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9)

19. 환각, 그 이상의 공포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당연히 아이든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잠시 쓸쓸한 감각을 느꼈지만,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배가 고프니 다이닝 룸에 내려가 먹을 게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감각만으로 단화를 찾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까지 걸어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존재만으로 저주입니다.”

흠칫.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고개를 휙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떤 실루엣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 나는 밭은 숨을 내쉬며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딨는 거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우리는 매일같이 당신을 저주합니다. 불행해지기를. 끝내는 죽기를.”

음산한 기운이 내 몸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방 등을 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두려움에 몸이 벌벌 떨렸다. 한기마저 들어 힘겹게 두 팔 움직여 몸을 감싸 안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그럴 건데…?

단지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미움받아야 해?

어째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목을 졸라왔다.

“으윽… 끅….!”

“당신이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어….”

목소리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하면서 머리를 어지럽혔다.

숨을 쉴 수 없어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음에 감사하시길.”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며 스쳐 가는 바람처럼 아스라이 흩어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목을 졸라오던 것도, 몸을 옭아매던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도 모두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손으로 목을 감싸고 컥컥거리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이것도 주술의 한 종류일까?

마법일까?

아직도 가시지 않은 두려움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일어나서 아이든을 찾아야 해.

뇌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공포에 잠식된 몸은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다.

이런 일을 매일같이 겪으면 미처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리안?”

익숙한 목소리도.

곧 침실 불이 환하게 켜졌다. 내 앞으로 걸어와 자세를 낮추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아이든의 옷 소매 깃을 그러쥐었다.

그의 눈이 떨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 아이든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어…?”

“바, 방금… 방금 이상한….”

“뭐…?”

“이상한 소리가… 저주한다고, 죽기를 바란다고, 누군가 이상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두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 옭아맸을 때, 내 안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목이 졸렸을 땐 공포감에 휩싸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감각을 도통 잊을 수가 없었다.

저들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언제든지…!

“나를 죽이고 말 거예요…!”

본능적인 공포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든이 나를 안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일단 진정해, 리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나는 그를 밀어내고 방을 둘러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름 끼치게도 창문이 틈새를 벌리고 열려 있었다.

“아아… 누군가 왔다 간 게 분명해요. 왔다 간 게 분명해…!”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과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이든 역시 나를 따라 열린 창틈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벌떡 일어난 그가 창문으로 걸어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위아래 양옆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창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이상하군. 분명 창문은 안쪽에서 걸어 잠갔는데.”

“안 믿으시는 거예요? 정말이었어요! 꿈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리안.”

“무언가 있었어요.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누가 나를…!”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호소하는데 그 순간, 눈앞에 비뚤게 웃고 있는 크리스틴이 나타났다.

나는 절망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온몸에 엄습했다.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건 다 환상이야! 가짜야!

크리스틴이 죽으라며 고함질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장미가 조각된 칼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덜덜덜 떨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웅크려 울며 고함질렀다.

“싫어, 저리 가! 저리 가! 아니야! 으허윽!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소리 내어 고함질러 울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든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안! 괜찮아! 나를 봐! 나를 봐!”

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억지로 들어올렸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아이든의 일그러진 얼굴이 들어왔다.

그가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눈물인지 그의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보였다.

“리안,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괜찮아!”

“어흐윽…!”

나는 미쳐버린 것일까?

사실은 아까도 나만 보였던 환상인 것은 아니었을까?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내가 미친 게 분명했다.

아이든이 고통스럽게 두 눈을 꽉 감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리안….”

“으흐흑….”

“내가 있어. 그대 앞에 내가 있잖아. 괜찮아.”

“흐으윽…!”

“괜찮아… 다 괜찮아. 괜찮아.”

그의 마법 같은 주문을 들으면서도 아이든의 등 뒤로 크리스틴이 정말로 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은 내가 끔찍했다.

이젠 어떡하면 좋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내가 그의 곁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이렇게 미쳐버린 내가?

아이든은 오랫동안 나를 품에 안고 내 등을 쓸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울음을 멈추고 진정할 수 있었다.

