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원망, 후회 그리고...
인생은 항상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힘든 일은 항상 몰아쳐서 다가오고,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든이 안전해졌을 것이라고 믿으며 평안한 나날을 보냈던 벌을 받는 것일까.
넌 그런 삶을 살아선 안 돼.
넌 행복해서도 안 돼.
누군가 내게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들.
습격을 받은 것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진 고용인들의 시체.
그리고 그 가운데 나란히 심장에 단검이 꽂힌 채로 쓰러져 죽은 중년의 부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부모, 데일 백작 부부.
손에 구겨진 보고서를 쥐고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젠 꿈과 실제를 구분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건가?
“…용서해 보겠다고.”
목이 메였다.
“곁에 없으면 다 부질없는 것을.”
그래도 중얼거렸다.
용서해 보겠다가 아니라, 용서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그런 게 다 뭐라고.
멍청하게.
“…주군. 눈을 감으십시오.”
고개를 돌려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용서한다고. 사랑한다고.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나는?”
“주군. 아무 말씀 마십시오.”
“나 때….”
“주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울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에릭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정신없이 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다.
휴와 노아가 가져온 보고서에는 믿을 수 없는 글이 적혀 있었다.
20만 프랑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가장 친했던 친우, 밀리언 해슬 백작이었다.
슬하에 여식 하나가 있음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자식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여식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는 사람은 제국에 단 한 명도 없었고 나 역시 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그의 집에 수상한 자들이 드나들었다는 것과 갑작스레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는 것까지.
보고서를 읽자마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보고서를 손에 쥐고 에릭만 대동한 채로 미친 사람처럼 말을 몰아 데일가로 왔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혼자만의 걱정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얼마 동안이나 에릭에게 기대어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어째서 안일했을까?
어째서 아이든과 나만 안전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내게서 소중한 것을 끊임없이 앗아가려고 하는 그들이 밉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몰아치게 내버려 두는 일라즈 님도 원망스럽다.
차라리 내가 죽어 없어져 버렸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결국엔 나 때문이야.
모든 게 나 때문이야.
부모를 죽음에 몰아넣고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행복하면 안 되는 거잖아.
숨이 가빠져왔다.
가슴이 턱 막힌 듯이 답답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에릭에게서 떨어졌다.
기력이 떨어졌는지 다리에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다.
에릭이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왔다.
순간, 눈앞이 핑 돌며 현기증이 일었다.
에릭이 내민 손을 쳐내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그가 무언가 말한 것 같았는데 너무 아득하게 들려왔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내 눈에 부모님의 시체를 온전히 다 담을 거야.
시체라도. 텅 빈 몸뚱이라도 마음에 새길 거야.
돌아서서 부모님께로 다가갔다.
시체 앞에 주루룩 주저앉아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영혼이 빠져나가 늘어진 시체는 무거웠지만 그래도 품에서 놓지 않았다.
“…사랑해요, 어머니.”
상대에게 전해지지 못한 마음의 소리는 공기가 되어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랑해요, 아버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니까.
“…내가 할게.”
고개를 내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죽여버릴 거야, 내가.”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
꼬박 하루를 지나 의식을 되찾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데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사유지에 부모님을 묻어드렸다.
장례는 간소하고 빠르게 치러졌다.
사용인들의 시체들도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며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비용을 각자 유가족에게 지급해 주었다.
개인의 사유지에 침입해 저택에 있는 모두를 몰살시킨 사건은 곧 제도 내에 큰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위로 목적으로 방문한 칼 폴쳐 경에게서 사건은 황실이 조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황실이 나를 대신해 복수해주리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나는 알고 있었다.
우선은 그 전에, 데일 저택을 정리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발을 들이면 눈물을 안 흘릴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택을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사용인들의 정산 되지 못한 월급도 모두 다 챙겨야 했다.
데일 백작 부부 슬하에 아들은 없었으므로 모든 재산의 상속권은 내게 있었다.
에릭과 휴와 노아, 그리고 리제를 포함한 사용인 십여 명을 데리고 데일저를 찾아갔다.
값비싼 보석들이나 물건들은 경매에 내놓기 위해 따로 상자에 모아두도록 지시하고, 부부의 침실로 들어갔다.
서랍장이나 협탁을 열어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사용인 한 명이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마님. 서재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몰라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크기에 맞는 두꺼운 다이어리가 들어가 있었다.
