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9)

18. 질투와 오해

[그 대상이 공작님은 더더욱 아니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토록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 한마디에 그는 마치 죽음에서 끌어올려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없어지지 않은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다.

어머니의 환청이 들리는 것.

언제 또다시 그 환청이 자신을 옭아맬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미쳐 버린 걸지도 몰라.

내가 미쳤다는 것을 알면 이 여자는 어떻게 나올까?

나를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절대 그녀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나 지났다.

아이든은 행여나 리안이 또다시 쓰러지거나 아플까 봐 수시로 찾아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식사 때가 되면 그녀의 침실로 가서 식사를 직접 떠먹여 주기도 했다.

물론 부인은 스스로 먹을 수 있다고 기막혀했지만 어쩌랴.

아이든으로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든. 목이 말라요.”

익숙한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아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제법 받아먹는 것에 익숙해진 듯 부려먹기까지.

그는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은 그녀에게 집중하자.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듬뿍 안겨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느껴질 만큼.

아이든은 컵에 물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앉아 있는 릴리아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내 침대 위에 엎었다.

그리고 책을 쥐었던 손에 컵을 쥐어주고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제법이네, 리안.”

웃음소리에 섞여 나온 말에 리안이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러게 내가 자꾸 해주면 버릇된다고 했잖아요. 이젠 나도 몰라요.”

그랬지.

제법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화를 내가면서.

“그 역시 원하는 바라고 했었고. 내가.”

“뭐… 그래놓고 왜 무안을 주고 그러시죠?”

“하….”

아이든은 난처한 듯 손으로 눈가를 가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매는 여전히 호선을 그린 채였다.

“안 그럴게. 물이나 얼른 마셔.”

릴리아나는 아이든을 한번 찌릿 노려봐주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밀었다.

“자요. 가지고 가세요.”

아이든은 기가 차서 헛숨을 뱉어내며 웃었다.

이 여자 갈수록 더 기어오르는군.

아이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아 컵을 내려놓고 서류를 손에 쥐었다.

“피식….”

생각해보니 웃음이 났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책의 제목이 떠오른 탓이었다.

<참된 지식인의 길>이라니.

리안과 퍽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었다.

그는 펜을 들고 서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책을 들려준 하녀는 잘라야겠군.”

“내가 고른거에요! 아니! 그, 그리고 이 책이 뭐 어때서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씩씩대는 꼴이 우스워 킥킥거리며 웃었다.

유쾌했다.

“내게 잘 보이려는 거라면 그쯤이면 됐어. 그대다운 책을 다시 골라오지 그래.”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제발 집무실에 가서 일하세요!”

아이든은 또다시 참지 못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과거의 자신이라면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즐거움, 기쁨, 행복감.

생경한 단어들로 채워진 심장이 기분 좋게 울렁거렸다.

물론 딱 이 때 까지만.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산책을 다녀온다던 그녀가 영 돌아오지 않아 아이든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창가로 다가갔다.

사제는 그녀가 완전하게 회복되는 데에 시일이 꽤 걸릴 것이라고 했다.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창밖을 내려다본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예 정원에 자리를 펴고 앉은 릴리아나는 외간 남자와 한껏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가 막혀 헛숨이 나왔다.

저게 지금 뭐 하는 짓들이지?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집무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바라보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부인의 옆자리에 붙어 앉아 신이 난 칼 폴쳐를.

“하… 죽여버릴까…?”

살의를 담아 칼을 노려보았다.

저 기분 나쁘게 히히덕거리는 꼴이라니!

아이든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기고 성큼성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걷는 내내 웃는 얼굴의 리안이 떠올라 짜증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어제 제게는 내내 짜증만 내던 얼굴이 맞나 싶었다.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웃다니!

다급하게 저택을 빠져나온 아이든은 정원으로 곧장 걸어가 칼 폴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한가한가 보군, 칼 폴쳐.”

칼과 릴리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똑같은 행동패턴에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도둑질하다 걸린 고양이 새끼 같군 그래.”

“가, 각하.”

칼 폴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릴리아나도 덩달아 주섬주섬 일어났다.

“요즘은 산책을 엉덩이 붙이고 하는 모양이지?”

