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9)

28. 끊임없는 위협

허허벌판에 스펠른군과 대치 상태로 선 프리온 연합군.

아이든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전에 죽였던 자들이 비틀거리며 온전하게 서 있지도 못하면서 꾸역꾸역 앞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수였다.

연합군들의 얼굴이 사색이 될 만도 했다.

“지금 이거 나만 소름 끼치는 거 아니지?”

옆에서 카이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죽은 자들을 살린 건가? 저들은 꼭두각시? 인형인가?”

아이든의 물음에 카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개처럼 싸워서 죽여버린 인간들이 도로 살아서 저렇게 서 있으니까 진짜 허망한데.”

아이든은 이를 아득 물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전쟁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리안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우두머리의 머리를 베어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저렇게 죽은 자를 계속 살려내는 것이라면 이 전쟁은 도대체 끝나기는 하는 것인가?

그동안의 전투를 치르면서 이쪽에도 사상자, 부상자가 꽤나 많이 발생했다.

그만큼 이쪽은 군 규모가 줄어든 상태.

아무리 프리온에서 지원병이 왔다고는 하나….

“표정이 왜 그래, 아이든? 쫄았어?”

카이가 피식 웃으면서 아이든을 툭 쳤다.

“…무력 충돌로 승산이 없다면 여우 같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가다간 이쪽이 전멸이다.”

“흐음. 뭐… 처음부터 쉬울 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차기 황제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듯한데.”

아이든은 끝도 보이지 않는 스펠른 군대를 바라보면서 혀를 쯧 찼다.

지금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다.

“…? 이거 뭐야? 땅이 좀 울리는 거 같지 않아?”

카이의 말에 아이든이 고개를 돌려 북쪽 능선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점점 땅이 울리고 거대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설마 뒤쪽에도 적군…?”

“각하! 황실 깃발이 보입니다!”

뭐?

아이든과 카이가 서로 놀란 듯 눈을 마주쳤다.

손해 볼 짓 절대 안 하는 그 능구렁이 이기적인 황제가 자기 기사단을 보냈다고?

“각하! 알란국, 헬리언국의 깃발도 보입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땅을 울리는 육중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

“반갑습니다. 알란국 황실기사단 제1기사단장 한슨입니다. 병력 총 천 명 지원하라 명받았습니다.”

“헬리언 황실기사단 기사단장 자밀이라고 합니다. 병력 총 천 명 지원하라 명받았습니다.”

“프세아니아 황실 제1기사단장 란테오, 황태자 전하,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총 병력 오 백 지원 왔습니다.”

아이든은 시야를 가득 채운 군대를 보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승산이 있다.

“로즈보르 단장님. 단장님 앞으로 서신이 한 통 있습니다.”

황실 기사 단장이 서신을 꺼내 제드에게 건네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서신을 펼쳐 든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아이든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다짜고짜 그의 가슴에 서신을 신경질적으로 들이밀었다.

“각하. 이곳에서 그분을 뵈었습니까?”

제드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아이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신을 들어 펼쳐보았다.

[제드 경. 그분께서 추가 병력을 더 원하셨습니다. 이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시는 것일테지요. 그분의 바람대로 추가 병력을 지원해 드립니다. 그리고 비상사태입니다. 그분께서 신성력을 각성하셨습니다. 때가 좋지 않은데 하필… 부군이 다친 것을 보고 충격에 그리되신 것 같습니다. 기도 중 보이기로는 그곳에서 부군을 치료해 드린 것 같은데. 프리온 새 황제폐하께서 그분의 존재를 아셨습니다. 느끼셨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그분께서 신성력을 각성하신 뒤로 끊임없이 능력을 쓰고 계신 터라… 미처 이 부분까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황제폐하께서 그분을 뵙기 원한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황위를 잃을까 불안하신 것이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승리를 거머쥐고 복귀하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부인을 잃게 되실지 모른다는 말씀을 각하께도 전해드리기를.]

“!”

아이든 역시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 제드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저야말로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분을 이곳에서 뵈었습니까?!”

젠장!

손에 든 서신을 팍 구겼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를 잃는 것!

아이든은 복부와 팔의 상처를 치료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분명 릴리아나였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이든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짓씹었다.

“며칠 전 복부와 왼쪽 팔에 깊은 자상을 입었습니다. 치료를 받는다면 한동안 참전할 수 없을 테고 차라리 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제드 경이 온 얼굴 근육을 와락 구기면서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휘젓다가 내렸다.

“이이…! 명석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당신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인지를 못 하시는 모양이군요!”

“…잃는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최악을 가정한다면 죽을 수도 있겠지요! 2황자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불같고 제 것을 빼앗기는 데에 크게 분을 느낀 자였습니다! 이제 황좌에 올랐으니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보다 더 나은 핏줄, 더 나은 신성력을 지닌 자를 가만히 둘 리가 없을 테지요! 게다가 여인의 몸입니다!”

아이든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휴와 노아가 있다.

볼턴도 윈터도 무엇보다 에릭이 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안을 지킬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다섯으로 충분할까?

기사단을 통째로 두고 나만 왔어야 했나.

아니… 하.

내가 지금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릴리아나를 못 본 지가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나는 지금 여기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뭘 위해 여기에 왔더라…?

매일 밤 보고 싶은 그녀가 꿈에 나타나지만, 결정적으로 얼굴은 흐릿해져 아무것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당장 달려가 리안을 몇 번이고 품에 안고 싶어.

그녀의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여자는 내 건데.

나만이 지켜줄 수 있는데.

오로지 나만이…!

“내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뭐?”

아이든이 보기 좋게 구겨진 서신으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려 제드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이 여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뭘 해야겠냐고.”

아이든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스산한 삼백안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이 여잔 내 거야.”

제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 자는 괴물이다.

이제껏 이런 눈빛을 한 자를 보았던 적이 있던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이라 해도 믿을 눈빛이다.

저 눈빛 어디에도 사람의 이성 따윈 없다.

제드가 경직된 채 아이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아이든이 제드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면서 짓씹듯이 말했다.

“누구든 건드리거나 빼앗으면, 도륙을 낼 것이다. 살 점 하나, 하나 발라 살아있는 것이 저주라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해. 당장 네 놈부터 죽여버리기 전에.”

이자는 지금도 참고 있구나.

저 광기 어린 눈빛도 전부가 아니다.

이 자는 사람인가?

