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39)

32. 악신의 아이

아이든이 토닥거리며 재워준 덕분에 다시 한번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나는 황궁의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아이든과 함께 재판장으로 향했다.

재판을 열기 전에 여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황태자의 허락을 받아둔 터였다.

물론 보호할 호위와 아이든과 동행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원형 돔처럼 생긴 재판장에 들어서니 여자가 의자에 묶여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든과 에릭이 내 뒤를 따랐다.

아이든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바로 앞에 멈추어 서서 여자의 멱살을 들어올렸다.

모두가 흠칫하며 나를 말리려 들었다.

“릴리아나!”

“난 괜찮아요.”

아이든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다시 여자를 노려보았다.

“너… 역시 해슬 백작의 여식이구나.”

“이미 아는 걸 묻네. 확신이 필요해?”

여자가 한쪽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정말 황태자 따위를 공격한 거라고 생각해?”

“!”

아! 황태자를 공격하면 자연히 아이든이 막아설 테고, 아이든을 공격하는 것보다 좀 더 수월하게 빈틈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결과적으로 이렇게 성공했고.

“왜? 왜 내가 아니야?”

“아하학! 아하하하하학!”

여자는 내 질문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였다.

“넌 왜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였는데?”

급격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은 광기 그 이상의 것이 들어 있었다.

나는 여자의 멱살을 놓고 뒤로 몇 발을 물러섰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복수를 한 거야…? 내가 똑같이 느끼기를 바래서…? 하지만 나 역시 복수를 했을 뿐이야. 네 아버지가 내 부모를…!”

“하. 그것 참 재밌네. 그래서 복수는 돌고 돈다고 하나 봐?”

“뭐라고…?”

나는 인상을 구기면서 여자에게 다가가려 발을 떼었다.

아이든이 내 팔을 잡아당겨 더 이상 여자와 가까워지지 못하게 했다.

“너는 이게 재밌니…? 재밌어?”

내 표정을 나른한 눈으로 바라본 여자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네 그런 표정이 정말 보고 싶었어.”

“뭐라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네 아비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으면서 자랐어. 근데 넌 아주 행복했겠지. 온전한 가정 아래서, 부모의 사랑이나 먹으면서…! 너나 나나 똑같은 신의 자식인데 왜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머리가 일순간 멍해졌다.

“그래서 생각했지. 너도 나와 똑같아져야 한다고.”

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너에게 협박이나 하면서 신의 뜻대로 살라고 종용할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

“너 이…!”

“그래서 생각했지. 네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좀 해봐야겠다, 하고. 내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어린 나이에 홀로 마법사들 무리에 들어가 살아야 했던 것처럼. 너 역시 부모의 사랑을 받아선 안 되니까. 그래야 우리가 좀 더, 비슷해지지 않겠어?”

“너… 정말 미쳤구나.”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다 못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미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삶이었지.”

여자는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나를 보며 웃었다.

“너를 미워하고 증오했어. 내가 이런 삶을 산 이유는 오로지 너 때문이니까. 근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드는 거야. 널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역시 나일 거라고.”

여자는 다시 나른한 표정으로 돌아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했다.

“네가 내게 한 짓거리 전부가 내가 너와 같아져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당연하지. 네가 나고 내가 너여야 하니까.”

“웃기지 마! 나는 그냥 나야!”

“매 순간 두렵고 불안하고 외로웠지? 어디다 제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곳마저 없고.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겠지.”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마저도 내겐 그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나는 너를 이해해. 아니. 나만이 너를 이해해. 나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왔으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든의 손을 찾아 꽉 움켜쥐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듣자 하니 별 지랄 같은 말을 다 듣겠군.”

아이든의 목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노려보았다.

“너만 없으면 모든 게 완벽했어! 릴리아나의 삶에 유일한 오점!”

흠칫.

여자의 말에 나에 대한 지배욕이 깔려 있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혀왔다.

“하. 본인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아이든이 비웃으며 침착하게 비꼬아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평정심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숨은 가빠져왔다.

나는 대체 뭘 알자고 여기에 왔을까?

이 여자랑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짓이겨 놓은 이유가 고작 그런 것이라고…?

아이든의 도발에 미친개처럼 발광하는 여자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져 왔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내가 여전히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혹은 회귀하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가?

