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작의 아내로 사는 법 4권 (완)
31. 악신의 제물(2)
응접실에는 침실보다 배는 크기가 더 큰 벽난로가 있었다.
겨울이 찾아왔어도 항상 사용하지 않다가 오늘은 손님을 위해 나무가 가득 들어갔다.
무엇이든 전부 태워버릴 기세로 불을 뿜어대는 통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땀이 뻘뻘 나고 등이고 팔이고 할 것 없이 간지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몇 번째 입어보는 모피코트인지 모르겠다.
이런 걸 입고 마차에 오르면 말이 무거워 마차를 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나야 따뜻하긴 하겠지만….
“여기 다른 디자인의 코트가 2벌 더 있습니다, 부인.”
마담 클레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색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입어 보란 말이에요?”
마담 클레어가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쌌다.
“그럼요, 부인. 부인은 워낙 미모가 출중하셔서 피팅 해보는 즐거움이 있답니다. 각하께서 특별히 명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국뿐 아니라 물 건너까지 수소문해 가장 좋은 것들로만 가지고 온 것이랍니다. 사양 말고 전부 입어 보세요.”
사양이라니…!
내가 겸양이나 떠느라고 이러는 게 아닌데…!
더워서 미칠 것 같아!옆에서 피팅을 돕던 리제에게 팔을 내밀고 힘없이 말했다.
“벗기거라. 이제 혼자 벗는 것도 못 하겠다.”
“예.”
리제가 부리나케 내 몸에서 코트를 벗겨냈다.
끔찍한 무게에서 벗어나고 나니 살갗에 바람이 통해서 막혔던 숨이 다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못 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파에 힘없이 몸을 맡겼다.
“나는 더 이상은 못 입어 보겠어요. 어차피 내 눈엔 다 그게 그거예요, 마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아쉬워라.”
마담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속이 답답하니 시원한 음료 좀 가져다 달라 해 주겠니, 리제.”
“예, 마님. 조금만 기다리셔요.”
리제가 응접실을 나가는 소리를 뒤로하고 말했다.
“적당히 입어 보았으니 그대 눈에 차는 것으로 두 벌 정도만 골라주세요. 마담의 안목이 훌륭하니 골라주는 것으로 하겠어요.”
실제로 그녀가 알아서 만들어온 웨딩드레스는 아주 훌륭했다.
듣기로는 내 결혼식이 치뤄지고 난 후로 제국의 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결혼식에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고 했다.
제국의 귀족 여성들이라면 공작부인을 선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나 뭐라나.
사교계에서 나를 그렇게 까 내렸을 땐 언제고.
나도 같은 여성이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종속들이었다.
마담 클레어는 영광이라며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매사에 호들갑을 떠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의 장사치가 그러하듯 자기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안달을 내지도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그런 실속을 차리려고 했다면 그녀는 지금보다 더 큰 돈을 벌어들였을 것이다.
똑똑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지, 너무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점 때문에 공작가와 황실이 그녀에게 만족하는 것이겠지만.
살갗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다.
설렁줄을 잡아당겨 들어온 사용인에게 내게 부채질 좀 해달라고 말하고 지친 표정으로 마담을 바라보았다.
“제가 부인을 좀 힘들게 해 드렸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부인의 체형에 맞게 수선해 가장 예쁜 것으로 2벌을 추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부인.”
“듣던 중 가장 반갑고 기분 좋은 소리네요.”
“그러면 이제 겨울 드레스를 한 번 보시겠어요?”
나는 사색이 되어 커진 눈으로 마담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또 뭘 입어 보란 말이에요? 나 땀범벅이 되었어요, 클레어!”
“아하하. 송구합니다. 이번엔 입지 않고 눈으로 보고 맘에 드는 것을 고르셔도 충분합니다. 제가 부인의 체형을 알고 있으니 맞춰 가져다드릴 겁니다.”
휴. 살았다.
