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신과의 만남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어느새 가을 냄새가 났다.
제국의 여름은 짧다고 하더니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었다.
정원의 끝자락에 있던 나무에 매달렸던 싱그러운 초록 잎은 어느새 부끄러운 연인의 얼굴처럼 빨갛게 물들어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슬란이 아카데미로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다.
어제는 아카데미로부터 정성이 깃든 편지까지 전해 받았다.
아슬란은 잘 지내고 있는 것같아 보였다.
편지에는 적응이 어렵지 않았고, 벌써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흐른다.
아이든을 생각하면 더 빨리 흘러가길 바라면서도 아슬란을 생각하면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고만 싶었다.
하루하루 아이는 몰라보게 성장하고 어느새 아이 같은 순수함을 벗어 던지겠지.
좀 더 사랑해주지 못하고, 좀 더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이면 아이는 이미 크게 성장해 있을 터였다.
물론 사이사이 방학 땐 돌아오긴 하겠지만.
정원을 거닐면서 손을 뻗어 모든 꽃들에게 신성력을 옅게 흘려보냈다.
손끝에 스친 꽃들이 더욱 생기 있어지고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는 순식간에 꽃잎을 펼쳐 고운 자태를 과시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로 인해 정원은 전보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워졌다.
향긋했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에릭과 볼턴 경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원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하고 아름답지 않나요?”
“예… 정말 놀랍습니다, 부인.”
볼턴 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에릭도 바라보았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예, 주군. 정말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다시 꽃잎을 만지작거리면서 에릭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 다정하게 웃었냐는 듯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꽃들을 구경하는 볼턴 경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에릭.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에릭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주군. 솔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들어가서 좀 쉬시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그 빌어먹을 신성력이라도 그만 쓰시는 게…!”
“이봐, 에릭. 말투가 그게 뭐야?”
볼턴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에릭을 툭 치며 말했다.
에릭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주먹을 불끈 쥔 두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낯빛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요 며칠 내내 그러셨습니다.”
화가 났구나.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볼턴 경도 마찬가지였다.
“에릭. 걱정해 주어 고마워요.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에릭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 저는….”
“에릭.”
“예?”
“나는 지금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봐요.”
내가 그들의 등 뒤편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에릭과 볼턴이 뒤를 돌아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건 사실 저택이라기 보단 성에 가깝죠.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가면 끝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복도에 문이 정말 샐 수 없이 달려있어요. 개중에는 비어있는 방이 주인을 가진 방보다 훨씬 더 많죠. 쓸쓸한 곳이에요. 주인을 오랫동안 잃은 터라 더욱이… 침대에 몸을 누이고 가만히 있노라면 거대한 섬에 나 홀로 떨어진 기분이 들어요. 고요하고 깜깜한 밤이 되면 그 기분은 더 배가 되죠. 물론 그대들이 늘 곁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볼턴 경이 근심 어린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에릭 또한 그랬다.
“상실감은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두 분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신성력을 연습하고 정원도 거닐고 있는 거죠. 움직여야 힘도 솟고 활기차지는 거 아니겠어요?”
에릭이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티파티나 사교계에 나가 보셔도 좋을 텐데요.”
“그건 다소 좀… 남을 흉보는 자리에 앉아 있는다고 기운이 나는 건 아니잖아요?”
내 말에 볼턴 경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부인. 방금 제국의 모든 여성을 흉보셨습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머. 제가 그랬나요?”
이번엔 에릭마저 참지 못한 웃음을 옅게 터트렸다.
“주군이 지금으로도 좋으시면 저도 좋습니다. 제가 괜한 혈기를 부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에릭이 내게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늘 편안하고 따사롭다.
기댈 곳 없이 홀로 선 나날들 중 그의 미소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정말 버틸 수 없을지도 몰랐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에릭은 제게 용서 구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염려 마세요.”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나 역시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
하도 꿈이나 환상으로 낯선 곳을 많이 보아서일까?
이젠 낯선 환경이 눈앞에 펼쳐져도 하나도 이상하거나 놀랍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벌판에는 하얀색 캐모마일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들산들 불러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바람을 타고 코끝에 전해지는 진한 사과 향에 마음마저 달큼해지는 것만 같았다.
