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39)

25. 암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깔린 시체들 사이로 익숙한 반지를 낀 손가락이 보였다.

얼룩덜룩하게 피가 묻어있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사색이 되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반지가 끼워진 손을 잡고 끌어당기려고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안 돼! 안 돼요! 아이든 안 돼!”

나는 소리 지르면서 엉엉 울었다.

손을 아무리 당겨보아도 수많은 시체에 깔린 몸은 쉽게 딸려 올라오지 않았다.

손을 놓고 위에 수북하게 쌓인 시체들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끈적거리고 등이 땀으로 축축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축 늘어져 한없이 무거운 시체들을 하나씩 치우는데 팔과 손이 덜덜덜 떨려왔다.

음습한 기운만이 가득 찬 그곳에서 나는 필사적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부모를 잃은 갓난아기가 응애, 응애 하며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드레스는 이미 피와 흙무더기로 진득거리고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피비린내가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내 것과 같은 반지를 낀 손을 끌어당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으흑…! 안 돼! 으아아! 아아아! 안 돼!”

비명과 고함을 지르면서 미친 사람처럼 시체를 헤집었다.

드디어 손과 연결된 팔과 몸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더욱 시체를 치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날이 어둑어둑 해져가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핏빛이 가득해진 하늘로 인해 더욱 증폭되어 갔다.

“제발…! 제발…! 으흑 제발! 으아아아!”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몸 위를 덮고 있던 시체를 다 치워낸 나는 다시 한번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한 번에 쑤욱 딸려 나온 몸체와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의 몸을 붙잡고 얼굴을 묻었다.

“으아아아! 안 돼! 안 돼요, 안 돼! 아아아!”

두 눈을 감고 미동조차 없는 아이든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절망의 비명을 질렀다.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따끔거리고 시야가 흐릿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나를…! 나를 데려가!”

어디서 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신을 향해 울부짖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아악!”

“…아… 나.”

“!”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내려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아, 아이, 아이든. 아이든. 지금 내게 말 했어요?! 지금 방금…! 바, 방금 내게 말한 거지? 그렇지?!”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아아…! 신이시여….”

아이든의 눈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리… 리… 아나….”

“나 여깄어요! 여깄어!”

“시… 신… 성….”

그의 입으로 내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뭐라고요, 아이든? 내게 뭐라고 했어요?!”

“… 리온… 황제… 배신… 여….”

고개를 다시 들어 그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무슨… 무슨 소리에요?! 무슨 소리야?”

“…그를 죽여!”

***

“으허억!”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을 조금 먹었는지 원치 않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아내고 욕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계속해서 얼굴로 흘러내렸다.

거친 숨이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물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바로 앞에 걸린 목욕 가운을 몸에 걸치고 끈을 묶으면서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노력했다.

어쩌다 정신을 잃었지?

분명 멀쩡했었는데?

아니, 사실 이건 정신을 잃었다기보단 순식간에 환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김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이거 일상생활이 가능하긴 할까…?

이런 상황이 어느 때에 갑자기 벌어질지 모른다면?

그런 두려움에 휩싸이자 곧 손이 벌벌 떨려왔다.

손을 서로 맞잡고 혀로 입술을 적셨다.

“리제!”

다급하게 소리치자 금방 욕실 문이 열리고 리제가 달려 들어왔다.

“찾으셨어요?!”

“내, 내가 여기 얼마나 있었니?”

“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셨는데요?”

…얼마 안 되었다고?

환영 속에서는 꽤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는데?

한참을 시체를 헤집었으니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가야겠다.”

“예, 마님. 머리 좀 닦아 드릴게요.”

침착해.

심상치 않은 환영이었으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돼.

리제의 도움을 받아 다리와 얼굴, 머리를 닦아내고 침실로 돌아와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온종일 어떻게 해야 그를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아무 힘이 없는데.

내가 뭘 어쩔 수 있지?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하지?

어떻게 해야 아이든이 살 수 있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나니 순식간에 날이 저물고 저녁이 찾아왔다.

아슬란이 침대에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에릭들을 바라보았다.

“프리온으로 가야겠어요.”

내 중얼거림에 아슬란을 바라보던 에릭의 눈이 내게로 옮겨오며 화등잔만 해졌다.

창밖을 보던 윈터 경도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볼턴 경도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주군. 저택을 비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릭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네. 하지만 아이를 데려가기엔 너무 위험해요.”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주십시오.”

윈터 경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차근히 둘러보았다.

“아이든을 보았어요.”