자물쇠가 잠겨 있지는 않아서 쉽게 펼쳐 읽어 볼 수 있었다.
딱 보아도 어머니의 일기장 같아 보였다.
꽤나 오랜 세월 동안 적어 오신 듯했다.
“두고 나가세요. 서재에서 중요한 문서나 물건이 나오면 내게로 가지고 와줄래요?”
“예, 마님.”
사용인이 나가고 난 후 일기장을 앞쪽부터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내가 10살 무렵 때부터 일기를 써 오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 꿈을 꾸신 그날부터.
부적을 사 모으기 시작한 어머니의 심리 변화가 하루하루 지날수록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일기였다.
그 보석에 집착하는 어머니가 참으로 싫었었는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을 만큼.
그랬는데… 이렇게도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난 이미 다 용서했다고 사랑한다고 한마디라도 해드릴 걸 그랬지.
미련하고 자존심만 센 딸을 그저 말없이 이해해 주신 부모님께 이제 와서 더없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일기장을 읽어 나가는데 중간에 어떤 날의 기록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가 4달에 한 번씩 열에 시달리고 있다. 주기적으로 오는 고열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면서 미리 같은 시기가 오면 빠르게 대처해 열이 너무 고열로 가지 않고 금장 가라앉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석에 마음을 빼앗겨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날들이 늘어가는 기분이다.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돼.]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기 전에는 꼭 계절에 상관없이 더위를 느낀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 돌아오는 주기마다 기록해 놓고 찬 음료나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 집사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도 집사가 내 딸을 챙길 것이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 눈물이 투두두둑 침대 위로, 다이어리 위로 수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이든과 함께 데일저를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건네었던 차갑게 마시는 차와 서늘한 손이 떠오른 탓이었다.
“욱… 윽…!”
꽉 막힌 목에서 채 삼켜내지 못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방치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마지막까지 내가 혹여나 열이 날까, 더워할까 싶어 자신의 손마저 차갑게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싶어서.
그 서늘하게 기분 좋았던 손은 어머니의 사랑이자 고통이었다.
그리움이 밀려들어 견딜 수가 없다.
원망이 몰려들어 참을 수가 없다.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에릭이 빠르게 부부 침실의 문을 닫아버렸다.
복도에서 들려오던 부산스러운 소음이 사라지자 침실 안에는 에릭의 고통 섞인 한숨 소리와 내 울음소리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속으로 일라즈 님께 고함을 질렀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오는 것을 막아주지 않는 거예요?!
왜 내게는 항상 불행한 일만 벌어지게 두시는 거예요?!
부모님을 보호해 주실 수 있으셨잖아요!
내게서 모든 걸 다 앗아가고 뭘 원하시는 거예요!
내가 뭘 어쩌길 바라시는 거예요!
대체 내게 왜 그래!
평생을 사랑받지 못했다고 오해하며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이제야 내 부모를 되찾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아아아악--! 대체 왜-! 왜-!으흐흑-!”
침대보를 움켜쥐고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부모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아왔던 세월들이 너무 죄송해서 고통스러웠다.
점점 삶의 희망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절망과 슬픔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분들에게 찾아온 자식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그분들 역시도 이런 일을 겪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이다.
이른 나이에 이렇게 허망하게 살해당해 죽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모든 원흉은 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언제나 그렇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울다가 충동적으로 일어나 침실에서 이어진 발코니로 나갔다.
난간에 올라서려 하자 에릭이 다급하게 뛰어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주군…! 안됩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놔-!”
“주군, 제발…!”
에릭의 떨리는 목소리에 고통이 스며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어흐흑…! 으으흑… 제발 나 좀 놔 줘… 그만 편해지고 싶어, 에릭… 제발….”
에릭이 내 머리를 당겨 품에 강하게 끌어안았다.
“주군을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전부 다 생각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각하께서는 주군 없이는 안 되는 분이신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금만… 조금만 견뎌 주십시오. 잔인하고 어려운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제가 대신 아파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부탁드립니다.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 일의 복수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주군. 믿어 주십시오.”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그렇게 생각하며 여기까지 버텨 왔어!
나는 괜찮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이만큼 버텨 왔는데!
얼마나 더? 언제까지 더?
