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9)

20. 로건 피츠로이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리제가 우리에게 달려와 조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나는 아이든의 손을 꼭 붙잡고 아이의 어미가 묵기로 했던 방으로 가 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조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나는 빠르게 다가가 아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사용인들이 시체를 담기 위한 관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색이 되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침착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시체를 처음 보는 나와는 달리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시체를 보았을 것이다.

“간밤에 크게 격통 하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에게 전해 달라고 편지를 한 장 남겼어요.”

하인 한 명이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우는 조의 등을 토닥여 주고 말했다.

“조. 어머니가 네게 편지를 남기셨다는구나. 글을 읽을 수 있니?”

멈칫. 그러고 보니, 이들은 글을 배우지 못하는 평민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글을 쓰실 수 있지?”

아이가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아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빨갛게 충혈되고 눈두덩이는 너무 많이 울어 보기 흉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몰락한 귀족의 마지막 남은 혈통이라고 하셨어요.”

몰락한 귀족의 마지막 남은 자? 제국에는 가문의 일원이 모두 다 몰락한 귀족은 없을텐….

“피츠로이.”

아이든의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몰살당한 황족!

선황의 형제 중에는 성을 하사받고 황실에서 쫓겨난 유명한 서자 출신 황자가 있었다. 그가 하사받은 성이 정확히 피츠로이였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거나 천대하지 않도록 마지막 은혜를 베푼 것이 성이었다. 피츠로이는 그 이름 그대로 고귀한 존재를 뜻했으니까.

“아아, 조…!”

나는 조를 끌어안고 눈물 흘렸다. 그렇게 남루한 거지꼴을 하고 있던 이 아이는 황족이었던 것이다. 어미가 거지꼴로 살아가며 자취를 숨겨야 했던 원인. 이 아이는 그 원인이었다.

“내보내면 안돼요! 황실에서 알면 큰일이 날 거예요!”

“숨겨주었다가 들키면 우리도 큰일이 난다, 리안.”

아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 아이 염색을 했군. 황실은 대대로 붉은 머리다. 머리 뿌리가 올라오고 있어.”

“어, 어머니가 아프신 몸으로 나가 번 돈으로 제 머리 염색약을 사셨어요. 굶어서 죽더라도 머리는 감추어야 한다고….”

아아…!

“이건, 반역이야. 내보내야 한다.”

“안돼요!”

나는 조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절대, 절대 안 되요, 아이든! 제발요! 이 아이까지 죽고 말 거예요!”

“그게 그 아이 운명인 거겠지.”

“아이든!”

운명이라니! 하! 운명이라니!

“당신은 누구보다 운명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도 이미 오래전 죽었어야 할 운명이에요! 이렇게 숨 쉬고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라구요!”

“릴리아나.”

아이든이 무서운 눈을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당신은 황실을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나도 황실이 두렵지 않아요! 이 아이를 위해서 신성력이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할 거예요!”

“릴리아나! 그 입!”

흠칫.

“하. 그 입 다물어.”

아이든이 짓씹듯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려 내 품에서 덜덜 떨고 있는 조를 바라보았다.

가엾은 것. 불쌍한 것.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 그렇게 거리에 내몰려야 했을까? 단지 황실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한 욕심쟁이 때문에!

“제, 제가 나갈게요. 어머니를 돌봐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마님.”

“조! 내게 마님이라고 하면 안 된다!”

“마님….”

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진 눈이 텅 비어 보여 마음이 쓰라렸다.

“누구에게도 쉽게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면 길거리에 나가자마자 죽는다, 릴리아나.”

“아이든!”

“하….”

아이든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간절한 눈으로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부탁이에요. 이 아이를 거둘 수 있게 해줘요. 제발요.”

“어쩔 셈이지? 거두면?”

“방법을 함께 찾으면 되잖아요.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 날 구멍은 있다고 했어요. 아이든은 황태자 전하와도 친하고 잘하면 오해가 풀릴 수도….”

“애초에 이건 오해가 아니야, 리안. 황실의 일은 황실에서 해결할 문제다. 그들의 일에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수 없어. 황제가 제 핏줄을 치겠다면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신하다.”

