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39)

30. 불안하게 한 건 나였구나

기다림은 한없이 길어졌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더 지났다.

어느새 제국에는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이 찾아왔다.

그동안 스펠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아이든은 제도의 도시 중 하나인 스윈힐을 공작령으로 하사받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 황제가 아이든에게 수많은 것들을 주기 시작할 때부터 공작령을 주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는 전쟁의 공을 치하한다기보단 주고 싶어 한 것을 주기 위한 명분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이든은 언제나 공작령은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해왔으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거절할 수 없는 공치사였다.

그렇게 아이든은 스윈힐 공작이 되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따뜻한 물이 든 그릇과 물수건이 올라간 쟁반을 손에 들고 침실 문 앞에 선 아이든이 중얼거렸다.

리안이 곁에 없으면 모든 게 무의미했다.

그는 점차 희망을 잃어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이를 아득 물었다.

괜찮다.

릴리아나는 일어날 것이다.

그녀는 강한 여자니까.

자신보다도 더….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닫을 새도 없이 우뚝 멈추어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청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쟁반이 힘없이 미끄러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침대와 바닥을 따라 이어진 핏방울의 흔적에 아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바로 릴리아나에게로 달려가 품에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그녀의 살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그토록 그리웠던 얼굴. 그토록 그리웠던 냄새.

진짜 아이든이 사랑하는 그녀였다.

“리안…!”

마음껏 그녀의 살냄새를 맡았다.

그녀를 잃는 줄로만 알았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심장은 충만함으로 온통 가득 찼다.

그녀가 아이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이든은 당혹감을 느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리안, 리안. 나를 봐. 눈 뜨고 나 좀 봐.”

“흐윽… 흐윽… 으흑….”

리안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심장이 찌르듯 아파왔다.

홀로 견뎌야 했던 시간만큼 두려웠을 것이다.

아팠을 것이다.

제가 전쟁터에서 정신을 놓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홀로 그 아픔을 감내했다.

누구에게도 쏟아내지 못할 감정을 끌어안고서.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대 앞에 이렇게 내가 있잖아.”

리안의 얼굴을 양손에 감싸고 애타는 마음으로 위로했다.

이제 그대 옆에 내가 있잖아.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게.

다 뱉어내지 못하고 삼켜낸 말끝에 고통 섞인 숨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대신 슬퍼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으흑… 사랑… 흐으윽….”

사랑, 이 와중에?

아이든은 얕은 실소를 토해냈다.

그렇게 아프면서, 사랑을 말하는 그 입술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나도 정상은 아니겠지.

아이든은 망설임 없이 리안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깊고 거칠게 그녀를 탐했다.

이 시간이 영원해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여전히 심장은 아려 오고 있음에도, 이 순간 어느 때보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역시 그대가 아니면 안 돼.

그녀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옅게 느껴지던 체향이 짙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녀에게 영혼까지 지배당한다 해도 좋아.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야.

그녀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파묻고 깊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아…!”

리안이 몸을 움찔거리며 떨어댔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숨결을 토해냈다.

“사랑해… 사랑해… 리안… 릴리아나….”

얼마나 부르고 싶던 이름인지.

얼마나 속삭이고 싶던 고백인지.

들끓는 마음에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모두가 평생 자신을 저주한다고 해도 좋았다.

그녀 하나만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자신은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아이든은 빠르게 리안을 품에 안고 침실로 걸어가 그녀를 눕혀 놓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뜬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이 미치게 좋았다.

그는 리안의 잠옷을 순식간에 벗겨내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사랑해, 리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제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 너무도 가벼운 그 말을 뱉어내는 대신 아이든은 그녀의 온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택했다.

서로의 달뜬 호흡과 신음만이 침실 안을 가득 메웠다.

***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던 신체는 생각보다 더 볼품없이 메마르고 약해져 있었다.

나는 꽤 많은 날들을 침대에서만 보내야 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마냥 먹고 자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든은 늘 내 기분을 살펴주고 내가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혹시라도 내가 삶의 의지를 잃고 또다시 나쁜 생각을 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인지 한동안은 늘 기운이 없었다.

너무 오랜 날들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보낸 탓인지 음식물을 넘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물. 그다음엔 스프. 그다음엔 말간 죽.

고형의 음식을 먹게 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든은 내게 스펠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저를 찾아와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는 내게 과하리만큼 고마움을 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퍽 난처했다.

잊고 있었던 헨델 사제와의 만남을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아팠는데, 그녀가 벌인 일의 여파가 아이든에게도 닿았던 것이다.

그는 어디서부터 짚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을 뒤에서 벌인 것이 모두 헨델 사제라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부 아이든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프리온의 황제와 만나야 한다는 것까지도.

그러고 보면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황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이렇게 그냥 흐지부지되어 만나지 않아도 된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이든은 아주 심각해졌다.

독살당할 뻔했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후로는 내가 먹을 모든 음식을 그가 먼저 맛보기 전에는 식기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에릭과는 좀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과묵하게 내 뒤를 지킬 뿐이었다.

그가 본인의 감정을 내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에릭의 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 역시 우리가 어쩌지 못할 관계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아이든에게 집중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하루하루가 벅차고 행복했다.

내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고 난 후에는 그와 함께 부모님이 안치된 곳을 찾아갔다.

아이든이 진심으로 묵념하며 죽은 자의 길을 빌어주었고, 나를 품에 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그 절망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저택으로 돌아와서는 아슬란에게 편지를 썼다.

답장이 너무 늦어 미안하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이든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다 비약된 루머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적어 붙였다.

생각해보면 처음엔 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홀로 버텨야 한다는 외로움 때문에 모든 문제가 너무 크게만 다가왔었다.

하지만 이제 내 옆에는 아이든이 있다.

“헨델 사제를 만나봐야 할까요?”

침실로 서류를 가져와 일하던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직접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며. 그럼 연락이 오겠지. 좀 더 기다려보는 게 어때. 그대가 깨어났다는 연통은 내가 이미 넣었으니 알고 있을 거야.”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내가 쓰러진 걸 헨델 사제가 알고 있었나요?”

“그대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몇 번 찾아오기도 했어.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신성력도 무의미하고 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걱정은 꽤 되었던 모양이더군.”

나는 헛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녀가 나를 정말 걱정했다면 그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 말고 다른 걱정이 있다면 지금 다 이야기해, 리안.”

“그래 보이나요?”

아이든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왔다.

