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폭풍전야
어제 리제와 기사를 둘이나 대동하고 시내에 다녀왔다.
에릭의 검에 달아줄 맹세의 깃을 구매하고 아슬란에게 줄 만년필과 아슬란의 방을 꾸밀 꽃을 사 왔다.
오늘은 구매한 모든 것들이 주인을 찾아가야 할 날이었다.
임시로 물에 담가 두었던 꽃다발을 꺼내 예쁜 화병에 꽃꽂이를 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심란했다.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그는 결국 이틀이 지나서도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일까? 왜 이틀이나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내가 꽃꽂이를 하는 내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자 리제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님. 혹시 마음에 신경 쓰이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어? 아. 리제.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혹시 저택 사용인들 사이에 도는 소문 때문이라면….”
소문?
나는 번뜩 고개를 돌려 리제를 바라보았다.
“소문? 무슨 소문?”
리제가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실눈을 뜨고 리제를 바라보았다.
“말해, 어서.”
“마, 마님… 죄송해요….”
내가 미간을 팍 찌푸리자 리제가 울상이 되었다.
“주인님이 이틀이나 집에 안 들어오시고 저번에 찾아온 여자랑 있는 게 아니겠냐는 소문이… 그래도 아닐 거라고 믿는 사용인들이 더 많아요, 마님! 실제로 이틀 전에 마님께 주인님이 다정하게 인사한 걸 본 한스도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얘기했고요!”
나는 커진 눈으로 리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절대 아닐 거예요, 마님! 주인님이 마님께 정말 다정하시잖아요!”
리제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외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꽃 한 송이를 든 내 손을 바라보았다.
이거… 손 안 대고 코 풀겠는데…?
“소문이… 어디까지 났을까?”
“네?”
“이왕이면… 일이 커지면 좋겠는데.”
“네에?”
나는 이내 당황한 리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제도에도 소문이 날까?”
“네에…? 마님?”
딜리아 공작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입이 가벼운 사용인이 누군지 색출할 때가 왔구나.
“가서 칼튼 좀 불러오렴.”
리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려는데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튼입니다, 마님.”
나는 리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들어와요.”
달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칼튼이 들어와 고개 숙였다.
“마님 앞으로 전서가 한 장 왔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가 내미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실링 처리 없이 접착제로 붙은 봉투를 보고 침대 옆 협탁으로 가 서랍에서 편지용 나이프를 꺼냈다.
봉투를 개봉해서 편지를 꺼내 펼치자 익숙한 필체가 나타났다.
[내가 찾던 수행 사제는 없었어, 리안. 신성 제국의 국민도 아니었고. 그 빌어먹을 놈이 그대를 위협하는 존재들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내 직감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야. 프리온의 사제가 오는 길에 제도 안에서 테러를 당했어. 제국간의 문제로 커지는 바람에 일이 좀 복잡해졌어. 빨리 돌아가지 못해서 미안해. 제도가 어수선해질 거야. 나와 황실 근위대가 수색을 시작했어. 그만큼 위험하다는 반증이니 저택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마.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리제와 칼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편지는 확인하면 태우도록 해. 어제 나쁜 꿈을 꿨어…. 괜찮은 거지? 불안해 미칠 것 같아. 부디 몸조심하고 에릭과 떨어지지 마. 그대가 보고 싶어. -아이든- ]
아… 어째 불안하다 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는 내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이든은 내가 눈에 보이지 않아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괜찮을까?
편지에 적힌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다급함, 불안감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한 개인일 뿐인 나로 인해 제국에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겁이 나기도 했다.
도대체 제도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부디 아이든에게는 별일이 없기를.
이기적이게도 나는 제국보다 아이든의 안위를 더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다급히 편지를 접어서 다시 봉투에 넣었다.
협탁 서랍에 편지용 나이프를 집어넣고 캔들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꽃이 있는 탁자로 와 옆에 있는 휴지통 위에서 편지에 불을 붙였다.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나만의 발악이었다.
아이든 없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그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욕심에 먹혔다.
“칼튼.”
“예, 마님.”
“저택 내부에 입이 가벼운 자가 있어요.”
“예. 전에 말씀하셨던 자 말이지요?”
“칼튼도 소문을 들으셨나요?”
칼튼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이든도 딜리아 저택에 입이 가벼운 자가 있기를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지켜야 할 비밀을 가지고 있잖아요. 색출해 내야겠어요. 역추적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일을 더 크게 키워 자발적으로 나와주길 기다려야 할까요?”
칼튼이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는 손뼉을 탁 쳤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소문을 들은 내가 속상해하다가 아이든과 다투고 점점 더 멀어졌다 정도면 되겠어요. 나는 크게 화가 났고, 그런 소문을 낸 사람에게 아이든이 크게 분노한 게 오늘 칼튼이 들고 온 서신에 적혀 있었어요. 그걸 지켜본 사람이….”
나와 칼튼이 동시에 리제를 바라보았다.
