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각성
다음 날 아슬란과 함께 막 점심 식사를 끝마치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창문을 톡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다가가 보니 새가 한 마리 서서 부리로 창을 쪼아 대고 있었다.
“아슬란, 앉아 있으렴.”
“예, 어머니.”
나는 부리나케 다가가 창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선 새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어 읽으며 티 테이블로 가서 아슬란의 옆에 앉았다.
[황위 찬탈 성공. 새로운 황제 폐하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곧 추가 병력을 편성해 스펠른으로 파견 예정입니다.]
나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따라 들어온 에릭과 윈터 경, 볼턴 경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해낸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오로지 나의 판단과 노력으로.
호위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여러분, 프리온에서 추가 병력을 편성해 파견해 주기로 했어요.”
기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황위 찬탈에 성공했군요!”
“됐어!”
둘이서 서로 어깨를 두들기며 좋아하는 볼턴 경과 윈터 경과는 달리 에릭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주군께서 해내셨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
나는 그날로 곧바로 제국의 황실에서도 혹시나 추가로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이 남아 있는지 묻는 서신을 칼에게로 보냈다.
답장은 다음 날 돌아왔다.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부인. 그렇지 않아도 서신을 드리려고 했는데, 프리온의 상황을 전해 들으시고 폐하께서 추가 병력 출정을 윤허하셨습니다. 전쟁에 출정했던 황태자 직속 기사단을 제외한 황실 기사단 중에 참전할 기사들을 선별 중입니다. 늦어도 오늘 오후 중으로는 출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프리온과 동맹을 맺은 국가 중 알란국과 헬리언제국에서도 참전 의사를 밝혀왔다고 합니다. 이제 염려치 마십시오. 부디 다른 무엇보다 부인의 안전과 건강을 챙기시기를, 부군의 보좌관으로서 또한 친우로서 간언 드립니다. 얼굴을 뵌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날 낯빛이 워낙 좋지 못했던 터라 부인이 걱정스럽습니다. -칼-]
서신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멍하니 편지글을 바라보았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너무 좋은 소식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착잡했다.
본국 황제는 정말이지 치가 떨리도록 이기적인 겁쟁이다.
오히려 그런 자에게서 황태자 같은 남자가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설마하니 황실 기사단은 쏙 빼놓고 황태자 직속 기사단만 출정시켰을 줄이야.
그런 상황에서 출정한 것이었구나. 아이든은.
아마도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전장에 내몰렸겠지.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전쟁 기계도 매번 승리를 보장하는 신도 아닐 터인데.
그래도 일단은 결과적으로 좋은 소식이니 기뻐해야겠지?
이제부터는 내 사람의 안위가 보장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는 편지를 들어 에릭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읽어 보시겠어요?”
내 말에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신을 받아 갔다.
볼턴 경과 함께 사이좋게 서신을 읽는 에릭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 며칠 그가 내게 몹시 상냥하게 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다정함은 더없이 큰 위안이 되고는 있지만….
내가 너무 믿음 가지 않는 주군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왠지 막냇동생 취급을 받는 기분인데.
볼턴 경은 서신을 읽자마자 동의를 구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윈터 경이 수업을 받는 아슬란을 호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터였다.
볼턴 경이 서신을 들고 방을 뛰쳐나갔다.
에릭이 나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잘 될 겁니다, 주군.”
또 저렇게 웃네.
얕게 한숨을 뱉어낸 뒤 나 역시 싱긋 미소 지었다.
“네. 이제 맘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
‘챙!’
‘챙!’
검과 검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사방에서 정신없이 들려왔다.
제대로 이해할 수조차 없는 주문들 역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순식간에 알 수 없는 공격들이 쏟아져 내렸다.
마법사들은 필시 적이든 아군이든 쏟아지는 공격에 죽는 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공격이 물리적 타격이 되기 전에, 성기사들이 방어막을 쳐서 사람들을 보호했다.
마치 자연재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공격들은 성기사들의 알 수 없는 주문에 사방으로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이 기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 겪는 전쟁의 모습에 숨이 저절로 가빠졌다.
몸이 얼어붙어 넋을 놓고 벌벌 떠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피가 솟구치면 여기저기서 사람이 죽어나갔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다.
죽는 이 어디에도 황실의 문양이나 울프하운드의 표식이나 공작가의 문양이 없었다.
성기사의 제복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필시 적군일 터.
저들이 죽지 않으면 아군이 죽는다.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충격으로 넋을 놓고 말았다.
쉴 새 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통스럽다.
꿈이 고통스럽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당장 이 꿈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찰나, 아이든이 눈앞을 지나쳐 갔다.
“!”
피 범벅이 된 검을 손에 쥔 채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이었지만 분명하게 보았다.
배에 깊게 베인 상처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아이든을 눈으로 쫓았다.