그가 내 얼굴을 양손에 감싸고 내 입에 입 맞추었다.

“그대에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불안하다는 거 알아. 힘들다는 거 알아. 조금만 견뎌 줘. 내가 해결할 거야. 다 해결할 거야.”

그가 나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내가 다 해결할 거야, 리안.”

“…미안해요… 미안해….”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미쳐버린 거 같아. 나는 아이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나는… 나는 그냥 미치광이가 됐어요.”

그가 나를 놓아주고 짐짓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리안. 그댄 멀쩡해. 그리고 내게 어울리는 게 뭔데? 난 이제 너 못 놔줘.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 말 두 번 다시 하지 마. 정말 화낼 거야.”

또다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아이든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배고프지?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그만 울고 저녁 먹으러 가자. 응?”

내 옷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옅게 미소 지으면서 나를 안아 올렸다.

“아까 일은 내가 조사해 볼 테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마. 또 쓰러지면 안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침실을 나서자마자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뒤늦게 아이든의 품에 안긴 것이 어색하고 민망해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릭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와 아이든을 번갈아 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못본 채 했다.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동안 마주치는 사용인들의 경악에 찬 표정까지 모두가 나를 더욱 낯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다이닝룸까지 나를 안고 들어와 의자에 나를 앉혀 주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와 내 바로 옆에 앉았다.

우리가 착석하자 곧 주방장과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난 가벼운 메뉴로 가져오고 부인은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예. 각하.”

주방장이 돌아가고 하인이 우리 앞에 놓인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아까 잠은 좀 잘 잤어?”

나는 여전히 붉어진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꿈도 꾸지 않았고?”

“네. 정말 잘 자고 일어났어요.”

“그래. 밤엔 잠이 안 오겠군, 이제.”

“그렇겠네요… 여러모로… 다시 자진 않을 걸 그랬나 봐요.”

그랬다면 아까 같은 일도 겪지 않았을 텐데.

“졸릴 때 자 둬야 체력이 비축되지. 잘 한 거야.”

아이든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

“일주일 뒤에 침실을 합칠 거야, 리안.”

“네?!”

나는 너무 놀라 냅킨을 식탁 위에 떨어뜨렸다.

얼른 잽싸게 주워들었지만 아이든이 낮게 웃는 소리가 숨소리에 섞여 들려와 다시 얼굴로 열이 올랐다.

“부부잖아. 싫어?”

그렇게 물으면 어떻게 싫다고 해?

“시, 싫은 건 아니에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와 한 방을 쓰고, 밤에 한 침대에 눕는 게 부끄러워 그렇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다시 가까운 귓가에서 아이든의 숨소리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부끄러워?”

으아, 그렇게 대놓고 묻지 말라구요!

“황궁에서 한 침대에서 잤잖아, 우리. 귀엽네, 리안.”

안 돼! 으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이든의 웃음소리가 꼭 나를 놀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대를 더 가까이에서 지키려는 거야. 내가 없는 동안 방금 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아이든이 다시 진지해진 말투로 이야기하는 동안 하인이 메뉴를 하나 둘 가지고 나와 각자의 앞에 올려 두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샐러드와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이왕이면 다 먹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대는 좀 더 잘 먹어야 해.”

아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서 스테이크 그릇을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가 나 대신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것을 멍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나이프 움직임이 멈추더니 아이든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아이든이 눈꼬리를 휘면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왜, 왜요?”

“침 닦아, 리안.”

아악! 이런, 망할!

새빨개진 얼굴로 냅킨을 들자 아이든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다이닝룸에 울려 퍼졌다.

“농담이었는데.”

수치사 할 것 같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큼지막한 손바닥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었다.

쓸쓸함이 베인 얼굴을 보니 창피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왠지 모르게 나 역시 마음이 슬퍼지고 말았다.

“이렇게 살 수 없는 이유가 있나요?”

아이든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하면서 대답했다.

“글쎄… 우선은 그대가 죽지 않아야겠지.”

맞는 말이었다.

