일어서 내게로 다가오려다가 말을 다 잊지 못하고 주저앉아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젊은 사람들이 그 남자를 감싸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병환이 있는 자인가…?
나는 침착하게 그의 기침이 멎기를 기다리다가 말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것. 내가 신탁의 아이가 맞아요.”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비참하게 살았다는 원망의 말들이 들려오기도 했다.
저런 말은 억울하긴 했지만,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누군가에 의해 불행하다고 느꼈던 삶을 살아왔었으니까.
어찌 무조건적으로 억울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들의 원성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
“우리는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기침했던 사내가 다소 차갑게 대답했다.
“프리온의 황제가 당신들의 목숨을 내게 맡겼어요. 알고 있나요?”
마법사들이 곳곳에서 몸을 움찔 떨었다.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당신에게 말이오…?”
처음 듣는 일인 듯 마법사들이 크게 동요하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니 내 질문에 성의껏 대답해 주어야 할 텐데요.”
“협박을 하는 게요?”
기침했던 나이 든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들리셨나요?”
“뭐라고…?”
나는 감옥에 수감되어 꼴이 말이 아닌 이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며칠은 씻지 못한 듯 모두 다 지저분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어째서 악신 따위와 계약을 했습니까?”
내 질문에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와 감옥 철장을 붙들고 악을 쓰며 외쳤다.
“네년이 뭘 알아! 우리는 그저 스스로를 지키고 싶…!”
여자는 말을 하다 말고 코앞에서 내 얼굴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여자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정면에서 여자를 빤히 바라보며 손을 뻗어 철장을 잡았다.
마지막 두 걸음마저 앞으로 나아가 철장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그들이 손을 뻗어 나를 잡는다면 언제든지 내 옷깃에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내가 완전히 철장 앞으로 나와 멈추어 서자 모두들 숨을 들이키며 굳어져 버렸다.
감옥 내부에 달린 등의 빛이 내 얼굴 위로 환하게 내려섰다.
이제 그들의 눈에 내 얼굴이 완연하게 보일 테지.
내 눈도.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야. 프리온은 어째서 마법사들을 탄압했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 다… 당신은…!”
나이 든 남자가 일어서 내게로 가까이 걸어왔다.
손을 뻗어 내 눈을 만지려는데 아이든이 순식간에 뒤에서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그 손 치워.”
아이든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짓씹어 말하자 흠칫한 남자가 손을 거두어 갔다.
“아이든. 고마워요. 난 괜찮아요.”
“위험하다, 리안. 저들은…!”
“알고 있어요.”
아이든이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어요. 정말로. 나를 좀만 믿어줘요.”
“그대를 믿어. 저들을 믿지 못하는 거야.”
나는 아이든의 손을 잡아내려 짧게 입 맞추고 미소 지어 주었다.
“잠시면 돼요.”
“…하.”
아이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뱉어내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나는 다시 마법사들과 사내를 바라보았다.
나이든 사내가 떨리는 손을 맞잡고 나를 두려움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신의 아이로군요.”
“내가 신탁의 아이가 맞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런 의미 따위가 아닙니다! 그 금안! 나는 그 눈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눈!”
금안?
“이건 그저….”
“나는 어릴 적 신화 책에서 그 눈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엔 그저 단순히 동화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당신을 보니 그것이 실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남자가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된다는 건가?
“신의 자녀 말입니다! 신의 대리자 역할을 했던 그자! 프리온의 시초가 된 그 자가 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리온의 시초!
프리온 건국 황제가 금안이었던가? 나는 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공작저 도서관에서 찾아본 수많은 책에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지칭하고 프리온을 건국한 초대 황제. 로긴 아델르크. 그는 한 번도 역사서에 기록된 적이 없어.”
아이든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가 본 역사서에 초대 황제는!”
“그는 초대 황제가 아니야, 리안. 그의 아들이지.”
“!”
“프리온 사람이라고 다 신성력을 지닌 건 아니야. 일부 신성력을 지닌 자들이 지배 세력을 이루었고 그게 프리온의 귀족이 되었어. 어찌 보면 그 귀족들은 전부 다 서자로서 아델르크의 후손인 셈이지.”
“로긴 아델르크의 후손이라고요?”
“그래. 그는 여자관계가 복잡한 인물이었어, 리안.”
말도 안 돼….
“그런데 역사서에 기록된 적이 없는 인물을 아이든은 어째서 알고 계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내게 금안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었다고도 했었잖아요!”
내 눈을 보고 아이든이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내게 역사를 가르쳤던 스승이 해준 이야기였어. 그리고 그는 태어난 게 아니야.”
“신화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그는 사람의 몸을 통해 태어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이든의 말을 받아 말하는 노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기억을 되짚듯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금안의 사내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칭했고, 그걸 믿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신의 대리자라고 불렀습니다.”
신의 대리자.
프리온 황족들은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 시작이 로긴이었구나…!
“그럼 로긴의 아들부터 금안이 태어나지 않은 것이군요. 금안은 오로지 로긴 뿐이었어. 그렇죠?”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대로 금안으로 태어난 자는 한 명도 없었어, 리안. 물론 프리온의 황실 후손 중 청안으로 태어난 자도 없었지만.”
청안? 설마 나…?
“하지만 나는 프리온 사람이라고 하기엔… 이자벨 황녀님께서는 제국인과 결혼하셨고….”
“맞아. 그런데 그대 부모 중 누구도 흑발이 없었듯이 누구도 청안이 아니었어.”
“!”
자,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누구라도 아마 그대가 입양아가 아닐까 한 번쯤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나는 당황한 얼굴로 아이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내 눈을 매만졌다.
불현듯 지난 과거에 있었던 기억의 단편이 스쳐 지나갔다.
사교계에 나갔을 때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나를 보며 여기저기서 수근 댔던 말들이 있었다.
[부모의 누구도 닮지 않았다던데. 정말 데일가의 핏줄이 맞기는 한 건지.]
[어디서 빌어먹다 왔을지 모를 일이지 않겠어요?]
[언행을 조심하게. 저런 미모가 길바닥에서 났을 것 같은가?]
참 할 일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말이었는데.
질투심에 눈이 멀어 한 말일 것이라 여겼었는데…?
어머니의 눈 색이 무엇이었더라?
아버지의 눈 색은?
내가 왜 그걸 한 번도 생각해보거나 의심해보지 못했지?
내 기억 속에 어머니 아버지는 왜…?