“직언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신하예요!”

“릴리아나!”

“제발… 제발요… 이 아이가 길거리에 나가 죽어버리면 저 역시 살 수 없을 거예요.”

“왜! 그 아이와 그대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까지!”

“나 같아서요!”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나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고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미움받고 있잖아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하잖아요!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닌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든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릴리아나….”

떨려오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이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이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호소했다.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살아가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아이든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지?”

아이든이 물었다.

조에게 편지를 건네자, 조가 종이를 펼쳐 글씨를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었다.

“너만 두고 가 미안하구나. 끝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를 이 고통에 밀어 넣은 어미를 용서치 말거라. 내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죄스럽다. 행복해지라고 말할 수 없어 죄스럽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해보고 싶구나. 행복해지거라, 아들아. 로건 피츠로이. 행복해져야 한다.”

마지막 이름을 읽어내고 조는 편지를 가슴에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로건 피츠로이.”

나는 덩달아 눈물 흘리며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하… 행복해지라고…? 이제 와서…?”

아이든이 경멸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는 아프게 울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부모란 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아이든이 아버지의 유서와 편지를 읽는 장면을 꿈으로 꾸었던 적이 있었다. 지극히 단편적인 장면이어서였는지 열은 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든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당신을 이해해요.”

아이든이 나를 꽉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아이든의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이든….”

“…하….”

아이든은 깊은숨을 내쉬고는 내 목에 짧게 입 맞추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여자야.”

아이든이 나를 놓아주고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못 당하겠군. 정말….”

“아이든….”

“로건 피츠로이. 오늘부터 그 이름은 버린다. 새로 이름을 받고 처우가 정해질 때까지 저택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서는 안 된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마를 땅에 박으며 연신 감사합니다를 외쳐댔다. 나는 아이든의 입술에 입 맞추고 그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이든! 사랑해요!”

“하… 사랑받으려면 군말 없이 말이나 잘 들으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런 거 아니에요!”

아이든이 내 허리를 끌어안고 사용인들에게 지시했다.

“아이의 어미는 조용히 묻어주고 장례는 생략한다. 소문이 돌면 난처해진다. 조는 따로 찾아가도 좋아. 대신 머리 염색은 다시 하고 호위를 붙인다. 소문 돌지 않게 조용히들 움직여.”

“예, 주인님!”

사용인들이 작게 대답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남자 하인들은 관을 옮기고 하녀들이 조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텅 빈 방을 바라보며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든이 제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방으로 돌아가자.”

“오늘 할 일이 많고 바쁘다고 했잖아요.”

“그럼 집무실로 갈까?”

“내가 있으면 방해되지 않겠어요? 칼이 불편해할 거예요.”

“아. 칼… 그렇군. 칼 말이지. 그러고 보니 다시 생각이 나는군 그래. 오히려 칼은 그대를 보면 아주 반가워하지 않겠어?”

나는 놀란 눈으로 아이든을 돌아보았다.

“둘이 아주 친밀해 보이던데.”

“네…? 무슨….”

“정원에 앉아서 히히덕거렸잖아, 둘이서. 아주 다정하게.”

흠칫.

그날의 일은 잘 풀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칼 폴쳐. 남의 여자한테 눈부시게도 웃던데.”

“아… 오해예요, 아이든.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저희…?”

아이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갑자기 내 부관이 아주 빨리 보고 싶어지는군.”

“아, 아이든…! 그런 게 아니라…!”

“됐어, 릴리아나. 자초지종은 그 새끼한테 듣도록 하지.”

아아, 안 돼! 어쩌지?! 이건 정말 민폐잖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이든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부리나케 달려가 아이든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 하는 거지 지금?”

“아, 아이든! 그런 게 아니라!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그대랑은 할 말 없는데.”

“친구! 친구예요! 그냥 벗이라구요!”

아이든이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게도 벗이 되어 주겠다 했었지.”

아아! 내가 왜 그랬을까!

“비켜.”