“꿈에서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아침에 욕실에서 경험한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호위 기사들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요. 뭔가 잘못된 거예요. 아니면 잘못될 예정이거나. 그 미래를 내가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가야만 해요.”

“…우선 폴쳐 경에게 말씀드려 보시고 결혼 주례를 봐주셨던 사제님을 먼저 만나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에릭 경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늦어 버리면요? 전쟁은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는 내가 보았던 장면이 실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에릭.”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그들을 바라보며 나 역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을 좀 받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윈터 경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요?”

윈터 경이 창문을 열고 휘파람을 불고 비켜서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복면 사내 2명이 침실 안으로 가벼운 몸놀림으로 들어왔다.

복면 사내가 내 앞에 부복해 고개를 숙였다.

윈터 경이 창문을 도로 닫고는 말했다.

“모르셨겠지만 각하께서 부인께 호위로 붙여 두었던 암살자들입니다.”

“휴이 플레처라고 합니다. 휴라고 불러 주십시오.”

“노아 녹스입니다. 노아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는 놀란 듯 윈터 경을 바라보다가 두 명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내 호위가 볼턴 경, 윈터 경, 에릭 경뿐만이 아니었다는 말이로군요?”

“뭐. 그렇죠.”

윈터 경의 대답에 황당해졌다.

“하지만 암살자라면 전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쯧. 뭐, 암살자뿐이겠습니까?”

볼턴 경이 혀끝을 차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그렇다고 부인 곁에 있는 게 불만이란 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다만 정예병 없이 무슨 생각이신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덧붙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해하지 않아요. 같은 생각인걸요.”

“그래도 부인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네, 볼턴.”

에릭의 말에 볼턴 경이 또다시 혀를 차고 입을 다물었다.

“각하께서는 강하신 분입니다. 자신이 있으셔서 모두 여기에 남겨 두셨을 겁니다.”

에릭의 덧붙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쉽게 수긍이 가는 말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잘못될까 봐 걱정되고 못미더운 이유가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덧붙이기보다 다시 윈터 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계획이 뭔가요, 윈터 경?”

“이들은 암살을 주로 하는 자들입니다. 부인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뤄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휴와 노아를 바라보았다.

암살….

신성제국 황제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진실로?

그는…그는 이자벨 황녀님의 핏줄인데.

내가…….

“그런 환영을 보신 데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성황제가 만에 하나 악신과 결탁이라도 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를 없애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 있는 성기사들의 능력과 사기가 달린 문제입니다.”

맞아. 분명 배신이라는 단어가 나왔었지.

단호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돼.

그를 사지에 내몰 수는 없어.

나는 굳게 결심 어린 시선으로 휴와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명을 기다리는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휴이 플레처. 노아 녹스. 신성제국 황제의 목숨을 거둬 주세요.”

휴와 노아가 고개를 숙였다.

“존명.”

암살자가 창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볼턴과 윈터 경을 바라보았다.

“아슬란을 지켜주세요. 잠시 서재에 있고 싶어요.”

“존명.”

“에릭은 날 따라오세요.”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을 뒤로하고 서재로 간 나는 동이 터올 때까지 신성제국 황실에 관련된 것이라면 모조리 찾아와 읽었다.

현 황제는 초대 황제로부터 내려오는 정실의 핏줄이라기보단 서자에 가까웠다.

그는 그다지 신성력이 강한 황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권은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유지되어 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에릭에게 들은 바로는 선황제에게서 나온 정실 핏줄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어린 시절 병사했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원인. 병사.

현 황제를 죽이라고 했던 아이든.

수행 사제라는 이름으로 아이든을 찾아왔던 신원이 불분명한 여자.

이 세 가지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창밖으로 동이 터오는 것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모든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밝혀질 것이다.

휴, 노아, 아이든, 그리고 나까지.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 수면 아래 숨겨졌던 진실을 알아낼 것이고 평화를 되찾을 길 또한 찾아낼 것이었다.

***

황궁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막 입구를 지나치고 있는 칼을 발견했다.

나는 마차를 멈춰 세우고 내려 소리쳤다.

“칼!”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본 칼이 다급하게 내게 다가왔다.

“부인…! 저택 밖으로 나오시면 위험합니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칼에게 더욱 바짝 다가서서 속삭였다.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듣는 귀가 제일 없는 곳은 대체 어디죠?”

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안내했다.

말에서 내린 에릭이 내 옆에 바짝 붙어 나를 호위했다.

우리는 아이든이 황궁에서 일하던 전용 집무실을 찾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칼은 암막 커튼으로 창을 다 가리고 책상 왼쪽 구석에 있는 이상한 버튼을 눌렀다.