우리에겐 넘어야 할 너무 큰 산이 존재했다.

매일같이 불안에 떨 수밖에 없을 만큼.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실존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적은 늘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끊임없이 내게 또는 그에게 달려들 것이고, 우리는 매 순간 위기를 넘기기에만 급급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모르게 그만 내 곁에 있어주면 안심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에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찾아온 것일까?

데일가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쌀쌀맞고 무섭게 굴었는데.

“아이든. 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어째서 마음이 바뀌셨어요? 제게 쌀쌀맞게 구셨잖아요.”

아이든이 마지막 스테이크를 썰다가 멈칫했다.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내 마음도 덩달아 덜컹 내려앉았다.

“정말로 제가 아파서 그런 건….”

“그런 거 아니야.”

그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스테이크 접시를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리안.”

“네?”

“사제가 그랬잖아. 내 탓이 아니라고. 나는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할 수 있는 날이 다 오는군.”

그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검푸른 눈동자에 내가 선명하게 비춰 보였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닌데.

“이제 필사적으로 그대를 지킬 거야. 그대 없는 삶은 내게 무의미하니까.”

그의 말이 끝나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깊은 늪 같은 눈동자에 마치 내가 갇힌 것만 같다는 착각이 일 때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닌, 떨림에 의한 것이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데도.

나는 감격에 겨워서 차오르는 주책맞은 눈물을 닦아내고 해맑게 웃었다.

“그러니 오늘 이 스테이크는 다 먹어주었으면 좋겠어. 내 성의를 생각해서.”

나는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크로 스테이크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그가 썰어주어서 그런 것인지 오늘따라 스테이크가 더 풍미 있게 느껴졌다.

“너무 맛있어요.”

바보같이 웃으며 말하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식사를 끝마치는 동안 그는 자기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연신 나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내 안이 그의 미소 하나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구름 위로 붕 뜬 마음은 땅으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만큼 행복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모처럼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그와 하는 산책은 처음이었다.

비록 따뜻한 낮에 하는 산책은 아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또 좋았다.

저녁이라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간질거리며 볼을 스칠 때마다 다 올려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럴 때면 아이든이 손을 뻗어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여자들은 참 피곤하겠어. 머리카락이 여간 문제가 아니군.”

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 머리카락에 만족해요, 아이든. 물론 머리색이 달랐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내 마지막 말에 아이든이 잡은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 맞추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참 예쁜 남자였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와 감을 때에 느껴지는 이미지가 너무 달랐다.

이내 입술을 떼고 눈을 뜬 아이든이 나를 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런 말 이제는 하지 마. 그대는 흑발이라 예쁜 거야.”

이 남자는 사실 여자 마음을 흔드는 선수였던 게 아닐까?

진실을 안 후로는 이 머리카락 때문에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염색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만큼.

그런데 그의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갈대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흑발이라서 다행인 건가? 하고.

나 역시 그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아이든이 더 아름다운걸요.”

“남자가 듣기엔 영 거북한 말인데.”

“그럼… 이런 건 어때요? 아이든은 늘 반짝반짝 빛이 나요.”

“내 눈엔 그대가 더 빛나는데.”

“아이든은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근육도 단단해서 아주 멋진걸요.”

“흠… 내가 좀 그렇지. 그런데 내 근육은 또 언제 봤어? 만져 봤나? 안길 때?”

그의 짓궂은 질문에 또 얼굴로 열이 올라 손 부채질을 했다.

“오늘 밤에 원하면 만지게 해 줄 수도 있는데.”

아악! 제발 그만!

부끄러워서 터질 것 같이 빨개진 내 얼굴과는 다르게 아이든은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산책은 길지 않았지만, 저택 안으로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닳도록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며칠간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공작저는 평화로웠고, 우리는 행복했다.

아이든은 여전히 업무를 침실까지 가져와서 했고, 식사도 함께했다.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생각인 듯했다.

며칠 전 겪은 일로 나 역시 그편이 안심되어 더 이상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오늘도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들었는데.