차갑게 뱉어낸 말에 울상이 된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진심으로 화가 난 목소리에 흠칫해 화들짝 놀랐다.

“네?”

아이든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내 입을 노려보았다.

“입술. 그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아…! 미안해요!”

나는 어쩔 줄 몰라 손으로 입술을 비볐다.

“피는 안 났어요!”

“…! 릴리아나. 그만.”

아이든이 두 눈을 꼭 감고 화를 눌러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망설이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아이든에게로 돌진해 그를 끌어안았다.

허리에 매달리다시피 끌어안은 채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

“화내지 말아요. 내가 누굴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잖아요.”

“…누굴 사랑하는데.”

“사랑해요. 나한텐 당신뿐이에요.”

“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화를 풀지 않으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게 갑자기 차갑게 구는 그의 모습에 당황스럽고 불안했다. 다시 내게 쌀쌀맞게 굴던 때로 그가 돌아가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이든 외에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용서해 줘요. 잘못했어요. 화내지 말아요. 차갑게 굴지 말아요. 제발요.”

“…고개 들어.”

“아이든… 제발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릴리아나.”

왜… 왜 그렇게 불러요? 왜 리안이라고 부르지 않아?

내가 그를 이름이 아닌 공작님이라 불렀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다 내 잘못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리안이라고 불러주면 안돼요?”

울먹이면서 말하자 아이든이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내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들어 올려 갑작스럽게 키스해왔다. 순식간에 밀려들어 온 말캉하고 따뜻한 혀의 감촉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숨을 쉴 수 없어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매달리자 그가 나를 급하게 안아 들었다.

“아이든…?”

“그러게 그만 하라고 했잖아. 그쯤 했으면 됐는데. 젠장.”

“네…?”

“오늘 정말 할 일 많은데.”

“화… 풀린 거예요…?”

“화는 진작에 풀렸어, 리안.”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언제…?”

“그대가 입술을 손으로 비볐을 때…? 젠장 키스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그, 그럼 난… 난 대체 뭐한 거야…?

“그리고 그대가 먼저 내 품에 안겨 얼굴을 비볐을 땐…! 하… 이곳이 복도인 걸 감사히 여겨, 리안.”

아아…!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아!

“내 이성을 끊어버린 건 그대야.”

“아, 아이든. 이건 아닌 거 같아요. 내려 줘요! 제발요!”

아니 왜 시도 때도 없이…! 나는 그냥 화를 풀어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미 늦었어.”

아이든이 어느새 도착했는지 침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닫고서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내 내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이미 한참 늦었어, 리안.”

***

조는 어미의 무덤을 찾아 혼자서 약소한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그리곤 내게 찾아와 말릴 때까지 절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참 착하고 곧게 자란 아이였다.

그렇게 또 하루하루 평범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흘러갔다.

아이든이 내게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아카데미에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귀족으로서 제대로 배움의 길을 걷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보상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틀이 더 지났을 때, 아이의 이름은 아슬란 딜리아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우리의 첫아들이 된 셈이었다. 아이든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었을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부모에 대한 지우지 못할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이 아이는 갖고 싶어하지 않았다.

좋은 부모가 되어 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그를 안아주는 것을 택했었다.

트라우마는 쉽게 뚝딱하고 치료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더욱 고마웠다.

“당신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너무 고마워요, 아이든.”

아이든이 내 이마에 입 맞추며 미소 지었다.

“입학원서를 넣었어. 한 달 뒤면 아카데미로 가야 해.”

“아이를 보러 가고 싶어요.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내가 아이든의 손을 잡아끌자 그가 웃으면서 내게 끌려와 주었다.

아슬란이 사용하고 있는 방으로 가니 문 앞에 호위 기사가 한 명 서 있었다.

아이든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배정한 윈터경이었다.

“반가워요, 윈터 경. 아이는 뭘 하고 있나요?”

“예, 부인. 엄청난 양의 책을 들고 들어가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어미를 잃은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 억지로 노력하는 걸까?

그냥 책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면 좋겠는데.