“! 아니야. 아니에요! 분명… 분명 어머니께서…!”
“릴리아나. 그대 어머니는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계셨어.”
“아냐!”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눈동자 색은 분명 청안이었어, 나와 똑같은 청안!
나를 바라보시면서 다른 이도 아니고 딜리아 공작이라고 강조하며 결혼을 기뻐하셨던 어머니의 눈동자!
내가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뭔가 잘못되었어요. 뭔가가 잘못되었다고요!”
아이든이 자세를 낮추어 내 손을 감싸고 머리에서 떼어냈다.
그의 다정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 그대는 내내 주술에 걸려 있던 상태였잖아. 그 여파가 아닐까? 만약 그 주술에 그대 눈을 가리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어머니는요…? 내가 어머니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흑발에, 상관없는 눈동자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대 눈에 대해 일하면서 생각해 봤어. 내 생각은 이래. 그대는 원래 금안이었고, 지금 그대는 원래 눈을 되찾은 거야. 그대가 그동안 청안이었던 이유… 그건 아마도 그대의 신성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신성력…?
“그동안 그대는 본인이 신탁의 아이인줄도 몰랐고 신성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컸잖아. 사실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본인 몸 안에 흐르는 능력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나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금안이었다고? 내 눈이?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청안이었다고 생각하고 컸는데?
“태어났을 땐 금안이었을까요? 그 때도 청안이었을까?”
“알 수 없지. 어쨌든 그대 눈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주술을 걸지 않았을까? 신성력을 각성하길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뭐라도 막아야 했겠지.”
왜… 왜 이렇게까지….
나는 고개를 돌려 마법사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난… 그냥 평범한 귀족 가의 딸이었을 뿐인데….”
“당신이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해서 신탁의 아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중년의 여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는 늘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았어요. 당신은 아주 잠깐이었겠지만. 우린 그 공포를 일평생 느끼며 숨어야 했어요. 프리온은 대대적인 숙청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언제나 매의 눈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어떻게든 죽일 구실을 만들려고 했어요. 게다가 이젠 악신의 계약자들을 모조리 숙청할 신탁의 아이가 태어났죠. 우린 두려웠어요.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여인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철장을 양손으로 붙들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악신과 계약했고 우린 그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하게 살아왔을 뿐이었어요. 우리가 직접 악신과 계약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이 귀족가에 딸로 태어나 평민은 가질 수 없는 부를 당연하게 여겼듯이. 우리도 그랬을뿐이라구요.”
엔젤이 내게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역시 이들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서로 적이 되어 등지고 있는 자들인데.
누구보다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해야만 하는 존재들인데.
이 모든 것들의 처음은 프리온이 마법사들을 배척하며 시작되었다.
그들은 악신과도 계약하지 않은 마법사들을 왜 탄압하고 배척했을까?
그들의 입지가 약해지기 때문에?
마력과 신성력은 반대되는 능력이라서?
“프리온은… 홀로 높은 곳에 서고 싶어했던 것일까요?”
“마력의 근원은 악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더군. 많은 국가들이 마력을 불법으로 정했지만, 마법사들은 그것들을 탐했고 결국엔 가졌어. 아무나 악신과 계약하고 싶다고 해서 덜컥 계약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리안.”
그렇구나.
신성력과 마력은 정 반대되는 능력이고.
프리온은 마력을 제한하고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의 끝은 참으로 허무한 것이었다.
완벽하게 풀어낼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감옥에 갇힌 채 희망도 의지도 없이 텅 빈 눈으로 무력하게 앉아 있는 수많은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항복했어요? 당신들… 죽을 길이라는 걸 알았잖아요.”
중년의 여인이 스르륵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잡히든 항복하든 우린 어차피 잡혔을 거고 죽었을 겁니다. 마법사들을 한데 모아 국가를 세웠던 장로님들은 모두 죽었고, 악신의 아이도 여기 황실에 끌려와 죽었다지요? 우린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어요. 발붙이고 살 국가가 있긴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가 당신들을 구해준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황제의 허락하에 생명을 이어나가는 건 다른 문제지요. 이 이후로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살려주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그래야 하나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내가 당신들을 살려준들 계속해서 마력을 사용하면 어차피 결국 프리온은 또 가만히만 있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제국까지 위험해지고 말 거예요. 은혜를 그렇게 갚으실 겁니까?”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나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연신 기침을 해대던 나이 든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네.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낮추어 철장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 주세요.”
사내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주춤거렸다.
“내게 무엇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내를 보다가 기가 막혀 웃었다.
“이봐요. 내가 그쪽을 해하려고 이러는 것 같아요?”
사내가 곁눈질을 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로서는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나는 손을 거두고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나도 그대들을 살려야 할 의무가 없겠군요. 나를 믿지도 못하는 자들을 살렸다가 뒤통수라도 맞으면 큰일이지요.”
내 말에 감옥 안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중년의 사내는 전보다 더욱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며 철장 앞으로 기어왔다.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여 절하는 모양새를 갖춘 사내가 간절하게 외쳤다.
“미, 믿습니다! 믿고말고요! 내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다시 자세를 낮추어 손을 내밀었다.
그가 얼굴을 들어, 내 손을 바라보다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흔들었다.
“뭐해요? 손.”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손을 내밀었다.
철장 사이는 손가락 2개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넓이였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넣어 그의 손을 잡고 미소 지었다.
“축하해요. 당신의 기관지는 마치 건장한 청년의 것처럼 건강해졌군요.”
내 말과 동시에 하얀 빛이 내 손에서 터져 나와 남자의 손과 팔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 목으로 스며들었다.
남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스며 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손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이제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겠군요. 모두들 안녕을 빌어요.”
몸을 돌려 아이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든이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갈까요, 부인?”
그의 첫 존대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네, 각하.”
웃음소리에 섞인 말에 아이든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와 함께 감옥을 빠져나와 빠르게 알현실로 향했다.
“폐하께서 노하셨으면 어쩌죠?”
“아마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떻게요?”
아이든이 개구쟁이처럼 큭큭대며 웃고는 말했다.
“내가 회의에도 항상 어마어마하게 지각했거든.”
…까면 깔수록 뭔가가 계속해서 나오는구나.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알현실 앞에 도착하자 방금 전의 나처럼 얼굴이 희게 질려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장이 화색이 밝아져 우리를 반겼다.
“어서 어서 오십시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시겠습니다!”