쾅쾅! 쾅쾅! 쾅쾅쾅쾅쾅!

곤히 잘 자고 있다가 들려온 소리에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침실 문이 덜컹거리며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침대에서 내려와 문으로 향했다.

“누, 누구세요?”

“리안!”

익숙한 목소리에 문을 벌컥 열었다.

아이든이 잠옷 차림새 그대로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두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지? 어디 아프다거나, 또 누가 왔다거나!”

나는 당황해서 아이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공포로 얼룩진 두 눈이 내게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저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내 대답과 동시에 아이든이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기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이든?”

“…함께 있어도 될까?”

“그럼요.”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애써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다.”

그를 방으로 이끌고 문을 닫았다.

벽 등을 켜고 아이든을 바라보니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이든은 창문을 다시 걸어 잠그고 내게로 걸어왔다.

내 손을 잡고 이끄는 그를 따라 침대에 앉았다.

“미안해. 놀랐지?”

등 아래에서 보니 그의 얼굴에 불안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조금 놀랐지만 저는 괜찮아요.”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아서….”

아이든이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했다.

“나흘 뒤면 침실을 합칠 거잖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창문 잠금장치가 풀려 있었어. 그대가 열었어?”

“아니요. 저는….”

아이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내가 안 될 것 같아.”

입술을 짓씹으며 말하는 그를 어떻게 안심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나 역시 스스로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아이든….”

“불과 세 시간 전에 내가 잠그고 확인까지 했어. 안쪽에서만 풀 수 있는 거야. 그대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잖아.”

“리제나 마리가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선은 제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걸요.”

“모르는 일이지. 내가 왔잖아, 리안.”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을 겪었을 때에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지금 아이든의 행동으로 인해 나는 확신했다.

그 일은 절대 내가 미쳐서 본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걸.

“마법은 멀리 있는 잠금장치도 풀 수 있는 것일까요?”

아이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국은 오랫동안 신성제국에 협력해 마법사들을 배척해 왔어. 게다가 초대 황제가 집권하던 때부터 마법에 무지한 나라였고. 나 역시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만약 이런 것까지 가능한 것이라면… 그들은 잠재적인 위험인자들이나 마찬가지야.”

하기사 나도 신성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마도 제국민들의 대부분이 마법사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지 않을까?

나로 인해 그들의 위험성이 제국에 알려진다면 그 여파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며칠 전에 찾아왔던 신원 불상의 존재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이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어….]

그는 알까?

내게 저지르는 일들로 인해 그들이 우려하는 일이 실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의 무덤을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창밖에서 안쪽 잠금장치도 풀 수 있다면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어.”

“그럴 수 있겠군요.”

소름이 돋아나 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며칠 전에도 침실 안에선 어떤 실루엣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들려왔던 목소리도, 내 몸과 목을 얽어매던 기분 나쁜 기운도 모두 다 건물 밖에서 행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를 죽여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째서 한 번에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경고하듯 겁만 주고 끝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침실 리모델링 공사 맡기려던 것부터 중지시키는 게 좋겠어. 외부 사람을 들여와 공사하려던 것이니 그들이라면 벌써 그대 방이 바뀌려는 걸 알 거야.”

“그, 그 정도일까요…?”

“그래. 그러니 침실은 내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하자. 아마도 당분간은 그들도 그대가 어느 방에 묵고 있는지 모를 테고 뒤늦게 알아도 내 침실까지 들어와 어쩌지는 못할 거야.”

“알겠어요.”

아이든이 나를 품에 부드럽게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어. 쉽진 않겠지만 해낼 거야. 나를 믿어.”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나를 바라보던 아이든의 눈빛이 꼭 [나를 믿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었지.

하지만 나의 짐작이었을 뿐인 그때와는 다르다.

지금 그는 내게 눈빛만이 아닌 말로서 내게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차피 그를 처음부터 신뢰했다.

어째서였을까? 그는 소문이 무척 험악한 남자였는데.

[미리 경고하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그에게서 도망쳐.]

[그는 괴물이야. 내가 심심치 않아서 좋은 거랑 그대는 다르지.]