여자가 묶인 채 앉아 있는 의자가 들썩거렸다.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미친 여자처럼 소리 지르며 아이든을 노려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너의 시대가 도래하였구나.]

일라즈 님의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래… 그러고 보니 일라즈 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 너와 나는 비슷하다고.”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반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맞아! 내가 그랬잖아! 난 너와 엄청 비슷하다니까?!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너도 이제 부모가 없는 것처럼 나도 이제 고아가 되었으니 더욱 그렇게 됐네. 그치?”

[그 아이가 끝내 하지 못한 것을 너는 하게 될 것이다.]

이자벨 황녀님께서 하지 못했지만 나는 하게 되는 것.

[사람의 불행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것이란다. ‘마음을 좀먹는 어둠’이 가장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 명심하거라.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마음을 좀먹는 어둠’

나는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어쩌면 일라즈 님께서는 내가 이런 것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아셨던 것일까?

나는 이제 여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네.”

나는 여자에게 하는 대답인 양, 작게 중얼거렸다.

실은 일라즈 님이 하셨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의 대답이었지만.

아이든이 내 손을 잡아끌어 돌려세우고 소리쳤다.

“릴리아나!”

그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 차려…!”

아이든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놔 줄래요?”

“리안…!”

“나는 괜찮아요.”

아이든이 내 눈을 보며 흠칫 놀라 나를 놔주었다.

“리안, 그대 눈이…!”

그를 지나쳐 여자에게 다가갔다.

“엔젤 해슬. 아이러니하지 않니? 악신의 아이 이름이 엔젤이라니.”

“뭐라고…?”

엔젤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의 무릎을 바라보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가엾은 엔젤. 일라즈 님은 널 항상 안타깝게 여기셨어.”

“니가 뭔데 날 가엾어 해! 똑같이 불행했던 주제에! 그럼 너도 가엾어야 마땅하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엔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삶이 참 처절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살인의 정당화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삶을 살아왔으니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내 삶이 얼마나 진흙탕 속이든 일라즈 님은 단 한 번도 날 가엾어하지 않으셨어. 당시엔 그게… 그렇게 섭섭하고 속상했거든? 네 말대로 나 역시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아니더라.”

엔젤이 동요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눈에 띄게 당황하며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내 삶이 뭔가에 의해 혹은 누군가에 의해 불행해졌던 게 아니었어. 그냥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싶었던 것뿐이지. 자기 연민이 얼마나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지 나는 이제 알아.”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 찬 음료를 준비하셨던 것, 손을 일부러 차게 만들어 내 손을 잡아 주셨던 것을 떠올리면서 미소 지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꽤 많은 것들을 오해하면서 내가 그 모든 일들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실 대부분 그 오해의 진실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야. 내가 너처럼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모든 일들을 정당화시켰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어야 마땅하지 않겠니?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너와 내가 정말 똑같다고 생각하니?”

이런 말을 해준다고 해서 바로 용납이 될 리가 없다.

그녀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일.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엔젤.”

덜덜 떨면서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무릎 위에 내 손을 얹어놓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인정하는 일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해. 그리고 그만한 계기도 필요하지. 정말 네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그 삶 속에서 너를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니? 네가 마냥 1분 1초 모든 순간이 불행하기만 했다고 생각해? 네 부모는 네게 왜 엔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해? 너 정말 부모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하지 마… 그만해! 그 눈으로 날 보지 마!”

엔젤이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소리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모든 걸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엔젤. 눈 떠.”

“저리 가!”

“눈 뜨고 날 봐.”

“싫어!”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나로서는 백퍼센트 전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주며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고 상처 주며 목숨을 빼앗는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어.

“엔젤 해슬.”

“그 눈으로 보지 마. 그 눈 저리 치워!”

아. 눈.

아까 아이든도 내게 눈이 이상하다고 했지.

손을 들어서 내 눈 위에 살며시 가져다 대 보았다.

“내 눈이 어떻죠, 아이든?”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엔젤을 노려보다가 움찔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리안… 그대 눈이… 아깐 섞여 있었는데… 완전한 금안이 되었어.”

금안.

금색은 예로부터 권력의 상징이었다.

황가를 상징하기도 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신을 나타내는 색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국인들은 찬란한 금발을 가진 황가를 신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는 했지.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웃긴 일이다.