또 입어 보아야 했다면 난 정말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리제가 시원한 음료를 가지고 돌아와 내게 건네주었다.
“고맙구나.”
잔을 받아 두어 모금 들이키고 나니 뱃속까지 시원해져 살 것 같았다.
클레어는 두껍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파일을 두 개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걸 또 다 보고 고르라는 말이야…?
나는 기가 질려서 클레어를 바라보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마담?”
“예?”
“나는 이런 의복 쇼핑에 쓸 수 있는 돈이 아주 많아요.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요. 이런 걸 구경하고 갈아입고 하는 재미를 나는 전혀 모르겠어요. 알다시피 제가 체력이 그렇게 튼튼한 편은 못되어서 좀 지치기도 하고요.”
“이번엔 그냥 눈으로 보시면 되는 것인데요?”
“네. 그런 것이어도 이젠 힘들어서 솔직히 쉬고 싶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아니.”
다시 잔을 리제에게 건네면서 연이어 말했다.
“그대의 안목을 믿겠다고 했잖아요. 매 계절이 지날 때마다 내게 어울릴 것 같은 의복이 있다면 가격 상관하지 말고 내게 가져다주세요. 나는 그렇게 많은 드레스가 필요하진 않아요. 유행을 타는 사람도 아니고요. 사교계에 나가 유행을 선도할 생각도 없으니 그저 5벌 정도면 충분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은 클레어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미소 지었다.
“잘 알겠습니다, 부인. 그편이 제게 더 즐거운 일이 될 것도 같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마담.
말할 기운도 더 이상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배웅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일개 장사치입니다. 공작부인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요.”
아하하. 침실로 올라가려던 건데….
클레어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응접실 바닥을 울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침실로 가시겠어요?”
부채질을 해주던 사용인을 물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쉬고 싶구나. 침실 난로에 불은 적당히 떼렴. 이제 불길만 봐도 속이 턱 막히는 것 같으니.”
“후후후. 예, 마님. 그럴게요. 허기지진 않으세요? 침실로 디저트와 차를 좀 올려 드릴까요?”
“그럴까?”
나는 리제에게 적당히 대답해주고 상념에 잠겼다.
어제 황태자 전하는 왜 공작저까지 직접 발걸음 해 오신 걸까?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아이든은 그에 관해 한마디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내가 몰라도 될 사항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랬을까?
“주인님!”
상념을 깨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칼튼이 응접실 문을 열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다급하게 주인님을 찾습니다.”
나를?
궁에서 날 찾을 일이 대체 뭐가 있지?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에릭이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랐다.
현관 밖으로 나가보니 시종장 복장을 한 사내가 내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말했다.
“부인을 급히 궁으로 모셔오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나를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저는 그저 모셔오라는 명만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아이든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요? 겉옷이라도 걸치게 해 주세요. 호위를 데려가도 괜찮죠?”
“가는 길은 괜찮습니다만 황제궁에 들어가실 때는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십니다.”
“알겠어요.”
나는 부리나케 2층으로 올라가 내게 있는 옷들 중에 가장 따뜻한 외투를 걸쳐 입고 내려왔다.
에릭과 눈을 마주치니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죠.”
***
마차에서 내려서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예의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사색이 되어 달려 들어갔다.
몸 여기저기에 활이 꽂힌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든만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의식을 잃고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침대보가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만큼 피를 많이 흘렸다는 증거였다.
“아아… 아아…!”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옷 소매에 피가 묻었지만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잃게 될까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황태자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면목이 없어, 부인. 내가 호위를 대동 했어야 했는데. 환궁하는 길에 테러를 당했어. 목표가 나였던 거 같은데 아이든이 대신 뛰어들었어. 범인을 잡았는데 여자더군.”
여자!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
“지하 감옥에 가뒀어. 우선 치료가 먼저잖아. 고칠 수 있는 건가? 활이 아무리 뽑으려고 해도 꿈쩍도 안 해. 게다가 의원의 말로는 알 수 없는 독에 중독된 거 같다고 했어. 약이 없으니 헨델 사제를 불렀는데 부인을 모셔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군.”