아이든이 여상한 표정으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무, 물론 하루이틀 일이 아니긴 하시지만… 아! 고해 올리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정신이 없다.
시종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잔뜩 긴장해 한숨을 내쉬자 아이든이 나를 다독여 주었다.
“진정해, 리안.”
“네에….”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시종장이 안에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폐하께서 혹 기분이 많이 언짢아 보이시던가요?”
내 질문에 시종장이 허리를 들고 나를 보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염려 마십시오. 괜찮아 보이셨습니다, 부인.”
“고맙습니다.”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시종장이 열어준 문 안으로 아이든과 함께 걸어 들어갔다.
알현실의 끝, 붉은 계단 위로 붉은 보석으로 세공된 용이 박힌 황금 의자에 앉은 황제와 황후가 보였다.
그리고 황제의 왼편으로 황자가, 황후의 오른편에 황태자가 앉아 있는 것도 보였다.
아주 황실 가족 모임이라도 하러 나왔나.
단지 마법사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뿐인데 이렇게 우루루 나올 일이 뭔지 모르겠네….
내 경악 반 한탄 반이 섞인 작은 한숨에 아이든이 작게 웃었다.
“긴장 풀어, 리안.”
아이든이 작게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귓가가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곳에서 멈추어 서는 아이든을 따라 나 역시 멈추어 서서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와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라즈의 영광과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비조에 가까운 편지를 보낸 것 치고는 꽤나 호쾌해 보이는 웃음이라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것도 귀족들 특유의 가면 같은 걸까?
“내 그토록 유명한 공작부인이 무척 궁금하였는데 이제서야 얼굴을 한 번 보는군 그래.”
그럼 그렇지.
아이든과 결혼하고 나서 폐하께 인사라도 먼저 왔어야 했나.
마치 시부모라도 된 양 구는구나.
애써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아이든이 피식 웃으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외관이 아름답고 그 품행은 더욱 아름다워 누가 채어 갈까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
화아악—
얼굴로 열이 몰려 고개를 숙였다.
아이든의 말인즉슨 내 와이프가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품에 싸고 있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것이었다.
“뭐라?”
황제 역시 그 뜻하는 바를 알아듣고 기가 막혀 했다.
황후는 부채로 하관을 가린 채 나를 내려다보며 고상하게 웃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외모지요. 제가 먼저 공작부인을 알았더라면 이리 채 가기 전에 내 아들과 맺어주었을 겁니다.”
흠칫.
그런 끔찍한 말을!
누가 봐도 황태자 전하는 진짜 제 스타일이 너무너무 아닌데요…!
저렇게 막 장난스럽고!
진심은 손톱 밑에 때만큼도 없을 것 같은 인간을?!
사색이 되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어깨를 으쓱하며 내 손을 더욱 꽉 그러쥐었다.
“제가 제국에서 가장 큰 승자로군요?”
이미 내가 가졌어!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든을 보며 나도 모르게 쿡 웃어버렸다.
나는 얼른 앞을 보며 고개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과찬이 지나치십니다. 제국에서 가장 큰 승자이며 가장 아름다우신 분은 황후마마가 아닐런지요.”
내 말에 황후가 별안간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내 공작부인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아아… 예….
딱히 또 황후마마의 마음에 차고 싶어 그랬다기보다는….
내 생명이 귀중해서….
“그대들은 조금 더 가까이 와 서게. 너무 멀어 내 목이 다 아프니.”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이끌어 좀 더 앞으로 걸어나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고개는 점점 바닥을 향했다.
웬만하면 이 눈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은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지.
황제가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공작부인께서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신가? 내 그리 무서운 이는 아니니 고개를 드시게.”
나는 떨려오는 손을 아이든에게 의지한 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곧 알현실에는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퍼졌다.
“그… 대… 눈이…?”
황태자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바라보며 아이든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렵다.
내 진심이 왜곡되고, 내 말이 저들에게 닿지 않을까 봐.
고작 눈 하나 때문에.
…하지만 피해선 안 돼.
다시 한번 눈을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청안이 아니었던가?”
황태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을 해야 한다.
“악신의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날에… 이리되었습니다. 저도 영문은 잘 알지 못하여….”
“악신의 아이를 본 날에? 혹여 사특한 저주가 걸린 것은 아닙니까!”
황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소리쳤다.
황태자가 주먹을 그러쥐고 황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대로면 우리 머리칼도 사특한 저주란 말이냐?! 폐하 앞에서 말을 가려 하거라!”
황자가 황태자를 노려보며 이를 아득 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얼음판인지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황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금색은 예로부터 신의 색이라 불리어 오곤 했지요. 하여 우리 황실 일원이 이리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후가 부채 너머로 미소 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황제 또한 그 말에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탁의 아이가 금안이라… 내 어찌 그것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황자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폐하, 마마.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황자가 자리에 다시 착석하고 나서야 나는 속으로나마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가 속으로 나를 어찌 생각하든, 일단 겉으로는 무난하게 넘어갔으니 이후에 할 말에 대해서도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대가 그렇게 치유 신성력이 강하다지? 구멍 뚫린 상처마저 메꿔버린다 하던데?”
나는 움찔 놀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은근슬쩍 내 눈을 피하며 휘파람을 부는 것을 보니 누가 봐도 범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러니 내 스타일이 절대 아니라고 하는 거지.
“미흡한 능력이나마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내 말에 황제가 흐음하며 제 수염을 어루만졌다.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긴장한 채로 고개를 숙이는데 황제가 별안간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신가?”
나는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감히 청하옵건데 마법사들 모두 저희 공작령에 머물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번엔 황자와 황태자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될 말이오!”
“제정신인가?! 공작과 상의해 결정 내린 것이 맞아?! 그대가 저들로 인해 입은 피해를 우리가 보상해 주려는 것이야! 정말 모르겠어?!”
나는 침착하게 허리를 숙였다 들고 황태자와 황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자 전하의 우려가 무엇인지 황태자 전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들을 살려주다 못해 공작령에 두겠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마법사들이네. 내가 공작에게 많은 것을 하사하고 양보했다 하나 그렇게 큰 세력을 갖는 건 위험하다 사료되네만?”
“마법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을 약속하면 어떻겠습니까?”
내 말에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석방 시킨 뒤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땐 어찌해야 할지도 생각해 보았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황태자 전하. 저들은 아시다시피 마법사들입니다. 감옥의 문이 잠겨 있다고 한들 저들에게 그게 효과나 있을까요? 왜 저들이 당장 저 문을 열고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까?”