왜 나만 참고, 나만 버텨야 해?
내가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살아갈수록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데….
내가 살아있을 명분이 고작 사랑하는 남자 하나야?
그가 나 없이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니 나는 인형처럼 그를 위해 존재해야 한단 말이야?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고통스러워!
1분 1초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게 위선적으로 느껴지고 역겨워 죽을 것 같아!
나는 이제 어떻게 해? 무슨 명분으로 살아야 해? 뭘 붙잡고 살아야 해?
입 밖으로 하지 못할 수많은 말들을 삼켜내며 에릭의 옷깃을 부여잡고 정신없이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기력이 다 소진되어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주르륵 주저앉았다.
나를 부축하려는 에릭의 손을 탁 쳐내고, 떨어지라고 명령했다.
억지로 내게서 발걸음을 떼어 멀어지는 에릭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죽는 것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사는 것조차 누군가에겐 저주 같은 나란 존재가 끔찍하게 느껴지는 대도.
어째서 저자는 이토록 애절하고 간절하게 살아 주기를 간청하는 것일까.
그저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런 간절함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하… 하하….”
진작에.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저자를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면.
오늘 나는 편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저 감정이 더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잘라낼 방법이 뭘까?
아니, 생각해보면 이는 연모도 아니던가?
단순한 동정심일 수도… 그럴 수도 있을까?
“…하하… 하… 하… 하.”
억지웃음마저 사라지고 난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이 내게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이대로 저 공기에 실려 함께 흩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나를 놓아 버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 일이 지나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나는 데일 저택의 부모님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밥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은 채로 움직이지 않자 사용인들도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음식을 가져다 바쳤고, 공작저로 돌아가자고 청했다.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사용인들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어쩌지 못해 안달을 냈다.
그럼에도 나는 모두를 물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삶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아.
눈을 감으면 뜬 눈으로 공포에 질려 죽은 부모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래서 나 역시 뜬 눈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드는 것 외엔 자의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먼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
그렇게 나흘째 되는 날.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질 즈음, 에릭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손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여전히 뜨거운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가.
“…피.”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릭이 그 자리에 손에 쥐었던 머리를 툭 던지듯 내려놓고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예. 핍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주군. 사람의 머리를 쳤습니다.”
고개를 들어 에릭을 바라보았다.
에릭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텅 빈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제가… 제가 복수를 했습니다. 그자를 제가 죽였습니다.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든, 왜 네놈이 그걸 대신 하냐고 욕을 하시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
에릭은 알고 있을까?
그자를 죽인다고 해서, 부모님이 다시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는 것을.
“제발!”
흠칫.
악을 쓰며 소리치는 목소리에 놀라 커진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발 그만…!”
에릭이 상체를 숙이고 바닥을 짚은 손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제 그만 하십시오…! 제발… 제발….”
에릭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바닥으로 투두둑 소리를 내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에릭의 눈물이었다.
“제가 스펠른으로 가고 각하께서 여기 계셨다면 이러지 않으셨겠습니까…?”
아아….
이것은 동정이 아니다.
연모로구나.
사랑이구나….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가, 눈물을 흘리는 이가 에릭이 아닌 아이든이었다면… 나는 정말 괜찮았을까?
다 이겨내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훌훌 털고 당신은 무사해 다행이라며 웃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겪어보지 않은 일이잖아.
“…에릭.”
천천히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에 에릭이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물로 온통 얼룩진 얼굴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널 사랑하지 않아.”
에릭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알고 있습니다.”
“…선을… 넘지 마.”
“예.”
무슨 충동이었을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에 얼룩진 눈물을 닦아주었다.
에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는 웃었다.
“우는 얼굴. 예쁘네.”
“…주군….”
에릭의 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고마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얼마 만일까.
편안하게 눈을 감아본 것이.
졸립다.
이젠 좀… 자고 싶어.
에릭의 뺨에 닿았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려갔다.
손바닥에 가득 찼던 온기는 아쉽도록 빠르게 식었다.
미소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렸다.
“너잖아….”
의식이 희미해져 감과 동시에 에릭의 처절한 외침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주군…!”
***
부모님과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 아쉽지 않을 만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행복에 취했다.
오랜만에 꾼 꿈이었다.
자의로 청하는 잠이 아니어서였을까?