리제가 커진 눈으로 나와 칼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왜 이러세요?”
“소문을 흘려야겠구나.”
“네?”
“방금 들었잖니.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와 더 이상 살지 못하겠다고 한바탕 운 것으로 하면 더 좋겠다.”
리제가 크게 당황해 흔들리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리제를 일으켜 세웠다.
“어서 가. 자연스럽게 하지 않으면 잘릴 각오를 하렴.”
“마, 마님!”
나는 리제를 문 쪽으로 밀면서 작게 속삭였다.
“명심해. 잘릴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리제가 울상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는 배신자를 색출하려는 거야. 앞으로 우리 가문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자. 그러니 사명감을 가져. 어서 가.”
리제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아버렸다.
“칼튼.”
칼튼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명하십시오, 주인님.”
그의 칭호가 바뀐 것을 듣고 나는 미소 지었다.
“아슬란을 데려와 주세요. 내가 데리고 있어야겠어요. 그리고 소문이 최대한 많이, 멀리 퍼질 수 있도록 칼튼이 좀 도와주세요. 이왕이면 제도에 쫙 퍼지면 더 좋겠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감당 못 할 두려움은 사람을 궁지로 모는 법이에요. 어쩌면 역추적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티 나게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주인님.”
칼튼이 방을 나서고 나는 탁자로 돌아와 휴지통 안에서 재가 되어버린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부디 조심하세요, 아이든.
***
3일이 더 지났다.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부풀려져서 퍼지게 되었다.
이제 사용인들은 나를 마주치기만 해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급하게 지나가기 바빴다.
나는 3일 전, 아슬란을 내 방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우리가 하려는 일을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고, 아이는 빠르게 이해해 주었다.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내심 크게 걱정했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아슬란은 되레 나를 격려하고 힘이 되어 주었다.
아이든이 저택을 비운 지금이, 그들로서는 나를 공격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였다.
게다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아끼는 아슬란이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했다.
이 저택을 든든하게 지켜줄 기둥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나는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겉으로 표 내지 않고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두려움에 먹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선 안 되었다.
내게서 맹세의 깃을 받은 에릭은 크게 기뻐해 주었다.
에릭과 함께 나를 호위해주는 볼턴 경, 그리고 아슬란이 방을 옮기면서 함께 온 윈터 경에게까지도 나는 현 상황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와 아슬란을 지켜야 하는 이유까지도 말이다.
에릭은 그제야 나를 지키는 호위가 그와 볼턴 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이든을 밀착 호위했던 암살자 2명이 언제나 내 방 근처에서 대기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볼턴 경과 윈터 경은 문 입구에서, 에릭은 침실 밖이 아닌 안에서 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화장실을 가거나 씻으러 들어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에릭은 늘 내가 어딜 가든 나와 함께 했다.
물론 아슬란도 함께였다.
5일째 되었을 때, 제도 내에서는 내가 곧 쫓겨나고 말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 소문이 제도에 일파만파 퍼져 급기야는 우리의 후원을 받게 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대문 입구에서 내게 제발 공작가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며 빌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바로 다음 날에는 제도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테러가 연이어 발생해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었다.
뭔가 정말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었다.
아이든이 무사한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감정을 드러내기에 내가 서 있는 위치가 가진 무게감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나와 칼튼은 사용인들을 한 명씩 불러들여 심문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는 누구에게 들었다. 누구는 누구에게 들었다.
하루 종일 끊임없이 나오는 이름들에 머리가 아팠다.
내 안색을 살핀 칼튼이 내일 다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나를 뜯어말렸다.
열 명의 사용인들을 심문하고 나서 나는 칼튼의 말을 듣기로 결정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슬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를 만져보고 내 품 안에 누워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하다.
그는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
다음 날, 칼튼과 나는 침실 탁자에 앉아 저택 재정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안주인에게는 공작이 없는 저택을 더욱 잘 꾸려가야 할 사명이 있었다.
아슬란은 내 바로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에릭이 창가에 서서 불안한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슬란이 고개를 들고 물었고, 곧 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리제예요. 마님을 뵙고 싶다는 사용인이 있어서 데려왔어요.”
리제의 말을 듣고 나와 칼튼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왔구나!
“들어와.”
내 명령에 문이 열리고 리제와 그 뒤로 하녀 두 명이 따라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매일같이 아이든의 시중을 들던 사용인이었다.
내가 이 저택에 처음 찾아왔던 날, 개를 건네받고 나갔던 그 여자.
나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빠르게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마, 마님…! 저희를 제발 용서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마님…!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나는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칼튼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너희 랜디 그 아이의 친구로구나.”
칼튼의 말에 두 하녀는 흠칫 놀랐다가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마, 마님…! 저희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희가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었어요! 저희는 그냥… 그냥 고작 평민 나부랭이가 갑자기….”
“닥쳐.”