옆에 걸터앉아 내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 넘겨주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야. 더 이상 그대가 아픈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눈을 내리깔고 이불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저택으로 찾아오는 제국인들에 대해서 들으셨죠? 그들에 대한 대책도 필요해요. 수행사제인 척 아이든을 만났던 그 여자도 잡아야 하고… 어쩐지 부모님을 죽인 밀리언 해슬 백작의 딸이 수행사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계속해서 지울 수가 없어요. 그는 늘 슬하에 자식이 없는 사람처럼 굴곤 했거든요. 만약 이 의심이 정말이라면 하루빨리 잡지 않으면 그 여자는 영영 잡을 수 없는 곳에 숨어 버릴지도 몰라요.”

“수행사제를 잡는 건 내게 맡기면 돼, 리안.”

“내가 바보같이 한 달이나 누워있지 않았더라면….”

“또 그런다.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대 탓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이든. 환영을 통해서 신을 보았어요. 그 얘길 내가 안 한 거 같아서요.”

“신? 일라즈 말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든이 믿어 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

누군가와 이 문제로 상의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당연히 아이든이어야 하니까.

“수행 사제를 잡고 싶다면 나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자와 나는 비슷한 사람이래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내 말에 아이든 역시 심각한 얼굴이 되어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대와 비슷한 사람이라. 부모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든가. 그런 거라면 가능성이 있겠군. 해슬 백작이 자식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했으니까. 실제로도 딸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아이든이 시선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신탁의 아이잖아. 그 여자가 혹시라도—.”

“그 여자가 악신의 아이란 말인가요?”

흠칫 놀라며 되묻자 아이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대와 비슷하다고 했으니 그대에 대해 생각해보면 되는 문제잖아. 그런데 그대는 신탁의 아이고,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또 뭐가 있겠어?”

“신탁은 본래 제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든가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신탁의 아이가 악신과 손잡은 마법사들로부터 세상을, 프리온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죠. 만약 악신의 아이 또한 같은 것이라면, 그자의 소명은….”

“신탁의 아이를 죽이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살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제 아비가 죽었는데.”

“애초에 서로 슬퍼할 정이 없을지도 모르죠.”

“리안. 스펠른은 모조리 몰살당해 죽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린 아이까지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었다고. 유일한 생존자는 수행 사제뿐이야. 그자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습관처럼 손을 올려 손톱을 까득 물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말을 하다 말고 내 손을 잡아 오는 아이든의 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톱을 내려다보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리안. 괜찮아.”

“아… 아….”

시야를 내려 내 손톱을 바라보았다.

깨지 않고 잠들어 있던 한 달 동안 꽤나 회복되어 정상적인 손톱 길이만큼 길어져 있었다.

물론 방금 깨물어 좀 빨갛게 되긴 했지만.

내가 불안할 때마다 손톱을 씹는다는 걸 그가 알고 있구나.

다시 눈을 들어 올려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이 습관은 고치는 게 좋겠어, 리안. 나는 에릭처럼 그냥 넘어갈 생각 없어.”

“알았어요.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저택에 호위를 늘렸어. 그대가 호위로 세웠던 용병들은 돌려보냈고. 울프하운드로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세울 거야. 휴와 노아도 있고. 또 나도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지었다.

“네. 맞아요. 아이든이 있네요. 안심이에요.”

아이든이 미소 지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대를 절대 잃지 않을 거야. 수행 사제를 잡아들이는 건 차차 함께하면 돼. 지금은 건강 회복만 우선으로 생각하자.”

“네, 아이든….”

고마운 마음에 미소 지으며 그를 마주 끌어안다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참, 그런데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아이든! 에릭에 관한 건데….”

그가 화들짝 놀랐다가 피식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이미 알고 있어.”

“네? 어떻게….”

“검에 그대의 손수건이 달린 걸 보고 애초에 눈치챘어. 그편이 그대에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별말 하지 않았던 거야. 에릭도 프리온 사람이니까.”

아아… 그랬구나.

깨어나자마자 그에게 먼저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뭔가 숨기고 거짓말 한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이든은 미소 지으며 내 입술에 버드 키스를 해주었다.

“그렇게 신경 쓸 일 아니야, 리안. 울프하운드 녀석들이 전부 그대 차지가 된다 해도 난 좋아. 걱정하지 마.”

그가 내게 키스 할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오며 작게 속삭였다.

“그 모든 걸 가진 그대가, 내 것이잖아.”

그런…!

얼굴로 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코와 입술 바로 앞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숨결도, 그의 목소리도, 그의 말도….

그의 모든 것이 내게로 전해지고 나면 심장이 곧 폭발해 죽을 것만 같았다.

이 떨림이 그에게 전해질까 봐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그, 그렇죠. 전 당신 거니까. 제 기사들도 전부 당신 거나 마찬가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갑자기 아이든이 내게 몸을 더욱 바싹 붙이며 속삭여왔다.

“키스해 줘, 리안….”

“무슨… 저리 가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베개로 아이든의 얼굴을 퍽 때려버렸다.

반동으로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린 아이든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큭큭대고 웃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고 당당할 수가 있지?!

사람이 부끄럼도 모르나 봐!

얼굴로 열이 더 많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만 웃어요!”

***

눈을 뜨자마자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렸다.

새로 리모델링한 부부 침실 창문에 아직 커튼을 달지 못한 탓이었다.

칼튼을 만나면 무조건 커튼 얘기부터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꾼 꿈 때문에 정신이 멍했다.

개인 기도실 안에서 아이든과 너무 비슷하게 생긴 사내 두 명이 가족이나 개인을 위한 기도는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든을 위한 기도들만 늘어놓는 것을 보았다.

단편적인 장면이었지만 나에겐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아이든이 제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옆에서 아직 자고 있는 아이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쩌면 잘못된 오해 속에 살면서 그의 형제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형제들은 저토록 아이든을 위하고 있는데….

그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그의 맘속 깊은 곳에 자리한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응어리들도 조금은 풀어져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손을 올려 아이든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넘겨보았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미끄러지듯 유려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아이든이 간지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내려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릴리아나….”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아이든.”

그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오늘도 아름답네.”

“당신도요.”

“키스해 줘.”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뒤통수를 끌어당겨 깊게 키스해 왔다.

한참 만에야 떨어져 나간 그가 나른하게 풀린 표정으로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모닝 키스는 이 정도는 돼야지, 안 그래?”

“시도 때도 없잖아요, 아이든.”

“그대가 너무 사랑스러운 탓이지. 너무 황홀한 탓이고.”