릴리아나를 내려다보며 짓씹듯이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어갔다.

“아이든 그게 무슨…!”

“충분한 산책을 즐긴 것 같으니 이제 아주 건강해지겠군. 그만 침실로 돌아가지 그래. 지금 당장.”

“아이든!”

릴리아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이든은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화가 났구나.

하지만 별 수 없다.

화는 내가 더 많이 났으니까.

“따라와, 칼 폴쳐.”

아이든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으니 곧 칼이 뒤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열심히 해명하려 애쓰는 칼 폴쳐의 책상에 자신의 몫이었던 서류를 뭉텅이로 올려놓았다.

이제 칼의 책상은 팔 하나 올릴 틈 없이 서류 더미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해명 따위 집어치워. 그게 더 의심스러우니까. 그 폼으로 달린 뇌가 이제 쉰만큼 운동할 차례야. 다 끝내기 전엔 집무실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이건 노동력 착….”

“착취라는 말 꺼내려면 입 닥쳐.”

아이든은 칼에게 바짝 다가가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짓씹듯이 말했다.

“네 놈이 처노는 동안 나 역시 착취라는 걸 경험했으니까.”

칼이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아이든의 시선을 피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는 칼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든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편두통이 와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그는 릴리아나의 침실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이유에 대해.

침실 앞에 도착해보니 문틈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한껏 짜증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내가 매일매일 감옥에 갇힌 죄수마냥 저택에만 있어야 해?”

“마님, 일단 진정을 좀….”

아이든은 미간을 찌푸리고 짙은 한숨을 뱉어냈다.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아이든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릴리아나는 아이든을 한번 노려보고 침대에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일어나.”

“싫어요.”

“릴리아나.”

그녀가 확 몸을 일으켜 앉아 아이든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그럼 어떻게 부를까.”

“그걸 왜…! 왜 나한테 물어요!”

“…….”

아이든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리안. 저택에만 있는 게 답답하면 내게 말하면 되잖아. 그대가 나가자고 하면… 내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당신은 항상 서류더미에만 파묻혀 있잖아요!”

아이든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말이 채 귀에 들어가 뇌를 거치기도 전에 그녀의 표정이 먼저 보인 까닭이었다.

“…그대는 오늘도 내게 그런 표정만 짓는군.”

“뭐… 라고요…?”

릴리아나가 놀란 표정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렵게 먹은 마음이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껍질을 깨고 나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고 힘겨웠다.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해 가면서 참아온 나날들은 지옥 같았다.

그녀를 제 곁에서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행복하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사실은 아직 그녀를 지켜야 할 의무가 남아 있었지만….

그건 누가 뭐라 해도 목숨을 다해 해낼 것이라 마음먹었다.

가슴이 턱 막힌 듯 답답해졌다.

적어도 사랑해 달라고 애원했던 그녀였으니까, 그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주리라고 기대했을까?

아니다. 이것 또한 내 탓이다.

어째서 그녀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채지 못했을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어쩌면….

그래. 어쩌면 제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이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것이면 어쩌지?

놓아주어야 하나?

그럴 수나 있을까?

“불행하구나. 그렇지?”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릴리아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이든, 지금…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칼 폴쳐가 좋아지기라도 했어?”

“아이든!”

“이젠 내가… 여기가 지긋지긋해지기라도 한 건가…?”

“나는!”

릴리아나의 고함에 아이든은 흠칫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지긋지긋한 거예요!”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 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내가 아프니까 잘해주는 거잖아요! 내가 또 쓰러질까 봐! 당신은 겁이 나는 거야! 안 그래요?! 당신은 늘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지긋지긋한거라구요!”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아이든은 귀를 거쳐 들어온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해석되지 않아 멍해졌다.

이렇게 바보 같아질 수가 있을까?

어째서 이 여자 앞에서는 뇌가 제구실을 못하는 것 같지?

“…지긋지긋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당신을…! 당신 바보예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이든은 그 순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뒷통수를 가격당한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고장 나버린 것 같기도 했다.

충동적이었다.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한 것은.

입안을 하나도 빠짐없이 헤집으며 그녀를 느끼고 또 느꼈다.