게다가 황태자는 아이든을 빗대어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었다.

나는 무슨 근거로 그를 신뢰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엇으로 내 믿음을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믿어요.”

나는 그냥, 그를 믿었다.

어떠한 이유 따위 없이.

“정말로 믿고 있어요.”

머리 위로 아이든의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더 없는 안정감이 들었다.

***

침실을 옮기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의 침실은 온통 까맣거나 반짝거리는 금빛투성이였다.

불이라도 끄면, 가구 실루엣조차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새카만 어둠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공포 속에 밀어 넣기 십상이었다.

어찌나 무서운지 밤중엔 절대 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런 방에선 오랫동안 있을 수 없다고 투덜거린 결과 사용인들이 내 방의 가구와 아이든 방의 가구를 바꿔주었다.

벽지가 까만색인 것도 맘에 안 들었지만, 그것까지 어떻게 하자고 할 수는 없어 포기했다.

아이든도 가구를 옮기는 데에는 찬성해 주었다.

좀 더 시일이 지나고 내가 비로소 안전 해졌다고 느낄 때쯤, 부부 침실을 새로 리모델링하면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침실을 합친 뒤로 아이든의 안전 불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외출이라도 할 일이 생기면 아이든은 호위를 두 배로 더 늘려 붙였고,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들어와 내가 안전한지 확인해야 안심하고는 했다.

불안증은 날로 더 심해졌다.

매일매일 같은 침실에서 붙어 있음에도, 아이든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결국엔 나를 품에 가두다시피 끌어안고 자는 날이 늘어났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서로의 스킨십 농도도 점점 더 진해져 가더니 결국엔 어젯밤 끝을 보고야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지난밤 기억의 잔상에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이불 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홀딱 벗은 내 몸과 옆의 몸이 시야에 들어와 화들짝 놀라 이불을 목까지 내렸다.

옆에서 쿡쿡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깨, 깨 있었어요?”

“응.”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아이든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잘 잤어, 부인?”

“…네.”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있기가 힘들었다.

“리안.”

“네, 네…?”

아이든의 손이 내 턱을 잡아 순간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꼬리를 예쁘게 휘면서 웃은 아이든이 순식간에 내 입술에 쪽하고 버드 키스를 해왔다.

“부끄러워?”

“네….”

이러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다.

[리안은 벗은 몸도 정말 예쁘네.]

[그 표정도 정말 예뻐.]

따위의 부끄러운 말을 수도 없이 했던 어젯밤 그의 모습이 기억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한 번만… 더 할까?”

그의 이어진 말에 나는 사색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도 무려…!

몇 시에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아이든 오늘 할 일이 무척 많고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건 내일. 오늘은 할 일이 무척 없고 한가해.”

자연스럽게 내 위로 올라온 그가 내 이마에 쪽하고 가벼운 뽀뽀를 했다.

“예뻐. 그대는 어떻게 이렇게 빛이 나지?”

“아이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럽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간질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우는소리를 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요?”

“그러게. 원래 난 그런 놈 아닌데. 이상하지?”

하더니 얼굴을 가린 내 손을 잡아 내리고 웃었다.

“손 올리지 마, 리안. 얼굴이 보고 싶어.”

“항상 보고 있잖아요.”

“지금은 또 다르지.”

아이든이 내 입술에 또다시 버드 키스를 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이러다가 정말 미쳐버리면 어쩌지?”

꾸밈없는 그의 진심이 내 심장을 타고 온몸에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익숙해지지 않는 간질거림에 웃음이 나왔다.

“아직 미치지 않았어요.”

그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릴리아나.”

“사랑해요, 아이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사랑에 목말라 애타게 구걸했는데.

영원히 받아주지 않을 것 같던 그가 한순간에 변해버렸다.

내가 아팠기 때문이 아닐까?

또다시 쓰러질까 봐 그가 내게 맞춰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솔직히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불안한 생각이 나를 잡아먹기에는 그가 나를 정말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을 다루듯 너무나 소중하게 대해주었다.