사람이 맞기는 한 것인가?

제드는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황위에 욕심이 없다 하셔도 폐하께서는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완전히 믿지는 않으시는 분이셨으니. 후환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하실 수도 있겠지요. 현재로서는 그분께서 그리 연약한 분이 아니시기를 바라는 것과 하루빨리 귀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 외에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이든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제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카이가 앞으로 나서 아이든을 돌려세웠다.

“이봐, 자네. 정신 안 차려?”

카이가 손으로 아이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아이든의 움직임이 없자 카이가 실소를 뱉어냈다.

“이 새끼 또 이러네. 이거 몇 년 만이야? 반가워지려고 그러네. 이래서 내가 공작부인에게 떨어지라고 경고도 했는데 말이야. 너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새끼라고.”

‘으득.’

아이든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가 손으로 아이든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돌리고 피식 웃었다.

아이든의 눈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정신 차려, 공작. 그렇게 폭주하는 모습을 공작부인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그러다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 그래? 그렇게 애절하게 사랑하면서. 여기서 못 이기면 어차피 그 여자가 죽는다며.”

탁!

아이든이 손을 들어 턱을 잡은 카이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치워. 죽여버리기 전에.”

“아아. 이거 황족 시해 미수죄로 잡혀갈 대사인데.”

아이든은 카이의 말에는 대답 없이 제드를 노려보았다.

제드가 흠칫 놀라며 입술을 짓씹자 입술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맺혔다.

아이든은 그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려 비소했다.

“피… 좋은 냄새 나네….”

아이든이 돌아서서 검을 뽑아 땅을 긁으며 앞으로 걸어가자, 제드는 옆 사람을 붙잡고 휘청거렸다.

“저 미친놈. 진짜 폭주해 버렸네.”

카이가 중얼거리자 제드는 입술을 짓씹었다.

“저분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카이가 고개를 돌려 사색이 된 제드를 바라보았다.

“뭐. 그대도 내가 보기엔 만만찮아 보이는데 저 녀석한텐 안 되는 모양이지?”

“전하!”

“사람이지 그럼 뭐? 그냥 좀… 많이 미친놈일 뿐. 자네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

카이가 진한 미소를 얼굴에 걸고 말했다.

“제국이 낳은 괴물. 광기의 전쟁귀. 좀 슬픈 이야기지만 부모한테 그렇게 길러졌거든. 괴물로.”

제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평소처럼 싱긋 웃었다.

“그런 싸이코 같은 자식이 사랑을 깨우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감정은 있긴 한가 의심스러웠는데. 가자고. 우리 다 저 자식한테 죽기 싫으면 이겨야 하지 않겠어?”

“전쟁귀….”

제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든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오랜 세월 잊지 못할 것 같다.

누구에게도 쉽게 덜덜 떨어본 적이 없었는데.

***

그것은 전쟁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저 완벽한 도륙이자 살육이었다.

병력의 규모 차이도 한 몫 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성기사단이 공격과 방어 마법으로 엄호를 하는 사이 프세아니아 연합군이 스펠른의 기사들을 상대하고 아이든이 그 중심을 뚫고 끊임없이 적군을 살려내는 마법사를 처단하는 것.

분명 처음의 의도는 그러했는데.

전쟁터를 휘젓는 아이든의 모습에 아군마저 공포심을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마지막 마법사의 머리를 벤 뒤 그 머리통을 들고서 진하게 웃는 모습은 가히 마신의 현신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승리했다.

모두가 전쟁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축제의 분위기였지만, 아이든은 제 막사로 들어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카이는 혀를 차고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힐끗 옆을 보니 제드 로즈보르가 눈에 띄게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나 저기나 정말이지 짜증이 나서 못 봐주겠네.’

“쫄았나? 저 녀석 때문에?”

카이가 툭 던지듯 묻자 제드가 흠칫 놀라며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가 뭐냐고 대체. 전쟁 처음 겪어봐? 자네 그런 사람 아니잖아.”

“그걸…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같이 보셨잖습니까! 저자 정말 사람이긴 합니까? 감정이 없는 악마 같았습니다! 그분이 평생 함께할 자가 저런 악마 같은…! 저한텐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직도 온몸을 휘어 감던 그 공포의 감각이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악마…? 그래서 엄호할 생각은 안 하고 덜덜 떨고만 계셨다?”

“전하!”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겁이 많군. 프리온 무력 2인자답게 제법 강한 줄 알았는데.”

바람에서 공기 타는 냄새가 났다.

옅은 숨을 뱉어냈다.

‘북쪽은 북쪽이라는 건가.’

카이는 손에 들린 따뜻한 수프를 제드에게 내밀었다.

“따뜻할 때 먹어 둬. 체온이 내려가면 큰일 나. 이곳의 밤은 춥다.”

제드는 눈을 내리깔아 카이의 손에 들린 수프 그릇을 바라보았다.

“정녕 사람이….”

“말했잖아. 그렇게 ‘길러진’ 거라고. 녀석의 아비는 늘 녀석을 감정 따위는 없는 살인귀로 만들고 싶어 했지. 그 결과 본인의 목숨마저 잃었지만 말이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들은 아비의 원대로 감정 따위는 애초에 없던 사람처럼 굴었고, 아비는 뒤늦게 뼈저린 후회를 했지.”

카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바마마를 뵙고 싶어 찾아갔던 정원에서 공작과 아바마마가 나눈 대화를 어쩌다가 엿듣고 말았던 날.

[난 그저 그 아이가 공작가의 주인의 자리에 걸맞은 모습으로 자라길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망가지길 바랐던 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아일 망쳤습니다, 폐하. 그 아이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제 눈앞에서요!]

부모의 끊임없는 욕심은 결국 자식을 더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럼에도 자식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걸 즐길 수 있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더구나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공작과 아바마마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커온 가장 가까운 친우였다.

서로의 성격도 성향도 맞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놀랍게도 그랬다.

그날 공작은 아바마마의 팔을 붙잡고 답지 않게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삐뚤어진 자식 사랑의 결말은 지독히도 참혹한 것이었다.

그 ‘비극의 날’이 지난 후 새로 공작위를 물려받은 어린 공작은 나이에 맞지 않게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냉혹하고 잔인한 괴물 같은 자였다.

그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자신도 눈앞의 사내처럼 몸을 벌벌 떨어 댔었지.