그는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도 미친듯이 싸우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내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만의 성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고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아이든의 뒤를 쫓았다.
곧 그에게 닿으려는 찰나, 적군의 검이 아이든의 배를 쥔 왼팔을 긋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의 팔에서 피가 사방으로 솟구쳐 올랐다.
가쁜 숨을 들이킨 채로 굳어졌다.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아이든이 상대의 목을 검으로 한 번에 내리쳐 죽이는 장면이 느릿하게 보였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다쳤어.
어쩌면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나는 어쩌면 좋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그는 여기에 있어선 안 돼. 죽고 말 거야.
아아, 아이든…!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로 눈앞이 흐릿했다.
아이든은 여전히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이 느릿해졌다고 느낀 순간 눈앞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막사 안에 아이든이 홀로 손에 검을 쥔 채 상의를 벗고 저상 침대에 앉아 있었다.
팔과 복부에 휘어 감긴 붕대는 이미 피가 진하게 배어 본래 색을 잃은 뒤였다.
왼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이를 악문 그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였다.
온 얼굴과 몸이 땀범벅이었다.
이를 악물었음에도 새어 나오는 신음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악문 잇새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상처가 덧난 것은 아닐까?
감염이 시작되면 그는 손쓸 수 없이 죽을지도 모른다.
오늘을 저렇게 버텨낸다고 해도, 내일은 어떨까?
또 내일은?
그다음 날은?
또 다음날까지 그가 살아있을까?
어째서 황실 기사단에서 군의관을 대동하지 않았을까?
혹여 있는데 그가 치료받기를 거부한 것은 아니겠지?
두렵고 무서워.
이렇게 다쳐서 피 흘리는 당신을 보는 것이 아파.
내가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당당히 당신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것이 그저 꿈속 세상만은 아니라는 걸.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에게 온 것이겠지.
어쩌면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그에게 온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제국에서는 꿈이 영혼의 여행이 아니겠냐는 우스갯소리가 돌곤 했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 말은 신성력 사용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 아니라 실제였다.
그가 다친 것도.
고통에 신음하는 것도.
나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배에 손을 얹으면 이전 꿈들처럼 신성력이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든이 막사 안을 훑어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누구냐!”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막사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설마 그가 암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주변은 그저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시선을 아이든에게로 옮겼다.
그가 나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든.”
“!”
아이든이 커진 눈으로 정면, 그러니까 정확하게 내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마 나를 볼 수 있는 건가?
“아이든!”
아이든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아이든이 실소를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미쳤구나, 아이든 딜리아. 어머니로도 모자라서….”
…본 것이 아니구나.
하지만 분명 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
생각해보면 늘 꿈에서 신성력을 쓸 수 있었을 땐 그가 나를 보거나 듣거나 어떤 식으로든 ‘인식’했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나는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아이든을 살려냈던 그 날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당황해서 내 배를 매만졌다.
속에서 꿈틀대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예전에 그러니까 꿈을 통해 신성력을 사용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더라?
나는 어떻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그를 치료해주고 싶어.”
작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몸속에 내재된 이질적인 기운이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펼쳐진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신성제국에 관한 모든 책을 찾겠다고 공작가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뒤졌던 일이 떠올랐다.
개 중 한 책에서 신성력을 사용할 때 외우는 주문이 실린 책이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 책을 볼 때 유독 3번째 챕터가 눈에 들어왔었다.
힐러사제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상처회복에 관한 주문을 보고 나도 그 주문을 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 아!
“파라 겔리즘!”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요동치던 기운이 손바닥 위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손바닥 위로 빛나는 구가 떠올랐다.
나는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됐어! 됐어! 내가, 내가 해냈어!
아이든 역시 고개를 들어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빛나는 구를 바라보았다.
구는 손바닥 위에서 떠올라 2개로 나뉘더니 아이든의 팔과 복부 각각의 상처 안으로 빨려가 듯 스며들었다.
나는 감격해서 아이든의 배를 바라보았다.
그를 살렸어.
내가 그를 살렸어…!
그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보들거리는 머리칼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아이든. 곧 추가 지원 병력이 올 거예요. 조금만 버텨줘요.”
그가 듣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렇게 속삭이고 그를 놓아주었다.
삽시간에 몸이 빨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사랑해요.”
***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병력이… 조금만 버텨줘요.”
중간중간 끊겨 완벽하게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잘 아는 릴리아나의 목소리였다.
아이든은 고개를 들어 막사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질적인 감각은 어느새 사라졌다.
분명 누군가 있는 것 같았는데.
막사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배를 움켜잡았던 손을 들어 펼쳐 보았다.
손바닥에 흥건히 묻은 것은 틀림없는 피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더 이상 그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타는 듯하던 작열감도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든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어떻게 된 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이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
꿈을 꾼 건가?