방문을 노크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며 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와 아이든을 올려다 본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가도 되겠니?”

“네! 그럼요!”

나는 아이든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윈터경의 말대로 방 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놀란 듯 방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빨개진 얼굴로 책을 부리나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제가 이러려고 한 게 아니라…!”

“아가.”

내 부름에 아이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긴 네 방이니 어떻게 쓰든 네 마음이란다. 우리 때문에 노력할 필요는 없어.”

“마, 마님….”

“네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왔단다.”

“좋은 소식이요…?”

“그래.”

나는 미소 지으며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며칠 새 저택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양껏 먹은 아이는 전보다 살이 조금 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너는 오늘부터 아슬란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었단다.”

아이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슬란….”

“마음에 드니?”

내 질문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요.”

“그래. 나도 네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어.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 오늘부터 너는 딜리아 성을 받게 되었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아이의 커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아슬란 딜리아….”

중얼거리는 아이의 눈에 매달린 눈물이 마음이 아파 품에 꼭 안아주었다.

“어미를 잃은 슬픔은 그렇게 빨리 털어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어. 네게 그런 걸 바라지 않아. 또한 내게 어미라고 말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네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 고통을 이겨 내기를 바랄 뿐이야.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일어서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다. 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거야.”

아이를 품에서 놔주었다. 아슬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소매를 들어 눈을 벅벅 닦아낸 아이가 나와 눈을 맞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의 죽음은 이미 수없이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해 왔던 일이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게요. 최선을 다할게요. 언제나 최고가 되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머니라는 말에 커다래진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번에 내게 어머니라 불러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아슬란은 아이든을 향해서도 꾸벅 인사하고 말했다.

“최고가 될게요. 아버지.”

아이든 역시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는 더 강인한 심장을 지닌 것일지도 몰랐다.

이 작은 아이가 이겨 내기에는 너무 큰 슬픔이리라 여겼는데….

아이는 자신을 거두어 준 우리를 위해 그 마음을 벌써 제 속으로 집어삼키고 스스로 일어서고 있었다.

너무나 강한 아이였다.

나는 그래서 더욱 슬퍼졌다.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어 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든이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최고가 되라고 한 적 없다. 행복해지거라. 그것이면 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학대 속에서 커왔다.

최고라는 단어는 그에게 고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단어 또한 그랬다.

그에게 최고와 행복이라는 섞일 수 없는 단어는 고통의 무게가 실린 어렵고도 어려운 말이었다.

아슬란은 아이든의 말을 듣고 무너져 내렸다.

아이는 더 이상 닦을 재간이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으흑흑…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연민의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든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고 일으켜 주었다.

“그만 울 거라. 부인이 몸이 약해 이 이상 울면 안 된다.”

아이든의 말에 아슬란이 소매로 또다시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고서 입술을 사리 물었다.

“울지 않을게요. 저는 괜찮아요.”

“한 달 후에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될 거다. 그전까지 가정교사를 붙여주마.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은 익혀두어야 하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 딜리아는 이름만으로 이미 최고의 위치에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아슬란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아이든이 아이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었다.

“딜리아는 누구에게도 쉽게 고개 숙이지 않는 법이다.”

아이든의 말에 아슬란이 놀란 눈을 들어 아이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를 뒤로하고 망설임없이 돌아선 아이든이 나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 약 먹을 시간이 거의 다 된 거 같은데. 갈까, 리안?”

“네. 그래요.”

나는 아이를 향해 싱긋 미소 지어주었다.

아슬란은 여전히 아이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상을 바라보는 표정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든의 손에 순순히 이끌려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기분이 들었다.

***

다음 날,

나는 리제가 가져다준 약을 먹으면서 기겁을 했다.

어째서인지 전에 먹던 것보다 더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서리가 쳐졌다.

“으으. 정말 너무 맛없어!”

리제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내게 캔디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은 주방장 아저씨한테 캔디도 얻어왔어요. 아주 달고 맛있을 거예요.”

“리제… 정말 너밖에 없다.”

캔디를 입에 쏙 넣으면서 감동 어린 표정으로 말해주니 리제가 양 볼을 감싸고 웃었다.