벌판의 정 중앙에는 노송나무가 자리해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거대한 노송나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엔 분명 낯선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다지도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넋을 놓고 나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나무 뒤편에서 발목까지 오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발목까지 오는 은색 곱슬머리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선이 고운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캐모마일 꽃말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가 이 벌판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 아닌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는 자각이 들 무렵, 어느새 내게 다가온 이가 흐트러진 내 머리를 귀 뒤로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눈을 내리깐 위로 보이는 속눈썹마저 반짝거리는 은빛이어서 몹시 신비로워 보였다.
이 벌판의 분위기만큼이나,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미모였다.
사람을 홀린달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그가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구… 신가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가 나와 눈을 맞춰왔다.
청량하고 깨끗해 보이는 녹안에는 푸른빛도 함께 감돌아 숲 같아 보이기도 하고 바다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눈을 바라보는데 엄마 품에 안긴 듯 따듯하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내 아이가 아니냐. 자신의 근본을 몰라보면 못쓰지.”
내 아이…?
“혹시 이자벨 황녀님이신가요…?”
“하하. 그 아이가 보고 싶으냐?”
아니구나.
그럼… 아!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눈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내 아이, 근본, 신탁의 아이.
“설마…!”
그가 눈을 휘어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아가야. 드디어 너를 다시 만났구나. 그러나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에는 세계의 밤이 너무도 짧다. 이리 오렴. 안아보자.”
내가 창조주를 두 눈으로 직접 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와중에 일라즈 님께서 나를 끌어당겨 품에 가두듯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많이 그립고…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이리 훌륭하게 자랐구나. 너는 어릴 적부터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참으로 기품이 넘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창조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머릿속으로 바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자벨의 아가. 그리고 내 사랑스런 아가야. 너는 처음부터 내겐 특별한 아이였다. 이자벨 보다도 더. 그 아이가 끝내 하지 못한 것을 너는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너의 시대가 도래했구나.”
일라즈 님은 나를 놓아주자마자 흩날리는 내 머리칼을 그러쥐고 입 맞추었다.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는 눈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조금 충동적이긴 하나 마음이 한없이 여리고 선하여 불의를 견디지 못하고, 약한 자를 끌어안을 줄 알며 악에 강하나 원수의 목숨마저 가볍게 여기지 않는 자.”
화악—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군가에게서 내 성격을 객관적인 말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왠지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졌다.
머릿속에서 별안간 일라즈 님의 바람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머리칼을 내려놓고 몇 발 뒤로 물러나신 일라즈 님이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그 얼굴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태양빛이 쏟아져 내려 무엇이라 표현할 길이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자벨의 자녀여. 가장 강하고 맑은 신성을 가진 자여. 아무리 깊은 어둠일지라도 작은 빛줄기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대는 크고 강대한 빛줄기. 숨이 끊어져 내게로 돌아오는 날까지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머릿속에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멍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강하고 맑은 신성…?
툭하면 픽픽 쓰러져 대던 내가?
크고 강대한 빛줄기라니… 대체 누가?
나를 지칭하는 말이 맞아?
이 분이 영 거짓말을 할 분은 아니신데?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가 머릿속에 뱅뱅 맴돌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별안간 일라즈 님이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셨다.
머릿속에서 일라즈 님의 푸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는 소리가 울려 퍼져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머릿속을 읽으시는 건가요? 전부 다요? 설마!”
“나는 모든 것을 듣고 보는 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란다.”
아… 그렇지. 이분은 창조주니까….
순간 왜 이렇게 가깝고 편안하게 느껴졌지?
나는 이분을 뵙는 게 처음인데….
“리안.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아가. 우리는 오늘 처음 보는 것이 아니란다. 네가 내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릴 적에 그렇게 내게 스스럼없이… 후.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닌데.”
일라즈 님이 캐모마일 꽃밭을 바라보시면서 중얼거리시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셨다.
이어진 말투는 다급하고 간절하게 느껴져서 나 또한 그 어떤 때보다도 집중해서 그분의 말씀을 경청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리안, 사실 정말 해주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단다. 사람의 불행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것이란다. ‘마음을 좀먹는 어둠’이 가장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 명심하거라.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여자’를 찾고 있다면 ‘너 자신’을 생각해 보거라. 그 아이 또한 너와 비슷한 삶을 살아왔고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다. 이제 가거라. 반드시 기억해. 너의 밝은 빛이라면 그 어떤 어둠이라도 밝게 밝힐 수 있음을—”
‘그 여자?’
설마 수행 사제?
그 여자가 나와 같다고? 어째서?
무슨 말씀이시지?