그땐 정말 어렸으니까.

“생각해보면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내게 생전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는데 말이야.”

무관심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카이는 중얼거리면서 제드의 손에 억지로 수프 그릇을 쥐어주었다.

“그럼에도 아이든은 사람이네. 내가 이전엔 말장난을 좀 치긴 했지만, 녀석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눌러 참는 것이고. 악마 같은 것이 아니라 눌러 참는 감정이 폭주하는 거야. 스스로도 감당 못 할 감정이 화산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거지. 아마도 녀석은 혼자서 온갖 감정을 삼켜내는 밤을 수없이 지나왔겠지. 언제나 조건 없는 애정에 굶주려 있었고. 그걸 채워준 것이 공교롭게도 공작부인이었으니, 저렇게 집착할 만도 하지 않겠나?”

“…집착.”

카이는 승전 파티에 신이 나 술을 들이붓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거 알아?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황궁으로 쳐들어와서 내게 했던 말이 있었는데.”

[미리 말해 두는데 필요하다면 그녀에게 제국이라도 손에 거머쥐어 줄 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해. 그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입씨름 하지 말고 그냥 승인 도장 찍어.]

“귀족 따위가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결코 선례가 없던 일이었어. 그런데 다짜고짜 쳐들어와 협박을 그렇게 하는 신하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감히.”

카이가 고개를 돌려 제드와 눈을 맞추었다.

“그런데 녀석은 늘 그래. 항상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막힘이 없고 주저함이 없어. 그 덕분에 제국이 이만큼 유지되어 왔어. 그리고 공작부인 역시 안전할 테지. 그 덕분에.”

제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하나밖에 없는 내 오른팔에게 그따위로 대하지 말게. 이건 경고야.”

흠칫.

카이의 형형한 눈을 바라본 제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가 만족한 듯 싱긋 웃고 벌떡 일어나 기사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확실히 차기 황제라는 것인가.”

제드는 고개를 숙여 제 손에 들린 수프 그릇을 바라보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공작을 빠르게 제도로 돌려보내야 한다.

***

막사 안에 원형 탁자에 둘러앉은 사내들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든의 상태가 아직도 좋지 않았다.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앉아 제 검만 만지작거리는 아이든을 흘긋거린 제드가 고개를 돌려 카이를 바라보았다.

“본시 어느 전쟁이나 포로는 있는 법입니다. 남은 자들을 포박해 데리고 돌아가야 합니다. 이곳은 이제 곧 겨울입니다. 계절은 빠르게 이동합니다, 전하. 제국에도 곧 겨울이 올 겁니다.”

“프리온에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요. 후환을 남겨두려 하십니까? 누구보다 마법사들을 대륙에서 몰살하고자 했던 것이 당신네들이 아니었습니까?”

알란 국의 기사단장 한슨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고집을 피울 만큼 앞뒤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한슨 경.”

“아니. 뭐가 불가피하다는 겁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완벽한 소탕이 가능합니다. 아까 제국의 공작 각하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본인의 개인 의견이 프리온 전체를 대표한다고 확실시하실 수 있는 겁니까?”

“대표…! 으득, 예. 당연합니다! 게다가 그 공작 각하가 돌아가셔야 한단 말입니다!”

제드가 언성을 높이자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황태자 전하. 끝을 봐야 합니다. 저들은 한 명만 남겨두어도 다시 일어설 자들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란테오의 말에 카이가 팔짱을 끼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가면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지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 아이든. 어찌할 텐가?”

아이든은 검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각하. 지금 돌아가셔야 그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제드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 돌아가면 그녀를 구할 수 있다.

그런데 후환을 남겨두면 결국 또 그녀는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두려움에 휩싸여 불안에 떨겠지.

그러다 언젠가처럼 이상한 것을 보고 발작을 할지 모르고.

게다가 그 후환이 언젠가 제국에도 악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고민을… 하시는 겁니까?”

제드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아이든.”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아이든이 카이를 바라보았다.

“자네 여기 올 때 내게 그랬지. 스펠른 우두머리의 목을 쳐서 가져가야 한다고. 약조했노라고.”

아이든은 그 순간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기억조차 희미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의 감촉.

[다녀올게. 그대에게 마법사 수장을 죽여 바칠 거야. 맹세해.]

어째서 이곳에 온 이유를 잊었을까?

이렇게도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울프하운드의 정예병은 어디서도 패해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릴리아나가 신성력을 각성했다.

마법사의 수장을 지금 잡지 않으면 어디로 숨어들지 알 수 없다.

그때에는 지루하고도 긴 싸움이 될 것이고, 또다시 제국과 릴리아나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못할 것이다.

결단은 지금 내려야 했다.

“제드 로즈보르.”

“예, 각하.”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제드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뚜렷하고 명확한 눈이었다.

“프리온의 현재 황제는 주변국과의 외교를 신경 쓸 자인가?”

“예. 황제로서는 결격사유가 없는 분입니다.”

“리안이 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여기 이만한 병력이 추가 지원되었다는 말은 믿어도 되는 것인가?”

“아직 사제님께서 프세아니아 제국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원하신다고 하면 그게 무엇이든 힘써 이뤄내실 분이시니 아마도 그럴 겁니다.”

“…스펠른의 피라면 씨 하나도 남겨 놓지 않겠다.”

“각하!”

제드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지만 아이든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카이를 바라보았다.

“리안이 신성력을 각성했고 그게 프리온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것인지 주변국이 알게 된다면 황제로서도 그렇게 쉽게 리안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머리가 비상하지 못한 자라면 몰라도. 나는 내 여자를 믿어 보기로 결정했고, 번복은 없어. 지체없이 출발해 마을로 진입한다.”

카이가 진한 미소를 입에 걸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원하던 답을 해주시는군. 속 답답해 뒤질 뻔했어, 친구.”

***

무언가 늘 선택의 기로에 설 때에는 내가 옳은 결정을 내린 것인지 불안해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늘 나는 조금씩 충동적이었고, 그 빠른 결정 끝에 따라오는 결과를 보고 기함을 하고는 했다.

어쨌든 결과에 늘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충동적이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엔 정말 신중해지고 싶었다.

나답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쉬이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 곁에 날 지지해주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이가 없기 때문일까?

그래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정원사는 당분간 새로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명했다.

꽃들이 시들면 내가 신성력을 사용하면 될 테고, 신원을 믿을 수 없는 자가 저택으로 들어온다는 게 꺼림칙했다.