“마님도 참. 주인님이 들으시면 기함하실 말씀을.”

“이미 들었어.”

흠칫. 조금 놀란 나와는 다르게 리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부리나케 인사하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문간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일하러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정말 너밖에 없어?”

“아하하… 고마움의 표시였어요. 아시잖아요.”

“흠.”

아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 나는 부리나케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놓고 간 게 있어서.”

“제가 찾아 드릴게요.”

내가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아이든이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이미 찾았는데.”

“네?”

아이든을 다시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말했다.

“물건이라고 말 한 적 없어.”

“그게 무슨… 앗!”

아이든이 내 손을 잡아끌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끌려 가면서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왜 이래요? 어디 가는데요?”

뒤를 돌아보자 에릭이 무감한 표정으로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며 나머지 손으로 아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걸음이 너무 빨라요!”

아이든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내게 걸음을 맞춰 주었다.

“습관적으로. 미안.”

“어디 가는지 알려 주셔야죠!”

“집무실. 그대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 소리 지르지 말고 조용히 가. 지금 우리는 저택에 없는 거니까.”

“네?! 이건 또 무슨…!”

“쉿—.”

입을 다물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집무실에 도착하니 칼 부관이 난처한 얼굴로 손님용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든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에릭에게 말했다.

“너도 따라 들어와.”

“예, 각하.”

내가 칼의 맞은편에 앉고 에릭이 내 뒤에 서고, 아이든이 상석에 앉았을 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칼튼이 들어왔다.

“분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주인님.”

“그래. 돌아가던가?”

칼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자리를 피고 앉을 태세입니다.”

“흠.”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칼이 근심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대로면 새 도련님께서도 아카데미에 가시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슬란이 왜요?”

내가 놀라서 묻자 아이든이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문이 났어, 리안.”

“네? 소문이라니요?”

“마님께서 아슬란 님과 모친을 거두신 것을 본 사람들이 그날 많았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아슬란 님께서 양자가 되신 것까지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저택 밖에 각자 어려운 사정을 가진 이들이 찾아와 우리도 거두어 달라, 보살펴 달라 청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 거지 아이만 특별 취급을 해주느냐고 소리 지르면서요.”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제겐 그 소리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거죠?”

“저택 외벽에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 리안.”

“평소엔 잘 쓰지 않습니다만, 원하면 언제든지 가동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공기중에 유입되는 소리를 차단해줍니다.”

나는 집무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 않았다.

“아슬란이 그 소리를 듣지는 못했겠군요. 다행이에요.”

“그 아이 때문에 버튼을 누른 거야.”

거지라니.

아슬란은 황족의 핏줄 임에도 이날까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온 것이었다.

처음 만났던 아슬란과 그 어미는 행색이 정말 남루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부쩍 살이 오른 아슬란은 귀티가 제법 났지만 처음 모습은 정말 그런 오해를 하고도 남을 몰골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대놓고 소리 지으며 사람을 모욕하다니.

“리안.”

나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슬란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했던 말 기억해?”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각하께서는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미리 예측하셨을 겁니다, 부인.”

칼의 조심스러운 첨언에 나는 말없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어려운 사람을 도울 마음 없이 그냥 지나치려고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 손을 잡았던 그에게 놓으라며 화까지 냈었는데.

또다시 나는 어리숙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을 맞닥트리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나 혼자만이 끌어안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돕겠다고 결정할 때에는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후폭풍까지 계산하고 그걸 감수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거야, 리안.”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뒷일까지 계산해서 결정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나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늘 좀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

“미안해요… 나는 이렇게 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 어리숙함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입었어요.”

염치가 없어 고개를 숙여 내 무릎 위에 힘없이 올려진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를 잡았던 아이든의 손을 뿌리쳐선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들을 외면했다면 나는 그날 온종일 그들을 머리에서 지우고 아이든과 행복할 수 있었을까?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더욱 모두에게 미안해졌다.

“고개 들어, 리안.”

“미안해요, 정말….”