“다른 영애와 결혼 했어도 그랬을 거잖아.”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가 상체를 일으켜 앉아 나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말했다.

“릴리아나. 내 인생에 다른 여자 따윈 없어. 그대가 아니었다면 평생 혼자였을 거야.”

“이런 황홀한 기분도 모른 채로 살았을 거라구요?”

“그대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겠지. 내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거든. 물론 이젠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아이든이 내 잠옷을 끌어 내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아침이에요, 아이든.”

“나도 알고 있어, 리안.”

그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오후에 황궁에서 전서가 왔다.

헨델 사제가 보낸 것이었는데, 일주일 뒤에 프리온의 황제가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전서를 손에 든 채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전에 헨델 사제 앞에서는 황제가 찾아오길 바란다고 했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나는 일개 공작부인일 뿐이고 상대는 일국의 황제였다.

이미 그렇게 뱉어냈으니 솔직히 말을 바꾸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기는 했다.

게다가 아이든에게 같이 프리온으로 가달라고 하기엔 그가 제국을 비운 시간이 너무 길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그는 오늘 결국 집무실로 돌아갔다.

온전히 일에만 집중해야 할 것 같다고.

그에게 동행을 요청할 순 없다.

그렇다고 또 그와 헤어져야 하는 것은 단 하루라도 더 이상은 싫은데….

게다가 만나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나는 그 황좌에 관심이 없다.

평생 제국에서 평안하게 놀고먹으며 숨만 쉬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뭐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매번 신성력을 사용할 때마다 황제가 그것을 느끼는 것이면 어쩌지?

근데 그게 가능은 한 일인가?

“주군.”

흠칫.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에릭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굳은 채 서 있었다.

“어, 언제 들어왔어요?”

“1분은 좀 넘은 것 같습니다.”

“왜 난 몰랐지.”

“각하께서 혹여 주군이 또 손톱이라도 깨물고 계실까 봐 걱정이 되신다고 해서….”

나는 움찔하며 눈을 내려 내 왼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손톱을 씹고 있었지?

또 나도 모르게 그만….

“고민이 있으십니까?”

고개를 들어 에릭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나를 볼 때 항상 저런 표정이구나.

걱정되어 죽겠다는 표정.

모든 게 맘에 안 들어 죽겠다는 표정.

한숨을 뱉어냈다.

괜찮아.

무시하면 된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고.

차라리 잘 됐다.

한참 바쁜 아이든을 붙잡고 얘기할 수 없으면 에릭에게라도 상담을 받아야겠다.

게다가 할 이야기도 있고.

“잘 됐어요. 좀 앉아봐요, 에릭.”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티 테이블 의자에 에릭이 앉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맞은편에 앉은 내가 전서를 에릭에게 넘겼다.

빠르게 전서를 읽은 에릭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는 제가 가겠습니다, 주군.”

“내가 뭘 고민하는지 알겠어요?”

“…….”

에릭이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무슨 말이라도 제발 했으면.

그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빠르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에릭,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숨 막혀 죽겠네.”

“각하와 상의하실 일이라고 판단됩니다만.”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아이든에게 말하면 그는 당연히 동행한다고 할 거예요. 나 때문에 제국을 또 비우게 하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그럼 전처럼 프리온의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라고 하십시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미간을 찌푸리며 애절하게 되묻자 에릭이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주군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으십니다.”

“네?”

“현 프리온의 황제는 황실 적통의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는 서자의 또 다른 서자입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황실 서열 1위였던 이자벨 황녀님의 핏줄이신 주군에 비할 바가 될 수 없습니다. 신성력으로 따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릭. 그 말을 돌려 말하면 그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죽일 것이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자를 죽일까요? 원하신다면 언제든—”

“아니요!”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심장이 다 쿵쾅거린다.

해슬 백작을 죽이고 나더니 사람 죽이는 데에 거리낄 게 없어졌나, 어떻게 저렇게 죽인다는 말을 서슴없이….

“말이 통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그런 관계일 겁니다.”

내 행동에 조금도 놀라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말하는 에릭을 보며 기가 막혔다.

자리에 다시 털썩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죽음… 지겹네요, 이제, 그 단어조차.”

“…송구합니다.”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탓하며, 죽이고, 또 죽이는 관계일 수밖에는 없는 거예요? 나는 이제 너무 지쳤어요, 에릭. 모든 걸 빨리 끝내고 편해지고 싶단 말이에요.”

말을 마치고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고 또다시 한숨을 뱉었다.

에릭이 눈을 내리깔고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해드려야 편해지시겠습니까.”

에릭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려 옆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나는 이제 누군가를 죽이거나 내가 죽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 너무 힘….”

“주군께서는 모른 척 계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시 눈을 돌려 에릭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모든 건 제가 할 것입니다. 그 어떤 고민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주군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편히 계시면 됩니다.”

“에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우고 모든 걸 짊어지면 누가 알아줘?

“정말 안 되겠네. 당장 나가요.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어.”

“주군….”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했잖아! 나가!”

에릭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슬픔과 고통, 간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마저 안 됩니까?”

“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압니다. 그럼 저는 뭘 할 수 있습니까? 주군을 위해 그저 저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허송세월하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습니까?”

아… 이 자를 대체 어쩌면 좋을까.

내가 잘못 생각했다.

외면하고 모른 척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이 자는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괴로웠구나.

그 긴 시간 동안 그랬구나.

더 이상은 안 돼.

곁에 붙잡아 두고 싶다고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나는 눈을 꾹 감고 입술을 짓씹었다.

“에릭. 그대는 오늘부로 울프하운드로 돌아가세요. 맹세의 깃도 이 자리에 놓고 나가세요. 명령이에요.”

“…!”

눈을 뜨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가 충격받아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 주군….”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요. 나가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도를 넘어 오만하게 굴었습니다. 감히 주군께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릭.”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곁에만 있겠습니다. 그것마저 하지 말라 하시면…!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감히 존귀하신 분께 감히…!”

에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에 묶인 맹세의 깃을 손으로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

“내 곁에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럽지 않아요? 나는 에릭에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한 거예요. 아이든과 함께 있는 나를 보는 것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이에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지킬 수만 있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나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답답한 인사다.

편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나는 당신 따위 평생 돌아보지 않을 건데.

“에릭 슈미트.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에릭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는 걸 보면서 말했다.

“아이든의 형제를 찾아볼 생각이에요.”

“예?”

에릭이 멍한 얼굴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형제.”