시기가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각이 그런 쪽으로만 갔다.

내가 마실 뻔했던 찻물에는 소량만 섭취해도 죽음에 이를 맹독이 있었다고 했다.

의원의 말을 듣는데 정말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차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쪽지를 발견했더라면.

이렇게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저택 밖에 진을 친 저들을 돕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혹여나 저들 중에서 내 죽음을 바라는 이가 한 명도 없다고 확신이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이젠 누구라도 내 죽음을 간절히 바랄 것만 같았다.

오늘도 손톱을 물고 씹으면서 침실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나는 늘 이렇게 안절부절을 하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이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나는 저들을 도와주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모든 걸 감수할 수 있겠다는 용기 또한 필요했다.

여기서 내가 저들을 외면한다면 제국인들은 공작가로부터 영영히 몸을 돌려버릴까?

혹 내가 하는 선택으로 인해 그 사람의 겨우 좋게 만든 명성에까지 피해가 가면 어쩌나 하는 무시하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칼튼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이 한가득 묻어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더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칼튼?”

“황궁에서 급한 전서가 왔습니다.”

부리나케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칼튼이 내미는 편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인장이 없이 붙은 봉투였다.

부리나케 협탁으로 가서 편지나이프를 꺼내 한 번에 봉투를 잘라냈다.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불편하시다는 것은 알지만 부디 황궁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정말 다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부인. - 사제]

편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리고 로브를 찾아 뒤집어썼다.

호위들이 따라붙는 것을 보고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에릭과 노아만 데리고 가겠어요. 나머지는 여기 계시다가 저택에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통해 주셔야 해요. 저택을 잘 지켜주세요.”

볼턴 경과 윈터 경, 휴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존명.”

고개를 끄덕여 주고 칼튼을 바라보았다.

“저택에 후문 같은 건 없나요? 정문에 버티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요.”

“비상 대피할 때 사용하려고 만든 후문이 있습니다, 주인님. 에릭 경도 알고 계실 겁니다. 마차를 그리로 대라고 할까요?”

“예. 말 두 필도 부탁드려요.”

칼튼이 고개를 숙였다 들고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에릭을 바라보았다.

“안내해 주세요.”

“예, 주군.”

***

후문에서 무사히 마차를 타고 황궁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칼이 마중 나와 나를 아이든의 집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오는데 따라붙는 자는 없었습니까?”

칼이 에릭에게 물었다.

에릭과 노아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행이군요. 들어가십시오.”

칼이 집무실 문을 열어주어 우리 모두 안으로 들어섰다.

로브 모자를 벗고 소파 있는 쪽을 바라보자 이미 사제가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제님.”

내가 다가서며 부르자 사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핏기가 없어 보여 나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으시군요.”

“일단 앉을까요, 부인?”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 맞은편으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사제가 따라 앉아서 탁자 위에 놓인 차를 내게 권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긴장한 시선으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낯빛이 창백하세요. 무슨 큰일이 생긴 거죠?”

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인.”

나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사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내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동안 얼마나 대단한 일을 벌여 왔는지에 대해 말하는 동안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 모든 것은 내가 원한다고 전서를 보냈던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을 이렇게 벌여 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사제는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나는 단 한 번도 내 몸에 이자벨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내가 디누트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신탁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차서 괴로워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내 몸속에 흐르는 피가, 신탁의 아이라는 점이 나를 그렇게까지 영향력 있는 말도 안 되게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사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내가 정말 프리온의 군주 자리에 앉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일까?

내게 프리온의 일에 더 이상 깊은 개입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사람이?

사제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 멍한 얼굴로 찻잔만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프리온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해오느라 쉬이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황제는 이미 내가 신성력을 사용한 것을 멀리서도 느꼈고, 내 존재를 눈치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프리온의 황제가 나를 보고자 한다.

그는 나를 죽이려는 것일까?

그 황금 칠 된 의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살아남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살아남을 수는 있는 것일까?

내 존재 자체가 반갑지 않은 자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이대로 사라져 주면 그들은 기뻐할까?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내 죽음을 관망하며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을 했던 빌처럼?

내 존재 자체를 병균 덩어리 취급했던 빌처럼?

나는 그저 삶을 살고자 하는 것뿐인데, 그들은 어째서 끊임없이 나를 미워할까?

두렵고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다.

나를 좀 내버려 둬!

마음의 절규가 온몸을 휘어 감는 기분이 들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길 기대하시나요?”

“부인….”

“그저 평범하게 한 사내의 여자로서 살고자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바람인 것일까요? 나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 건가요?”

“…죄송합니다.”

“이제 정말 지치네요. 말씀해보세요, 사제님. 제가 프리온의 군주로서 서길 바라시나요?”

“…….”

사제의 침묵이 전하는 바는 명확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돌덩이가 나를 위에서 내리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왜 다들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지 못해 안달인 거야?

좀 편안해지고 싶다고 하잖아.

그냥 목숨만 붙여주면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겠다고 하잖아.

그저 행복하고 싶은 사람과 매일매일을 바라보고 웃으며 살고 싶은 것뿐이라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사람에게 모닝 키스를 하면서 여유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 모든 게 내게는 거창한 소원인 거야?

어째서? 나는 그저 평범한 여인일 뿐인데 왜?!

“사제님께서는 내가 프리온의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해주길 바라시나요? 그렇다면 애초에 2황자를 지지할 필요조차 없으셨을 텐데요. 처음부터 제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오래 유지되지 못할 행복 따윈 버리고 군주의 자리에 올라 달라고.”

“부인. 저는 그런 것이…!”

“그런 것이 아니면요?”

사제의 말을 잘라내고 차갑게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이젠 프리온의 모든 동맹국이 제 존재를 알게 되었군요. 내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일 줄 몰랐네. 일개 백작 영애였던 내가.”

“부인….”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한들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무려 신탁의 아이인데요? 아이든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돌아오면 다들 그러겠군요. 신탁이 이루어졌어! 드디어 예언의 아이가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냈어! 나는 공작저 저택에 앉아 매일 차나 들이키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지냈는데! 그동안 아이든은 수많은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나와의 약조를 지키겠다고 버티고 버텨왔어요! 내가 손에 물을 묻히지 않으니 아이든은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단 말입니다!”