내 질문에 알현실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황제도 황후도, 황태자, 황자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그저 헛기침이나 하면서 시선을 돌리기 바빴다.
저들도 분명 마법사들이 삶의 희망을 놓아버렸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 황제를 올곧게 바라보며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다름 아닌 공작령입니다. 각하께서는 수많은 권력과 무력을 지니고도 폐하의 밑에서 제국의 칼로서만 살아왔습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 50명을 받아들인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자가 이를 아득 갈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대는 지금 이 일을 윤허하지 않으면 더 이상 제국의 칼로서 존재하지 않겠다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황자의 노여움이 한껏 담긴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렇게밖에 생각을 못 할까?
고개를 돌려 황자를 바라보았다.
“전하. 그 말뜻은 전하께서는 저희 딜리아 가문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식적인 황실의 입장인지 황자 전하만의 의견인지 궁금해지는군요.”
내 말에 황제가 당황하여 아이든을 바라보다가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이보게, 공작부인. 이는 그저 아직 성숙치 못한 황자의 혈기에 불과한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게. 우리 황가는 여전히 딜리아 가문을 가장 큰 우방으로 여기고 있으니.”
나는 싱긋 웃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딜리아 가문 역시 황실의 무한한 신뢰에 응하여 변함없는 제국의 칼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든든하네. 허나 만에 하나라도 마법사들이 명을 어기고 사특한 마법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면 어찌할 것인지 대책을 들어보고 싶네만.”
황제가 내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쉽지 않구나.
다시 대화가 처음으로 돌아갔어.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도움을 요청해 오는 자들을 그냥 물리지 못해 손을 뻗고는 했다.
아이든이 아무리 ‘그게 리안이니까.’ 라고 말한다고 해도, 나 역시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전부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번만큼은.
[릴리아나. 이제 이자벨이 하지 못했던 일의 마지막을 장식해다오.]
[저들을 보거라.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며 서로를 미워하지 못해 안달을 한다. 네가 그들의 증오를 없애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해 다오.]
그러니까 나도 쉽게 물러설 수 없다.
“폐하. 마법사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시는 이유에 대해 먼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흐음…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마법이 사특한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네. 마치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 역시 몹시 당연한 것이었지.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군.”
“마법은 창조주에게서 온 것이 아닌 악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황후가 황제의 뒤를 이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후마마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마법은 악신에게서 온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처음 마법이 출현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너무도 까마득한 옛날이지요. 폐하께서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신 것처럼, 저 감옥에 갇혀 희망을 놓아버린 자들 역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당연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저 마법사의 배를 타고 태어나 당연하게 여기며 마법을 배웠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저들은 사특한 자들입니까? 마음에 악을 품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크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황제와는 다르게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공작부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어.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끼리 안전하다 그렇지 않다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지 않나? 프리온의 황제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우리는 국가 간의 문제로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문제는 역시 프리온이구나.
“여기서 황제 폐하께서 저들이 공작령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명만 내려 주신다면 프리온의 황제 폐하를 설득하는 것은 제 몫이 될 것입니다.”
“부인, 프리온의 황제를 알현할 생각인가?”
황태자가 놀란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부인에게 이렇게까지 할 의무는 없어!”
“예, 전하. 그럴 의무는 없지요. 다만 저는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의미 없는 전쟁을 끝내고 싶을 뿐입니다.”
“왜?”
“…저는 열 살 때 처음으로 스펠른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참 끊임없이 저를 죽이려고 했지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미웠습니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들만 없어지면 이제 나도 안전해 지리라고 생각했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저를 해하려던 자는 모두 죽었고 남은 자들은 그저 마법사로 태어나 마법사로 살았을 뿐인 무고한 자들뿐입니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더 이상 저택에 남아 내 남편이 언제나 돌아올까 혹여나 죽지는 않았을까 가슴을 졸이고 싶지도 않고, 나로 인해 무고한 누군가의 목숨이 연기처럼 사라지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저들은 무고한 자들입니다, 전하.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로서 되돌려 받을 뿐입니다.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들을 모조리 죽이면 어차피 복수가 복수를 낳을 수조차 없어, 부인. 후환을 없애려는 것이잖아.”
“전하… 악신의 아이가 저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신탁의 아이가 마법사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내려왔던 신탁의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혹시나 그럴까 봐’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저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황태자가 놀란 듯 눈이 커졌다가 이내 곧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쓰게 웃었다.
“감옥에 있는 저들도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만약 복수를 꿈꾸었다면 항복해 저 감옥에 있을 것이 아니라 저를 찾아왔을 겁니다. 처음 시작은 오래전 프리온과 제국의 연합이었지만 이번에 치룬 스펠른 전쟁은 저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끝 또한 제가 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선택이 저들을 풀어주는 것이다?”
황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것이 저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또한 신의 선택입니다.”
“신의 선택? 그것을 어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신탁이라도 받는 자라는 말인가?”
신탁….
역사상 단 한 번도 신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그것도 아주 자주 들었던 이는 없었다.
그래서 신탁이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되었고, 그 신탁을 받는 프리온의 황제가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신과 대화를 합니다.
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신을 마주 대하기도 합니다.
신탁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아.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하지.
어쨌든 이미 나에 대한 어마어마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기도 하고.
“예. 폐하. 저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자가 맞습니다. 신께서는 더 이상의 살육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이 신의 뜻임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황제의 말에 아이든이 옆에서 이를 아득 가는 것이 들렸다.
“폐하. 이 자리에서 대체 무엇을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부인은 지금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몸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는 신의 뜻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인가?”
“폐하!”
“아이든.”
나는 아이든의 손을 꼭 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든이 쯧, 하고 혀를 찬 뒤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황제를 바라보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외람되오나 신의 뜻은 내가 알고자 할 때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증명을 할 수 있을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로군?”
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으로 그대를 믿어야 하는 것인가? 이 일은 제국의 안전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네. 자칫 했다간 풀어준 마법사들이 사특한 마법으로 제국을 어지럽힐 수도 있음이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마법사들이 그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을 모두 보았다.
일말의 희망도 의지도 없는 나약한 눈.
그들은 절대 사특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눈은 자고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니.
하지만 이것을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을까?
황제는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내가 이것을 증명하려고 무언가 눈앞에 놀라운 이적을 보인다 한들?