다시 한번 되짚어 말해주자 에릭이 ‘아.’하는 짧은 신음 끝에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각하의 동생분들을 말입니까?”

“프리온에 있어요.”

“혹시….”

“꿈을 꿨어요. 그들 꿈을.”

“아….”

전서를 움켜쥔 손으로 탁자를 탁, 탁, 탁 두드리며 말했다.

“만나야겠어요. 내가 황제를 알현하는 동안 그대는 대신전의 개인 기도실로 가세요. 그들은 항상 같은 시간에 와서 기도하고 돌아가요. 그들을 찾아가 내가 만나기를 청한다고 전해주면 분명 바로 승낙할 거예요.”

“…주군의 호위는.”

“휴와 노아, 볼턴 경이 함께할 거예요. 에릭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싫다며. 할 일을 주었으니 잘 해낼 거라고 믿을게요. 그들이 선뜻 승낙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승낙하게 만드세요. 그게 에릭이 할 일이니까.”

“존명.”

에릭이 다시 고개를 수그리며 짧게 대답했다.

“나가 보세요.”

에릭이 돌아서 방을 나가는 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엎드렸다.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그를 곁에 두었다가 마음이 더 커지면 안 될 텐데.

이를 아이든과 상의할 수도 없고.

대체 저 마음을 어쩌면 좋담.

***

아이든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실내 정원을 거닐었다.

항상 저택을 답답해하는 나를 위해 아이든이 새로 만들어둔 공간이라고 했다.

겨울엔 정원을 산책할 수 없을 테니까.

실내 정원은 여러가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답고 꽤나 따뜻하고 아늑해서 함께 거닐면 마음마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든의 배려가 몹시 고맙고 행복했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뒤에서 떨어져 걷고 있는 에릭 때문이겠지.

나는 부러 아이든과 더욱 다정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가 괴로움에 자발적으로 울프하운드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적극적인지 모르겠네, 리안.”

아이든이 내 손등에 입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 접혔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온몸이 그의 온기로 따뜻해져 오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아도 익숙해지지도 질리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좋아서요.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요.”

아이든이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를 정리해주고 다정하게 턱을 그러쥐고 내게 입 맞추었다.

그의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손길도, 부드러운 입술의 감각도 모든 것이 너무도 따뜻했다.

“늘 전쟁터에 있다가 저택으로 돌아오면… 그 참을 수 없는 적막이 힘들었어. 귓가에 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거든. 잠들면 꿈에는 피 흘리며 우는 어린아이들이 나왔고. 나에 대한 소문이 어떻든 나는 살인귀 따위가 아니니까.”

그가 나와 깍지 낀 손을 따스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요.”

그가 따스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있는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마음이 급하고 두근거려. 아무리 저택이 고요하고 어두워도 더 이상 괴롭지도, 두렵지도 않지. 그대가 있다는 것 하나뿐인데도.”

“아이든….”

그러고 보면 전쟁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는 못했던 것 같아.

그가 나를 걱정하고, 그가 나를 안아주고.

늘 나는 받기만 해왔구나.

“이번 전쟁이 당신에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을지 알고 있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가 또다시 우뚝 멈추어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릴리아나.”

“네?”

“그대가 주기적으로 보내왔던 서신들. 나를 믿노라고 적혀 있던 그 수많은 편지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어. 힘든 것은 그대였겠지. 인사 한마디 없이 갑작스레 저택을 비운 뒤로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잖아. 외로웠을 거고, 힘에 부쳤을 테고, 고단했을 테고, 두려웠을 텐데.”

“어….”

나도 모르게 떨어져 내린 눈물을 허겁지겁 훔쳐 닦았다.

여기서 눈물이 나면 안 되는데.

분위기 좋았는데, 우리.

아이든이 나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에 입 맞추었다.

그가 없는 그 수많은 날들 동안 꾹꾹 눌러 참아왔던 모든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저택의 주인 자리.

불안했던 마음.

그립고 그리웠던 날들.

혼자 두려움에 떨었던 수많은 밤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잘 버텨줬어. 고마워.”

그의 짧은 위로 한마디에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이 당황스러웠다.

“고… 고마워요, 아이든.”

목소리가 얄궂게도 떨려 나왔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든이 나를 놓아주고 얼굴을 바라보더니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대는 늘 사내를 모르는 소녀 같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화르륵.

얼굴로 온몸의 열이 다 몰린 기분이었다.

이러다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아이든….”

“그러게.”

그가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쿡쿡대고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 덕에 감정이 조금 추슬러지는 것도 같았다.

밀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수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는데.

눈길을 돌리며 난처해하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그러쥐고 그가 말했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네, 정말.”

그리고 내게 짧게 또다시 입 맞추었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마다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 순간이 내게 마지막 행복인 것은 아닐까?

한 시간 뒤, 혹은 내일, 혹은 그다음 날.

나는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수행사제를 잡고 나면 이 불안감은 없어지는 걸까?

나는 비로소 평안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회귀하기 전부터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불행을 떠안고 살아왔다.

그것이 마치 몸에 밴 듯이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참 어렵다.

행복을 온전하고 건강하게 누리는 것은.

“걱정거리가 있구나, 리안.”

자못 심각해진 표정으로 아이든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양손을 들어, 내 볼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아이든.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사실 좀 불안해요. 수행사제를 잡고 나면 이 마음은 괜찮아 지는 걸까요? 하루하루 아무것도 어려운 일 없이 편하기만 한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해? 그자가 그대와 비슷한 자라고 했다며.”

“어떤 부분에서요?”

“그대가 만약 그자라면? 그자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은지.”

“제 생각이 도움이 될까요?”

“당연하지.”

“그자가 만약 해슬 백작 영애라면…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한동안은 헤어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겠죠. 아버지의 죽음의 죗값을 받아내려고 할 거예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요.”

“그래. 맞아. 그 수단과 방법이 중요해.”

“아이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 저택의 경비는 허술했지만 제 곁을 지키는 기사들은 늘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어요. 제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요. 하지만 지금은 저택의 경비가 오히려 더 삼엄해져서 출입 자체가 불가능해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대가 외출하거나 외부인이 들어올 때.”

그래. 맞아.

일주일 후에 나는 프리온으로 떠나야 하고 그러려면 제도 시내를 지나쳐야 해.

그리로 통과하지 않으려면 더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 해도 안전하지만은 않지.

거긴 더 인적이 드문 곳이니까.