충만함이 가득히 차오름과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몰려왔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질 때쯤 겨우 놓아준 그는 릴리아나와 이마를 맞대고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대가 아파서 그랬던 게 아니야.”

작게 속삭이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 아이든…!”

목소리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그녀의 거친 호흡까지도.

“사랑해. 죽음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대가 이제 와서 싫다고 해도 별수 없어. 나는 원래 이렇게 이기적이고… 그대를 놓아줄 수 없어, 이젠.”

그녀가 와락 품에 안겨왔다.

아이든은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이 다시금 온 몸에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요, 아이든…! 영원히, 영원히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고백했다.

영원.

쉽게 뱉어낼 수 없는 무게감이 실린 단어였다.

아이든은 그제야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리안의 살냄새가 났다.

살 것 같았다.

***

그가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난 후로 우리의 온도는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내게 다정했고, 나는 그것이 너무 행복하고 충만해져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해 답답하다는 마음은 핑계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알게 되자마자 나는 몇 날 며칠을 산책하지 않아도 마냥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했으니까.

나 때문에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칼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든의 마음을 알게 해준 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참 나였다.

데일가에서 돌아온 뒤로는 침실 밖에서 늘 에릭 슈미트가 대기했다.

울프하운드의 몇 없는 실력자인 그가 할 일 없이 서 있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봤지만, 매번 소용없는 일이었다.

식사는 리제가 침실로 가져다주었고, 아이든이 침실로 와서 함께 식사할 때가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내 침실에는 티 테이블보다는 조금 더 사이즈가 있는 탁자가 놓이게 되었다.

리제는 내가 데일가에 갔던 날 마리와 함께 시내에 다녀왔다고 말해주었다.

시내에서 내가 말해 주었던 셔벗을 먹고 행복감에 취했던 이야기,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축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표정만 보고 있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보는 사람마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오늘도 아이든은 내 침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서 일에 집중하는 아이든을 부루퉁하게 바라보았다.

“일은 집무실로 가서 하시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어째서요?”

아이든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그대를 보호해야 하니까…?”

“나는 멀쩡하잖아요.”

“지금은 그렇겠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문밖에 에릭 슈미트가 저렇게 동상처럼 서 있는데 뭐가 문제일까?

불퉁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뭐가 툭 하고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금 무슨 소리였죠?”

아이든이 잠시 천장 쪽을 바라보고 창밖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쥐새끼라도 있는 모양이지.”

“네에?”

말도 안 돼! 쥐라니!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얌전히 있어, 리안.”

“내가 무슨 개예요?! 내 맘대로 할 거예요!”

“그러든지.”

아이든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침실을 나갔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방금 그 소리는 도대체 뭐였을까?

***

아이든과의 행복도 내 답답함을 어쩌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결국 호위를 3명 붙이고 움직인다는 조건으로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일전에 칼과 티타임을 가져서 심술이라도 난 줄 알았지만 아이든은 오로지 내 안전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 뒤로는 두 명이나 나를 졸졸 따라 걸었고, 내 옆에서 에릭이 산책 동무인 듯 아닌 듯 호위해 주었다.

집 안에서만 움직이는데 이게 무슨 못 볼 꼴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든이 너무 강경하게 나와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는 칼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는 황궁에서 일하면서 잠깐, 잠깐 아이든을 만나러 들리곤 했는데 갈수록 얼굴이 수척해져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이든이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넌지시 그를 좀 쉬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정원을 10분 정도 거닐면서 날이 많이 더워졌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오래 걷진 못할 것 같았다.

“부인. 그만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에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요. 날이 정말 덥네요. 에릭은 덥지 않나요?”

긴 소매에 긴 바지로 된 기사 정복만 늘 갖춰 입는 기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민소매로도 이렇게 식은땀이 나고 몸이 허해지는 기분인데.

“부인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그렇습니다. 날은 생각보다 덥지 않습니다. 제국의 여름은 원래 덥지 않지요.”

에릭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 잘 나지 않았다.

“돌아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에릭의 부축을 받아 저택의 침실로 돌아왔다.

에릭과 호위 기사 2명이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침실 문을 닫았다.

나는 침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내내 이 침실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적막하고 고요한 침실 분위기가 참으로 싫었다.

아이든이 이곳에 없기 때문일까?