그동안 자왔던 잠은 잠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것이었는데.
긴 단잠을 끝으로 꿈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 희미한 시야 안으로 들어온 것은 딜리아 공작가의 침실 천장이었다.
돌아왔구나.
부모님의 흔적이 담긴 그곳에서… 결국은 벗어나 버렸구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잘린 머리를 떠올려 보았다.
밀리언 해슬.
명백하게도 그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그 머리를.
그나마 살아야 할 명분을 만든다면… 그자의 생명이었을 텐데.
내가 직접 취했어야 할 생명.
이젠 정말 모든 것이 끝이 난 거 같아.
난 복수조차 내 손으로 하지 못했어.
느리게 깜빡이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 머리카락을 적셨다.
죄책감이 심장을 잠식해 옥죄어왔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앉고 보니 팔에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다.
사흘이나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으니, 탈수가 온 모양이었다.
음식물을 목으로 넘기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에릭의 따뜻한 눈물에 사흘 만에 제대로 된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생을 이어가야 할 명분이 생긴 것은 아니었으니까.
주사바늘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거침없이 팔에서 빼내 버렸다.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데일가처럼 침실에서 바로 발코니로 이어졌다면 난 아마도 바로 뛰어내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저택에 발코니 따위는 없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바람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어느새 겨울이 왔을까?
내가 그렇게까지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올만큼?
쨍그랑!
잠옷을 여미면서 창문을 닫는데 순간 뒤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나는 잠시간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가 급하게 달려와 나를 품에 부서질 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이 턱 막혀왔다.
“리안…!”
믿을 수 없어. 당신이야?
정말 당신이에요?
이것도 결국 꿈인 건 아니겠지?
그럼 당신도 나를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진짜인 거지?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돌아왔다.
아이든이다.
진짜 아이든이야.
두 손을 들어 올려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
막힌 댐이 무너지듯 꽁꽁 싸매 왔던 마음의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내가 흐느껴 울자, 아이든이 나를 놓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리안, 리안. 나를 봐. 눈 뜨고 나 좀 봐.”
눈을 뜨고 아이든의 얼굴을 내 시야 가득히 담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흐윽… 흐윽… 으흑….”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대 앞에 이렇게 내가 있잖아.”
“으흑… 사랑… 흐으윽….”
그가 내게 급하고도 거칠게 키스해왔다.
입속을 유려하게 헤집는 그의 감촉이 좋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찌릿거리며 아파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내 영혼이 아직도 요동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그만이 나를 숨 쉬게 한다.
그토록 조소하고 괴로워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명분은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텅 비었던 심장이 그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고서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결이 목을 간지럽혔다.
그의 거친 입술이 내 살결을 탐했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나를 꾸짖듯이 그가 거칠게 내게 흔적을 남겼다.
“아…!”
몸이 움찔 떨려 오자 그가 거친 숨을 뱉어내며 어깨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랑해… 사랑해… 리안… 릴리아나….”
그의 목소리로 불러주는 내 이름이 좋다.
매혹적으로 속삭이는 고백 사이 흐르는 숨소리마저 내 것이었다.
어째서 이 감각을 잊었을까?
어째서 이 감정을 모른 체했을까?
나는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아버지. 미안해요. 나를 용서하지 마세요.
이토록 행복한 나를 용서치 마세요.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
그는 망설임 없이 왕좌에 앉아서 공포에 덜덜 떨어 대는 스펠른 왕의 목을 쳤다.
손에 움켜쥔 왕의 목에서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아이든은 돌아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치열하게 검을 맞대던 적군의 기사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이든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연합군이 그들의 목을 순식간에 그어버렸다.
그토록 길게 갈 것 같던 전쟁이, 참으로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아이든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서 손에 들린 왕의 머리칼을 더욱더 세게 움켜쥐었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
나의 그녀가 있는 곳으로.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 아…….”
지친 한숨을 길게 토해낸 아이든이 왕의 머리를 움켜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곧 왕궁이 귀가 따갑도록 함성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드디어 100년의 숙업이 이루어졌다!
그런 외침 속에 모두가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데 아이든은 왕의 머리를 움켜쥔 채로 그저 터벅터벅 왕좌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그동안 쌓였던 모든 피로가 한 번에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라도 당장 엉덩이를 붙이고 나면 쓰러지듯 잠이 들 것만 같다.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와 아이든을 붙들었다.