만약 외부인이 들어오는 틈바구니에 섞이고 싶은 거라면?

하지만… 전에도 한번 팔찌를 차고 들어온 여자가 있어 같은 방법을 쓸 것 같진 않은데.

그냥 포기할 리는 절대 없다.

그자는 마지막까지 나를 죽여 없애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라고 배워왔을 테니까.

신탁의 아이가 스펠른 마법사들을 죽여 없애고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시킬 거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그런 잘못된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그 오해의 뿌리가 잘못되어 서로를 죽여야 끝나는 관계가 되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끝내 하지 못한 것을 너는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너의 시대가 도래했구나.]

일라즈 님의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사실은 정말 내가 마법사들을 모조리 도륙해야 하는 존재였던 걸까?

정말로?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기만 하다.

어쨌든 만약 그 여자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어떤 방법이든 수를 강구해 낼 것이다.

“아이든.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요.”

“음?”

내 얼굴에서 그의 손을 내려 꼭 그러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프리온 황제를 만나야 해요.”

“그건 이미 했던 말이잖아.”

“제가 프리온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아이든 없이. 저만요.”

아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못 박아 두지 않으면 그다음을 강구할 수 없다.

“아이든과 떨어지는 것이 싫어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제국에서 떠나 있었잖아요. 아랫사람들이나 황태자 전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을 것이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망치고 싶지는 않아요. 사내들의 정치란 그런 것이잖아요. 게다가 이젠 공작령이 생기셨으니 좀 더 책임감을 가지셔야 하고요.”

“리안, 하지만….”

그의 손바닥을 들어 올려 입 맞추었다.

따뜻하다.

프리온으로 향하는 순간, 이 따뜻함과는 멀어지는 것이겠지.

금방 돌아올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리안….”

아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더욱 애처롭게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에 약해져 내 의견을 꺾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가 없어야 그의 형제들을 아무 장애 없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제가 홀로 가고 싶어서 그래요. 전에 저택에 남았던 호위들을 모두 데리고 갈까 해요. 휴와 노아도요. 그렇다면 조금 안심하실 수 있겠죠?”

“하아….”

그의 손바닥에 내 얼굴을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다만, 가는 길에 두 갈래 길 모두 병력을 조금만 배치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수행 사제가 노리기 좋은 때니까요.”

“…무슨 말을 해도… 그대는 참 고집스러워.”

고집을 내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미소 지으며 눈을 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 따뜻한 손길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서로 작은 문제로 다투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기엔 당신 말대로 우리가 너무 오랜 기간 떨어져 있었잖아요.”

아이든이 내 볼을 어루만지면서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군. 근데 난 이 손길만으로는 만족을 못 할 것 같은데.”

“네?”

아이든이 순식간에 내게서 손을 빼내어 나를 들쳐 안았다.

“아이든!”

“먼저 유혹 한 건 그대니까 입 다물어 줬으면 좋겠는데.”

하?

방금 되게 사이좋게 대화 주고받은 거 외에 더 있나?!

게다가 유혹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크게…!

“에릭이 듣고 있잖아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속삭이는데 아이든이 실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한 행동은 괜찮았던 거 같아? 남자는 보이는 것에 약해, 리안. 유혹한 대가를 치러야지.”

으윽….

다 들으라고 저러는 거구나.

더 창피하다.

단순히 손잡거나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유혹이니 대가니 하는 것.

행여나 떨어질까 그의 목과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손조차 없었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아.

혼자 내 지난 행동이 대체 어땠나 곱씹는 동안 아이든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침실에 도착해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내 위로 올라탄 그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얼마나 나를 갈구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에릭은 문 앞에서 물려 줘요. 그것만이라도 제발.”

“리안. 그대가 깨어난 첫날엔 아예 문도 열려 있었어. 기억 못 하겠지만….”

“!”

말도 안 돼!

아흑, 정말 수치스러워서 죽어 버릴 것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게 소리쳤다.

“정말 몰랐어요… 진짜로 몰랐어…!”

“뭐….”

아이든이 내 옷을 벗기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뒤늦게 문이 닫히긴 했지만. 누가 닫았는지는 모르지.”

설마 에릭이 그런 거 아니겠지?!

믿을 수가 없다, 정말.

그럼 그 소리를 전부 다 듣고도 에릭은 내게 그렇게 애타게 구애한 거야?!

대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든이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앗! 간지러워요!”

“딴생각하지 마.”

“내, 내가 언제…!”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본능만이 남은 어둡고 깊은 눈동자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릭 슈미트가 그대를 보는 눈빛이 어떤지 그대는 몰라.”

“!”

이… 이 사람이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해 봤는데…!

대체 언제부터…?

“그가 무력이 강해서 내가 아낀다고 생각해? 틀렸어.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쥐고 비틀어 버리고 싶은 걸 참는 거야.”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쳐왔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을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처신을 바로 하지 못한 걸까?

역시 에릭은 울프하운드로 보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러니 나만 알아야 할 그대 신음소리까지 듣게 하고 싶진 않다는 거짓말은 못 하겠어. 실컷 들으라고 해. 그래야 릴리아나가 누구 여잔지 알겠지.”

아이든이 내 얼굴을 가린 양손을 떼어 내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움켜쥐었다.

“아이든…! 이거 놔요…!”

“더 크게 신음해.”

“아이든…!”

당혹스러움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사람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닌데 어째서…!

“그댄 내 거야. 누구도 탐할 수 없어야 해. 녀석의 눈빛을 참고 있는 건 오로지 그대 때문이니까. 내게도 보상을 줘야 하지 않아?”

“아, 아이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 정도로 겁먹지 마. 그댄 내 새카만 속을 십 분의 일도 모르는 거니까.”

[그자 안에 들끓는 광기를 그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나 보군.]

아니야.

[그는 괴물이야.]

아니야!

“아이든, 이 손 놔요! 앗!”

야속한 몸뚱이는 그의 손길 한번에도 참 크게도 반응한다.

이래서는 놓아 달라는 말에 너무 신빙성이 없는데!

“릴리아나. 눈 뜨고 나를 봐.”

질끈 감았던 눈을 떠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요?

“나 역시 그대 거잖아. 다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다른 여자가 내게 그런 추파를 던진다고 생각하면 그댄 어떨 거 같아?”

“…!”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간절하고 애타게 내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못 견디겠지.

이 사람이 지금 하는 행동을 내가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역시 그에게 화를 낼 거 같아.

지금 그가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화가 나서 날 겁준 거야.