그렇다기엔 상처가 너무….
아이든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피로 물든 붕대를 풀어보았다.
단 한 번도 상처 난 적이 없던 것처럼 깨끗한 피부가 드러났다.
“!”
꿈이 아니었다.
이곳에, 그녀가, 실제로…!
아이든은 번쩍 고개를 들어 막사 안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릴리아나…?”
“각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막사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든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붕대를 휴지통에 버렸다.
“기다려라!”
아이든은 팔에 감겼던 붕대까지 모두 풀어내고 제복 상의를 갖춰 입은 채 검을 들고 막사를 나섰다.
“무슨 일이지? 보고 할게 있나?”
기사가 거수경례를 하고 말했다.
“가 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각하.”
아이든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안내해.”
허리에 검집을 차면서 말하자 기사가 고개를 까딱하고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든은 기사를 따라 걸으면서 임시 캠프를 둘러보았다.
각 막사 주변으로 기사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이다 못해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막 전쟁을 치루고 돌아온 이들의 피로감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승리라도 한 얼굴들이군. 너무 헤이 해 진 것이 아닌가? 내가 좀 만만해졌나?”
아이든의 말에 앞장서 걷던 기사가 움찔하며 뒤돌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각하. 설명보단 일단 직접 봐주십시오.”
아이든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더 가야 하나?”
“다 왔습니다.”
기사가 옆으로 비켜서자 아이든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족히 500명은 될 것 같은 수의 성기사들이 아이든의 캠프 바로 앞에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막사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사내가 아이든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짙은 밤색 머리가 허리까지 오는, 장신에 다부진 체격이었지만 얼굴만큼은 선이 곱고 예쁜 사내였다.
사내가 아이든의 앞에 멈추어 서더니 가슴께 손을 얹고 가볍게 목례했다.
“아이든 딜리아 공작 각하. 맞으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황실 성기사 제2기사단장 제드 로즈보르라고 합니다.”
아이든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서 제드를 바라보았다.
성 기사단은 첫날 합류했던 이들이 최선의 인원이 아니었던 건가?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드가 싱긋 웃으며 성기사들에게서 떨어져 걸음을 옮겼다.
아이든 역시 제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프리온에서 추가 병력을 지원한 것이지요.”
“어제까지 손 놓고 있던 제국에서 말입니까?”
프리온은 처음부터 최소한의 병력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하기야 황실 기사단은 쏙 빼놓은 본국만큼이야 하겠느냐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제서야 추가 병력을 지원한 거지?
제드는 제법 캠프에서 떨어져 조용한 곳까지 왔을 때 멈추어 섰다.
그가 아이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린 아이든과 달리 제드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며 아이든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이게 다 각하의 부인되시는 분 덕분이지요.”
아이든의 눈이 또다시 휘둥그레졌다.
부인…?
“리안이…?”
“그간 프리온에서는… 좀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각하.”
제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을 치루는 내내 성기사들의 물리적 공격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아이든은 심각해진 얼굴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18살 생일을 지나자마자 매번 전쟁으로 내몰렸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보았던 성기사들은 기대한 만큼 늘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기수가 역사상 가장 막강하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이전만큼도 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방어력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공격력이 터무니없이 약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성기사들은 역량이 아무리 좋다 해도 개개인의 신앙만으로 그 능력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주신께서 강력하게 함께하시는 자가 황위에 오를수록 성기사의 물리적 공격력도 방어력도 높아지고 더욱 견고해지지요. 이런 시기에 성황이었다면 기사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금식으로 기도했을 겁니다. 대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그 자리에 앉은 자의 사명이니까요. 그러나 프리온의 황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아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황제는 변절자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지요. 그는 황위에 오를 수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악신의 도움을 받아 황위를 찬탈한 자가 신성제국을 올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그는 황위를 찬탈해서 가진 것처럼 찬탈로 빼앗겼습니다.”
아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역이 일어났단 말입니까? 이 시기에?”
“각하의 부인께서 주도하셨습니다?”
아이든이 기가 막힌 얼굴로 실소를 뱉어냈다.
“말도 안 됩니다. 그 여자는 그럴 여자가-”
“각하. 그분께서는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단호한 제드의 말투에 아이든은 멈칫했다.
“뭐라고…?”
이 꺼침칙한 느낌은 대체 뭐지?
프리온 신성 제국의 누구도 릴리아나가 디누트인 걸 알아서는 안 되는….
“고귀한 핏줄이시지 않습니까.”
제드의 말에 아이든이 미간이 일그러졌다.
“당신…!”
“그분께서는 디누트. 신탁의 자녀이며 이자벨 님의 자손이시지요. 황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황제는 서자 출신이나 그분께서는 정통성 있는 황녀에게서 태어난 깨끗한 황가 핏줄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은 모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란 말입니다.”