사제가 두 눈을 꼭 감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나였다.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그럼에도 매일 악착같이 버텨온 것은 오로지 아이든 때문이었는데.

이젠 행복이 너무 아득해 보였다.

타의에 의해 나는 이미 너무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이번에도 아이든은 나를 쫓아 올라와 줄 수 있을까?

그의 모든 것을 또다시 내던져 가면서?

내가 혹여라도 정말 프리온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이든에게 오랫동안 제국을 수호해 왔던 가문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매달려야만 할까?

모든 것이 끔찍하고 괴롭기만 하다.

일라즈 님은 대체 왜 나여야만 했을까?

왜 내게 자꾸만 이렇게 견디기 무거운 짐을 얹으려고 하시는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아. 처음부터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빌의 손에 그저 죽어버렸더라면.

차라리 내가 없어져 버렸으면.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 하지만 이자벨 님의 후손이자 신탁의 아이라는 조건이 갖는 의미는 부인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란국에서도 헬리언제국에서도 그 존재가 갖는 의미 하나만으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해 온 것이고요. 하지만….”

사제는 고통스러운 듯이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하지만 부인의 행복을 짓밟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부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부인의 말씀대로 2황자를 지지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 이렇게 다시없을 강하고 위대한 군주가 계시는 것을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답답한 숨을 삼켜냈다.

사제의 말은 전혀 조금도 내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력 지원을 설득하기 위해서 알란국과 헬리언제국에 제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으셨다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솔직히 대관절 내가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뭘 어쩌겠나.

이제 와서.

나는 아이든을 살려야 했고, 이건 그것을 위한 방편이었는데.

강하고 위대한 군주.

어색하고 낯선 단어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리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런 말을 한다고 한들 사제가 수긍이나 해줄까?

이들은 이미 마음속에 신탁의 아이가 자신들의 군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인생인데.

이렇게까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생각을 해도, 나 없이는 안 된다는 아이든을 생각하면 그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정말이지 나는 내 인생을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셈이었다.

“제게 원하는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하세요. 또 뒤에서 저를 기만하지 마시구요.”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 백 번 사죄를 해도 모자라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은 이제 필요 없어요. 유의미한 말을 해주세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에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아이든을 잃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저들 손에 쥐여주자.

사제가 나와 눈을 맞추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다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괴로워했다.

“자포자기하셨군요…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제가 부인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불충을 차라리 욕하시고 꾸짖으십시오.”

불충.

그것은 주신 관계에서나 쓸 수 있는 단어다.

이 사제가 나의 신하였던가?

대체 언제부터?

그러면 이들은 애초부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주군이라 칭해왔다는 것일까?

하… 이젠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유의미한 말씀만 하시라고 했는데요. 말씀을 꺼내시기 어려워하시니 내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프리온의 황제를 만나겠어요. 그걸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리 해드리죠. 그런데 내가 그 황좌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한들 그걸 믿어나 줄까요? 되게 웃기는 일이네요. 프리온 황제는 제 형제들도 모자라 옆 나라 일개 여자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불운한 존재로군요.”

“…송구합니다.”

“이제 제 목숨이 정말 경각에 달렸군요. 하긴 언제는 안 그랬겠냐마는”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더 이상 눈조차 맞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불충이라 하셨습니까? 나를 진정 그리 주인으로 생각하셨다면 경고하는데 아이든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귀환해야 할 겁니다. 물론 나도 살아야겠으니 스펠른 사람이라면 씨조차 남기지 않은 상태로 말이에요. 아. 여전히 제국에 머무르는 그 신원미상의 수행 사제와 더불어 자꾸 저를 위협해 오는 암살자까지 모조리 잡지 않으면 그땐 정말로 그대도 그리 아끼는 주인을 잃게 되실 겁니다. 바로 며칠 전에도 독살당할 뻔했거든요. 내가.”

사제가 충격받은 듯 커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어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일이…? 예상하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나는 이날까지 꾸준히도 생명을 위협 받아왔는데요? 주술은 사제님께서 풀어주셨으니 다른 방법을 쓰려고 안달이 났겠죠.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 줄 아세요? 저택의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사람들을 전부 의심해가면서 살고 있어요. 어디에 누가 숨어들지 알 수 없으니 매일매일 긴장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요! 내일도 내가 살아있을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건 아닐까?! 나는 매일매일 시간이 너무 소중해요. 그런데 심지어 그 시간조차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지 못하고 있군요! 어쩌면 그들은 성공했을지도 몰라요. 내가 이렇게 불행하니까.”

사제의 일그러진 표정에 심장이 아릿해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그녀의 감정을 모른 체했다.

“주술사가 찾아올 때면 항상 제게 똑같은 말을 했어요. 당신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으니 제발 죽어 달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보낸 밤이 수도 없이 많죠. 내 존재는 죄악이야.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나만 사라진다면 모두가 평화로울 텐데. 아이든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주해야 하는 심정을 사제님은 알고 계세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나도 모르게 누군가는 내 추종자를 만들어내고 나를 끌어올렸네요. 그러니까 나는 내 몸뚱이 하나 내 맘대로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누군가는 나를 끌어내리고 누군가는 나를 끌어올리고!”

내 눈에서 그녀는 무엇을 읽었을까.

사제가 눈에 띄게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고통이 내 고통에 얼만큼이나 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이잖아요… 내 몸뚱이는 내 거잖아요! 다들 참… 잔인하시다는 생각 안 해보셨어요? 본래 사람은 누구나 놀랍도록 이기적인 것이라지만….”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본래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나 역시도 지독하리만치 이기적이라서 국가든 공익이든 아이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머지 기사들이 모조리 죽어도 상관없었다.

아이든만 살 수 있다면.

그게 나의 실체였다.

나는 절대 선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다 들어 주겠어요. 어차피 처음부터 이 몸뚱이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다만 나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아이든을 잃지 않는 선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그만 있으면 되니까. 이 정도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정돈 욕심내도 괜찮잖아. 이 이상 당신네들한테 바라는 거 없어.”

“저를… 차라리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그 입.”

슬프게도 울고 있는 그녀를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그 입 닫아. 내가 불행해하고 괴로워하는 꼴을 똑똑히 지켜봐. 그게 그대들이 받을 벌이잖아. 견뎌. 내가 견디고 있는 것처럼.”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에릭과 노아 역시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저들은 나를 더욱더 연민의 눈으로 보겠구나.

다 가진 공작부인.