“각하, 전서구가 왔습니다!”
기사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은 아이든이 그 자리에 머리를 툭 내려놓고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의 손에 묻었던 피가 새하얀 편지에 번져나갔다.
[각하. 에릭입니다. 급합니다. 데일가 전원이 살해당했습니다. 공작부인께서 정신을 놓으셨습니다.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 하신 걸 막았는데 그 후로 아무것도, 물조차 입에 대지 않으십니다.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 너무 무섭습니다.]
“!”
아이든은 커진 눈으로 편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대체 다 무슨…!
몰려왔던 피로감이 다 달아나 버렸다.
편지를 사정없이 구겨버린 아이든은 왕의 머리를 다시 움켜쥔 채로 고함쳤다.
“카이 드 로데우스!”
멀리서 군을 모으고 뒷정리를 지시하고 있던 황태자가 흠칫 놀라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를 발견한 아이든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구겨진 편지를 가슴팍에 거칠게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먼저 돌아가야겠다.”
아이든의 말을 듣고 편지를 펼쳐본 황태자가 놀란 눈을 들어 올렸다.
“아이든.”
“뒷정리 부탁해. 울프하운드도 부탁한다.”
“내 말 가져가. 그게 제일 빨라. 관리도 잘 되어 있으니 피로하진 않을 거야.”
아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을 빠르게 뛰쳐나갔다.
황태자의 백마에 올라타면서 몇 번이고 입술을 짓씹고 이를 아득 물었다.
릴리아나, 제발.
제발 버텨줘.
나만 두고 가면 안 돼.
안 돼, 릴리아나.
“으랴!”
아이든은 쪽잠을 자면서 최대한 쉼 없이 달려 사흘 만에 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에 발을 디디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옷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갑갑했던 갑옷을 모두 다 벗어 던졌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온 터라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 것만 같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녀를 확인하기 전까진 잠들 수 없다.
칼튼이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각하. 돌아오셨습니까.”
아이든은 바닥에 놓아둔 스펠른 왕의 목이 담긴 자루를 가리켰다.
“대문 밖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둬. 리안은.”
칼튼은 제 주인이 지금 몹시 큰 인내심으로 묻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이마와 목에 힘줄이 붉어져 있었다.
“침실에 계십니다. 나흘 전에 쓰러지신 채로 오셨는데 전혀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십니다.”
나흘!
아이든은 주먹을 그러쥐고 이를 아득 물었다.
“목욕 후에 갈아입을 옷 올려 줘. 목욕 시중은 필요 없어.”
마음 같아선 목욕이고 나발이고 당장 리안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피 냄새를 싫어하니까.
몸에 너무 오랜 기간 배어버린 피 냄새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예, 각하. 그럼 게스트룸 욕실로 가시겠습니까?”
아이든은 고개를 까닥이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게스트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욕실로 직행해 몇 번이고 반복해 몸을 씻어냈다.
혹시라도 남았을지 모를 피 냄새를 가려줄 향수까지 뿌리고 나서야 욕실에서 나와 하녀가 준비해 놓은 새 옷을 입었다.
“후우….”
긴장감 도는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부부 침실 앞에 도착하니 에릭과 볼턴, 윈터가 자신을 보고 거수경례를 해 왔다.
아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어때.”
에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각하….”
“그 얘긴 나중에 해.”
짓씹듯 뱉어낸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인 에릭이 고개를 들어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의원의 말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지라 신체가 많이 상해 다시 건강을 되찾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 하였습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것은 환자 자의인 것 같다고 하셨고요. 삶의 의지가 없으면 그대로 깨어나지 못하실지도 모른다고….”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이든은 자신을 탓했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니,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잃게 될까 봐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도 무슨 여유였단 말인가.
“…열어.”
“예.”
에릭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선 아이든은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이마에 버드키스를 하고 주저앉아 작고 앙상한 손을 부서질 듯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리안. 다녀왔어. 너무 늦었지. 미안해. 미안해….”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야윈 모습을 보니 울컥 눈물이 밀려 나왔다.
“내가… 내가 미안해….”
무슨 말로 이 죄책감을 걷어낼 수 있을까.
무슨 말로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네가 아프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널 어디에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나만 남겨두면 안 돼… 리안, 그러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