신의 자손이 따로 있을 리가 있나.

그렇게 따지면 프리온의 황가도 사실은 특별할 게 없는 것일까?

그저 신의 대리인의 피를 내려받은 자들일 뿐.

고개를 돌려 엔젤을 바라보았다.

[너는 내 아이가 아니냐. 자신의 근본을 몰라보면 못쓰지.]

[이자벨의 아가. 그리고 내 사랑스런 아가야.]

[신의 자손이여. 일라즈의 딸이여. 죽어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입에서 끊임없이 입김이 새어 나올 만큼 매서운 한겨울 날씨에도 하늘은 파랗기만 하다.

두 눈을 감아 그날을 떠올려 보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신의 땅에 발을 들였던 날.

내가 몇 살이었더라.

뚜렷하지 않은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원하는 답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라즈 님이 내게 언젠가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나의 릴리아나. 너의 부모는 네 마음에 쏙 들더냐?]

[이자벨이 제 역할을 다 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

눈을 뜨고 고개를 내렸다.

기억에서 잊혔던 지난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모두 다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꿈에서 일라즈 님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견디거라. 네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내 아가야. 사랑하는 리안.]

[너는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지. 나는 널 아꼈다. 너를 어둠에 빼앗길까 두렵구나.]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고개를 들어 엔젤을 바라보았다.

두려운 듯 덜덜 떨며 나를 내려다보는 엔젤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찼다.

[보고 있는가? 그대가 그토록 아끼고 아꼈던 영혼이 내 손에 있구나. 즐겁다.]

그렇구나.

어둠이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너의 피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강대하고 신성한 피다. 네 안에 내 힘을 일부 봉인해 두었다. 네 피에 나의 일부를 흐르게 하였다.]

일라즈 님은 늘 엔젤을 두고 가엾은 아가라고 했다.

신 앞에 모두는 공평하다.

모두 다 신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가 창조해내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엔젤 해슬 또한 그분의 자녀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다.

나만이 그토록 아끼고 아꼈던 영혼인 것이 아니다.

[좀 더 깨끗하고 신성한 영혼이던 너를 아꼈던 것은 맞다. 그러나 너만이 대단하고 너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란다. 다만 네가 겪을 일이 특별하기 때문에 네게 나의 일부를 준 것이다.]

일라즈 님은 신의 땅에 나를 데려가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수많은 생명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 내게 일라즈 님은 말씀하셨다.

[보아라. 신 앞에 모두는 공평하다. 모두 다 나의 아들이고 나의 딸이다. 그러므로 엔젤 그 아이도 나의 딸인 것이지. 가엾은 아가. 가엾은 엔젤을 네가 구해다오. 그 아이를 구해다오.]

[왜 신은 인간사에 직접 개입해서 불행한 이들을 구원하지 않으시나요?]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헨델 사제에게 같은 것을 물었었지.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꼭두각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나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들을 만든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나는 그것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단다. 그러니 네가 필요한 것이지. 저들을 보거라.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며 서로를 미워하지 못해 안달을 한다. 네가 그들의 증오를 없애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해 다오. 가엾은 저들을 위해 그래 주겠니?]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면 그분의 파편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힘에 몸을 내어 맡겼다.

“…엔젤 해슬. 가엾은 아가.”

흠칫.

엔젤이 화들짝 놀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네 삶이 어둠에 물들고 네 손이 피에 물들었다 해도 괜찮다.”

엔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커진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등에서 익숙한 작열감을 다시 느꼈다.

나는 고통을 애써 모른 척하며 엔젤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태어나자마자 악신에게 제물로 바쳐져 악신의 아이가 되었다고 해도 괜찮다.”

“아아아….”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그것은 하등 중요치 않단다. 너는 존재만으로 그저 신의 딸.”

엔젤이 커다래진 눈을 내 등 뒤로 옮겼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낮추었던 자세를 펴고 일어서서 엔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라즈의 딸이여.”

“아아…!”

등 뒤로 돋아난 새하얀 날개가 활짝 펴지는 동시에 아이든과 에릭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력을 확장한 그분의 파편이 내 몸을 감싸고 그 능력을 표출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곧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을 통해 일라즈 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끝끝내 내 손을 잡지 않겠느냐? 끝끝내 내가 눈물을 흘려야만 하느냐? 너는 불행했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아껴주는 이들을 곳곳에 두었으며 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네가 불행했다 하겠느냐? 그렇다면 듣거라. 엔젤, 내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아낀다. 이것으로도 부족하겠느냐?”