어젯밤에도 아주 여러 번 나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강압적이거나 거칠지는 않았다.

그와의 관계는 격정적이었지만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이제 그의 삶은 매 순간 내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아주 작정이라도 한 듯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을 내게 쏟아냈다.

나는 마치 데일가에서 꾸었던 꿈에서처럼 행복에 취했다.

입안에서 아스라이 사라지고 마는 구름과자처럼 없어져 버렸던 꿈과는 달랐다.

아이든은 매일매일 같은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며 사랑해 주었다.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너는 사랑받고 있어.

언제까지나 그럴 거야. 아스라이 사라지지 않아.

꼭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 역시 그에게 내 사랑을 온전히 쏟아내 주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이 마음을 그도 느끼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침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구나. 이것이 사랑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기를.

나는 매일매일 간절히 바랐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가 낮게 소리 내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내 눈과, 코, 입술을 쓸어 만졌다.

그러는 동안 내 위에 있는 그의 몸은 언제라도 다시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굴에 또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역시 한 번만 더 하고 싶어. 제발, 리안.”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에 입맞추었다.

“좋아요. 대신 오늘은 나랑 시내 데이트에 나가겠다고 약속해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래 성립.”

***

시내에 나가는 길은 무척 설레었다.

얼마만의 자유로운 외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지난 생까지 합친다면 정말 오랜세월동안 제대로 된 외출을 하지 못한 터였다.

마차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준 그가 내 손을 잡아왔다.

“이리와, 리안.”

순식간에 그에게 이끌려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게 된 나는 창문 밖을 볼 수 없어져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도 귀엽긴 한데, 창밖을 보고 있으면 좋지 않은 것만 볼 거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음이 오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더는 삐진 척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든….”

“그런 표정 하지 마. 그대가 말했던 엄청난 거절감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나는 충만해.”

그가 나를 살포시 끌어안고 말했다.

“그래도….”

“쉿—그만. 그냥 내게 집중해.”

아이든이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감싸고 고개를 낮춰 내게 입 맞추었다.

따듯하고 몰캉한 감각이 입술에 전해지며 살랑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볍게 버드 키스를 한 그가 내 두 눈과 시야를 맞추면서 예쁘게 웃었다.

“기껏 꾸민 화장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그의 작지만 섬세한 배려가 기분이 좋았다.

시내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었다.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나였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므로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맞장구를 쳐주거나 간결하게 대답을 해주는 쪽이었다.

‘똑똑’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 아이든이 창문을 열었다.

“각하. 앞쪽에 소란이 좀 일었습니다.”

우리의 호위 기사로 따라나선 에릭의 말에 아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

나는 아이든의 손을 잡아당기며 내 쪽을 보게 만들었다.

“화내지 말아요. 같이 나가봐요. 내가 궁금해졌어.”

아이든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어린아이 우는 소리와 성인 여성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이든의 손을 잡고 부리나케 마차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부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앞을 보니 행색이 남루한 여인의 앞에 어린아이가 서서 소매로 눈물을 닦아가며 울다가, 나와 아이든을 발견하고 무릎 꿇고 소리쳤다.

“제발 저희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귀족 나으리! 저는 하루 종일 굶어도 괜찮습니다! 이틀을 굶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너무 아파요! 한 끼만 굶어도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제발! 제발 저희 어머니 좀 도와주세요!”

아이가 엉엉 울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발음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나는 놀란 눈으로 아이와 아이 뒤에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아이든이 내 손을 끌어당겼다.

“리안. 우리가 저들을 도울 의무는 없어.”

“하지만! 아이든, 너무 가엾어요!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저 어미가 젊은 날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이거 놔요!”

아이든을 노려보자,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부리나케 아이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

“아가야. 너 이름이 뭐니?”

“저는 이름이 없어요. 그냥 조라고 불러서 조예요.”

“그래. 너는 조구나. 조는 올해 몇 살이지?”

“10살이에요, 마님.”