형형한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제드의 분위기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그 얼굴 어디에도 미소는 없었다.
아이든은 굳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자는 무서운 자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껏 겪어온 그 어떤 성기사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
“그런 분께서 반역자를 처단하고 새로운 황제를 고른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지요.”
제드는 눈을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심려치 마십시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와 헨델 사제님뿐이시니.”
속내도 알 수 없다.
저 웃음 뒤에 감추어진 본색은 전혀 다른 얼굴일 테지.
아이든은 혼란스러웠다.
“리안이 반역자를 처단하고 새로운 황제를 골랐다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배도한 자들의 우두머리, 황제의 목을 치셨습니다. 암살자를 보내셨더군요. 그 전에 헨델 사제님께 전서구를 받았습니다. 신탁의 자녀, 고귀한 디누트께서 황제를 처단하시고자 한다. 새롭게 황위에 세우기 원하는 자는 제2황자. 그대들은 배도한 자들을 처단하고 황위를 지키라. 라는 것이었지요.”
아이든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릴리아나가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가 없다.
그 여자는 피만 봐도 현기증을 일으키는 여자다.
내가 릴리아나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녀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 병력이… 조금만 버텨줘요.]
흠칫.
떠오른 기억에 숨을 들이켠 채로 굳어졌다.
릴리아나. 그대는 대체 뭐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괜한 염려치 마십시오. 저도 헨델 사제님께서도 그분께서 황위에 뜻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저 지금처럼 멀리서라도 프리온을 바라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지요.”
“하….”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왼손을 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아주 완벽히 잠시였지만 분명히 느껴졌던 몸을 감쌌던 온기.
그것은 정말 릴리아나였단 말인가?
상처를 치유한 것도?
“…믿을 수가 없군요.”
중얼거리는 아이든을 바라보는 제드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당신이 얼마나 큰 행운아인지 죽어도 모를 테지. 그분께 선택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이든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제드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긋 미소 지었다.
“새로운 황제가 추가 병력 지원을 윤허했습니까? 지금 프리온에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을 텐데요.”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신 일이니까요. 저는 그저 참전을 지원했을 뿐이고 폐하께서도 마법사들에게 감정이 깊으시니, 윤허하지 못할 것이 없지요.”
하. 모든 것이 릴리아나의 손에 움직이고 있다는 말인가?
이 전쟁의 운명조차?
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든은 실소를 뱉어냈다.
이렇게 대단한 여자와 결혼 한 줄은 미처 몰랐는데.
어디까지 대단해질 작정이지?
내 목숨이 이제 당신에게 달린 건가, 릴리아나?
“그럼 이제 황태자 전하께 저를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어디에 계시지요?”
아이든은 왼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
꿈에서 깬 뒤로 나는 줄곧 틈만 나면 몸 안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을 제어해보려고 노력했다.
사제가 말했던 ‘신성력’이라는 것은 생경한 것이라 이질적이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굉장히 따듯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이틀이 지났을 때는 신성력을 이용해 죽어가는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실에 놓인 화병에 꽂혀 있던 생명력이 다해갔던 꽃은 다시 그 생기를 회복하고 어여쁘게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불안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감염으로 죽어가는 아이든을 살렸고, 엄청난 수의 추가 병력이 스펠른으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승리를 거머쥔 채로.
시일이 더 지나 아슬란이 아카데미에 가야 하는 날이 왔다.
아이든과 함께 배웅해 주고 싶었는데.
마음 한 켠이 못내 쓸쓸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꾸준히 들려왔다.
칼도, 사제님도 내가 걱정하지 않도록 전쟁 상황을 전서로 보내주었기 때문에 크게 안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아슬란을 배웅할 수 있었다.
아이는 출발하기 전에 나를 바라보며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가문에 먹칠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사랑으로 돌봐 주신 은혜에 꼭 보답할게요. 최선을 다할게요, 어머니.”
아이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그리고 여전히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아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아슬란. 넌 이미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그곳에 가면 아마도… 적응하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거란다. 너도 알다시피 소문이라는 것이 그렇잖니.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될 테니까. 명심하렴.”
아슬란이 얼굴을 붉히며 예쁘게도 미소 지었다.
“예. 어머니. 명심할게요.”
윈터경의 호위를 받으며 아슬란이 떠났다.
나는 침실로 돌아와 입구에 서서 안을 둘러보았다.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퍼즐을 맞추던 나와, 아슬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테이블 위에선 함께 마주 앉아 식사하던 모습이, 침대 위에선 어머니를 지킨다며 꼭 끌어안고서 잠든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 저택에는 더 이상 아슬란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라더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숨을 들이마시면서 미소 지어보았다.
괜찮다. 아이든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몸을 돌려 볼턴경과 에릭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한가득 묻어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애써 미소 지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산책이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