다시 고개를 돌려 몸 여기저기에 꽂힌 4개의 활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신성력을 손끝에 몰아 활을 잡았다.
그 순간 뽑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새카만 기운이 폭발하듯 흘러나오며 4개의 활이 동시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활이 없어지고 난 자리에서 울컥울컥 검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마법이에요. 마법이 아직도…! 스펠른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멸당했지. 하지만 잡아온 여자가 그 활을 날렸고, 다른 독에 중독될 상황은 없었어, 부인.”
수행사제!
그자가 틀림이 없다!
“헨델 사제는 돌아갔나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했어. 죽어가고 있잖아.”
황태자가 하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확실히 아이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고, 입술은 핏기를 잃어갔다.
코 밑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희미하지만 숨결이 느껴졌다.
긴장으로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아이든은 이대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수행 사제를 찾아가는 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떨리는 호흡을 거칠게 뱉어냈다.
손바닥을 아이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지만 견뎌야 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피비린내가 코를 가득히 찔러 와 현기증이 일었다.
눈을 뜨고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어.
정신만 차리면 돼.
“사람들을 다 물려 주세요.”
내 말에 황태자가 곧 침실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물려주었다.
안에 남아 있는 이라고는 황태자와 에릭과 나, 아이든 뿐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손끝에 힘을 끌어모아 아이든에게 내보냈다.
처음에 꿈을 통해 아이든을 치료했던 것처럼 주문을 외울 필요는 없었다.
눈을 살며시 뜨자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활이 뽑혔던 자리에 모여들었다.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점점 구멍이 메워지고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상처가 메워지면서 아이든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세요!”
내 말에 황태자가 아이든의 얼굴을 잡고 옆으로 돌려 피를 다 토해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황태자가 아이든의 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처가 다 메워진 자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끈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몸 안에 있는 모든 독기를 정화하고 꺼져가는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어 주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어째서 헨델 사제가 불가능한 일이라 단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같은 자리에서 쉼없이 신성력을 소모하면 절대 헨델 사제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드러누워 쉬고 싶어질 만큼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체력과 신성력을 소모하고 있었는데, 순간 눈앞에 나타난 새카만 기운에 그만 화들짝 놀라 아이든에게서 손을 떼어내고 말았다.
“왜 그래?”
황태자가 놀라 내게 물어왔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독하도록 악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손을 떼어 내자마자 눈을 뜨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내게 위협해 오듯 일렁거렸다.
저건 단순한 독이 아니잖아…!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럴 힘이 있기는 할까?
덜덜 떨려 오는 손을 뻗어 아이든의 손을 잡으려고 해 보았다.
검은 기운이 그의 손에 몰리며 내 손을 쳐냈다.
“부인. 왜 그러냐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세요?”
떨려오는 목소리로 묻자 황태자가 무슨 소리를 하느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공포에 떨려오는 손을 맞잡고 마른 침을 삼켰다.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낯빛이 너무 안 좋아, 부인.”
“물러서세요.”
“뭐?”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내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단순한 독이 아니에요! 절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에릭이 서 있는 만큼 떨어져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이든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며 몸을 불리고 있었다.
아이든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갔다.
마치 그의 생명력을 먹이로 삼아 자신을 불려가는 것 같지 않은가…!
“어서요!”
다급하게 소리치자 황태자가 에릭이 서 있는 문 앞까지 뒷걸음질 쳤다.
황태자가 문 앞에 다다른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악신의 아이는 내게 이런 방식으로 복수를 하는구나…!
네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갔으니 이제 내 차례라는 것인가…?
멀쩡한 사람을 악신에게 제물로 바친 거야…?
악한 기운이 몸을 더욱 불려갈수록 온몸의 털이 쭈뼛 설만큼 소름이 끼쳤다.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덜덜 떠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울고만 있을 수는 없어.