그가 광기 가득한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어쩌면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숨어 그를 무서워하면서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걸까?

이건 모두 내 탓이 아닌데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내려 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알 수 없는 흉터.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있다.

그의 벗은 몸을 이토록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었다.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더 이상 부끄럼 따위는 없었다.

온전한 시선으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그가 그렇듯이.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해요. 내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나 역시 화를 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아니라 당신한테. 미안해요. 나는 늘 상황을 회피하려고만 하는데 당신은….”

“쉬— 다 괜찮아….”

그가 내 목에 짧게 입 맞추었다.

내 입술에도 짧게 입 맞추었다.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잘못을 반성하라는 게 아니었어. 나를 제대로 봐주길 바랐을 뿐이야.”

늘 아이든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 걸까.

이 사람은 늘 내게 노력하고 있어.

이성의 끈을 붙잡아 가면서.

에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아끼니까.

그걸 아니까.

이 사람은 언제나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나를 가져, 릴리아나. 정복해. 난 영원히 그대 거니까. 마음대로 휘두르라고.”

늘 받아 오기만 했던 수동적인 자세.

당신을 믿는다고 말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겠지.

이 사람의 입장에선 확실한 게 필요했을지도 몰라.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받고 싶은 것.

나를 향한 마음을 품고 있는 에릭이 곁에 있는 지금은 더욱이.

이 사람을 불안하게 한 건 나였구나.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든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당신을 원해요. 당신의 눈빛 한 번, 손길 하나, 속삭이는 목소리, 그 작은 숨결까지. 모두 다 원해. 언제나 그래왔어요.”

아이든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어두운 방을 환히 밝히는 달빛에 비친 그의 검푸른 머리칼과 눈동자, 그의 눈썹, 코, 입술… 그의 모든 것이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그가 내 손을 풀어주자마자 반대로 그를 눕혀 놓고 위에 올라타 그의 가슴의 흉터 위에 입 맞추었다.

내가 신성력으로 치료해주기 전에 상처 입었던 배 위에도 입 맞추었다.

그와 진득한 키스를 나누고 난 뒤 그와 한 몸이 되었다.

쾌감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좋았다.

에릭 따위는 내 안중에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나는 마음껏 신음하고, 아이든을 애타게 부르며 그를 갈구했다.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도수 높은 술에 취한 듯 무언가에 홀린 듯 기나긴 밤이 지나도록 우리는 서로를 가지고 또 가졌다.

31. 악신의 제물(1)

오전 내도록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우리는 서로 짧게 입 맞추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이든은 집무실로 갔고 나는 침실로 재정보고서를 가지고 온 칼튼의 보고를 듣고 일 처리를 빠르게 해주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주인님.”

그는 여전히 내게 주인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아이든이 돌아왔고, 이 저택의 주인 자리는 이미 바뀌었는데도.

나는 칼튼에게 최대한 밝게 웃어주었다.

“나는 괜찮아요.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요?”

“예.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든과 함께 먹고 싶은데. 그는 지금 바쁜가요?”

칼튼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식사 때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았습니다. 각하께 여쭤보도록 하죠.”

칼튼이 말을 마치고 서류를 들고 나가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고 마리가 들어와서 고개 숙였다.

“마님. 주인님께서 집무실로 급히 와달라고 하십니다. 집사님도 함께요.”

무슨 일이지?

우리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칼튼과 함께 방을 나왔다.

잠에서 깨서 처음으로 침실을 나온 것이라 에릭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볼턴 경과 윈터 경은 저택 호위 조에 들어간 지 좀 되었다고 했다.

고로 어젯밤에도 지금도 문 앞을 지키고 선 것은 에릭 혼자라는 말이었다.

에릭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사무적으로 고개 숙여 인사해왔다.

나 역시 뭔가 좀 낯 뜨겁고 어색해져서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 바로 칼튼을 바라보았다.

“갈까요.”

“예, 주인님.”

***

잠든 리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와중에도 정말 많이 피곤했는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잘도 잔다.

자는 모습마저 천사처럼 아름다워 보이니 참 큰일이다.

이러면 더더욱 혼자 보내기가 싫어지는데.

아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리안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지 지켜내고 싶어서 전쟁도 불사했다.

그런데 이제 와 혼자 프리온의 황제와 독대를 하겠다고?

이 여자는 남편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 가는지 알기는 할까?

아무것도 모르니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 건가.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자신과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무서움에 덜덜 떠는 모습을 보았는데….

전쟁에서 돌아와 다시 재회하고 나니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사람 같아 보인다.

분명 여러모로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홀로 버티면서 이만큼이나 강하고 단단해졌을까?

아이든은 리안의 옆에 다시 비스듬히 누워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손등에 입 맞추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그대를 잃을까 봐 겁이 나.

“그대에 비하면 참으로 겁쟁이가 따로 없군….”

“으음….”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모아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던 그녀가 마침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마음의 근심이 이 순간엔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심장이 그녀로 가득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요.”

좋은 아침이라는 말 대신 갓 일어나 메인 목으로 고백해오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녀의 입술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사랑해, 리안.”

릴리아나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푸른 눈동자가 아침햇살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다.

***

아이든은 오전 중에 서류를 모두 다 결제해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칼이 오후에 저택으로 찾아오기로 했으니 그때는 엄청난 양의 일거리가 몰려들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일 더미에 파묻혀 있어야 하다니.

릴리아나를 알기 전엔 일 더미에 파묻혀 있는 걸 오히려 기껍게 여기던 그였다.

일 따위보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든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릴리아나를 생각하니 또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놀려도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지는 얼굴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행동들도 정말이지 귀여워 미칠 것 같은 여자였다.

게다가 누가 봐도 태생부터 다른 것처럼 모든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품과 제국 어디에 내어놓아도 단연 으뜸일 것 같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외모까지.

뭐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전쟁 중에도 줄곧 그녀가 아프진 않을까 혹여나 잃게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떠올리기만 해도 이토록 좋은데 어떻게 그녀를 홀로 떨어트려 놓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 길은 죽으러 가는 것과 진배없는 것인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굳이 창문을 열어 보지 않고도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드는 게….

꼭 이 겨울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해야만 하나….

릴리아나가 오고 가는 길에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차에 카펫과 방석을 모조리 극세사 원단으로 바꾸고 겨울 담요를 여러 개 준비해 넣어 놓으라 지시해야겠다.

아무리 따뜻하게 껴입어도 겨울 공기는 시린 법이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꼭 수행 사제를 잡아 부인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되어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니.