그러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불운한 여자.

나는 픽하고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아도 누구보다 외롭던 아이든과 나는 애초부터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프리온 황제 폐하께 나를 보고 싶거든 알아서 찾아오시라고 하세요. 그대들이 나를 그보다 높이 했으니 내가 프리온으로 가야 할 필요는 없겠지. 아이든이 없는 동안에는 저택을 비우고 싶지 않으니까.”

“…예. 명 받들겠습니다.”

사제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바라보았다.

귀라도 안 들렸으면 좋았을까?

피곤하다.

그만 자고 싶어.

“…돌아가죠.”

에릭이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노아가 내민 손을 잡고 에스코트 받으며 황궁을 나왔다.

마차에 올라타서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대로 잠들어 아이든이 돌아오고 나서 눈을 뜰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답답한 마음을 목구멍 아래로 내리눌러 삼키고 눈을 감았다.

몸 안에 흐르는 신성력의 기운을 감지하고 제어해보았다.

나와 아이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이든,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저택으로 돌아와서는 내내 잠만 잤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몸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술이 걸렸던 몸뚱이가 아직 다 낫지 않았던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한 번도 깨지 않고 온종일 잠만 자는 내가 다들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고 나서자 호위 기사들뿐만 아니라 칼튼까지 문 앞을 지키고 서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놀라 커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다들 뭐 하시죠?”

“주인님. 괜찮으신 겁니까? 의원을 불러야 하나 의논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의원이요?”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주인님….”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칼튼에게 몹시 피곤하니 잠들면 깨우지 말아달라 이르고 올라왔는데?

나는 칼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머지 호위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왜들 표정이 그래요? 내가 피곤하다고 자고 싶다고 했잖아요. 깨우지 말아 달라고 했고. 그렇지 않아요?”

“걱정이 되었습니다. 궁에서 너무 위태로워 보이셔서….”

에릭이 미간을 구기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주먹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진 것이 보였다.

물론 그때 내가 감정이 격해졌던 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분명 에릭과 노아가 나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모두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과민반응을 할 줄은 몰랐다.

마치 내가 방에 죽으러 들어간 줄 아는 사람들 같다.

초상이라도 치른 표정들을 하고서 서 있는 꼴들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피곤했어요. 나는 괜찮다구요. 칼튼은 가서 이제 볼일 보세요. 나머지 분들도 각자 자리로 가서 제 역할에 충실하시고. 내 남편이 죽어서 돌아오는 거 아니면 내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 안심들 하세요.”

내 말에도 모두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왜들 그래요? 나 정말 괜찮다니까! 얼른 가세요, 칼튼!”

“…예. 주인님. 그럼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무겁게 옮겨 돌아서는 칼튼을 보다가 아차 싶었다.

“아. 칼튼. 잊을 뻔했는데. 내일부터 저택에 찾아오는 사람들 한 명씩 응접실로 불러주세요. 원하는 걸 해드리겠다고 하시고요.”

칼튼이 뒤를 돌아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들을 전부 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이젠 거리낄 게 없어졌거든요. 제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해볼 수 있을 거 같으니 잘 되었어요.”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어요, 에릭.”

“하지만…!”

“연민이 들었겠죠, 당연히. 그럴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고작 내 감정을 저택 사람들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에릭에게 그럴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고요.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송구합니다. 하지만 제 감정은 연민 따위가 아니라….”

“연민 따위가 아니면?”

표정을 굳히고 말을 자르자 에릭이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에릭이 가졌던 것이 무슨 감정이었든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연민이든 뭐든 나한텐 다 똑같아. 선을 넘지 마세요.”

“…송… 구합니다.”

에릭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말하는 것이 나라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볼턴 경의 말처럼 마냥 에릭만 오냐오냐하면서 예뻐해 줄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더더욱 그가 잘못한 것이고 말이다.

“사용인들 사진이 붙은 명단 드렸던 건 다들 같이 보셨어요? 얼굴들 외워 두라고 드린 거예요. 이왕 제 경호를 하기로 마음을 먹으셨으면 좀 더 신경 써 주십사 해서요. 물론 한번 쓴 방법으로 다시 접근해 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죠.”

“예. 꾸준히 계속 보고 있습니다, 부인.”

윈터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난 들어가서 좀 더 쉬어야겠어요. 수고들 하세요.”

에릭이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냉정하게 돌아서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

숄을 두르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으니 문이 열리고 남루한 차림의 여자가 쭈뼛대며 어색하게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사색이 된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청소하는 사용인들이 있으니 내가 밟는다고 저택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은 안 하셔도 좋아요. 이리 와 보시겠어요?”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인이 몸을 벌벌 떨면서 소파 바로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제, 제가… 제가 어찌 감히 부인께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흠… 하지만 상태가 어떤지 내가 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 말로… 말로 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저택에 찾아와 농성을 할 만큼 간절하고 용기가 있었으면서 대체 다들 왜 이럴까.

벌써 이번이 8번째 사람이었고 내내 계속 같은 반응이라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치려고 하고 있었다.

“어디가 안 좋은지 정확히 이야기해 보세요.”

여자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쉽게 뱉어내지 못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여자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아세요?”

내 목소리에 여자가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 그 전엔 안 보이던 것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예컨대 이런 거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렁줄을 잡아당기니 곧 칼튼이 들어와 고개 숙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옷 속에 감춰졌던 손을 들어 올려 팔을 걷어 올렸다.

팔에 채워진 팔찌에서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흠칫 놀라며 팔을 빼려는 그녀를 노려보며 더욱 우악스럽게 팔을 그러쥐었다.

“에릭, 볼턴 경, 윈터 경 들어오라고 하세요.”

칼튼이 부리나케 나가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호위 기사들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나는 신성력을 그녀의 팔찌에 박힌 보석으로 흘러 넣었다.

곧 신성력과 마력이 충돌해 검붉은 기가 요동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게 뭘까?”

“이… 이건… 이게 그러니까…!”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야. 너 뭐야.”

흠칫.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게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다.

만약 나를 죽이러 온 암살자나 마법사였다면 이렇게 겁먹어 발버둥 칠 게 아니라 나를 바로 공격해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이 여자는 정체가 도대체 뭐지?

팔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뒤로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려던 여자는 반동에 의해 뒤로 쿵 하고 넘어져 버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호위 기사들을 바라보고 턱짓했다.

