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진실의 서막
다음 날이 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아침을 먹고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일이고 뭐고 기필코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결혼식 날 사제의 알 수 없는 말들에 대해 해명을 요구해야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혼란스럽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를 뵙고 싶었다.
아이든이 나를 거의 반강제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진찰한 의원이 아직 맥이 불안정하고 기력이 회복되지 못하셨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틀이나 집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기필코 내 원을 이루어야 했다.
이러다가 영영 해명은 듣지도 못한 채로 내가 그 일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외출복을 입고 준비를 끝마친 내가 1층 로비로 내려가 집사를 찾으려는데 계단 위에서 익숙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리안.”
그와는 아직 화해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든이 회색 슈트 차림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왔다.
그리고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외출은 당분간 자제하라고 했을 텐데.”
또다시 강압적인 말투에 나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공작님.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갈 권리가 있어요.”
“…….”
그가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함께 가지.”
“네? 제가 어딜 갈 줄 알고 그러세요?”
아이든이 내 말은 무시한 채 내 팔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 저택을 나섰다.
“아아! 아파요! 이 손 놔요!”
내 짜증 섞인 외침에도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집사!”
아이든의 벼락같은 고함소리에 정원 관리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칼튼이 부리나케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님?”
“데일 백작저에 다녀오겠다. 칼 폴쳐가 오거든 집무실에서 대기하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칼튼의 인사를 받으며 그는 여전히 나를 잡아끌고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아악! 아프다니까요!”
기어코 나를 마차까지 잡아끈 아이든은 마차 문을 열고 말했다.
“같이 가. 눈에 안 보이는 데서 쓰러져서 미치게 만들지 말고.”
“무슨…!”
“타, 빨리.”
“아이든!”
“또 잡아끌어야겠어?”
나는 그를 한번 노려봐 주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탄 아이든이 창밖으로 외쳤다.
“출발!”
마부에게 어디로 간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출발만 외치는 그가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그가 내 표정을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팔짱을 끼고 앉아 물었다.
“왜?”
“마부한테 어디 간다 말씀하셨어요?”
“이미 알고 있어.”
“예?”
“이미 알고 있다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가 얄미웠다.
손목이 화끈거리는 게 멍이 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저택에 돌아온 이후로 내게 왜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세요?”
“뭘 말인가?”
“쌀쌀맞게 구시고 강압적이시잖아요.”
“언젠 내 다정함이 싫다며.”
“제가 언제…!”
[공작님의 다정함이 저를 고통스럽게 해요.]
윽…!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내가 한 말이 맞았다.
자꾸 헷갈리게 행동하는 그가 원망스러워서.
“입술 씹지 마.”
“그것도 내 맘대로 못해요?”
그가 내리깐 눈으로 내 입술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그를 한층 부드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겉모습만.
“그렇게 짓씹고 또 피가 나겠지. 전엔 그러자마자 그대가 쓰러졌고.”
“그땐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송장 치우고 싶은 마음 없어, 리안.”
송장…! 하!
“그래서요? 다정함이 싫다고 해서 이러시는 거예요?!”
“…나는 설명할 길이 없고. 그대는 포기를 해야 하고. 방법을 찾는 중이라면.”
“포기 안 해요, 나.”
“리안.”
그가 눌러 참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포기, 안 해요. 나.”
강조하듯 내뱉은 말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군.”
“하… 귀찮다 이거예요, 지금?”
“그래. 귀찮아. 귀찮고 피곤해.”
그가 눈을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차갑게 가라앉은 눈에 내 심장에 또다시 생채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귀찮으시면서 도대체 데일가에 왜 따라가시는데요? 저 혼자도 갈 수 있어요.”
“말했잖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러지지 말라고.”
“그러니까 왜요? 눈에 보이나 안 보이나 송장 치우는 건 똑같을 텐데요?”
으득.
그가 이를 악물고 가는 소리가 들려 흠칫했다.
“릴리아나. 그 입 다물어.”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움찔 몸을 떨면서도 그의 시선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다시는 송장 같은 말 지껄이지 마.”
위압적이고 강압적인 태도.
거친 언사.
그는 원래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대하는 이었던가?
그동안 내가 얼마나 특별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 시리도록 실감이 났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고 아팠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뭘? 처음부터 말했잖아. 나는 네가 필요하고. 네가 뭔지 알아야겠다고.”
[나 역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릴리아나.]
[그래서 알아가려는 거야. 네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인지.]
결혼하자고 말했던 그 날,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나는 여전히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목구멍까지 올라온 물음이 입 밖을 나가지 못했다.
꽉 막힌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주 궁금한 게 많아, 리안.”
그가 비웃음이 명백한 표정을 얼굴에 드리우고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똑똑히 들어 둬. 황궁 연회장도, 신방도 그대가 아주 화려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어. 내가 아니라. 니가.”