10살. 고작해야 일곱, 여덟 살이나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작고 메말라 서 있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 아이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시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흑. 매일매일 헛구역질을 하시고 기침을 심하게 하세요. 피를 토할 때도 있어요. 너무너무 무서워요, 마님… 으흐흑…!”

“아가… 뚝. 그만 울 거라. 네가 울면 어머니가 슬퍼하신다.”

내 말에 아이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쁜 아이였다.

기특한 마음이 들면서도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잠시 기다리거라.”

나는 몸을 일으켜 아이든에게로 걸어갔다.

“저들을 저택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아이든?”

아이든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와 어미를 바라보았다. 곧 한숨을 내쉬고 나를 보며 미소 지은 그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이 이렇게 여려서야. 그대 원대로 하도록 해. 딜리아의 가주는 그대이기도 하니까.”

다행이다! 활짝 웃으며 그를 껴안아 주었다.

“고마워요! 정말 사랑해요!”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릭. 저들을 마차에 태워 저택으로 데리고 먼저 돌아가도록. 씻기고 먹이고 진찰받을 수 있도록 집사에게 일러두고.”

“예, 각하.”

에릭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말에서 내린 에릭이 아이와 어미를 마차에 타도록 도왔다.

아이가 마차에 타기 전 땅에 몸을 대고 절하며 울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님! 이 은혜 죽기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들을 태운 마차가 에릭과 함께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내가 아직도 아이든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그에게서 떨어져 어색하게 웃었다.

“이동수단이 사라졌네요.”

“말을 사면 돼. 왜 그렇게 떨어져 있어? 이리 와.”

그에게 다시 다가가자 아이든이 내 손을 잡아왔다.

“어디 가고 싶어?”

“어디라도 좋아요. 시내에 나왔으니 맛있는 것도 먹고, 쇼핑도 하고 싶어요. 아, 꽃도 사면 좋겠어요! 칙칙한 침실에 꽃을 두면 아주 예쁠 것 같아요!”

아이든이 끙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내 침실이 그렇게 별로인가.”

“하루 종일 더 많은 시간을 침실에서 보내는 건 저니까, 제가 원하는 꽃을 둘래요.”

“그래. 그럼 갈까?”

“네!”

나는 신이 나서 대답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여름은 길지 않아서 벌써부터 날씨는 쾌청하고 선선해서 돌아다니기에 무리가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시내 입구에 들어서자 수많은 상가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서로 우리 집에 와달라고 내 눈을 유혹하고 있었다.

시내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분명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부리나케 건물 안으로 숨어든 것이겠지만 아무렴 좋았다.

아이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고, 나도 오늘은 우리만의 데이트에 집중하고 싶었다.

마차가 아닌 두 발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예쁜 액세서리를 파는 상가도 구경하고 귀족들이 출입하는 주얼리샵에도 들렸다.

금줄 사이사이 청호안석이 박힌 팔찌가 눈에 띄었다.

아이든의 머리색과 눈 색을 닮아 마음에 들었다.

아이든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팔찌에 가져다 대자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목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금 그건 뭐죠?”

“사제가 주고 가더군. 신성력이 응축되어 있다고 했어. 보석을 살 때는 주술이 걸리지 않았는지 감정하고 구매하라고 주었는데 혹시나 싶어 챙겨 오길 잘했네.”

나는 신기한 눈으로 아이든의 손에 들린 작고 하얀 돌을 바라보았다.

“그냥 돌일 뿐인데. 신기해요. 만약 주술이 걸려 있다면 어떻게 되나요?”

“신성력과 주술이 충돌해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던데. 이건 그렇지 않은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아.”

“신기해요.”

“그대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신성력을 다룰 수만 있게 되면.”

“전 그게 어떤 느낌인지도 알 수 없는걸요.”

“이왕이면 쓰지 마. 또 쓰러질까 봐 겁나.”

아이든은 내 손등에 입 맞추며 웃어주고는 안쪽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팔찌를 구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곧 값을 치르고 나온 아이든이 내 팔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예뻐. 뭘 차도 그렇겠지만.”