아이든을 잃을 수는 없어.
다시 한번 온몸에 운용할 수 있는 모든 신성력을 끌어모아 손끝으로 보냈다.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인!”
“주군!”
놀란 두 사람이 뒤에서 동시에 소리쳐 나를 불렀다.
검은 기운이 나를 조롱하듯이 더욱 크게 일렁거리더니 한순간에 아이든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아이든이 다시 한 차례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눈에서 눈물이 의지와 상관없이 줄줄줄 흘러나왔다.
아아…! 그를 잃고 싶지 않아…!
그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릎으로 기어가 아이든의 손을 힘껏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아이든이 갑자기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아… 아이든…! 제발 버텨줘요…!”
울음에 먹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침을 삼키고 한 손을 떼어내 눈물을 닦아냈다.
바보 같다.
릴리아나, 정말 바보 같아…!
울고만 있으면 안 돼!
뭐라도 해야 해!
입술을 질근 깨무는데 그 순간 아이든이 두 눈을 번쩍 뜨자마자 침대에서 튕겨지듯 일어나 내 목을 움켜쥐었다.
“!”
“주군!”
“아이든!”
수… 숨이… 숨이 쉬어지지 않아…!
“…컥…! 아… 아이… 든…!”
그가 아니야…!
아이든의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매섭도록 나를 정면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내 목을 움켜쥔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크흑…!”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와 이젠 아이든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대로 끝인 건가…?
그를 영영 잃는 것일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할 수 있지…?
너무 고통스러워….
숨이 쉬어지지 않아….
더 이상은….
“주군! 정신 차리십시오!”
귓가로 파고든 에릭의 목소리에 두 손을 들어 목을 움켜쥔 아이든의 손 위에 포개어 올렸다.
등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새하얗고 거대한 깃털로 가득한 날개가 뻗어 나와 마치 제 의지를 가진 양 내 몸을 감쌌다.
아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개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그 여자의 아이로구나. 결국에 태어나고 만 불순물이여.”
“!”
그 여자라니…?
이자벨 황녀님을 말하는 건가…?
“보고 있는가? 그대가 그토록 아끼고 아꼈던 영혼이 내 손에 있구나. 즐겁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구나.
“신의 자손이여. 일라즈의 딸이여. 죽어라.”
이게…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든…?
“커헉…!”
목에 가해지는 힘이 더욱 강해져 이젠 완전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얼굴로 모든 피가 쏠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날개가 서로 교차하며 내 눈을 가려버려서 더 이상 아이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힘없이 눈을 감았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나는….
“…사… 랑… 해….”
흠칫!
아이든이 순간적으로 놀라며 손에 힘을 빼 나는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꼬꾸라졌다.
“콜록, 콜록, 콜록…!”
“…으아아…!”
“!”
아이든…?
고개를 휙 돌려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집요하게 그의 눈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검푸른 눈이다.
내가 아는 그 남자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기어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연신 기침이 터져 나오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울먹이면서 간절하게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우… 우리의 창조주, 일라즈 신이시여. 내, 내게 힘을 주소서. 흐윽.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소서…!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내게 주소서…! 그의 죄를 그에게 돌리지 마시고 내게서 찾으소서! 이 모든 것은 다 나의 생명의 죗값이니 내게서 찾으시고 그를 구원하소서!”
기도를 끝마치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 어쩌면 본능적으로 나를 보호하는데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신성력까지도 모두 끌어 모았다.
손에서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날개가 나와 아이든을 함께 감싸 안았다.
아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짐과 동시에 새빨간 눈동자로 돌아갔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체력의 한계였다.
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너는 정녕 일라즈의 딸이란 말인가…?”
아이든이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내 몸에서도 힘이 쑤욱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열 배는 느리게 흘러가는 착각이 일었다….
“안ㄷ….”
눈앞이 섬멸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은 여전히 화려한 궁이었다.