지금 무슨 말씀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일라즈 님을 바라보는데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우리를 비추고 일라즈 님의 모습도 노송나무도 하늘거리던 캐모마일 꽃밭도 눈앞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끊임없이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바람도 한순간에 멎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창조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분과 연결되었다고 느꼈던 감각이 끊어지더니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새카만 어둠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라즈 님…?”
[일라즈 님…?일라즈 님…?]
내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가 다시 내게 되돌아왔다.
내가 서 있기는 한 것인지 누워 있는 것인지, 정면을 보고 있는지 하늘을 보고 있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끝없는 어둠을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지…?
왜 내가 이런 곳에…?
“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 누구 없….]
아. 어떡하지?
이게 뭐야?
꿈에서 깨야 하잖아.
아냐. 깰 수 있어. 깰 수 있을 거야.
깨야만 해!
두 눈을 꼭 감고 온 힘을 다해 꿈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눈을 떠 보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나 뜨나 시야에 비추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여기에 더 오래 있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 같다.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깰 수가 없어.
그럼 나는 이제 어쩌지?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끝나기는 하는 걸까?
그래. 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걷다 보면 한줄기라도 희미한 빛이 보일지도 몰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작정 방향도 알 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었다.
제발 끝이 있기를.
제발 곧 빛이 나오기를.
얼마 동안 걷기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리가 아파왔지만 눈앞은 여전히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자리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이대로 어둠에 계속 갇혀 있을 수는 없어.
여기서 흐르는 시간이 바깥세상과 얼마나 차이가 지는지도 알 수 없는데, 전쟁은 언젠가는 끝날 테고 그가 돌아오겠지.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면?
아니, 설마 이대로 내 육체는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영만 이곳에 갇혀 영원히….
아니, 아니야. 아니야, 릴리아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어쩌면 좋을지 생각해.
“어쩌지 정말….”
[어쩌지 정말… 어쩌지 정말….]
[… 안…. ]
뭐였지, 방금?
내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 리안…. ]
“!”
누군가 있구나!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어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 크고 강… 줄기…. ]
[… 사… 아가….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게 뭐야?
인상을 와락 찌푸리고 눈을 떴다.
역시나 보이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말을…!
그 순간이었다.
마치 강하게 밀려오는 해일처럼 귀 안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몰아쳐 들려왔다.
[…이자벨의 자녀여!]
아! 일라즈 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눈앞은 그저 깜깜한 어둠이었지만 나는 필사적이었다.
들려온 목소리를 분명히 일라즈 님이셨는데!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주의하라. 주의하라….]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억이 났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내 나이 7살 때.
꿈을 통해 나는 그 들판에 자주 찾아가곤 했다.
그것이 나의 의지였는지 일라즈 님의 의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들판을 거닐고, 뛰어놀고 함께 노송나무에 달린 그네를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분은 늘 내게 다정하고 상냥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고 품에 안아 들고 들판 너머로 아름답게 펼쳐진 신의 세상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그리고 볼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 주실 때면 나는 항상 그 손바닥에 얼굴을 마주 비벼대며 행복해하곤 했다.
일개 피조물 따위가 얼마나 일라즈 님을 얼마나 편하게 대했는지 때때로 투덜거리고 투정까지 부리기도 했지만, 그분은 내게 단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었다.
1년여 시간 동안 나는 수시로 그분을 꿈을 통해 뵈었고, 그분은 항상 내게 같은 말을 반복하곤 하셨다.
“나의 릴리아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야.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그렇게 수시로 말씀하셨던 이유가 있으셨을 것이다.
도대체 왜?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왜 그 1년을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
마치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작은 그 무엇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모든 장면들이 물 흐르듯 모두 다 기억 난 이유는 대체 무엇이지?
이 순간 내게 대체 무얼 원하시는 것일까?
이 어둠 속에 나를 밀어 넣으신 이유는?
내게 뭘 원하시나요, 일라즈 님?
나 어떻게 해야 해요?
[이자벨의 자녀여… 이자벨의 자녀여….]
아! 알 것 같아!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깊은 어둠일지라도 작은 빛줄기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절대 이 어둠에 먹히지 않아.
사실은 이 어둠에 갇힌 게 아니야.
아무것도 나를 사로잡을 수 없어!
왜냐면 내가…!
내가 크고 강대한 빛이니까!
“에끌라 살리드!”
주문을 외우자마자 몸 안에서 신성력이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곧 순식간에 몸 밖으로 신성력이 강력한 빛으로 터져 나왔다.