“나는… 나는 당신의 아이를 죽이려 했는데… 대체 왜…!”

“누가 내 아이냐. 네가 내 아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이가 다 나의 아이다.”

“나는 릴리아나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나는 그 부모까지 모조리 찢어 죽였어요!”

“후회하느냐?”

“윽… 우윽…!”

엔젤이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삼키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회하거라. 사무치도록 후회하거라.”

“우으윽…! 흐윽…!”

“오냐. 울거라. 참회의 눈물은 그 어떤 보석보다 반짝이는 법이니. 드디어 빼앗긴 내 것을 되찾았구나. 몹시 좋다.”

일라즈 님의 힘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날개가 나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매서운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은 따뜻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싸듯이 휘몰아쳤다.

[아름다운 리안. 선물 이란다.]

마지막으로 일라즈 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날개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에 비틀거렸고, 아이든이 급히 달려와 나를 부축해 주었다.

***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공작저의 침실 천장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은 나는 내 옆에서 잠든 아이든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침구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참회와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엔젤을 뒤로하고 우리는 미련 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한번 체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힘을 또다시 사용한 탓인지 피곤한 몸은 침대를 만나자마자 피곤하다고 아우성을 쳤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언제 내 옆에서 같이 잠이 든 것이지 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

잠에서 깨고 나서야 어제 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현실감이 들었다.

사실 엔젤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끝나 버린 것인가?

나는 이제 안전해진 걸까?

“리안…?”

아이든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 눈이… 돌아오지 않는군.”

눈…?

“아직도 금안인가요?”

“그래.”

고개를 내려, 감은 눈 위로 내 손을 얹었다.

“릴리아나.”

아이든이 눈을 가린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나를 불러왔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흘긋 바라보았다.

“흉측한가요?”

아이든이 미소 지었다.

“아니.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숨 쉬고 있죠.”

“여기 내 앞에서.”

“네. 아이든의 앞에서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항상 존귀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든이 상체를 완전히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대는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군. 또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나? 어디까지 놀라울 셈이지?”

“…미안해요. 나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날개라니 정말 말도 안 되잖아요.”

아이든이 내 고개를 들어 올려 입에 입 맞추고 미소 지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아름다운 부인.”

“그런 말 낯간지러워요.”

“이전에 눈도 충분히 신비로웠는데… 이젠 신비의 경지를 뛰어넘는군. 이 눈을 해서 프리온 황제를 만나면 정말 큰일이 나겠는데.”

“…저를 죽이려고 하겠죠…?”

“금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어, 리안. 알다시피 금색은….”

“신의 색이죠. 이젠 일라즈 님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따윈 그만두어야겠어요. 일부러 이러시나.”

“그대도 원인을 모른다는 말이로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든이 내 이마에 입 맞추고 나를 놓아주었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의자에 걸쳐 두었던 가디건을 유려한 움직임으로 걸쳐 입으며 말했다.

“내가 함께 갈 거야.”

“그건…!”

“안된다고 말해도 소용없어. 난 가야겠으니.”

아이든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검지를 내밀며 단호하게 말해왔다.

“그대를 절대 잃고 싶지 않아. 프리온에서 내가 그대 곁을 비울 일은 없을 거야. 맹세코.”

“하지만, 아이든…!”

“쉿— 그만. 그 이야기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이제 어쩐담….

나 역시 그와 떨어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먼저 그의 형제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구나.

“…알겠어요.”

“나는 잠깐 집무실에 다녀올게. 함께 점심 먹자. 심심하면 실내 정원이라도 산책하고 와, 리안.”

“…네.”

그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 침실을 나갔다.

텅 빈 침실에 우두커니 앉아 창 쪽을 바라보았다.

엔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못했어.

나는 들을 자신이 없었던 걸까?

…죽었겠지?

그 애는 어쩌면 정말로 그저 가엾은 아이였을 뿐일까?

우리는 혹여 서로 대립하는 위치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 인연을 쌓았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까…?

무릎을 세우고 이마를 묻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로 인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이가 죽어야 할까.

이게 마지막이기를.