말을 자르고 엄포를 놓자 하녀가 숨을 들이켜며 히끅 거리더니 이윽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하녀를 차갑게 노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네 입에 함부로 올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거 모르겠니? 고작 평민 나부랭이?! 미친 게로구나! 아슬란은 내 아들이야. 소공작이란 말이다!”
“마, 마님…! 살려주십시오!”
더 들을 가치가 없어.
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 아슬란을 품에 안았다.
아이가 괜찮다는 듯 내게 미소 지어 주었는데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칼튼.”
“예, 하명하십시오.”
“저 두 명은 아이든이 돌아올 때까지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세요. 어떻게 처리할지는 그가 결정할 겁니다. 일체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게 하고 근신시키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엎드려 눈물을 터트려 우는 그녀들을 차갑게 노려보고 설렁줄을 잡아당겨 사용인들을 불러 그들을 데리고 나가도록 했다.
칼튼이 그들과 동행해 나가고 나는 아슬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들의 말은 하나도 기억에 담아두지 말거라. 너는 평민 나부랭이 따위가 아니다. 알겠니?”
“예, 어머니.”
“너는 이 공작가의 소공작이다. 누구도 네게 감히 고개도 치켜들 수 없어.”
“예, 어머니.”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슬란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슬퍼하지 마세요.”
“아슬란….”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슬퍼하지 않으마.”
아슬란과 붙어 생활한지도 며칠이 지난 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이 아이에게 어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아이도 서로에게 이미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아이가 정말 내 아들같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아이의 친어미였던 여자에게 속삭여 보았다.
‘내가 아이를 사랑으로 잘 키울 게요. 아이는 잘 자랄 거예요. 부디 우릴 지켜봐 줘요.’
“주군.”
그 때, 에릭이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열면서 나를 불렀다.
내가 고개를 들어 에릭과 창문을 바라보자 곧 에릭이 내민 손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전서구 입니다.”
에릭이 새의 다리에 달린 편지를 풀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아슬란을 의자에 앉혀 두고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에릭에게 다가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아무렇게나 접혀 마끈에 묶인 편지였다.
끈을 풀러 내고 펼쳐보니 아이든의 익숙한 필체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잘 지내고 있어? 여긴 아직도 사제를 잡지 못했어. 제도에 일어나는 테러는 마법에 의한 것이었어, 리안. 테러범들을 몇 잡는데 성공 했어. 마법사들이 오래전 바다건너 먼 곳에 국가를 건설했다더군. 어떻게 이 기나긴 세월 동안 아무도 모를 수 있었을까? 그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프리온과 우리가 그들을 선제공격할거야. 이건 오랜세월 동안 두 제국이 염원해 온 일이었어. 곧 출정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들을 모두 없애지 않으면 그대가 죽게 되겠지. 나는 물러서지 않아. 불안하다는 거 알아. 미안해. 몸 건강히 조금만 기다려 줘. 끼니 잘 챙겨먹는 거 잊지 마. 사랑해. 그대가 보고 싶어. –아이든-]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했고, 출정한다는 것에 불안했다.
편지를 든 손이 잘게 떨려왔다.
에릭이 손을 잡아왔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가 심호흡을 하고 떴다.
“그럼요. 나는 괜찮아요.”
나는 부리나케 협탁 서랍에서 캔들라이터를 꺼내 가지고 와서 편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작은 편지 한 장에 펜으로 꾹꾹 편지를 눌러 썼다.
[저는 괜찮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부디 건강하게 다치지 말고 돌아와 줘요. 당신을 믿어요. 나도 보고 싶어요, 아이든. 사랑해요. –리안-]
나는 편지를 접어 마끈을 가지고 새 다리에 묶어주었다.
“날려주세요.”
에릭이 새를 날렸다.
내 편지를 가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새를 바라보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 줘요.
“좀 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릭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사들이 오래 전 국가를 건설했고, 갑자기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하네요…. 아이든은 출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선제공격을 할 거라는 군요.”
에릭이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창 밖의 먼 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 제도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이군요.”
나 역시 창 밖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을 힘주어 맞부여잡았다.
“울프하운드는 그대를 포함해서 정예기사가 전부 빠져 저택에 있는데… 정말 괜찮을까요? 에릭이 아이든과 함께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에릭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왔다.
“주군. 저는 더 이상 울프하운드 기사로 설 수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제게는 주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딜리아는 무력하지 않습니다. 역대 가주들 중 각하께서 검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제국 내에 몇 없는 소드마스터도 각하께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각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나는 불안한 시선을 창밖에서 떼어내 에릭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에릭이 내가 맞 부여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쉬셔야 합니다, 주군.”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힘주어 부여잡고 있음에도 잘게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을 풀어 등 뒤로 감추면서 미소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나는 부리나케 아슬란에게로 가서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책을 읽어주세요, 어머니.”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가 보고 있던 책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이가 의자를 내게로 가까이 붙여왔다.
“어디까지 읽었니?”
“이 다음부터요.”
나는 아이의 머리에 입 맞춘 후 책을 읽어주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