위 위잉 하며 알 수 없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칼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제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니, 아니요. 그 전에 칼에게 이야기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나는 다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괜찮으신 겁니까? 주무시지 못하신 거죠? 낯빛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부인.”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집무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칼이 내 맞은편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제 제가 너무 이상한 것을 보았어요, 칼.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은 알지만… 제 이야기는 절대 그냥… 그저 그런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랍니다.”

“부인, 부인. 심호흡을 하십시오. 저는 부인을 신뢰합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던 모양이었다.

칼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다음, 침을 꼴깍 삼켰다.

“어제 저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빨려 들어가듯이 다른 차원에 들어가 이상한 환영을 보았어요. 그건 너무 끔찍하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어요. 하늘은 핏빛이었고, 광활한 대지에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어요. 건물은 뼈대조차 남기지 못하고 무너져 사라졌고,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땅은 시체로 가득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칼? 그곳은 그냥 지옥 그 자체였어요. 저는 시체들 사이를 걸으며 절망감을 느꼈어요. 그곳은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문득 고개를 내렸는데… 수북이 쌓인 시체들 안쪽에서 튀어나온 손에… 그 손가락에….”

나는 고개를 내려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오른손으로 왼쪽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제 것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고개를 들어 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오랫동안 얽혀들었다.

그의 눈에서 큰 불안과 공포가 서린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저는 곧바로 미친 듯이 시체들을 헤집기 시작했어요.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손의 주인이 내가 아는 그가 아니기를, 만약 그라면 내가 아직 늦은 것이 아니기를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울면서 정신없이 시체들을 헤집고 나서 발견한 몸은 제발 아니기를 바랐던 주인이 맞았죠. 그때의 심정은 정말….”

“아아, 부인…!”

“저는 정말로 견디지 못할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침착하게 이야기하리라 다짐한 첫 마음과 달리 나는 울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가 된다면 저는…!”

칼이 다급히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 꿇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부인!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울지 마십시오. 각하께서는 강하신 분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강하게 끌어당겨 바짝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칼. 아이든이 내게 암살자 2명을 호위로 붙여 두었어요. 알고 계셨나요?”

“예.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주 위험하고, 어려운 명령을 내렸어요.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우린 다 죽고 말 거예요. 아니, 적어도 저는 죽고 말 겁니다.”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부인…?”

칼이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환영 속에서 아이든의 목숨은 다행히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아마도 그대로 둔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죠.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었어요.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었어요, 칼. 나는 그 말을 듣고 현실로 돌아왔어요. 그를 구할 새도 없이 말이에요.”

칼이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나는 더욱 그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여 말했다.

“프리온… 황제… 배신….”

칼이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는 것을 더욱 꽉 붙잡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를 죽여.”

“!”

나는 그에게 기울어졌던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칼을 잡았던 손을 풀어주었다.

“그래요. 나는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어요. 소리소문없이. 비밀스럽게요.”

“부… 부인…! 하지만 그건…!”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면서 굳어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믿지 못하시는군요. 나를.”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칼은 혼란스럽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사제님을 뵈어야겠어요.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은 칼뿐이에요.”

칼은 이내 집무실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걸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를 지킬 거예요. 죽음이 그를 삼키기 전에, 내가 할 거예요.”

“부인, 이건 그냥 단순한 꿈이거나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칼이 드디어 언성을 높이며 내게 소리쳤다.

나는 움찔했지만, 표정도 고개도 자세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그저 정면을 바라보고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부인…!”

치맛자락을 잡고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그제야 칼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제가.”

소파에서 나와 돌아섰다.

나를 지키던 에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 문 쪽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려던 찰나 칼이 내 손목을 잡아 왔다.

“부인…!”

뒤를 돌아 칼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좋은 것일까?

내가 디누트라는 것?

그건 이미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아이든의 어린 시절을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들여다보았던 것?

내가 죽음의 경계에서 회귀해서 돌아온 것?

과연 그가 믿어나 줄까?

그는 과연 신뢰할 만한 남자인가?

아이든이었다면 이 남자를 신뢰해도 좋다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을 연기를 걷어내듯이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내 손목을 붙든 칼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든은 내게 암살자 말고도, 에릭, 볼튼, 윈터 경을 모두 붙이고서 출정했어요. 모두 울프하운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정예병이죠. 팔다리가 잘린 아이든이 홀로 그곳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요? 그가 강하다고요? 네. 그는 강해요, 칼. 그러나 마법사만큼은 아니죠. 아이든은 근접거리에서 싸워야 하는 이고, 마법사는 아니니까요.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싸움이죠. 성기사들이 없다면… 그건 자살하러 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출정이었어요. 그저 꿈일 뿐이라고요…?내가 여자라서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눈을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칼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칼.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어요. 나 때문에 그는 죽을 거예요. 홀로. 외롭게. 거기서 그렇게.”