“고개 들어. 앞으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대비해서 한 말이었어. 과거가 아니라.”

고개를 들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거나 무표정할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짐작과는 다르게 아이든은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든….”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를 다그치거나 혼을 내었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건 명백한 나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까.

“그대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했을 거잖아. 그렇지?”

“…미안해요….”

“리안. 그대는 딜리아야. 딜리아는 아무에게나 고개 숙이지도 사과하지도 않아.”

“여기 있는 분들은 아무나가 아닌걸요.”

아이든의 숨소리 섞인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옅게 흩어졌다.

“내가 그대를 택했고, 그걸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내 몫이야. 그러니 미안해할 것 없어. 그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놔 준 건 나였으니까.”

“왜… 왜 그랬어요? 더 말리실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아는 릴리아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이든….”

아이든은 다시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내 뒤에 서 있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넌 당분간 리안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마. 옷 갈아입고 씻을 때 빼곤 늘 같이 있으라는 소리야. 리안은 지금 위험한 위협을 받고 있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들 중에 그들이 섞여 있지 않다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에릭의 대답을 들은 아이든이 칼을 바라보았다.

“황궁에 일 처리 안 된 문건이 얼마나 되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최대한 처리하고 계시지만 각하의 동의가 필요하고 조언을 얻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아이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분간 황궁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리안. 빠져나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저택 문 절대 열지 말고 산책도 하지 마.”

그의 말을 들으면서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이 미안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렇게까지 저들을 밀어내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아이든.”

“무엇이 말이지?”

“저들의 사연을 들어보고 필요하다면 몇 명쯤 추려내서 좀 도와주면 저택 내정에 금이 가나요?”

“뭐라고? 그대 내가 아까 한 말을….”

“알고 있어요, 아이든. 그런데 지금 아이든의 평판이 제국에서 그렇게 썩 좋지 못하잖아요. 이번 일을 통해 평판을 좀 바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아이든이 그런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는 것이 싫어요.”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딜리아 공작가문에서 후원할 자를 모집한다고 하면 어떨까요? 사정이 딱한 아이들 중 몇을 골라 아슬란과 같이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한다면요? 그게 아니라면 기술이라도 배울 수 있게 도와준다면 좋을 것 같아요. 저들은 대를 이어 내려온 가난에 무엇도 배울 수 없는 자들이잖아요. 생계를 이어갈 수단이 없는 자들은 하루하루 동냥질을 하는 것이 최선일 거예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공작님은 적어도 이 제도 내에서는 평판이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 말을 들은 칼튼이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마님의 말씀이 아주 틀리지는 않아 보입니다, 주인님.”

“제가 들어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요. 저 많은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원성을 잠재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걸 보여주면 말이지요. 물론 이제껏 각하께서 유지해왔던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나는 간절한 시선을 아이든에게로 던졌다.

칼의 말처럼 그는 이제껏 가난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대가라고 생각해 온 것 같았다.

내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으니까.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회귀 전 삶에서 빌과 결혼하기 전에 리제와 자주 시내에 나갈 때면 그렇게 어려운 자들을 자주 마주치곤 했었다.

우리 가문이 그렇게 부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을 쉽게 지나칠 수 없어 몇을 도와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곤 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발자국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애초에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발선부터 다른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자리일 것이고, 살아갈 수단이나 기술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은 무엇으로 생을 연장해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냥 사람의 모습을 한 짐승의 삶을 살 뿐이었다.

아이든이 나와 시선을 맞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마음이 너무 여려서 탈이야.”

“아이든은 너무 강직해서 탈이고요.”

“솔직히 내 평판이 어떻든 나는 신경 쓰지 않아. 내내 그렇게 살아왔고 불편함도 없었으니까.”

아이든은 칼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자를 정해서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면으로 서류 작성해서 올리도록 해. 선별 작업은 나와 리안이 할 테니. 황궁에 가는 건 칼 폴쳐. 그대가 대신하도록 하고. 그렇다면 이제 누가 아슬란이 아들이 된 사실을 퍼트렸는가에 대한 이야기만 남았군.”