황제가 내 능력이나 심지어 일라즈 님 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이용해 먹으려고 들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는 그러고도 남을 자다.
하지만 만약 증명해 내지 못한다면?
황제는 마법사들을 절대 풀어주지 않을지도 몰라.
전권을 내게 일임했다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프리온의 황제였어.
이미 저들은 제국의 황실에 인계되었고, 그 순간부터 모든 권한은 황제가 가지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국 내가 무언가 결정한다고 해도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저들은 황실 감옥에서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는 뜻이다.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아이든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릴리아나. 원치 않으면 지금이라도….”
아니요. 해야만 해요.
일라즈 님이 내게 바란 것은 그것이었으니까.
내가 무슨 손해를 보더라도 나는 이걸 해야 해.
“역시 증명하지 못하는 게로군. 그렇다면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법사들을 사면해 줄 수는 없네. 저들은 죽어 마땅한 범법자들이야. 애초에 오래전부터 마법은 불법이었으니. 정당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네.”
황제는 욕심이 많은 자다.
그는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저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이 없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다.
나는 황제가 가지고 있는 저런 눈을 잘 알고 있다.
빌이 꼭 저런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입이 되자마자 이가 으득 갈렸다.
정말로 질리는 종족들이야.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불러오고 끝이 없다는 걸 어찌 모르는 것일까.
황제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그래. 원한다면 기꺼이.
악신의 아이를 만났던 날, 등의 날개죽지에 타는 듯한 작열감과 함께 드러냈던 날개를 기억했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돋아났던 그 날개.
그것은 과연 일라즈 님이 나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실 때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이라면 충분한 증명이 되겠지.
나는 아이든의 손을 놓고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아이든이 커진 눈으로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준 뒤 두 눈을 감고 일라즈 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
내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능력을 달라고.
그게 무엇인지는 어차피 다 아실 거잖아…? 그렇죠…?
눈을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신성력을 운용해 날개죽지로 끌어모았다.
“폐하. 신의 뜻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만큼 불의한 것이 없습니다. 증명을 원한다고 하셨습니까?”
나는 눈을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알고 있다.
내가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뜻을 알 수 있으며 진실된 신의 종인 것을.
분명 그는 보았으니까.
내 날개를. 그리고 아이든을 치료한 그날의 일을.
황태자는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부인, 지금 무슨 짓을…!”
황태자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등의 날개죽지에서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져왔다.
나도 모르게 바닥에 툭 주저앉으며 양팔을 교차해 몸을 끌어안고 덜덜 떨었다.
“릴리아나!”
아이든이 놀라서 달려오려고 해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지 마세요!”
“리안!”
“멈… 으윽…! 멈춰!”
“부인…! 몸에서 연기가! 그만둬!”
황태자의 만류하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온몸의 신성력이 쫘악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는 듯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동시에 전신이 타오르듯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이전에 날개가 돋아났을 때와는 정말이지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흐윽…!”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서 신성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등에서 새하얀 깃털로 이루어진 커다란 날개가 순식간에 돋아나 활짝 펴졌다.
온몸을 불태워 버릴 것 같던 뜨거움이 서서히 가라앉고 나자 오히려 신성력이 배로 넘쳐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느껴본 적 없던 느낌인데 뭐라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깨어나 숨 쉬는 것 같아.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제와 황후, 황자 역시도 경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쭉 둘러보다가 마지막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숨을 멈췄다.
지독한 냄새. 사취가 난다.
저 기운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지 내가.
내가 손을 황자 쪽으로 뻗자 곧 황자의 몸이 순식간에 떠올라 내게로 순식간에 끌려왔다.
“컥!”
뻗었던 손에 황자의 목이 움켜졌다.
인간의 것이라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넘쳐흘러 그를 제압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황제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손 놔! 지금 뭐 하는 거야, 부인!”
“릴리아나!”
황태자와 아이든의 외침도.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마법이 사특한 것이고 마법사들은 악신과 계약한 자들이니 죽여 없애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무, 무슨!”
새파랗게 질린 황제의 얼굴을 보고 싱긋 웃었다.
“증명해 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좋은 기회가 온 것 같습니다, 폐하.”
그리고 옆으로 기울였던 고개를 다시 바로 하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켁켁 대는 황자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악취가 납니다, 황자 전하. 견딜 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켁켁…! 놔, 놔라…! 이, 이…!”
“어째서 악신 따위와 계약을 하셨습니까?”
“뭐… 뭐라…?”
황제가 충격받아 중얼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감정 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황자를 바라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악신의 제물로 취하셨습니까. 더럽게 부패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황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황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아바마마…! 사, 살려…!”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하며 황자를 노려보았다.
“연약한 척은.”
황자가 잠시간 멈칫하더니 이내 곧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목을 움켜쥔 내 왼쪽 손목을 잡고 한 번에 휙 떼어낸 황자가 기침 몇 번에 목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잡혔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순간적으로 잡혔던 것인데도 손목에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
오른손으로 멍든 손목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자 황자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창조주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해졌구나.”
그리고 손을 들어 제 목을 쓰다듬고 몇 번이나 고개를 양옆으로 기울여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며 짓씹듯이 뱉어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픽 웃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무엇이?”
내 질문에 황자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손을 들어내 목을 움켜쥐었다.
“! 릴리아나!”
아이든이 검을 빼 드는 것이 보여 손을 뻗었다.
“괜… 괜찮아요!”
“리안! 너 이 새끼!”
“물러서라고!”
내 외침과 동시에 황자가 다른 손을 아이든에게 뻗었다.
순식간에 아이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이든, 안 돼! 흐윽!”
목을 더 조여오는 힘에 신음했다.
얼굴로 피가 쏠려 머리가 곧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운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신성력을 아이든에게로 던지듯 보냈다.
‘제발…!’
다행히 빗나가지 않은 신성력은 투명한 구를 형성해 아이든을 감쌌다.
곧 그가 알현실 저 끝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보호 물질이 터지며 사라지고 그가 주르륵 쓰러져 내렸다.
아이든이 기절한 듯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충격과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보호하지 않았으면 그가…!
나는 고개를 돌려 황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 황자는 황자가 아니다.
고로 그의 힘은 정상적인 사내의 힘에 비할 수 없는 정도고,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든 뿐만이 아니야.
여기 있는 누구라도 그처럼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할 것이다.