짓씹듯이 뱉어낸 말에 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줄곧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고.

아이든의 말처럼 이건 그냥, 프세아니아와 프리온 제국의 오랜 숙명일 뿐이라고.

칼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부인… 당신은 대체….”

“절망스럽게도 이 모든 건 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디누트이기 때문에. 그는 나를 지키려다가 그렇게 죽는 거예요. 멍청하게도. 아마도 우린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그의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마지막 말을 속삭이듯 뱉어내고는 칼의 손을 탁 쳐냈다.

“오늘 들은 말은 모두 없던 일이에요.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주세요. 그럼.”

돌아서 나가려는데, 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뚝.

발을 멈추어 섰다.

“제가, 제가 해 보겠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부인.”

“…….”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시오.”

에릭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뒤를 돌아 칼을 바라보았다.

“만약 부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예요. 우리는 줄곧 딜리아 가문에 의지해온 국가입니다. 그가 없으면, 제국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인.”

“…황족 모독이로군요, 칼 폴쳐.”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게 진실이니까요. 제가 돕게 해 주십시오. 제 부족함을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내게 고개를 숙이는 칼을 바라보며 결국 희미하게 웃었다.

“고개 들어요, 칼.”

그가 고개를 들어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믿었어요, 칼. 결국 이리 나오실 줄 알았거든요.”

칼의 얼굴에 당혹감이 들어찼다.

“우리는 벗이잖아요. 비록 함께 한 날들이 많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버버 거리는 사이에 나는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드레스치마가 소파에 닿으면서 폭하는 소리를 냈다.

“사제님을 만나 뵈어야겠어요.”

뒤를 돌아보자 칼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허.”

“안 가고 뭐 하세요?”

“정말… 닮으셨습니다.”

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허?”

이번엔 내가 그를 따라 헛숨을 뱉어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뒤를 돌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자, 곧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칼은 돌아왔다.

집무실 문이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열리고, 칼과 사제가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그녀가 프리온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맞았다.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걸어오는 사제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내게 다가온 사제가 나를 살포시 안아주며 말했다.

“안 그래도 한 번은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나를 놔 주고 맞은편 소파로 가는 사제를 기다렸다.

그녀가 착석하고 나서야 나도 자리에 다시 앉았다.

칼이 찻잔 2개를 가져와 찻물을 따라주는 동안 나는 사제를 빤히 바라보며 그녀를 탐색해 보려고 했다.

그녀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신성 황제의 끄나풀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

사제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부인께서는 생각이 얼굴에 아주 많이 들어나는 편이시라는 거 알고 계십니까?”

흠칫.

놀란 눈을 들어 사제와 눈을 맞추었다.

“제가 그렇게… 티가 났나요?”

사제는 대답 대신 싱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민망해져서 얼굴로 열이 올랐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제님.”

“물론입니다. 아.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좋아질 만한 것은 아니었는데.”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답니다. 아. 아이든에게 주셨던 신성력이 담긴 돌은 정말 유용하게 사용했어요.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나는 팔목을 들어 올려 팔찌를 사제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쾌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더 기쁘네요. 그래서 제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라는 것은?”

조금 진중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시간이 좀 여유로우신가요?”

“얼마든지요.”

나는 사제의 대답을 듣고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아이든의 꿈을 꾸었던 내용부터 시작해서 어제 보았던 것, 그리고 그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때로는 두려움에 휩싸여 어깨를 떨기도 하고, 억울함과 괴로움에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감정을 잘 추스르며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사제는 한동안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잠시간 침묵을 선택했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무엇으로 그녀가 신성황제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까?

그녀가 말을 골라내느라 고민하는 사이 나 역시 그런 고민들을 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십 분 정도 침묵의 시간이 지나간 후, 이윽고 사제가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인?”

“저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 셋과 암살자 둘, 그리고 칼과 사제님뿐입니다. 그마저도 어제 본 것에 한해서요. 나머지 내용을 들으신 것은 여기 계시는 분들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 멍해진 얼굴의 칼을 바라보았다.

내 모든 이야기를 듣고 그 역시 좀 놀란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 뒤에 서 있는 에릭 역시 그렇겠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제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에요.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자리에서도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더 있습니다.”

내가 회귀한 것.