온몸을 끌어안듯 감싼 강력한 빛의 덩어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삽시간에 어둠을 집어삼켰다.
“!”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쏟아져 들어와 부신 눈을 찌푸렸다.
시야가 적응되고 나서 완전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니 믿을 수 없게도 어릴 적에 보았던 황홀하게 아름다운 신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정 중앙에 일라즈 님이 공중에 떠서 나를 다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계셨다.
“가거라. 강대한 빛이여.”
그것이 내가 들은 일라즈 님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눈을 떴을 땐 화장대 거울을 손으로 만지고 있는 내가 보였다.
아침 준비를 하다 말고 나는 또다시 환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온 것이었다.
거울 속에 리제는 여전히 내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시차는 크게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욕실에서 겪었던 것과 여지없이 완벽하게 똑같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밖에서 침실 한가운데로 따스하고 반짝거리는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 앞을 바라보니 에릭이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머리칼도 태양 빛에 반짝거렸다.
밤새 불침번을 서다가 잠이 든 것이었다.
그때, 달칵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고 볼턴 경이 들어왔다.
“어? 부….”
“쉿.”
검지로 입에 가져가면서 속삭이자 볼턴 경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리제에게 됐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였다.
막 손질을 끝냈는지 리제도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화장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있는 내 이불을 가져다가 에릭의 몸에 살며시 덮어주었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몸에 손이 닿아도 깨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목까지 이불을 잘 덮어준 뒤 일어나 볼턴 경을 문밖으로 밀며 나도 함께 나왔다.
리제까지 나오고 문을 닫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고 볼턴 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볼턴 경.”
“잘 주무셨습니까?”
환영에서 보았던 일라즈 님의 다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잘 잤어요. 좋은 꿈을 꾸었거든요.”
비록 꿈은 아니었고, 어둠은 끔찍했지만요.
작게 중얼거리는데 볼턴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아니에요.”
“그나저나 부인께서는 유독 에릭 슈미트 그놈에겐 약하게 구십니다.”
“제가요?”
놀란 눈으로 볼턴 경을 바라보았다.
“모르셨습니까? 그냥 봐도 딱 보이는데.”
“허?”
어느 부분에서? 내가 언제?
“부인께서 자각을 못 하시는데… 저희를 바라보실 때, 저놈을 바라보실 때 눈빛조차 다르십니다.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울프하운드에서는 저렇게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게 기어오르는 놈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정도였나…?
나는 손으로 턱을 만지면서 심각해졌다.
눈빛조차 달랐는데 볼턴 경은 상처 받은 것은 아닌가?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안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거라면?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인데.
정말 괜찮은 건가?
내가 크게 실수한 거 같아.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볼턴 경을 올려다보자 그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볼턴 경. 왜 웃는 거죠?”
“저를 신경 써 달라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무슨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으니 그런 표정은 마십시오.”
내 표정이 어땠는데?
인상을 와락 찌푸리자 볼턴 경이 한숨을 내쉬곤 피식 웃어버렸다.
“각하께서는 여태 자신 앞에서 감정 숨기기에 급급한 이들만 보아 오셨을 겁니다.”
“그게 왜요?”
“어떻게 목석같은 분이 그렇게 단기간에 부인께 푹 빠지셨나 했는데.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부인께서는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시니 각하께서도 어지간히 당황스러우셨을 겁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셨을 테니까요.”
아아.
처음 겪는 일….
그만큼 그에게 진심으로 다가간 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그건 좀 슬프고 속상한데.
그런데 단기간이라니?
“아이든이 저를 마음에 둔 건 최근의 일일 텐데요. 저희는 사실 계약 결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거든요. 단기간이라니 볼턴 경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요.”
내 말에 볼턴 경이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놀라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그럼 그간 서로 정말 삽질을… 크흠. 서로 바보같이 오해하고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사, 삽질….
“제가… 뭘 몰랐나요, 볼턴 경?”
“일에 통 집중도 못 하셨고 기사 훈련에도 집중을 못 하시고 괴로워하신 날도 많으셨고, 뭔가 그냥… 누가 봐도 티가 확실하게 나셨습니다만…?”
“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뒤로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넘어질 뻔한 걸 볼턴 경이 재빠르게 잡아주어 안주인의 체면이 상하는 불상사만은 막을 수 있었다.
하긴 이미 제 발에 걸려 넘어지려던 것 자체가….