마지막 말을 짓씹으며 뱉어내는 그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다고 한 건 나였다.
하지만 성대한 것이 꼭 반짝이고 화려한 걸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터인데.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바라는 대로 모든 걸 맞춰 줬어. 돌아오는 건 빌어먹게도 끔찍한 원망이었지만.”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나를 위한다고 했던 게 되려 내게 비수가 되었다.
나는 한 나라의 차기 황제에게 수치감을 느꼈고 상처받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쩌면 그도 정말 억울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온종일 곱씹으며 화가 났겠다는 생각도.
“이 이상 내게 뭘 맞춰 달라 요구할 수 없다는 거 기억해 둬. 애초에 말했지. 나는 간섭을 아주 싫어한다고. 들어줄 수 없는 요구는 내게 간섭이고 강요야.”
알고 있었다.
[내게 어떤 터치도, 간섭도 하지 마. 난 그런 걸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분명 내게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내가 이 이상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긴커녕 그 근처에 다가가는 것도 이다지도 어렵고 힘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문득 너무 지치고 지나치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한기가 스미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이 이다지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니.
일평생 한 번도 온전하고 조건 따위는 없는 일방적인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래서 더욱이 그 사랑에 목말라 매달리고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집착일까?
사랑만이 나를 나로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닌데.
머리로는 아는 그것이 왜 심장으로는 이다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매 순간 헛된 희망을 품고서 매달리고 지치기를 반복한다.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던 순간에 나는 깨달았다.
회한하며 내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돌아오지 않을 사랑에 목매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다시 그러한 사랑에 목매고 애달파 하고 있었다.
나를 쏘아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 쌀쌀맞게 굴지 말아줘요. 당장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삼켜낸 말들이 속에서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들쑤셨다.
엉망진창으로 들쑤셔진 심장이 너덜너덜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선연한 고통을 끝끝내 나는 모른 체했다.
나로 인해 그가 고통받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를 화나게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억울한 부분도, 할 말도 많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그 정도로 벽을 치고 있었으니까.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말은 그렇게 차갑게 해도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러지는 나를 염려하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모순덩어리였다.
그에게서 벗어나면, 이 들끓는 마음도 좀 평안해질까?
그렇다 해도 내가 그를 잊을 수나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를 벗어나지도,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하고 고개를 돌려 창문을 열었다.
숨이 턱 막혀서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마차 안으로 들어와 나와 그의 사이를 훑고 다시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오늘따라 시내는 고요하고 내 마음처럼 쓸쓸했다.
***
데일가에 멈춰 선 마차에서 내려서자, 전언을 미리 받았던 것인지 부모님께서 나와 계셨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공작부인.”
그에게라면 몰라도 내게마저 깍듯하게 대하는 아버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익숙한 음성이 나를 낯선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내게마저 그러지는 않아도 될 텐데….
“들어가시죠.”
다행인 것이라면, 그가 자신보다 한참 직위가 낮은 내 부모를 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의외의 태도에 나는 또 한 번 놀라움을 삼켰다.
나는 어머니와 가볍게 포옹을 마쳤다.
오랜만에 본 어머니는 보석도 다이아도 없는 심플한 차림새를 하고 계셨다.
공작님을 뵙는 자리에 사치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셨을까?
“잘 지내셨어요?”
“저는 늘 잘 지내지요. 이리 뵈니 좋습니다, 공작부인.”
어머니마저 나를 낯설게 대하니 마음이 간지러웠다.
“어머니… 말씀 낮추세요.”
내 청을 듣고도 어머니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각하.”
부모님의 인도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집이었고, 이 응접실에 주인으로 앉아 있던 사람도 나였는데.
어느새 나는 손님이 되었구나.
출가해서 이제 더 이상은 내가 데일가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 생경한 기분에 어색하게 응접실 소파에 앉자, 아이든도 나를 따라 내 옆에 착석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탁자에는 낯설게 생긴 기다란 컵에 얼음조각과 함께 주홍빛의 차가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북쪽 타하만 지역에서 공수해 온 차랍니다. 더운 여름날에는 이렇게 얼음조각과 함께 마시면 정말 시원하고 맛도 일품이라더군요.”
아….
나는 감탄 섞인 눈으로 얼음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컵에 손을 가져다 대자 손에 기분 좋은 찬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컵을 들어 올려 찰랑이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는 내내 그로 인해 답답했던 마음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결 편해진 속에 놀라 내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그저 상냥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찾아뵌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전서를 통해 드린 바 있습니다. 읽어 보셨습니까?”
안부 따위는 일체 묻지도 않은 채 본론부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이런 걸 두고 내가 그와 닮았다고 했던 건가….