굳이 그 얘기까지 꺼내지 않은 것은 여기 있는 칼과 에릭이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제가 알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제는 예상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부인.”

역시나.

“일단 오늘 이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다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되물었다.

“제가 무엇으로 사제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사제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옷깃에 달려있던 브로치를 떼어 내게 내밀었다.

“제 고위 사제 신분증을 부인께 맡기면 되겠습니까?”

나는 그 브로치를 받아 들었다.

위아래, 양옆으로 뻗어나간 노란색 막대 안에 푸른색으로 고위 사제를 뜻하는 문장 첫 알파벳이 박혀 있었다.

내가 브로치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사제는 칼에게 전서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칼이 종이와 펜을 꺼내 주고 집무실을 나간 사이 사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은 편지지를 돌돌 말아 마끈으로 묶었다.

칼은 곧 손에 전서구가 있는 새장을 들고 돌아왔다.

사제가 편지를 전서구 다리에 묶어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제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은 지금도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암살자가 명을 수행하기 위해, 또 어딘가에서는 아이든이 제국과 나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목숨을 내걸고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이런 것뿐이었다.

나는 어쩌면 평생 아이든에게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가 너무 보고 싶은 나에게 진저리가 났다.

그가 내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이 모든 건 너 때문이 결코 아니라고 말해주었겠지.

나는 아마도 그런 말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웃기는 일이다.

그것이 진실일 리가 없는데.

나는 매 순간들마다 그런 입에 발린 말 한마디를 믿고 싶어했다.

정말이지 위선자 같아.

그동안 나 스스로조차 감추고 속여왔던 진실이 내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심장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해지자, 숨이 탁 막혀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깨를 한차례 떨었다.

에릭이 뒤에서 눈치 빠르게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주었다.

사제가 내 맞은편 소파에 돌아와 앉았을 때, 나는 죄책감, 상실감 같은 내 감정의 쓰나미를 집어삼키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애써야 했다.

“추우십니까?”

칼이 걱정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젓고 말했다.

“조금요. 하지만 그렇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이건 집무실 온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서요.”

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

들려오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께서 겪고 계시는 이 일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알지만, 또한…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맞다.

그녀는 내가 될 수 없으므로 내 고통을 알 수도 없다.

아마도… 누구도 내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짊어지고 견디고 계시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감히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려요. 흔들리지 말아주십시오, 부인.”

그녀는 나 따위가 뭐라고 감히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내가 디누트라서?

아니,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디누트가 아니다.

그저 아주 조금 그 피를 가졌을 뿐.

나 자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조차 사지로 몰아넣는 저주받은 존재일 뿐인데.

하지만 그녀 말이 옳다.

이정도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든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있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쟁터에서 두려움을 삼켜가며 싸우고 있겠지.

돌아가야 해. 리안에게 돌아가야 해.

하고 생각하면서.

내가 견뎌야 할 것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응당 견뎌야 했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제님. 그보다 프리온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제는 두 손을 꼭 쥔 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찻잔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현재 프리온제국은 둘로 나뉘어 있다고 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했던 내용이지요.”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제국에 내분이 일어난 상태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말인가?

프리온은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입을 여는 대신 그녀의 찻잔에 차게 식은 차를 따듯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것으로 내 마음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프세아니아 제국민이라면 응당 방금 들은 이야기가 제국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계산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내 안에 흐르는 피의 적어도 몇 퍼센트는 디누트의 것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어느 한쪽의 편에서만 판단하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사제는 찻잔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의 배려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맛본 뒤에 다시 테이블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만큼이나 뜨거운 한숨을 뱉어낸 사제는 곧이어 결심한 듯 입을 다시 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든 발설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 황제는 그동안 많은 고위사제들과 장로들이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행보들을 보여왔습니다. 우리는 일라즈를 섬기는 국가로서 응당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작부인. 그러나 현 황제는 그런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못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은 그 뒤로도 아주아주 길게 이어졌다.

황태자 역시 황제의 뒤를 이어 같은 행보를 보였다고 했다.

사제들과 장로들, 귀족들까지 프리온 제국에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뜻을 같이한 제2황자를 중심으로 뭉쳐 신진세력을 구축하고 때를 기다려왔으며, 그 안에는 자신 역시도 가담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끊임없이 2황자를 의심하면서 살인을 시도해 왔다고 했다.

자신을 사랑해주어야 마땅한 부모가 사랑 대신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안겨주었다.

2황자는 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면서 견뎌왔을까?

그가 참으로 가엾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자녀는 부모에게 사랑받아 마땅했다.