그가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네 놈이 이긴 것 같겠지! 네 놈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겠지! 하지만 틀렸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통해 다른 이를 보듯 분노와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목을 점점 조여오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두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힘껏 바르작거렸다.
“이 여자가 가장 아끼는 자를 죽여버리고, 이 여자마저 처참하게 죽여주마. 고통스러워하고 마음껏 절망해라.”
아이든을 죽이겠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손등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놔…!”
황자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정신을 잃은 아이든을 가리켰다.
“오냐.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아… 안 돼…!”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움직일수록 목이 더 조여 들어왔다.
뇌로 가는 모든 산소가 차단된 기분이 들었다.
숨이 껄떡껄떡 넘어갈 때 즈음, 머릿속에 이상한 영상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전에 날 찾아오셨던 일라즈 님의 외모와 아주 똑같은 모습으로, 범접 못 할 외모를 지닌 여자와 그녀보다는 덜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라도 홀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답게 생긴 남자가 일라즈 님과 함께 있는 모습들을 보았다.
일라즈 님과 그들은 모두 세상을 내려다보며 매우 흡족해했었다.
그래. 흡족했었다.
악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상에는 악이 팽배해졌고,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여자와 함께 있던 남자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일라즈 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발에 입 맞추며 땅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가장 먼저 세상에 발을 뻗은 이는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로긴 아델르크.
[오라버니!]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그 여자를 일라즈 님은 애정을 가득 담아 이렇게 불렀다.
[아가. 나의 사랑하는 리안.]
어느 날, 악신의 천사들이 신의 세계에 침입해 들어왔고, 그들의 선봉에는 악신이 서 있었다.
그가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일라즈 님을 향해 비릿하게 웃자, 일라즈 님이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미델 네 이 놈!]
여자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컥컥거리자, 일라즈 님 또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릴리아나 아델르크!]
“!”
일라즈 님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실제 귓가에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옴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파고들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 같은 영상이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자의 속에 들어간 것의 정체 또한.
온몸에서 이전과는 다른 활력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신성력의 양 또한 이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올랐다.
그 이유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있는 힘껏 황자의 손을 그러쥐고 그를 끌어당겼다.
등에 돋아난 날개가 나와 황자를 감싸 오므렸다.
황자가 당황한 틈을 타 피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미델.”
내 인사에 황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는 그의 손을 움켜쥐어 순식간에 내 목에서 치워내고 그의 가슴을 탁, 치며 뒤로 밀어냈다.
날개가 열려 활짝 펴짐과 동시에 황자가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게, 힘 좀 주고 서 있지 그랬어.”
내 인사에 황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표정을 와락 구겼다.
“너 대체 뭐야…?!”
“뭐냐니. 전에 니가 그랬잖아. 진정 일라즈의 딸이란 말인가. 하고.”
“너는 ‘진짜’ 아델르크인가?”
황자의 흔들리는 표정에 싱긋 미소 지었다.
“내가 진짜가 아니었으면 좋겠지?”
“아델르크는 여기에 있을 수 없다!”
“왜?”
한발씩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이를 아득 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너는 그저 그가 아끼는 영혼일 뿐이야!”
“아아. 하긴 그분은 항상 딸을 떼어놓지 못하시긴 했어. 늘 안절부절못하셨지. 이건 그러니까 나를 너무 아낀 나머지 딸과 비슷한 외모를 주었다, 뭐 그런 건가?”
그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넌 절대 날 못 죽여. 애석하게도.”
그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미델. 좀 솔직해져 봐. 너, 나 좋아하지?”
황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내려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때? 어린 몸을 차지해서 그런가? 살결도 곱네. 좋아?”
황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 진짜구나?”
그날, 신의 세계에 쳐들어와 내 목을 움켜쥔 날.
나는 알고 있었다.
악신은 결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일라즈 님을 향한 분노와 원망과 질투심.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찰나의 그 눈빛과 표정.
그는 나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째서?
나는 그날 그를 처음 보았는데.
그는 나를 이전부터 알았던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하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나.”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일라즈 님이 하셨던 경고의 말이 단순한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날 나타났던 악신은 참으로 놀라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단번에 미혹하고도 남을 아름다움이었다.
결국, 그는 일라즈 님에게 참혹하게 패배하고 신의 세계에서 쫓겨났지만.
생각해보면 일라즈 님은 늘 나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셨다.
[너는 너무 과하게 아름다워.]
그런데 실제로 사람 몸을 입고 태어난 건 왜 이 모양이지?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다 어디 가고…?
“손 치워.”
짓씹듯이 뱉어내는 황자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의 가슴에서 손가락을 떼어 냈다.
“내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그저 인간인 줄로만 알았어? 게다가 신탁의 아이라니. 그래서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을 했었구나? 니가.”
으득.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고?! 웃기지 마!”
황자가 다시 손을 뻗어오는 것을 보고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도 이젠 제발 마지막이었으면.
“미델. 넌 그냥 질투심과 소유욕에 눈이 먼 패배자일 뿐이야.”
“릴리아나 아델르크!”
“내가 위험해지면 일라즈 님이 이곳에 오시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넌 또 패배하겠지. 그날처럼.”
“닥쳐!”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프니까.”
나는 그대로 황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려 반대쪽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진 황자가 유려한 움직임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 내게로 손을 뻗었다.
“하… 숙녀한테 뭐 하는 거야.”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그를 가리키며 까닥거렸다.
황자가 의지와 상관없이 바닥에 고꾸라지며 무릎을 꿇고 이를 갈았다.
“으아아! 아델르크!”
“생각 못 했어?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네 능력도 고작 그 인간의 몸에 맞게 변질 되는 거야. 힘을 다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니? 멍청하긴.”
“그러는 너도 인간이지 않나!”
그에게로 걸어가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델. 난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나를 올려다보는 황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 맞춰 설계된 존재란 말이야, 애초부터. 알겠니?”
“!”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싱긋 미소 지었다.
“돌아가. 너의 세계로. 그리고 마법사들을 괴롭히지 마. 황자도 놓아 줘.”
“네 명 따위, 들을 내가 아니다!”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를 아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델. 나는 네게 아니야. 그럴 생각조차 없어. 그러니까 꿈 깨.”
“릴리아나.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네가 원한다면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너에게 바칠 수도 있어. 내게는 그럴 권력과 힘이 있다!”
황자가 갈망이 가득 찬 눈빛으로 내게 그렇게 말해와서 웃음이 났다.