제발 이젠 더 이상은 싫다….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힘없이 대답했다.

“…들어와.”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님. 깨어나셨다고 들어서요. 의원이 두고 간 탕약을 지금 드려도 괜찮을까요?”

고개를 들어 낯선 얼굴의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너 누구니…?”

“앗, 죄송해요, 마님! 저는 후원 받은 가문에서 온 벤이라고 합니다! 실습 중이지만 메리가 마님께 다녀와 보라고 해서….”

메리.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으니 이 아이를 믿어야 할까?

독이 든 차를 가져다주었던 사용인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낯선 이를 볼 때마다 이렇게 경계하고 의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때 보았던 그 자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다시 나를 죽이려고 하진 않겠지?

나는 괜찮겠지?

안전한 것이겠지?

손을 교차해 팔을 감싸고 벤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널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예?”

벤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두 눈을 확인하자마자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미안하구나. 가서 리제 좀 불러다 주겠니?”

“예, 마님!”

벤이 허겁지겁 침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팔을 감쌌던 손을 풀었다.

긴장으로 막혀왔던 숨이 탁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잠금장치를 풀어내고 창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털이 쭈뼛 설 정도의 추위였지만 나는 눈을 감고 찬 공기에 몸을 내어 맡긴 채로 눌러왔던 숨을 몇 번이고 편안하게 내쉬었다.

살 것 같다.

그래도 춥긴 정말 너무 춥네.

오들오들 떨면서 창문을 다시 닫았다.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걸어 침대로 가다가 문득 소파와 티 테이블을 바라보고 멈추어 섰다.

아이든이 출정하고 난 뒤에 저 자리에 앉아 있던 호위 기사들과 아슬란의 환영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아서.

생각해보면 짧다면 짧은 나날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야 그때 겪었던 나의 고통과 두려움, 괴로움들이 그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될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크리스티나가 두려운 데.

이 모든 일들도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쉽게 잊히지는 못하겠지.

“트라우마는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들이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창가에 걸터앉은 낯선 사람이 나를 향해 눈이 부시도록 웃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감고 소리를 질렀는데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고 공포에 질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정색 머리에 금안을 한 남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남자가 눈꼬리를 휘면서 미소 지었다.

“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그럼 다른 이들이 몰려오잖니.”

“누… 아! 누구세요…?”

다시 목소리가 나온 것에 화들짝 놀랐다가 부리나케 되물었다.

“너는 여전히 네 근본을 몰라보는구나.”

“!”

일라즈 님!

순식간에 순간이동으로 내 앞으로 다가와 선 일라즈 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다시 미소 지으셨다.

“그래. 너와 같은 흑발에 금안으로 바꿔 보았는데. 어찌. 잘 어울리느냐?”

…어떻게….

“잘 어울리냐니까?”

일라즈 님이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어 오셨다.

어떻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토록….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신 걸요.”

일라즈 님이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래. 내가 보아도 그렇다. 너는 참으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 내가 지은 생명체 중엔 단연 으뜸이로구나.”

“아….”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오신 것이구나….

얼굴로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하지만 정말로 나와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인걸.

“그것은 내가 너와 차원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여긴 꿈이 아닌데… 어떻게….”

“그 또한 내가 차원에 제약받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겠고.”

“창문이 잠겨 있었는데….”

“내가 창으로 다니길 원하느냐? 그리해 주마.”

“아,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말로…!

머리로 들려오던 목소리가 아니잖아…?

“하하. 당황하는 모습이 꼭 놀란 토끼 같구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왔으니 말도 인간처럼 해야지. 이곳은 신의 세계가 아니지 않으냐. 그것보다 입을 열어 말로 해야 하는 것은 좀 불편한 것이로구나.”

“그렇구나….”

작게 중얼거리는데 일라즈 님이 침실을 둘러보시면서 조용한 걸음으로 침대로 가서 걸터앉으셨다.

“이런 것 위에서 잠이 드는 것이로구나.”

“예, 일라즈 님.”

“가까이 오거라.”

걸음을 옮겨 그의 앞까지 걸어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어찌 그리 불편한 자세로 앉는 것이냐?”

“인세에서 이 자세는 상대에 대한 예를 보이는 것이며 충성의 표를 다하는 것입니다, 일라즈 님.”