태어나기를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사제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나는 도무지 어떤 말로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그동안 조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묵묵하게 지켜왔을 뿐이었다.

“2황자님께서는 좋은 신하를 곁에 두었으니 참으로 든든하고 기쁘시겠어요.”

그녀는 눈에 띄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럼요.”

내가 환하게 미소 짓자, 사제가 커진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미소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고맙습니다, 부인.”

시선을 돌려 소파 상석에 앉아 있던 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싱긋 웃어 보였다.

“전서구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2황자님께로 보낸 것이로군요. 그렇지요?”

사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대로 황자님께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암살에 성공한다면 자연스럽게 황위는 황태자가 이어받게 될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만약 휴와 노아가 암살에 성공하게 된다면 프리온에서는 황권 탈환을 위해 엄청난 피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밖으로는 전쟁을, 안으로는 쿠데타를 치루고 난 뒤 제국이 안정화 되려면 꾀나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사제님. 언제라도 돕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부인. 너무 많은 짐을 지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자신들만의 일이라는 것이구나.

선을 그은 사제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제는 지금 디누트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이곳에서 아이든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우려는 것이었다.

신성제국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지도 몰랐다.

내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프세아니아 제국민으로서의 내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아이든과 행복하고 싶었다.

물론 그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나는 사제에게 지난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대강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제를 포함해 신성제국 사절단이 겪은 테러와 제도 내에서 일어났던 테러들, 그리고 아이든을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수행사제까지.

아이든은 사절단과 황제폐하께서 함께한 자리에서 노발대발을 했다고 한다.

어째서 신성제국에서는 신원이 확인되지도 않은 자가 수행사제가 될 수 있는 것이냐부터 시작해서, 부인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말까지.

그런데다 사절단이 제국 내에서 테러까지 겪었으니 대화로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가 한순간에 국가간의 문제로 커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아이든의 옆에 내가 있었더라면 이성을 잃은 그의 두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을 텐데.

퍽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절단은 내일 신성제국으로 돌아가지만, 사제는 꽤 오랫동안 황궁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칼을 통해 전서를 보낼 터였다.

태양이 중천에서 따사롭게 제도를 비추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환복을 하고 난 후에는 아슬란에게 가볍게 인사해주고 점심 식사부터 해치웠다.

정말로 배가 많이 고팠다.

가정교사가 방문해 아슬란의 공부를 봐주는 동안 나는 저택 내정 일을 본 뒤 호위 기사들에게 황궁에 가서 들은 이야기들을 공유해 주었다.

볼턴경과 윈터경은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에 부쩍 얼굴이 어두워졌다.

생각해보면 에릭도 사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쩍 얼굴이 어두워졌던 거 같기도 했다.

“신성기사들의 힘의 원천은 황제로부터 옵니다.”

에릭이 내게 넌지시 말했다.

“황제가 제사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신의 가호가 약해지고 그러면 신성기사들의 힘도 당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역량과 신앙도 한 몫을 하기는 하겠지만…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황위에 누가 앉아 있느냐가 무척 중요한 것이죠.”

“현 상황에서 신성기사들의 힘이 약해지면 전쟁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겁니다! 마법사들을 상대로 검사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각하와 함께 출전한 울프하운드에는 소중한 동료들이 많습니다! 가족 같은 이들도 있고요!”

윈터 경이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분에 못 이겨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악신과 손을 맞잡고 더욱 강력해진 마법사들과 그들이 세운 국가.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 세력을 뻗어왔는지 알 수 없이 섞여 혼탁해진 프리온의 현재 상황까지….

현 프리온의 황제가 만약 정신이 혼탁해져 일라즈 신을 배반하고 악신을 섬기게 되었다면, 당연히 신성기사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사제는 아이든이 출정을 하기 전에도 황궁에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음에도 출정을 막지 못했다.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면 스펠른에서 우리를 칠 것이고 제국인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지금 마음이 몹시 괴로운 나처럼.

볼턴 경이 말했다.

“휴와 노아가 갔으니 성공하길 빌어야지.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

그 말이 맞았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꿈을 꾼 나조차도 이제 무엇이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이든과 울프하운드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프리온 제국 일에 관여하고 사제를 돕는 것도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대의 같은 건 내게 없었다.

디누트고 뭐고 나는 그저 딜리아 공작부인일 뿐이니까.

“잘 될 거예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함이 내 마음을 집어삼키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

“부부 침실 공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보고 와야겠어요. 아슬란 가정교사는 돌아갔는지도 궁금하네요.”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에릭이 내 손목을 잡아왔다.