에릭과 볼턴, 윈터 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마법사? 주술사? 암살자?”

내 물음에도 여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이런 잔인한 말을 하는 때가 오다니….

하지만 나도 내 목숨은 지키고 봐야 하니까.

“안 쓰는 혀 그냥 잘라 버릴까?”

내 말에 호위 기사들까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져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당신들이 놀라면 어떡해?

“아, 아뇨! 아니요!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자비를…!”

나는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해야지.”

“누군가 제게 이 팔찌만 차고 들어가 주면 거금을 주겠다고 했어요! 돈이 필요했어요! 정말이에요!”

거금!

“얼마를 주겠다고 했는데?”

“20만 프랑이요! 20만 프랑을 준다고 했어요!”

20만 프랑이나…?

평민에게 20만 프랑이면 평생을 놀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누가 그런 돈을 주지?

“어떻게 할까요, 부인?”

윈터 경의 질문에 손을 들어 저지시키고 손톱을 입에 물었다.

20만 프랑은 평민에게는 큰돈이지만 제도 내에 살고 있는 귀족에게는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스펠른 사람이어야 하는데.

전쟁 중에 제 것 챙기기에 급급하면 몰라도 20만 프랑이나 되는 돈을 내어준다고?

프리온 사람일 가능성은?

하지만 배도했던 선대 황제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2황자는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을 텐데.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손목에 반짝이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주술을 파괴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사제는 어떻게 했을까?

내가 그녀보다 신성력이 부족할 리는 없을 텐데.

“윈터 경은 팔찌 풀어서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서 칼을 만나세요. 사제님을 뵙고 싶다고 말씀 드리면 뵙게 해줄 거예요. 팔찌에 담긴 주술이 뭔지 알아 오세요.”

“예. 부인.”

윈터 경이 여자의 팔에서 억지로 팔찌를 끊어서 응접실을 나갔다.

“당신은 그 팔찌를 내가 맘에 들어 해서 선물로 주었다고 하세요.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예, 예. 아, 아무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님.”

“휴, 노아.”

응접실 구석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던 휴와 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하십시오.”

“이 여인이 가는 길에 조용히 따라붙으세요. 상대가 알아채면 안 된다는 거 명심하고. 20만 프랑이나 주겠다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 그자 신상정보에 대해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털어오면 더 좋고.”

“존명.”

나는 에릭과 볼턴 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보세요. 당신이 그 자에게 가서 거짓말 못 하는 얼굴로 들키지만 않으면 죽지 않고 20만 프랑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죠?”

“예, 예! 마님!”

에릭과 볼턴 경이 여인을 풀어주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곤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휴와 노아가 곧 뒤따랐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볼턴 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머리를 흩트렸다.

“스펠른은 벌써 씨가 말랐을지도 모르는데 20만 프랑이나 줄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혹여 제국 내에 변절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

나는 소파에 앉으려다가 고개를 돌려 볼턴 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제국인은 아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워낙 마법이나 주술에 대해 무지한 나라였고, 그렇게 쉽게 변절할 수 있는 귀족이 있으리라고 짐작이 되지 않아서….

나는 다시 손톱을 깨물면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주군.”

“네, 에릭. 말씀하세요.”

“손톱… 피가 납니다.”

흠칫.

입에서 손을 떼어내니 손톱 사이에서 피가 고여 손톱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무감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손톱 깨무는 버릇이 생겼지?

하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이 정도는….”

신성력을 손끝으로 흘려보내자 순식간에 피가 멎고 손톱이 깨끗해졌다.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오늘 일은 끝내야죠.”

“주군. 이만 들어가 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까 그 주술 걸린 보석… 분명 뭔가 영향을 받으신 거 아닙니까?”

아니라고 해도 안 믿어 주겠지?

사실 팔찌에 있는 보석에 신성력을 흘러 넣을 때 뿜어 나온 악한 기운에 순간 머리가 아파왔던 건 사실이었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20만 프랑이나 줄 만큼 영향력 있는 주술이었을까요?”

“제국에 그것도 제도 내에 있는 귀족들 중 20만 프랑을 무겁게 느끼는 자들은 없습니다.”

볼턴 경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겠죠. 하지만 저 여인에겐 아니잖아요. 나는 하층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본 적이 있어요, 볼턴 경. 그건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짐승에 가까웠어요. 20만 프랑이면…. 적어도 평생 동안 사람으로 살 수 있을 테죠. 그 돈을 건네주는 사람이 그걸 몰랐을까요?”

***

누구나 자기 처지를 인정하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욕심은 본디 이만큼을 가지면 그보다 더한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휴가 전해온 말에 따르면 그 여인은 20만 프랑을 거절했다고 한다.

내가 해주길 부탁한 연기는 물론 완벽하게 해주었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여인이 그랬을까?

아니. 생각해보면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부탁을 받고 저택에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여인으로 하여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원하는 것은 이루었으니 이젠 솔직히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고.

“하아….”

내 한숨에 옆에서 내 업무를 돕던 칼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칼튼을 바라보며 한차례 난처하게 웃었다.

“우리가 후원에 쓸 수 있는 여유로운 예산이 얼마 정도 남았을까요, 칼튼?”

칼튼은 커진 눈으로 나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돕고 싶은 분이 생기셨습니까?”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도 될 일일 텐데.

그녀로 인해 내가 잠시간 주술에 휩쓸릴 뻔한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하지만 마음이 썩 편안하지 않으니 이건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내가 자꾸만 남들한테 휘둘린다고 생각하죠? 한두 번이었어야지.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는걸.”

“주인님.”

“네?”

칼튼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내게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그 점이 주인님의 큰 강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셨잖습니까. 오래도록 늘 냉기만 날리던 공작저에 꼭 필요하신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칼튼… 나를 너무 좋게 봐주고 계시는군요.”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산은 충분히 넉넉하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책상 위에 펼쳐진 재정부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마음대로 막 쓰라고 있는 돈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돈들은 원래 안주인이 막 쓰라고 있는 돈이 맞습니다. 그러라고 각하께서 내어 맡기신 것입니다.”

“아… 정말이요?”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주인님께서 비정상적으로 안 쓰신 겁니다. 보통 귀부인들께서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의류가 되었든 액세서리가 되었든 쇼핑을 하시니까요.”