릴리아나가 저택을 나서는 그때가 그자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매복하기보다, 확실하게 소문을 퍼트려 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

이 기회를 놓치면 숨어든 자를 찾아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릴리아나의 차에 독을 타서 마실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 들었었다.

범인만 알았다면 당장에 찾아내 입을 벌리고 맹독을 부어 넣었을 것이다.

그자가 살아있는 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까드득’

아이든은 이를 갈면서 매서운 눈길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수행사제를 잡으면 독차를 건넨 년부터 찾아내야겠다.

아이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 줄을 잡아당겼다.

곧 사용인 하나가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테이블에 두 명분 차 준비하고 부인과 집사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나가면 부인과 점심 식사 할 거니까 준비하고.”

“예.”

사용인이 짧은 대답을 끝으로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아이든은 손님맞이용 소파로 가 상석에 몸을 맡겼다.

곧 사용인이 차를 들여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아나와 칼튼 역시 집무실로 찾아왔다.

“앉아.”

두 명이 착석하자마자 아이든이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편하게 들어, 집사.”

칼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고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아이든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릴리아나의 차에 독이 들었던 사건이 떠오르네.”

칼튼이 흠칫하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행동을 멈추었다.

“사용인들을 총괄해야 하는 집사가 외부인이 하녀인 척 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그렇지?”

릴리아나가 화들짝 놀라며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이든?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아이든이 고개를 까닥해 리안을 바라보았다.

“지금 아니면 언제 얘기해? 찻잔이 눈에 보이는데.”

“아이든…!”

“아닙니다, 주인님. 그건 명백한 제 잘못이 맞습니다.”

칼튼이 리안을 향해 말하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이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칼튼이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명백한 제 잘못이었습니다, 각하. 이런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벌이라뇨! 주인 없는 저택은 내내 어수선했지만 우린 잘해왔어요! 칼튼은 최선을 다했어요, 아이든!”

“주인이 왜 없어.”

아이든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며 릴리아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당신이 이 저….”

“릴리아나.”

아이든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태도가 정말 신경에 거슬린다.

“이 저택의 주인은 당신이야.”

아이든이 짓씹어 뱉어낸 말에 릴리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을 힐끗 바라본 아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손님은 아니잖아. 나와 결혼했고, 당신은 이미 이 저택의 주인이 되었어. 칼튼이 왜 그대에게 주인님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어?”

“아… 알고 있어요… 저는 단지… 당신이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으니까….”

“후우…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어. 마음까지 이곳을 멀리 생각할까 봐 한 말이었어, 리안. 이제 이곳이 그대 집이잖아.”

릴리아나가 시선을 내리깔아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미소 지었다.

“네. 알아요. 제 집….”

아이든은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과 입술이 움직이는 모든 순간을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두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찌푸린 아이든이 곧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칼튼을 바라보았다.

“우리 마차 카펫, 방석 모두 다 겨울용으로, 제일 비싸고 좋은 걸로 수소문해 바꾸고. 담요도 제일 따뜻한 걸로 두 개 정도 마차에 실어 놓으면 좋겠어. 그리고 릴리아나가 입을 수 있는 따뜻한 겨울 모피코트 구하고. 드레스도 겨울용으로 싹 다 바꿔서 드레스룸 채워 넣고. 보니까 아직도 가을드레스 밖에 없던데. 대체 그런 거 하나 안 바꾸고 뭘 했어? 지금도 부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 꼴을 좀 봐. 나라도 추워서 뒈지겠군.”

“아… 전 괜찮은데. 저택이 따뜻해서 그렇게까지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아이든.”

“그대 지금도 말하는데 입김 나오고 있는 건 알고 있어? 저택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아. 그대가 주로 있는 침실이야 벽난로를 온종일 떼고 있으니 추위를 모르지만 침실만 나와도 이렇게 싸늘해.”

“아….”

릴리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아이든은 한숨을 뱉어냈다.

감정에 남들보다 더욱 예민하고 솔직한 여자라는 걸 매번 잊어버린다.

너무 대놓고 솔직하게 까발렸나.

“무안 주려던 건 아니었어, 리안. 하… 미안.”

“아니에요. 당신 말이 맞아요. 저는 침실에만 온종일 붙어있어서 저택이 춥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안주인의 역할이 다 그런 것일 텐데… 사용인들도 무척 추울 거예요, 그렇죠?”

“리안, 나는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이요. 제가 듣기로 바깥의 찬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 단열공사라는 게 있다고 들었어요. 칼튼이 한번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분명 이 시기쯤이었을 텐데….

릴리아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칼튼이 알겠다고 대답하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하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

릴리아나가 놀라서 커진 눈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방금 혼자 중얼거린 말. 뭔가 이상했는데, 리안?”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는데…!”

“외부 정보를 가져다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대는 그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지? 단열이라니. 난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릴리아나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꾸, 꿈을 꾸었어요! 제가 원래 꿈에 막 미래의 일도 좀 잘 보이고 그래서… 꿈을….”

릴리아나가 점점 더 작아지는 목소리로 자신 없게 말끝을 흐렸다.

“흐음.”

“왜, 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수그리는 모습을 보며 아이든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낮게 웃었다.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귀여우니 믿어 주어야 하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네….”

아이든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칼튼을 바라보았다.

“집사가 해야 할 일이 좀 많을 것 같은데 적을 수첩과 펜이라도 줄까? 다 기억할 수 있겠어?”

“제게 하명하실 일이 더 있으십니까?”

“음. 소문을 좀 내볼까 하는데.”

아이든의 말에 릴리아나와 칼튼이 동시에 의문을 품은 표정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리안이 저택에서 출발하는 날과 시를 정확하게 잡아 소문을 퍼트리면 좋겠어. 이왕이면 신탁의 주인공 성녀가 프리온 황제를 독대하러 간다. 이렇게 소문을 내면 더욱더 좋겠군. 릴리아나가 황제후보자가 아니라 성녀가 되어있어야 프리온의 황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으니 쉽게 손대지 못할 거야.”

아이든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올라오는 분노를 내리눌러 삼켰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른 아이든이 지친 듯한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만약 그럼에도 황제가 리안에게 손을 대면… 바로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황실에도 소문이 들어가야만 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집사?”

“예. 심려 마십시오. 하명하신 모든 일 처리는 완벽하게 해 놓겠습니다.”

“그래. 그럼 집사는 나가 봐.”