멈칫하고 돌아보자 그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굳게 의지 서린 얼굴로 말했다.

“각하는 괜찮으실 겁니다. 주군께서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시면 다들 불안해합니다.”

“…방금 내가… 그렇게 보였나요, 에릭?”

“…예.”

입술을 사리물었다.

잘 견뎌왔고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이제 나는 어쩌면 좋을까?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불안해지지 않았을까?

마음 같아선 스펠른으로 당장 달려가서 그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만큼 내 마음은 불안감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에릭의 말대로 내가 불안해하면 저택의 모두가 불안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견뎌야 해. 이겨 내야만 해. 어차피 나는 스펠른으로는 갈 수 없는걸.

“놔 줄래요, 에릭?”

눈을 뜨고 말했다.

에릭이 화들짝 놀라면서 내 손목에서 제 손을 거두어 갔다.

“죄송합니다, 주군.”

“아니. 사과할 것 없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제 괜찮아요, 에릭.”

그리고 뒤를 돌아 침실을 빠져나왔다.

내 뒤를 이어 에릭과 볼턴, 윈터 경이 줄줄이 나를 쫓아왔다.

나는 다시 일상을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공작부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이행했고, 사용인들은 나를 전보다 더 신뢰하며 따라주었다.

3일 낮과 밤이 지나갔을 때, 휴와 노아가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된 채, 처참한 모습으로.

나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놀라서 달려가 주저앉았다.

“의, 의원을…! 볼턴 경! 의원을 불러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시… 실패했나요…?”

휴가 검에 배여 끊임없이 피가 흐르는 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그를 붙잡고 버럭 화를 냈다.

“바보 같은 행동 하지 말아요!”

휴이가 움찔거리며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다 죽어가는 몸으로 예를 갖춘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죄… 죄송….”

“됐어요. 결과나 말해봐요.”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니 그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헛숨을 뱉어냈다.

“살만해요?”

“아, 아닙… 윽.”

“그래서 실패했어요? 참고로 미리 말해두지만 실패했어도 상관없어요. 그대들을 탓하지 않아요.”

내내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어이없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던 노아가 입술을 깨물면서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윽… 당신이 보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보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들이 배후에 내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 뒤에 누군가 붙었을 수 있고, 그러면 지금쯤 벌써 이 저택으로 이들이 들어서는 게 탄로 났을 것이다.

“…뒤쫓는 자는 없었습니다.”

휴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있었다고 해도.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휴와 노아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은 이미 생사의 기로에 서 있어요. 나라고 목숨을 보장받으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편할 리가 없잖아요. 뭐라도 하고 싶어요. 아니. 뭐라도 할 거예요.”

내 대답에 얼마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노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내 앞에 무릎 꿇고 부복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이러지 말라고…!”

“저는… 스펠른에 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노아가 느릿하게 하는 말을 들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당신을 수호하라는 명이 싫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들은 모두 정예병이다.

아이든의 오른팔이자 왼팔이었고, 오른발이자 왼발이었다.

모두 전쟁터를 오가던 이들이었다.

이렇게 무료한 일상을 보내 본 적이 얼마나 될까?

모두 다 고작 나 때문에.

“에릭이 그러더군요. 당신은… 각하를 닮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말을 하다 말고 쿨럭거리며 피를 한차례 토해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의원은 대체 언제 오는 것이지?

이러다 초상 치르고 오는 게 아닐까?

“…부디 교만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놀란 눈으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내 심장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것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며칠 전 그를 처음 보았고, 그의 눈빛에서 그런 기색은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마도 그렇다면 마법사가 나를 죽이러 왔을 때 구한 것은 휴이일 가능성이 컸다.

“…저를… 벌하셔도 좋습니다.”

“노아!”

화들짝 놀라며 그를 다그쳤다.

“몸이나 낫고 나서 다시 얘기해요! 난 당신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노아!”

“저를 써주십시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노아!”

나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붙여진 기사들을 다치게만 하고, 남편은 사지에 나가 있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지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는 되려 내게 자신의 불충을 토로하고 벌을 해달라 하고 있으니.

“당신은 아이든의 기사예요.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리고 벌을 줄 권리는 없어요.”

“…제 기사도를 회복하게 해주십시오.”

“!”

그렇구나.

그는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것이다.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아이든의 명을 불신하고 나를 불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인가요?”

“부인….”

“당신 탓이 아니에요. 모든 건 다 내 탓이에요. 따지고 보면 그렇단 말이에요. 나는….”

나는 존재 자체가 죄란 말이에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삼켜냈다.

심장이 아릿해져 왔다.