이젠 혼자서 방에 남겨지는 것조차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걸까?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결혼 전에는 리제와 시내 구경도 자주 나갔다.

저택 안에만 붙어 있으면 어머니 아버지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숨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 수많은 보석과 사치품들이 나를 집어삼켜 버리는 기분이 들었었다.

어쩌면 삿된 주술이 걸렸었다고 하니 정말 나를 집어삼키려던 것일지도 몰랐다.

침대 바로 아래에 주르륵 주저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이마를 기대었다.

커티스 백작가에서의 결혼생활도 다르지 않았지.

친구 없이 버티는 결혼생활은 더더욱 외롭고 고달팠다.

사교 파티에 나갔다가 여자들이 서로를 웃는 얼굴로 헐뜯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함을 했던가.

서로를 칭찬해 주고 감싸주고 사랑해 주어도 모자란 생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수명은 고작해야 100년인데 어째서 서로를 헐뜯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할까?

그래서 다신 사교 파티에도 티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저택 안의 내 방에 반 자의, 반 타의로 갇혀 내 여생은 이렇게 끝나겠구나 생각했었다.

갑갑함 마저 익숙해져 나중엔 그 50평 남짓 한 방 한 개가 내 세계의 전부가 되었다.

이번 생은…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의지 따위로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펐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은 대체 누구를 원망하며 풀어야 할까?

이자벨 디누트를 원망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마법사 무리들을 원망하고 저주해야 하나?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죽음을 끊임없이 바라고 소망하고 기다린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 그들이 너무나 두려웠다.

“리안…?”

익숙한 저음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문 입구에서 놀란 얼굴로 서서 나를 내려보던 아이든이 급히 다가와 내 앞에 몸을 낮추었다.

“어디가 아파? 힘들어? 의원을 불러줄까?”

“아이든….”

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왜… 왜 울어…?왜 그래?”

사정없이 떨려오는 목소리가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만 이 상황이 우울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기대고 싶은 상대마저 내가 어떻게 되어 버릴까 봐 매일같이 불안에 떨었다.

내 불안정한 마음을 그에게 기대도 되는 걸까?

내가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무섭고 두려워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면 어떡해요?”

하지만 그런 고민을 마칠 새 없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쓰나미처럼 내 속의 고통을 그에게 모두 다 쏟아내 버렸다.

그가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 내가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버거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리 내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이든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품에 나를 안아주었다.

내 머리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킬 거야, 내가. 그러니까….”

아이든이 목이 멘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가슴 옷깃을 부들부들 떨리도록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내 머리를 쓸어주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이러니했다.

내가 무너질까 봐, 내가 아파 일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 늘 어쩔 줄 몰라 하는 그가 너무나 의지가 되었다.

나는 오직 그의 품에서만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평안함을 얻었다.

이제 나는 아이든 딜리아 없는 삶은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생에 50평 남짓한 방이 내 세계가 되었듯, 이번 생에선 아이든 딜리아가 나의 세계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엄마 젖을 찾는 아기처럼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말했다.

“절대로 나 버리면 안 돼요. 흐윽.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어째서 그런 불안감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가 나를 버리면 나는 그 즉시 그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숨이 막히도록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왜 그런 말을 해. 이젠 놓아주지 않는다고 했잖아.”

원하던 답을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평안함을 얻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 마, 리안….”

나를 달래는 그의 목소리와 그의 손길에 의지해 울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몸뚱이는 울다 지쳐 잠들지 않으면 버틸 수조차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여린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내 머리를 쓸어주는 다정한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아이든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자도록 해.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깨울게.”

그가 내 이마에 짧게 입 맞추어 주었다.

나는 일어나려는 그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왜?”

그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럽게 들렸다.

“고마워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히 속삭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잠에서 막 깬 목소리가 잠겨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를 만났던 카페테리아 란즈에서 보았던 웃음보다 좀 더 자연스럽고 더 반짝이는 미소였다.

아름다웠다.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질 만큼.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었다.

“좀 더 자. 일만 마무리하고 다시 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족한 듯 미소 짓고 일어나 방을 나갔다.

적막이 휩싸인 방 안에는 다시 나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외롭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평온하게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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