“나만 몰랐다고요…? 나만…?”
볼턴 경은 나를 놔주고 손을 들어 이마를 긁적였다.
“글쎄요. 그런데 부인께 영 티를 내지 않으셨다면 모르실 만도… 워낙 포커페이스로 유명하신 분이시고… 부인께서도 그런 쪽으로는 좀 둔감한 면이….”
두… 둔감….
“하하. 재밌는 얘기 잘 들었어요, 볼턴 경. 아이든이 오면 그와 이야기해야겠어요.”
“예. 뭐. 그러십시오.”
나는 그를 뒤로하고 앞장서 다시 걸음을 재개했다가 떠오르는 생각에 발을 우뚝 멈추어 섰다.
뒤를 돌아 볼턴 경을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데 경. ‘나의 에릭’은 업무 시간엔 잡담하지 않는 거라고 하던데요. 볼턴 경은 지금 제 호위 기사로 함께 하시는 건가요?”
볼턴 경은 내 말을 듣고 나자마자 헛?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바짝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부인. 용서하십시오.”
“흐음. 그래요. 그건 차차 생각해보죠. 아. 볼턴 경이 나와 함께 식사에 ‘참여’해준다면 용서가 가능할 것 같은데요. ‘나의 에릭’이 깨기 전에 아침 식사부터 빨리 해치우죠. 그도 깨면 식사를 해야 하니까.”
“예…?”
“왜 그렇게 당황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볼턴 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난처한 듯 웃었다.
“호위 기사는 업무 시간 중 불필요하게 자리에 앉을 수 없….”
“핑계는 그만. 그동안 내가 침실에서 소파에 앉아 있는 거 여러 번 봤는데?”
볼턴 경이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장 난 기계 같아서 나는 주먹 쥔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들이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사실 알게 된 건 얼마 되진 않았지만… 제가 식사하는 동안에는 교대로 근무하시니 그럴 때 알아서 챙겨 드시는 줄로만 알았거든요. 이제부턴 대충 때우지 마세요. 저랑 같이 한자리에 앉아서 식사하세요. 명령이니까 불복하면 혼날 줄 알아요.”
“부, 부인….”
여전히 난처해하는 볼턴 경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내가 왜 에릭과 그대를 차별하겠어요? 그대 또한 많은 것을 뒤로하고 내 곁에 남아주었잖아요. 나는 볼턴 경에게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볼턴 경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귀가 새빨개진 것을 보니 이런 말을 들은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저 장난스럽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이런 면도 있구나.
나는 그의 귀여운 모습을 그냥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이제 먹으러 가죠!”
***
오늘은 윈터 경이 아카데미에서 돌아와 호위 업무에 합류했다.
문밖에서는 볼턴 경과 윈터 경이 지키고 방 안에서는 에릭이, 서로 번갈아 가며 방 안에서 서는 불침번을 바꾸기로 합의한 모양이었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나서 침실로 돌아온 나는 창가에 앉아 열린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고 했던가.
정말 하늘이 까마득하게 높게 느껴졌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보았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바람에서 사과 향은 나지 않았다.
[사람의 불행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것이란다. ‘마음을 좀먹는 어둠’이 가장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 명심하거라.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일라즈 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었을까?
‘내면’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누구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었을까?
수수께끼 같은 말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기만 할 뿐 그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여자’를 찾고 있다면 ‘너 자신’을 생각해 보거라. 그 아이 또한 너와 비슷한 삶을 살아왔고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다.]
‘그 여자’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수행 사제.
“흐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창가 옆 벽에 붙어 서 있던 에릭이 넌지시 물어왔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어도 된다고 아무리 뜯어 말려보아도 통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가에 올려둔 내 팔을 바라보면서 생각해보았다.
아이든이 부재중인 지금 황실에서는 과연 수행 사제를 잡기 위해 노력이나 제대로 하고 있을까?
“다시 황궁에 가봐야 할까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으나 무리하지 마시고 전서를 보내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각하께서 안 계시는 지금 주군께서 황궁에 자주 드나들면 말이 돌 겁니다.”
그렇겠구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어.
몸을 돌려 에릭을 바라보았다.
“에릭도 알고 있나요? 각하를 찾아왔다던 그 수행 사제 말이에요.”
“예. 전해 들었습니다.”