나는 어두워진 얼굴로 진중하게 고민하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저택 내에 소문을 퍼트린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예.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아슬란 도련님을 알고 있는 자는 저택 내부인밖에 없으니까요.”

“랜디라는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내 질문에 칼튼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5일 전 겨우 지방 귀족가에 일자리를 찾아주어 저택을 나갔습니다, 마님. 명하신 대로 일처리를 다 해주기도 했고요.”

“그랬군요.”

“범인을 색출해 낼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아이든이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하는 듯하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소문이 될 만한 걸 퍼트리고 역으로 잡는 수밖에.”

“그런 게 뭐가 있을까요?”

아이든이 나를 바라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할까? 그대와 이혼을 할 위기라고 할까? 뭐가 좋겠어, 리안? 한바탕 싸워야겠는데?”

나는 놀란 눈으로 아이든을 바라보다가 칼과 칼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주 재밌는 의견을 들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나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고요? 정말 그렇게 소문을 내실 거예요?”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 이만큼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소문이 있나? 잘하면 사용인들을 대거 색출해 낼 수도 있겠군그래.”

“어떻게요?”

“나는 앞으로 절대 그대랑 헤어질 생각이 없는데. 소문만 듣고 그대에게 막대하거나 태도가 변하는 이들이 있다면 다 잘라낼 거야. 이 저택에서 살아남으려면 조심성과 비밀유지, 눈치를 두루 갖추어야지.”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나는 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든이 내 모습을 보고 숨소리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리안. 지금 이러면 안 돼. 너무 사랑스럽잖아.”

으아! 그런 말을 이렇게 사람들 있는 데서!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칼과 눈이 딱 마주쳐서 화들짝 놀랐다.

칼이 어느 때보다 안심한 듯 다정한 미소를 짓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나를 염려하던 그가 생각나 민망해졌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럼 소문을 내보죠. 아예 아이든이 바람을 피우다가 걸려서 싸우다가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간 것으로 하면 완벽하겠어요.”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곤 칼튼과 칼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가봐, 다들. 일 봐.”

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칼튼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실 안에는 나와 에릭, 아이든만이 남게 되었다.

“그대는 왜 안 가?”

아이든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아이든. 제 의견을 수렴해 주셔서요.”

내 말에 아이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했잖아. 그대가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그냥 하면 된다고. 나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거야, 릴리아나.”

잊고 있었다.

그가 그런 약속을 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사실 그 약속은 사랑 없는 결혼이라는 전제가 깔렸던 약속이었다.

이제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정말 고마워요.”

그 어떤 것에도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내 의견을 수렴해 주는 그에게 고마웠다.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도 내게 꾸지람 한번 하지 않고 웃어준 것에도.

어쩌면 그는 원래가 딱딱하고 무서운 성격이 아니라 이런 성격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너무나 정적이 많은 삶을 살아온 그가 환경에 맞춰 성격이 변화되어 온 것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내가 그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간질거렸다.

“그만 가서 쉬어. 아니면 아슬란에게 가보아도 좋고. 무리만 하지 마, 리안.”

“알겠어요. 그럼 일 봐요. 가볼게요.”

나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을 빠져나오는데 뒤에서 에릭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정말 씻을 때, 옷 갈아입을 때, 화장실 갈 때 빼곤 붙어있을 거예요?”

“저는 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고마워요, 에릭.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든든하고 크게 안심이 된답니다.”

내 말에 에릭의 발걸음이 멎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리둥절해져서 나 역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에릭이 화등잔만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처음입니다.”

“네?”

“부인께서는 항상… 돌아가라, 그만 쉬어라, 서 있지 말아라, 떨어져서 걸어도 된다. 그런 말씀뿐이셔서… 제가 필요치 않으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놀라서 에릭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섭섭하게 들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에릭에게는 그게 그런 뜻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에릭. 나는 실력이 출중한 그대가 내 곁에 있어서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나는 지금 누구보다 그대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정말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에릭이 내게 고개를 숙이곤 강한 의지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대를 믿고 있어요.”

- 3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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