이전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빛은 사라지고 어둠 속에 곳곳에 설치된 벽 등으로 불을 밝힌 방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려오려다가 현기증이 일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체감으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당장 확인을 해야 한다.
내가 정말로 실패한 것인지.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회피하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든이니까.
곧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이 온몸이 아파왔지만 무거운 다리에 힘을 주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을 뻗어 등의 어깻죽지를 매만져 보았다.
날개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꿈이라도 되는 양.
손을 힘없이 탁 내려 뻗고 어기적 비틀거리며 힘겹게 한발씩 걸음을 떼어 침실의 문까지 다다랐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려 온 힘을 다해 열자 복도의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셨다.
한 팔로 눈을 가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다.
낯선 곳에서의 긴장이 탁 풀어졌다.
눈이 빛에 점차 익숙해져서 팔을 내리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에릭… 각하께서는 어디에….”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너무 울면서 악을 쓰며 기도했기 때문이었는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잔 탓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에릭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발을 떼려는 순간 또 한 차례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주군!”
“아이든… 아이든에게 데려가 줘요….”
에릭이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그에게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로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좀 더 쉬셔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잤죠…?”
“3일을 꼬박 주무셨습니다.”
3일… 사제! 악신의 아이!
“그 여자…!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설마 나 없는 동안 그 여자를 죽인 건 아니죠?”
에릭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애타게 물었다.
에릭이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지하감옥에 있습니다. 우선 들어가서 좀 쉬십시오. 각하께서는 괜찮으십니….”
“릴리아나.”
이 목소리…!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돌려 에릭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복도 끝에 서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나는 에릭을 붙잡았던 손을 놓고 그에게 온 힘을 다해 달려가 안겼다.
몸이 삐그덕 거리는 거 같았지만 그를 살려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취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에게서 떨어져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흐윽…! 내가 해냈어…! 실패 한 줄로만 알았는데…!”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이든이 얼떨결에 나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리안. 이렇게 뛰면 안 돼.”
“나는… 나는 당신을 잃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그가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다.
“그대가 날 떠나면 몰라도 내가 먼저 그대를 떠날 일은 없어.”
“아이든…!”
그가 나를 한동안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음은 금세 멎고 그가 살았다는 기쁨만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었다.
“점점 어리광이 늘어가는군. 리안. 난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 들어가자. 옆에 있어줄 게. 그대는 좀 더 쉬어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든과 손을 맞잡았다.
“어디 다른 데 아픈 곳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밤에 악몽을 꾼 다거나… 눈을 감으면 이상한 게 보인다거나….”
아이든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소 지었다.
“그런 일은 없었어. 아픈 곳도 없고 다 괜찮아.”
그와 손을 잡고 걸어오자 에릭이 아이든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이든 역시 고개를 까닥이며 에릭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문을 열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나는 아이든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고 그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딸을 키우면 이런 기분이겠군. 잘 때까지 손잡고 옆에서 동화를 읽어주겠지?”
“아이를 갖고 싶으세요?”
“그런 적 없었어. 한 번도.”
“네. 알고 있었어요.”
아이든이 내 손등에 입 맞추고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면 괜찮을 거 같단 생각도 들어. 물론 그대가 완전히 건강해진 다음에.”
“네. 건강해진 다음에요.”
“그대가 또 나를 살렸어. 그리고… 그리고 그대가 죽을 뻔했지. 나 때문에.”
아이든이 손잡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고통스러워 보여 내 마음도 편치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아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내 손등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릴리아나… 내가 살아난다 해도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했잖아. 앞으로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당신이 없는 세상도 내겐 의미가 없는 걸….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야기가 끝나질 않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이든.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이든이 내게 얼굴이 보이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 손등 위에 뺨을 기대며 아프게 미소 지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고 싶어. 허락해 줄래, 부인…?”
“무슨 소리에요. 당신은 내 남편이잖아요. 당연히 되는 걸 물을 필요 없어요.”
내 대답에 그가 다시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따스한 감각이 손등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