칼튼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가고 나자 집무실 안에 잠시간 정적이 맴돌았다.

긴 침묵 끝에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언제부터였는지 아이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리안.”

“이 방법밖에 없을까요? 나는 이미… 릴리아나로서가 아니라 사람들 병을 치유해주는 사제처럼 취급받고 있어요. 저택에 찾아와 날마다 농성하는 자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나는 그냥 나이고 싶어요. 성녀니 뭐니 따위가 아니라….”

아이든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헨델 사제가 꾸며낸 일들 하며… 모든 것이 이 여자에겐 버거운 고통일 테지.

그저 평범한 영애일 뿐이었는데.

마음을 내리누르는 사회적 지위의 무게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녀가 안타까웠다.

“리안. 이미 그대가 평범한 영애로 돌아가는 건 틀렸어. 사제 취급을 받고 있다고? 아니. 지금 그대는 신의 대리인 취급을 받고 있는 거야. 신탁의 내용이 이미 제국에 쫙 퍼졌어, 리안. 황실을 제외하고 평범한 하층민부터 고귀한 귀족들까지 모두들 그대를 우러러보고 있어. 이런 시선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프리온 황제를 더욱 절벽으로 몰아붙일 뿐이지. 소문의 내용을 바꿔야 해.”

“신탁의 내용이 퍼졌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리에요?”

릴리아나가 당황해 새빨개진 얼굴로 되물었다.

아이든은 그녀가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동안 저택으로 끊임없이 날아왔던 편지들을 떠올렸다.

누구든지 릴리아나를 한 번만 만나고 싶어 애걸복걸을 했다.

그 콧대 높은 자들마저.

아이든은 그 편지에 전부 릴리아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로 거절의 답장을 보냈다.

그녀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순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대체 제국에 왜 그런 소문이 돌게 되었는지,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명백했다.

황제가 자리를 위협받는다고 느낄 것이라는 것.

그런데 그게 비단 프리온의 황제뿐일까?

제국의 황제는 욕심이 많은 자다.

그저 내가 무서워 목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일 뿐.

아이든은 이를 아득 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의 황제는 내 힘으로 어떻게든 될 것이다.

카이는 어차피 다 알고 있던 사실이니 크게 동요하지 않을 테고.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경우 프리온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

내 것만 지킬 수 있다면 뭐든 할 것이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면, 그것마저도 기꺼이 불사하리라.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몰라, 리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미 그런 소문이 났다는 거고.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란 거고. 그러니까 안심하고 프리온으로 가도 좋아. 소문을 들으면 수행사제가 나타날 테고 울프하운드는 원래 사냥개였으니 놓치지 않을 거야, 리안.”

릴리아나는 여전히 아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그럼에도 황제가 나를 죽이려 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호위로 따라가는 이들에게 뭐라고 명을 내리실 건가요?”

“…….”

이 여자가 걱정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녀의 푸른 눈을 뚫을 듯이 응시했다.

전쟁을 걱정하는 것인가? 황제의 죽음?

그도 아니면 호위 기사들의 죽음?

“그게 중요한가?”

아이든이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릴리아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전쟁을 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렇죠? 군을 동원하실 건가요? 전쟁을 치룬지 시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뭐가 문제야.”

“뭐라구요?”

“다른 이들이 무슨 상관이야, 리안.”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금껏 충분히 나로 인해 피 흘린 이들 생각에 괴로웠어요. 또 나 때문에 누군가 피를 보아야 한단 말이에요?”

아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대를 지키기 위한 거야.”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목표를 이룰 수는 없을까요?”

“…릴리아나. 만약 소문으로 인해 황제가 그대에게 손대는 걸 꺼려하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프리온의 황제를 죽이실 건가요?”

“뭐…?”

“그러면 비어있는 프리온의 황위는 누가 채우나요? 황족이 전멸했어요. 그가 유일해요.”

“릴리아나.”

“그가 죽고 나면 그때야말로 헨델 사제도 제드 경도 알란국도 헬리언제국도 모두 다 나를 그 자리에 앉히지 못해 안달이 날 거에요! 내가, 내가 그 자리에 앉기를 바라세요?!”

“…….”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왜 그 생각은 못 했지?

아이든이 멍해진 것을 눈치챈 릴리아나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든, 나는… 내가 프리온으로 가면 아이든은 어떡해요? 내가 당신에게 이 제국을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못 해요…!”

아이든이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세를 앞으로 기울여 릴리아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리안. 나는… 그대를 위해서라면 이 제국을 가져다 바칠 마음도 먹었어. 내게 이 제국을 향한 충성심이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당연히 마음에 나와 헤어지는 방법 따위는 없어야 정상이 아닌가?

아이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릴리아나 앞에 자세를 낮춰 그녀를 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내가 갈게. 내가 갈 거야. 필요하다면 그럴 거야, 릴리아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또 소리도 내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었군.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려는 거야. 그대가 안전한 게 최우선이니까. 다른 건 어찌되든 난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믿을지 모르겠지만… 제국을 수호하던 사명감 따위… 그대의 안전 앞에 무의미하다고. 나는 이미… 그대가 아니면 안 돼.”

“아이든….”

감동받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릴리아나를 보며 이마에 입 맞추는데 집무실 문 쪽에서 별안간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눈물겹구만.”

아이든과 릴리아나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 앞에 황태자, 그리고 그의 뒤에 칼이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뭐야.”

아이든이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워낙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신지라….”

칼이 안절부절못하며 변명하자 아이든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릴리아나를 놓아주었다.

“신분만 아니면 길거리 양아치가 따로 없군.”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팔짱을 꼈다.

“불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그 입만 할까.”

릴리아나가 당황하여 둘 사이를 번갈아 보다가 다급하게 황태자 앞으로 가서 무릎을 굽혔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일라즈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여기 정신 멀쩡한 자가 아직 있었군그래.”

황태자가 릴리아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이든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황태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릴리아나가 앉았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칼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칼 폴쳐. 들어와. 서류 흘리지 말고.”

칼이 양 옆구리 가득 서류를 끼고도 양손에 서류를 한 뭉텅이 채로 들고 낑낑대며 들어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막 부인과 점심 식사를 하려던 참인데.”

아이든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칼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예에.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각하. 제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요. 다만….”

칼이 말을 흐리며 황태자를 바라보자 아이든 또한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옛날부터 참 일관성 있게 눈치가 없지.”

황태자가 아이든과 칼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야? 설마. 아니겠지?”

- 4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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