“프리온에서는 그런 사제는 찾을 수 없다고 했어요. 아이든이 출정 전에는 제국 곳곳을 뒤져 그 여자를 찾았는데 잡지 못했다고 했고….”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손톱을 까드득 물고 나서 말했다.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여자를 찾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알 수 없잖아요. 나라도 나서서….”
에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합니다.”
“에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저희가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 여자가 무슨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마법을 쓸 줄 아는지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는 지는 싸움입니다, 주군.”
“하지만 내가 신성력을….”
에릭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본디 신성력은 공격이 아닌 치료와 방어에 최적화되어 있는 능력입니다. 저희가 주군을 지켜드려야 하는데 혹여나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주군께서 저희를 지키실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윽. 하지만….”
“황실에 다시 조사를 의뢰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칼에게 전서를 보내야겠어요. 황궁에선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야 결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낮잠을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칼튼입니다!”
부리나케 침대에서 내려와 가디건을 걸쳐 입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칼튼?”
“정원사가….”
“네? 정원사가 왜요?”
“주인님께서 정원에서 신성력을 사용하신 것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나와 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에릭, 윈터 경, 볼턴 경이 나를 따랐다.
칼튼을 따라 2층 복도 끝에 있는 창가로 갔다.
“여기가 정문이 가장 가깝게 잘 보이는 곳입니다, 주인님.”
칼튼이 옆 벽 쪽으로 비켜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 거지?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서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정문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절반은 이 거리에서 보기에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게 무슨….”
꼭 아슬란 때랑 비슷한 상황이지 않나?
“하지만 저 사람들은….”
“정원사가 저 꼴을 보자마자 자진해서 고백하고 사직을 했습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주점에 들렀다가 취기가 올라와 그랬다는군요.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칼튼이 송구한 표정을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시겠습니까? 쫓아낼까요?”
“쫓아낸다고 갈 사람들이었다면 이리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저들은 일단 그냥 좀 두세요. 서재로 허브티 한잔 가져다주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뒤를 돌아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볼턴 경이 사뭇 진지하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들로만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신성력을 얼마만큼이나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그랬으니 정원에서도 그런 짓을 했던 것이었고.
하지만 이러다간 결국 나는 제국에서 원치도 않는 성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본디 한도 끝도 없는 법이었다.
결국에 사람들은 더 많은 수가 밀려들 테고.
그걸 다 감당할 수 없으니 누구는 받고 누구는 안 받게 될 것이다.
예견된 결과였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지 장담도 할 수 없고.
그러면 저들을 쫓아내야 하나?
아픈 몸을 이끌고 힘겹게 여기까지 온 자들을 내치라고?
썩 꺼지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때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각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를 도울 때 생각해야만 하는 부분 말입니다. 저는 주군께서 몸을 축낼 수 있는 신성력을 그렇게… 주군께서 도울 의무는 없으시다고 생각합니다.”
멈칫.
서재를 코앞에 두고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리안. 우리가 저들을 도울 의무는 없어.]
[누군가를 돕겠다고 결정할 때에는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후폭풍까지 계산하고 그걸 감수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거야, 리안.]
귓가에 아이든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저들은 내게 이런 모든 것들을 다 외면하고 평범하고 조용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렇게 많은 이들을 상대로 써본 적도 없는 힘을 쓰고 내가 쓰러져 버리면?
당연히 아이든은 또 슬퍼하겠지?
내가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하기 전에 날 걱정할 아이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을 내칠 수 있을까?’
“주군?”
“…신은 내가 어쩌길 바라고 계시는 것일까요?”
짙은 한숨을 뱉어냈다.
서재 문을 열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들어오지 마세요.”
탁.
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힘없이 소파에 몸을 맡겼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일라즈 님. 대답해 주세요. 제게 뭘 원하고 이러시는 거예요?”
분명 듣고 계시잖아요….
당신은 모든 것을 보고 듣는 존재라면서요.
나는 성녀따위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날 잘 아시잖아요.
“하아….”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아마도 어둠 속에 한 줄기 빛 같을 것이다.
내가 꿈속에서 어둠만 가득한 곳에서 한 줄기 빛을 간절히 구하였듯이.
그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더더욱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만약 저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여 준다면 제국에는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미 퍼져 나갔을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욕심만 그득한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프리온 제국의 새로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누군가를 돕겠다고 결정할 때에는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후폭풍까지 계산하고 그걸 감수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거야, 리안.]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정도로 저들을 치료하는 것이 값어치가 있는 일이던가?