“아이든과 닮았어요. 색깔이요. 그래서 맘에 들어요.”

아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그대를 닮았다 생각했는데.”

“그런가요? 제 눈은 이렇게 어두운색은 아닌걸요.”

아이든이 내 손을 잡고 미소 지었다.

“우리 눈 색이 서로 닮은 걸로 치면 어때.”

나는 배시시 웃었다.

“뭐든 좋아요. 배고파요. 맛있는 걸 먹으러 가요.”

우리는 시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분위기를 내면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는 플라워샵에 들려 화사하고 예쁜 로즈를 샀다.

블루로즈와 화이트로즈가 섞인 꽃다발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수시로 꽃다발에 코를 가져다 대며 향기를 맡았다.

그동안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느라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든은 그런 나를 보며 연신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꽃다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나만 보는 그를 향해 꽃을 내밀었다.

“향을 맡아봐요. 너무 좋아요. 예쁘지 않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내 머리칼을 손에 그러쥐고 향을 맡았다.

“그대가 더 향기롭고 예쁜데 뭘.”

으으. 정말 선수 같은 남자!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품에 넣고 다니고 싶어.”

“아이든….”

새빨개진 내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그만 돌아갈까? 더 오래 있으면 그대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직 몸이 다 회복된 건 아니라고 했잖아.”

“저는 괜찮은데요?”

“내가 괜찮지 않아. 다음에도 같이 나오면 되잖아.”

“정말요?”

“바쁘지 않을 땐 언제든지. 그러니 이제 그만 가자.”

“네. 좋아요.”

아이든이 내 손을 잡고 마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아주 어여쁘게 생긴 흰색 말을 사서 함께 올라타 달렸다.

마부에게 말을 맡기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인사를 해왔다.

“데이트는 즐거우셨습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데이트였어요. 저택으로 보낸 아이와 어미는 어떻게 됐나요?”

“사용인들이 씻기고 먹여 아이는 재웠고 어미는 진찰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의원이 뭐라던가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손을 쓰기엔 늦은 듯싶습니다, 마님.”

아아! 어쩌면 좋아…!

안타까운 마음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는요? 아이에게는 말했나요?”

“아직… 차마 뭐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몰라… 아이는 지금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이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쩌면 좋죠? 어미가 죽고 나면 그 아이가 기댈 곳은 있을까요?”

“흠… 우선 그대는 올라가서 씻고 옷부터 편한 것으로 갈아입는 게 좋겠어.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하기로 하지. 집사, 혹시 오늘 칼이 다녀갔나?”

“잠깐 들리셔서 승인내역서만 두고 가셨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올라가자.”

아이든이 나를 순식간에 들쳐 안아 놀라 소리를 질렀다.

“꺄악! 아이든! 내려줘요!”

“쉿. 잠든 아이가 깨겠어, 리안.”

“하, 하지만…!”

집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잖아요! 민망하고 부끄럽게 이게 무슨…!

“오늘 그대는 너무 많이 걸었어. 저택 계단쯤이야 내가 안고 올라갈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이 정도 걷지도 않고는 못살아요, 아이든…!”

민망한 마음에 속삭이며 따지고 들자 아이든이 숨소리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 얼굴을 숙였다.

“리안. 그렇게 말해도 아마 다 들릴 걸. 저택이 좀 많이 울리잖아.”

으아…! 정말이지…!

얼굴로 열이 올랐다.

“내게 사랑해 달라 말할 땐 이런 건 안중에 없었어? 난 매일같이 안고 다니고 싶을 지경인데.”

아이든은 웃으면서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나를 눕히고 내 위로 올라왔다.

“뭐, 뭐예요?! 씻고 옷 갈아입으라며!”

“응. 그 전에 급한 불부터 끄고.”

“네에?!”

아이든이 내 귀에 대고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종일 참았어.”

“씨, 씻고 올게요!”

“하… 리안. 얌전히.”

“제발…!”

“쉿—.”

아이든이 손가락을 들어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입을 열 수 없어진 내가 울상을 짓자 아이든이 낮게 웃으면서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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