태어난 것이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일까?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나는 잘못이었다.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나 하나로 대체 몇 명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 다 셀 수조차 없었다.

신탁의 아이가 다 무엇인가.

그딴 것이 없어도 국가는 잘만 굴러갔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신을 믿으면서도 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저 이제라도 신의 품에 안겨 안식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한 사람.

그래.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내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그 사람.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노아의 탓이 아니었다.

그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당신은 죄책감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는 거예요, 노아.”

“죄책감 때문이 아닙… 윽…!”

“그만! 제발 그만해요! 이러다 죽겠어요! 그게 뭐든 살고 나서 해요!”

나는 너무 놀라서 노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노아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내 손과 나를 바라보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볼턴 경이 의원과 함께 뛰어 들어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노아를 놓아주었다.

***

의원이 약 처방과 치료를 끝내고 돌아갔다.

혹여나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여 방문 앞을 서성이던 나는 의원이 돌아가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휴이와 노아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둘 다 심한 부상은 아니었는지 여전히 제정신을 유지한 채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다가가 그들의 앞에 앉았다.

“이제 말해주세요. 내게 할 말이 남았잖아요.”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입술을 사리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성제국의 황제는 죽었습니다, 부인.”

성공이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헌데 명을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체불명의 복면인들과 맞붙었습니다. 그들도 암살자들 같아 보였습니다. 딱히 마법을 사용한다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희가 죽이긴 했지만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습니다.”

“그런 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택의 호위를 더 강화해야 합니다. 단기적으로 용병을 고용하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 울프하운드가 출정 중이니까요.”

암살자라니…?

마법사들도 그런 자들을 키우고 있었나?

마법이 있는데 굳이 왜?

직접 몸이 닿지 않고도 그들은 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계속 그러지 못하는 걸까?

전에 나를 죽이려고 찾아왔던 자도 결국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나를 처리하고자 했다.

멀리서 마법 주문만 시전 했으면 되었을 텐데도.

도대체 왜 그랬을까?

“용병 중에 저들이 숨어 있지 않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어떻게 사람을 가려내야 할까요? 마음 놓고 용병을 구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둘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주군. 제가 잘 아는 용병이 몇 있습니다. 우선 그들이라도 고용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내내 뒤에만 서 있던 에릭을 돌아보았다.

“에릭이 용병과도 친하게 지냈나요?”

“아시다시피 제가 귀족은 아니라서요.”

이마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에릭을 보고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에릭.”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하자 에릭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귀족이 아니라고 해서 불편한 건 없었으니까요.”

“저놈은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놈입니다.”

노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놀란 시선을 돌려 노아를 바라보았다.

에릭을 싫어하나?

“노아.”

휴가 짐짓 엄하게 부르자 노아가 쳇 하고 혀를 차고는 시선을 돌렸다.

“어, 어쨌든 그럼 에릭이 잘 아는 용병을 우선 고용해 보기로 하죠. 저택으로 불러줄 수 있죠, 에릭?”

“물론입니다.”

에릭이 고개 숙여 대답했다.

나는 다시 휴와 노아를 바라보았다.

“일단 용병 고용 문제는 차차 더 늘리든지 하기로 하죠. 용병이 저택을 지킨다고 해도 사실상 암살자들을 잡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모두가 수긍하는 것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들춰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사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신성제국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2황자는 황권 탈취에 성공했을까?

아이든은… 그는 무사한 것일까?

어디 크게 다쳐서 사경을 헤매거나 그러진 않겠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커튼을 들추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조금 틈만 나면 고개를 들이밀지.

심호흡해, 릴리아나.

이따위 감정에 지면 안 돼.

나는 불안감을 다시 꾹꾹 눌러 집어삼켰다.

곧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져 왔지만 별수 없었다.

익숙해져야만 한다.

이런 감정은 언제든지 다시 겪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공작’은 유능했고, 이번만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전쟁에 불려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그 공작의 아내’로서 살아내야만 할 테니까.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에릭, 볼턴 경, 휴와 노아가 모두 걱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리온에서 2황자가 황권 탈취에 성공하고 나면, 스펠른으로 추가 병력을 지원해 줄지도 몰라요.”

휴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문제라면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죽는 걸 확인하고 왔으니 아마 지금쯤 황좌에는 부인께서 원하시는 이가 앉아 있을 겁니다.”

내가 원하는 이.

낯선 어감이었다.

마치 내가 프리온의 황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 온전한 디누트인 것도 아닌데.

“어쨌든 잘된 일이군요. 다… 그렇게 잘 될 거예요. 모든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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