빌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이런 종자들은 정말이지 여자를 꼬실 때 할 말이 그런 것들밖에 없는 건가?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권력? 명예? 부? 그게 뭐? 미델. 있잖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그런 것보단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해.”
황자의 눈이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의 가슴을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툭툭 찌르면서 말했다.
“마음 말이야. 마음.”
“내 마음도 못지않다. 왜 믿지 못하는 거지? 나는 몇 천 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너를…!”
“아니.”
싸늘한 눈빛으로 황자를 바라보며 대답하자 그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나는…!”
“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나를 가진 일라즈 님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그러다 보니 나를 소유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너에겐 그런 행복을 느끼게 해줄 존재가 없었으니까.”
“아니야, 나는…!”
“그래도 고마워. 그 마음만 내가 고이 가슴속에 간직할게. 약속해.”
그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바라보면서 잠시간, 아주 잠시간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게.
그는 그래서 악신이 되었을까?
아니면 악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고마워. 행복해져, 미델.”
황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 내밀어 그의 뺨에 살짝 입 맞추었다.
“돌아가. 이제.”
고개를 들자 황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너는… 어째서 이토록….”
그리고 황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일렁거리던 검은 기운도 사라졌다.
나는 잠시간 손을 들어 황자의 머리에 얹고 축복기도를 했다.
다시는 악신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축복기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아이든이 깨어나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뒤를 돌아 아이든이 처박힌 벽을 향해 뛰어가서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이든?”
“으윽… 내가 기절 했었나?”
아이든이 질문을 하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 그 날개는 없어지지 않는 건가?”
나는 접힌 날개를 흘끗 돌아보고 다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꽤 오래 정신을 잃었어요.”
“다른 이들은?”
아이든이 내 손에 의지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황좌를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와 황후가 모두 공포에 질려 넋을 놓고 자리에 주저앉아 덜덜덜 몸을 떨어 대고 있었다.
그 옆으로 황태자는 뭔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의자에 앉아 멍해진 상태였다.
“하….”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저들이 이곳에 아직 있다는 걸,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다.
…모두 보았겠구나.
모두 들었을 테고.
이를 어쩐다.
“다들 넋이 아주 완벽히 나갔군. 황자는 어디에… 아.”
아이든이 기절해 쓰러져 있는 황자를 바라보고 잠시간 말없이 서 있었다.
“아이든.”
흠칫.
“어?”
아이든이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요?”
“저 덩어리… 설마 그대 작품인가?”
아이든의 들어 올려진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든을 다시 바라보았다.
“뭐. 그렇죠 뭐.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어요.”
“그대도 사람이잖….”
아이든은 내 등 뒤를 흘끗 올려다보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더욱 어색하게 웃었다.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군.”
아이든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을 내려 내 목을 바라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대 목이…! 설마 목이 졸렸어?”
아.
나는 짧은 탄성을 뱉어내며 손으로 목을 감쌌다.
아이든이 표정을 왈칵 구기며 황자에게 달려들려는 걸 급하게 가로막았다.
“아이든! 진, 진정해요!”
그때, 갑자기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다다 달려 내려와 내 발치 아래에 납작 엎드렸다.
나도 아이든도 흠칫 놀라며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서, 성녀님! 아, 아니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합니까?! 하명해 주십시오!”
황제의 존대에 나는 몸을 움찔 떨며 그의 손에 잡힐까 얼른 발을 빼내어 뒤로 물렸다.
“대체 무슨 말씀을….”
아이든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흐리는데 별안간 위에서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나는 당황하여 황태자를 올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희 제국은 성녀님을 성실히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부디 저희에게 축복을…!”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아이든이 인상을 왈칵 구기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우선 황궁의부터 불러 황자 전하를 모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 성녀님께서 계시는데 궁의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황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간 부담스러운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폐하. 때로는 의술 또한 신에게서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사를 찾아가세요. 부디.”
“아아, 성녀님…!”
“그, 그 성, 하… 성녀… 그 명칭도 좀… 어떻게 하시구요.”
“그, 그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황제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사색이 되어 뒤로 한발을 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공작부인이라고 부르세요!”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이렇게 천사처럼 날개도 가지고 계시고… 아델르크시지 않습니까!?”
황제의 말에 아이든이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아이든의 시선을 피했다.
“…릴리아나. 설명해.”
으으….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설명해?!
내가 내 입으로!
신의 딸이니 뭐니!
내가 그걸!
으으!
“그, 그러니까….”
“그 설명, 내가 하지. 본인께서 입을 떼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황태자가 언제 정신을 차리고 내려왔는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알지, 부인? 나는 호기심이 아주 많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한가득한데. 알아야겠어.”
“…미스터리요…?”
…사실 그냥 평소처럼 나를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건가.
나는 다시 황제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 폐하부터 모셔가 주세요. 아이든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법사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거지?”
아이든의 질문에 황제가 번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풀어드리겠습니다! 성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허…
이렇게 쉽게…?
허탈함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 예. 감사합니다, 폐하.”
“리안. 나가기 전에 그 날개는 좀 어떻게 해야겠는데.”
아이든의 말에 나는 아차 싶어 힐끗 날개를 바라보았다.
커다래도 너무 커다랗다.
꺼내는 건 어떻게 꺼내긴 했는데….
그래서 이걸 다시 없애는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전엔 대체 어떻게 없어졌지…?
일라즈 님…?
도움이 좀 필요한 것 같지 않은가요…?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날개가 활짝 펴지는 상상을 하자 실제로 날개가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활짝 펴져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든 역시 놀란 듯 움찔하며 옆으로 더 물러나 비켜섰다.
뭐지? 이거 그냥 이렇게 되는 거라고?
정말로?
나는 놀라운 마음에 다시 한번 날개가 사라지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1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개가 없어지긴커녕 활짝 펴져 위용을 뽐내는 모습에 당황해서 또다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이, 이게 왜… 하하….”
아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은 거야, 리안?”
…아니요.
전혀 괜찮지가 않아요.
“나는 일단 여기 정리 좀 하고 올게.”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나갔다가 오자, 시종장과 시녀, 시종들이 우르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황제와 황후를 데리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황태자 역시 황자를 등에 업고 나갔다.
열린 문밖으로 궁의를 불러오라 지시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드디어 황제가 갔구나.
부담스러워 죽을 뻔했어.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날개가 파스스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뭐야….