“호오. 그러니 내게 충성을 다하겠다?”

“이미 다하고 있는걸요.”

“하하. 그래. 너는 충분히 잘 해내 주고 있지.”

일라즈 님이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보고 싶었다, 내 딸아.”

“언제나 지켜보고 계신다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나는 언제나 널 보고 있지. 하지만 네가 날 보지는 못하잖느냐. 이렇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만나는 것이 나는 무척 좋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예. 저도 좋습니다.”

“그래. 모든 기억을 다 떠올리고 나니 어떻더냐?”

모든 기억….

“좋았습니다. 무척 좋았습니다. 일라즈 님께서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요.”

일라즈 님 역시 소리 내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가야. 궁금한 것이 무척 많으리라는 것을 안다. 때가 되면 네게 모든 답을 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일라즈 님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금안이 애정을 가득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눈은 이제 다시 본래로 돌아가지 않는 것인가요?”

“그래. 내 선물이 맘에 들지 않으냐?”

일라즈 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오셨다.

선물… 이었구나.

그때 그 말의 의미가 이 눈이었어.

당황한 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난처한 상황에 처했어요.”

“…시론 때문이구나. 프리온의 황제 말이다.”

잠시간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던 일라즈 님이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그 자리를 빼앗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일라즈 님.”

왠지 모르게 부모에게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중요한 사안인걸.

“그 아이 또한 아델르크가 아니냐.”

일라즈 님이 미소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말씀하셨다.

“신의 뜻을 행하는 자. 그 성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안다. 걱정 말거라. 다 잘 될 것이다.”

“…더 이상 저로 인해 누군가가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요. 이제 더는 피 흘리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어요.”

“약조하마.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정말 안심해도 되는 것이겠지?

일라즈 님이 미소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오셨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일라즈 님의 손길이 시원하고 좋아 얼굴을 부볐다.

“하하. 정말 아기 같구나. 리안. 다 잘 될 것이다. 네가 편해졌으면 좋겠구나.”

‘똑똑똑’

“마님! 저 리제예요!”

“아!”

나는 화들짝 놀라 일라즈 님을 바라보았다.

그저 부드럽게 웃고 계시는 걸 보고 난처한 마음이 되어 어쩔 줄 모르다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리제! 탕약! 탕약을 가져다주겠니? 따뜻하게 데워오렴!”

“네, 마님!”

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큭큭 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일라즈 님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제가 웃기세요?”

“내가 널 난처하게 만들었구나?”

“…아시긴 하셨군요.”

내 부루퉁한 대답에 일라즈 님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더 호쾌하게 웃으셨다.

“그래. 넌 원래 그런 아이였지. 그래도 참으로 맹랑하지 않으냐.”

입술을 삐죽이자 일라즈 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여쁘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도 일라즈 님은 항상 내게 저 알 수 없는 말을 하시곤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여쭤보니 동쪽 나라에선 예쁜 아이를 보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여쁘다.

어감이 참 듣기 좋은 말이었다.

“어여쁘다….”

“그래. 참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아이다.”

“과분한 칭찬이네요.”

“과분하지 않아.”

일라즈 님은 다시 한번 내 뺨을 어루만지시고 손을 거두어 가셨다.

그리고 진지해진 얼굴로 말하셨다.

“릴리아나. 이제 이자벨이 하지 못했던 일의 마지막을 장식해다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곧 알게 될 거란다. 그보다… 엔젤이 죽은 것에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거라. 그 아이는 평안하다.”

“아….”

짧은 침음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진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내 어머니, 아버지도 그렇게 평안하시겠지.

그래.

그것으로 되었다.

모두들 이젠 그냥 평안하기를.

“그 애를 원망하지 않으냐? 미워하지 않아?”

그 애를 원망하냐고?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나?

우리의 지난 과거가 다시 리셋 되는 일은 이제 벌어지지 않을 테고.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관계가 좋아 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 우리 둘의 개인적인 감정만을 처리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니까.

나나 그 애나 도대체 누굴 향해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목적 없는 감정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건 정말이지 의미 없는 일일 뿐이다.

“원망했고, 미워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좀 더 복잡한 감정이 들어요.”

게다가 그 아이는 이용당했을 뿐이니까.

악신의 아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저지른 것들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나는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느꼈고, 부모를 잃었고, 아이든 마저 잃을 뻔했다.