“음. 사실 이 저택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뭔가 사건사고들이 많았잖아요. 그럴 정신조차 없었어요. 생각해 보니 제 앞으로 떨어지는 예산이 따로 있긴 했겠어요. 그렇죠?”

“그런 것도 보통은 안주인이 알아서 판단하고 부군과 상의하는 정도로 책정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돕고자 하는 분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쓰고 싶으신 만큼 쓰시면 됩니다.”

“그럼 저 20만 프랑도 가능할까요, 칼튼?”

“그저 명령하시면 됩니다, 주인님.”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만 프랑을 내어 주세요, 칼튼.”

***

“정말 그 자에게 20만 프랑을 내어줄 생각이십니까?”

윈터 경의 목소리에 아이든에게 선물할 손수건에 수를 놓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결정했어요, 윈터 경.”

“그냥 윈터라고 불러주십시오. 에릭에겐 그렇게 하시잖습니까?”

“에릭은 내 사람이니까요. 윈터 경은 내 부군의 사람이지요.”

윈터 경은 커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어쨌든 재고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사제님의 의견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잘못했으면 부인께서는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으실 뻔했습니다. 몸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면 생명과도 직결될 문제였고요. 그런데 그런 걸 차고 들어온 여자에게 20만 프랑이라뇨. 말도 안 됩니다.”

나는 다시 수틀로 시선을 옮기며 미소 지었다.

“걱정해 주어 고마워요, 윈터 경.”

“그…! 하….”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윈터 경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하는 모습에 더욱 웃음이 났다.

“그녀가 그렇게 좋은 사람 일리는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경.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걸 차고 저택에 들어왔을 리가 없겠죠. 돈을 줄 테니 차고 들어가라, 그것도 20만 프랑이나. 누가 봐도 좋은 의도는 아니고 그걸 깨닫지 못할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에요. 그럼 대체 왜 그자에게 가서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을까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내 협박이 좀 무서웠나?”

“공작저에 더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네. 맞아요. 당연해요. 더 큰 금액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난 그녀가 원하는 금액을 줄 마음이 없어요. 20만 프랑을 주겠다고 결정한 건 어쨌든 그녀가 선택권이 있었음에도 내 명에 따랐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앞으로 무언가를 행하기 전에 내 마음에 일말의 부채감을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녀에게 일러주겠죠. 공작부인 시해 혐의로 고발하지 않고 20만 프랑이나 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엄청난 보상을 받은 것이라고요. 앞으로도 이런 욕심을 부리다간 곧 그 수명이 원치 않게 끊길 수도 있다는 걸 몸에 아로새기게 알려주기도 해야겠죠.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윈터 경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무서운 분이셨군요.”

“칭찬인가요?”

“영리해지셨습니다.”

“원래 그랬다고 해주면 더 좋겠는데.”

“어쩌면 정말 각하께 부인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아니었으면 각하께선 평생 홀로 사셨을까요?”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으셨던 분이시니까.”

나는 그동안 꿈속에서 봐왔던 아이든의 모습들을 떠올려 보았다.

수없이 많고 그 깊이를 다 통감할 수조차 없는 상처를 끌어안아 온 그의 모습 하나하나가 전부 다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곁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곁을 줄 수 없었던 거에요.”

나는 다시 수틀로 시선을 옮겼다.

“단단한 껍질을 가진 것일수록 그 속은 약하고 부드러운 법이죠. 그것이 세상의 이치예요.”

“각하께서 약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나는 윈터 경에게 싱긋 미소 지어주고 다시 수를 놓는 것에 집중했다.

그도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손수건 구석에는 꽤 사랑스럽게 꽃을 피운 캐모마일 꽃다발이 자리해 있었다.

아이든이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맘에 들어 하겠지?

뿌듯한 마음으로 손수건을 바라보고 있는데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칼튼입니다.”

“들어오세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칼튼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전서가 왔습니다.”

전서?

“아카데미에서 왔습니다, 주인님.”

아카데미!

“이리 주세요.”

빠르게 건네받은 전서를 뜯어 펼쳐보았다.

역시 아슬란이구나.

잘 적응해 친구도 여럿이 생겼다는 좋은 소식으로 시작된 편지는 곧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이야기로 끝맺어져 있었다.

아카데미에 아이든이 죽음의 저주가 붙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 많은 학생들이 아슬란에게 너도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고.

이 소문이 사실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다.

“전서를 가져다준 심부름꾼은 돌아갔나요?”

“예.”

“…….”

대답이 급하진 않다는 건가.

아이든에게 죽음의 저주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무슨 의도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이든의 부모가 죽고 형제가 떠나고,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비명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아이든 스스로가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지금의 전쟁 역시도.

다들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 거지?

정말로 그 모든 게 아이든의 탓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그는 늘 고통받아 왔을 뿐인데?!

“…그만 나가보세요, 칼튼. 전해주어 고마워요.”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식사….

“입맛이 별로 없어요. 가벼운 스프 한 그릇만 위로 올려 주겠어요? 스프를 다 먹고 나면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차도 한잔 올려 주면 좋겠어요.”

“예.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아. 칼튼. 호위 기사들은 식당에 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셨죠?”

칼튼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칼튼이 나가고 밖에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곧 사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에 아이든의 평판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아.

후원까지 감행하며 어떻게든 평판을 바꿔보려 애를 썼는데, 이렇게까지 나아지지 않을 수가 있다니.

“어째서 스스로의 건강을 호위 기사들보다 못한 후순위로 두십니까?”

아. 에릭이 방 안에 있다는 걸 깜빡했어.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지?

당연히 칼튼이 호위들 다 데리고 간 줄 알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 에릭을 바라보았다.

“나를 지키려면 우선 잘 먹고 든든해야 하니까?”

“스스로를 지키시기 위해서도 든든하게 드셔야 합니다.”

“에릭은 언제나 나를 못 미더워 하시네요.”

“그런 게 아니라…!”

“업무시간에는 잡담하지 않는다고 칼같이 잘랐던 에릭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주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릭과 말씨름할 기분이 아니었다.

“날 좀 내버려 두겠어요? 이 방에서 나갈 게 아니면 단 10분 만이라도 그 입 다물어요.”

에릭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음에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를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슬란에게는 어떤 답장을 해야 할까?

아이든의 평판은 또 어떻게 바꾸어야 하지?

그보다 당장 눈앞에 다가올 프리온 황제와의 독대는 어떻게 해야 해?

머릿속이 과부하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