어쩌면 그냥 시간제한 같은 게 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이든이 빠르게 자신의 재킷을 벗어 내 몸에 걸쳐주었다.
날개가 돋았던 부분의 옷감이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재킷을 위에 걸치고 그의 집무실에 와 소파에 앉고 나서야 긴장감이 사르르 풀려 버렸다.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머리를 기대니 아이든이 차를 우리면서 말했다.
“좀 눕는 게 어때.”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이든. 그냥 좀… 긴장이 풀려서요.”
하고 눈을 감는데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아이든이 옆에 앉아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마음이 한결 더 안정되는 것 같아.
그리고 그에게 더 미안해진다.
“아이든….”
“응?”
“오늘 너무 많이 놀랐죠.”
“언젠 안 그랬나?”
그… 그렇긴 하죠….
감았던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아이든이 그렇게 말하며 우려낸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나 때문에 겪지 않았어도 될 일은 너무 많이 겪었어요. 당신과 내가 서로 알지 못했더라면….”
그가 멈칫하다가 주전자를 탁자에 내려놓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대를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여전히….”
“네? 여전히 뭐요?”
“…아니야.”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이토록 차분할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차향과 맛을 음미하는 아이든의 옆모습은 완벽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전쟁에 나가 죽을 뻔하기도 하고….
오늘은….
“…당신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
아이든이 눈을 뜨고 찻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면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내 작은 중얼거림에 아이든이 찻잔을 탁자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화가 났나…?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가 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진하게 키스해왔다.
놀람과 당황스러움은 곧 진한 쾌감과 아찔함으로 변질되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아이든이 입술을 떼고 경고하듯 뇌까렸다.
“그댄 내 거야.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혹여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생긴다 해도.”
“하아, 하… 하지만 당신이….”
“아니. 힘든 건 내가 아니라 그대겠지.”
“아이든….”
그가 한숨을 내쉬고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나는 언제나 그대를 감싸 안을 거고, 그대의 모든 걸 수용할 거야. 혹여 그대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고 해도. 나는 전혀 힘들지도 그대를 내치지도 않아.”
그가 나를 놓아주고 두 눈을 맞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랬잖아. 나는 질투심이 아주 많은 남자라고. 그리고 소유욕도 아주 심한 남자야. 두 번 다시 내게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마. 알겠어?”
그래. 생각해보니 그는 늘 내게 ‘그댄 내 거야’등의 말들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흠흠.
내가 물건도 아니고 참 웃긴 말이긴 하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도, 그가 뻗은 손을 놓고 싶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그런 말마저도 참 달콤하게 들리는 내 귀도 좀 문제고.
나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당신이 나의 남편이라서 기뻐요, 아이든.”
내 말에 그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면서 내 입술에 버드 키스를 해주었다.
이 아름다운 미소는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있다.
더 이상 처음 우리가 만났던 날처럼 냉소적인 포식자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게 이토록 끊임없이 맞춰 주고 웃어주고 모든 걸 수용해주는걸.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질 만큼.
“사랑해요, 아이든.”
그가 내 이마에도 역시 입 맞추고 미소 지었다.
“나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잔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아이든이 갑자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 팔을 그러쥐었다.
“앗! 아파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 지르자 아이든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포식자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는 생각 취소….
정말 저 표정은 너무 무서워….
“아, 아이든 놔줘요. 너무 아파요…!”
내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이든이 긴 팔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내 손목에 든 멍을 바라보았다.
“…이거 뭐야.”
음산하게 낮게 깔린 목소리에 꿀꺽 침을 삼키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그냥… 아까 싸우다가….”
아이든이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 짓씹듯 말했다.
“아실 드 로데우스! 이 쳐 죽일…!”
“아이든!”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든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가 아니었잖아요! 기억도 못 할 거예요! 진정해요!”
아이든이 다시 한번 내 손목과 목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의원이라도 불러와야겠어.”
“의원은 내가 데리고 왔어.”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가 궁의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든의 손을 끌어당겨 그를 앉히고 함께 앉았다.
“전하. 황자 전하께서는….”
“그놈은 괜찮을 거야. 부인은 이제 신경 쓰지 마.”
“예….”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궁의를 향해 손짓했다.
“한번 살펴 봐줘.”
황태자의 말에 궁의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전하.”
나는 얼른 아이든을 가리키며 말했다.
“각하께서 벽에 부딪히고 기절하셨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먼저 살펴봐 주세요.”
“리안, 나는….”
“아이든.”
내가 그를 엄하게 바라보자 아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못이기는 척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나는 의사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상의를 모두 벗고 등을 의사에게 보이자 의사는 몇 군데 손으로 눌러보고 확인해 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일이면 좀 멍이 들긴 하겠군요. 하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이십니다. 안심하셔도 좋겠습니다.”
“머리를 부딪치고 기절한 건 아닌지 염려가 되는데… 괜찮은 것이겠지요?”
내 말에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깨어나신 후로 사람을 인지하시고 상황을 인지하셨으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이든이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말했다.
“부인 왼쪽 손목과 목도 한번 살펴보지. 손목은 너무 심하게 멍이 들었는데 뼈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마지못해 소매를 올리고 의사에게 팔을 보여주었다.
황태자가 놀란 듯 목과 손목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의사가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눌렀는데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윽… 그만…! 너무 아파요!”
“손목이 붓지 않으신 걸 보면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졌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멍이 과하게 심하시니, 약을 좀 발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왼손 사용에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목도 스카프를 두르시는 게 좋겠군요. 근육이 충격에 약해져 있는 상태니 까딱 잘못해 삐끗하시면 크게 다치실 수 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손목에 약만 가볍게 발라주고 난 뒤, 의사가 물러갔다.
나는 옷소매를 다시 내리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전하, 차라도 드시겠어요?”
“앉아.”
“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끊어 말하는 아이든의 말에 부리나케 그의 옆에 앉았다.
“이걸 직접 해보긴 또 처음이구만. 누구 때문에.”
황태자가 투덜거리며 찻잔을 가져와 주전자에 있는 찻물을 따라 마셨다.
“이제 말해봐.”
아이든의 말에 황태자가 찻잔을 탁자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후, 피식 웃었다.
“나도 얼떨떨하고 상황 정리가 필요하긴 하지만… 뭐. 있는 그대로 말할게.”
황태자의 말이 시작되고,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하면서 아이든의 재킷을 한번 여몄다.
내 이야기인데 저기 앉아 하나하나 다 들을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