마냥 가엾기만 하냐고 하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가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했던 말만큼은 모두 진심이었다.

나는 그 과거 속에서도 분명히 하루하루 행복한 날들이 있었다.

그것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일라즈 님이 나를 품에 부드럽게 안아주시곤 등을 토닥여 주셨다.

“너는 언제나 변함이 없구나. 나의 리안. 행복해지거라. 죽을힘을 다해.”

“…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눈앞엔 텅 빈 침실만이 나를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무릎 꿇고 앉은 채로 일라즈 님이 사라지고 없는 빈 카펫을 바라보았다.

그럴게요. 반드시.

***

리제가 가져온 탕약을 마시고 아이든과 점심 식사를 했다.

알고 보니 벤이라고 했던 사용인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견습 하녀가 맞다고 했다.

다시 만나면 꼭 사과부터 해야지….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황실로부터 전서가 왔다.

아이든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집사의 손에 들린 전서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작부인께 온 전서입니다.”

“수신인이 나라고요?”

놀라서 되묻자 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봐, 리안.”

나는 아이든의 말대로 전서를 받아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프리온과 알란, 헬리언과 우리 제국 각지에 퍼져있던 마법사 잔당들의 일부가 자진해서 항복해왔고 나머지 잔당도 모두 손쉽게 붙잡았다.

그런데 프리온의 황제가 마법사 잔당들에 대한 처벌과 조치를 이자벨 황녀의 자손인 내게 일임하겠다고 했고, 모든 잔당들을 제국에 넘겨 버렸다.

하여 현재 황실 감옥에 50여 명이 넘는 마법사 무리가 갇혀 있으니 속히 입궁하여 입장을 밝히라는 것.

말이 좋아 그렇다는 거지 말투는 거의 시비조에 가까웠다.

황제는 지금 몹시 불쾌한 것이다.

나는 전서를 아이든에게 넘기고 칼튼을 바라보았다.

“마차 대기시켜 주시고, 리제와 마리 올려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데 편지를 다 읽은 아이든이 따라 올라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와 함께 가.”

“네. 그럴게요.”

“리안, 리안, 리안!”

다급하게 불러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리안. 내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아이든.”

“과한 걱정이라는 말하려는 거라면…!”

아이든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프리온의 황제가… 제국의 황제가 아닌 나를 지목했어요. 이제 황제가 나를 견제하겠군요. 그렇죠? 그는 욕심이 많은 자니까.”

“…릴리아나.”

아이든이 눈을 감고 뺨을 감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맹세코 그럴 거예요.”

아이든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대를 잃지 않아. 어떤 경우라도.”

“네. 그럼요. 알다시피 저도 그렇게 쉽게 죽을 위인은 아니랍니다.”

아이든이 내 농담에 입꼬리를 올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헛웃음을 뱉어낸 아이든이 눈꼬리를 휘어 접으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어련하실까.”

“저는 30분이면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로비에서 봐요, 아이든.”

“그래.”

짧게 서로 입 맞춘 뒤 나는 서둘러 2층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수수하게 입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공작부인의 위세에 걸맞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드레스룸에 도착해 옷을 훑어보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이미 눈엣가시로 박힌 이상 더 좋아질리는 없으려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급하게 말했다.

“들어와.”

리제와 마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르셨어요, 마님?”

“그래. 입궁 채비를 해야 해. 드레스는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걸로. 장신구는 다이아로.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되 저렴해 보이지 않게. 무슨 말인지 알지?”

“예, 마님.”

리제가 드레스를 고르고 마리가 장신구와 신발을 고르러 간 사이 나는 드레스룸 한가운데 마련된 소파에 앉아 손톱을 물었다.

프리온의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그토록 견제해야 할 내게….

황제는 나를 궁으로 불러들여 뭘 어쩌려는 것일까…?

사실상 마법사 잔당의 처치에 대한 것은 내게 이야기하지 않고 황제 마음대로 했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프리온의 황제에게 내가 했다 속였어도 누가 알겠는가.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그보다 나는 마법사 잔당들을 대체 어쩌고 싶은 거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마님. 환복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리제에게 몸을 맡기고서 거울에 비친 금안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을 어떻게 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살아남아야 해.

지혜롭게 처신하자.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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