내가 아니면 저들은 평생 불행한 것일까?
에릭이나 아이든의 말대로 내가 저들을 반드시 치료해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거절할까?
쫓아낼까?
나는 그런 자가 아니라고 할까?
다 헛소문이라 윽박지를까?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나는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우유부단하고 약한 마음을 빌미로 삼는 사람들에게 휘둘려야 할까?
아슬란을 도왔으니 우리도 도와달라 막무가내로 농성하던 자들을 도왔던 이유는 내가 착하고 선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순전히 아이든의 평판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었다.
프리온의 황제를 죽인 것 역시도.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결정한 모든 일의 이유에는 항상 아이든이 존재했다.
이번엔?
저들을 돕는 게 아이든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이 딜리아 공작가문에 무슨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지?
‘똑똑.’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와 자세를 바로 했다.
곧 문이 열리고 하녀 한 명이 들어와 내 앞에 허브티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보던 이구나.”
“저, 저는… 마님께서 후원해 주신….”
“아아. 그런데 이렇게 빨리 하녀로 투입이 되었다고?”
“업무 습득이 빨라 그리되었습니다.”
“…알겠다. 나가 보거라.”
하녀가 나가고 나서 탁자 위에 올려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허브티 안에 내 얼굴이 일그러져 비춰 보였다.
찻물에 입술을 가져다 대다가 그만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잔 받침대 위에 올려진 쪽지.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쪽지를 집어 들었다.
펼쳐보니 단출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발 먹고 발견하면 좋을 텐데.]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찻잔을 바라보자 소름이 끼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가 입술을 벅벅 씻어냈다.
서재 문을 열고 나가니 호위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아까 나간 계집.”
“하명하십시오.”
“암살자였습니다.”
기사들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잡아 오세요.”
“존명.”
에릭이 뛰어가자 볼턴 경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다 가면 호위는,”
“당장 가라고!”
“예!”
볼턴 경과 윈터 경마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다시 서재로 돌아와 창문을 활짝 열었다.
“휴, 노아!”
이름을 부르고 뒤로 물러나자 순식간에 창문 안으로 사내 두 명이 날아들었다.
내 앞에 부복한 그들이 고개 숙여 말했다.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 옆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휴와 노아는 각각 창문을 가운데 둔 양옆 벽에 서서 날카로운 기운을 서슴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곧 서재 문이 열리고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이번엔 익숙한 얼굴이었다.
“칼튼을 불러다 주겠니?”
“예.”
하녀가 도로 서재를 나가고 나서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찻잔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독이 있었을까?
그대로 입술을 핥았다면 나는 죽었을까?
그 후에 쪽지를 발견했더라면…?
그 여자는 정말 단순 암살자였을까?
수행 사제.
그 여자일 가능성은?
이전의 나였다면 벌써 온몸에 한기를 느끼고 덜덜 떨며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했을 텐데.
이렇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도 신성력 덕분이려나?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바라보았다.
온몸을 덜덜 떠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손만은 여전히 그렇게 의식할 새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양손을 그러쥐어 떨림을 막아보았다.
칼의 말에 의하면 수행 사제는 여전히 제국 안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여자 역시 마법사들 중 한 명이라면 당연히 나를 죽이려고 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휴와 노아가 언제 암살자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었지.
수행 사제야 제국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통 경계 중이니 그렇다 치지만 스펠른에서 전쟁이 이쪽의 승리로 기울고 있다면 그 암살자들 역시 급히 그쪽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제 동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똑똑.’
흠칫.
“칼튼입니다.”
놀란 심장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칼튼이 정중하게 내게 고개 숙였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주인님.”
“거기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허브티에도 찻잔에도 독약이 들어있었거나 묻어있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요. 방법이 있겠어요?”
칼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인님, 설마…!”
“나를 돌봐 주었던 그 의원. 독약에도 아주 정평이 나 있다던데.”
“예, 불러올까요?”
“그래요. 그래 주세요. 저택 경비 더욱 강화하고 사용인들 명단 사진이 붙은 것으로 가져다주시면 좋겠어요, 칼튼.”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의원이 오면 진료도 한 번 받아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칼튼이 나가고 나서 책상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았다.
“부, 부인…! 괜찮으시….”
“괜찮아요. 긴장 늦추지 마세요.”
“예.”
내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그들의 표적이라는 걸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에 취해서.
아이든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에 취해서.
내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겠지… 혹은 그들이 몰살당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