“읽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사뭇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답니다. 언젠가는 딸에게 이야기해주어야 할 날이 오지 싶었긴 했지만….”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어머니와 손을 맞잡았다.
내 손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좋았다.
어머니의 손이 적당히 기분 좋게 찬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외고조할머니께서는 머리가 금발이셨습니다. 그러니 그 태에서 흑발이 태어나리라는 신탁을 쉽게 믿지 못하셨지요. 신성력을 그렇게 소유하고 신성제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의심을 풀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죽기 직전까지도 흑발의 아이를 얻지 못하셨지요. 우리 가문엔 사실 흑발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신탁의 내용이 가보처럼 전해졌지만, 이제껏 가문의 그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믿는 이는 없었어요.”
나는 어머니의 윤이 나는 금발과 아버지의 갈색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흑발은 아니었다.
나는 왜 이날 여태껏 단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당연하게 내가 그들의 친자식임을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명백하게 머리색이 다른데도.
데일가에 오자마자 머리를 들이민 낯설고 이상했던 기분은 그 머리를 더욱 내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릴리아나를 뱃속에 품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참 꿈을 많이 꾸었어요. 꿈속에서는 흑발을 지닌 여자아이가 나타나 제 손을 꼭 잡고 늘 똑같은 말만 반복했지요. 엄마. 릴리아나예요. 엄마. 릴리아나예요.”
팔다리에 소름이 끼쳤다.
어머니는 내 손을 더없이 다정하게 꼭 잡고 쓰다듬으며 내 손등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 흐릿한 표정을 지었다.
“해산 날 아이가 태어나고 품에 내 아이를 안았을 때, 나는 확신했어요. 꿈에 나왔던 그 아이가 내 아이였다는 것을요. 그래서 릴리아나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내 아이가 그 이름을 원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제서야 불현듯 신탁이 떠올랐죠. 내게 더 없는 축복이라 여겼어요. 사랑으로 키우리라 다짐했죠.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내 품에서 고이고이 길러 소중하게 보듬어 주겠다고.”
그런데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지 못했어요?
왜 나보다 그토록 재물에 눈을 돌리고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았어요?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그런 원망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녀는 보석과 재물을 더 사랑했다.
별안간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를 낳고 난 후 꿈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어요. 다시는 꾸지 않았죠. 아이는 사랑스러웠어요. 커갈수록 더욱 그랬죠. 그리고 나는… 또 꿈을 꾸었어요. 아이가 열 살이 될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꿈이었어요.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을 만큼 두려웠죠. 아이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스스로 제 삶을 포기하는….”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내 꿈이 그저 꿈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어요. 그건 절대 그냥 꿈일 수 없었어요. 나는 내 아이를 지켜야 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받을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온갖 부적을 수소문해 끌어모았어요. 처음엔 분명 그랬는데….”
어머니는 회상에서 돌아와 나와 눈을 맞추고 눈물 흘렸다.
내 손을 잡았던 손을 놓고 자신의 눈물을 훔쳐내는 어머니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릴리아나. 내 사죄를 받아주겠니…? 처음의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나날이 부적에 박힌 보석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단다. 그 아름답고 영롱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불안감이 가시고는 하여서… 내가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사치한 것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랬어. 변명이겠지만… 변명 같겠지만….”
아아….
아아….
눈 주변이 뜨끈해졌다.
이를 악물었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어머니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이건 명백한 변명이야!
그동안 나는…!
“나는 그 이후로 신탁을 까맣게 잊고 살았어요. 두 번 다시 그런 꿈도 내게 찾아오지 않았고요. 나도 남편도 릴리아나를 제대로 소중히 여겨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통회하고 있어요. 결혼식 날 사제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 제 안에 무언가가 깨지는 것만 같았어요. 안개 낀 것 같던 머리가 맑아지고 내가 내 딸에게 해왔던 것들이 무슨 짓이었는지 깨달았어요.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어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투두둑.
눈에서 맑은 액체가 흘러나와 치맛자락 위로 수도 없이 추락했다.
나는 부모님으로 인해 끊임없이 결핍된 감정을 사리물며 자랐다.
일찍부터 철이 들어야 했고, 사랑해 달라 소중히 여겨 달라 애원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외로웠다. 그래도 사랑받고 싶었다.
그 재물보다 나를 더 봐달라고, 그 보석보다 나를 더 어여삐 여겨 달라고.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
너무 아파.
미어지는 가슴은 어느 사이 통제하지 못할 통증으로 이어졌다.
아이든에게 사랑받지 못해 아팠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나는 결국 어머니께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의 옷을 그러잡고 상체를 숙였다.
“아아…!”
꽉 막힌 목을 뚫고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도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이러다가 심장이 뒤틀려 죽고 마는 것은 아닐까, 숨이 탁 막혀 질식해 죽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리안!”
내가 고통의 신음을 흘림과 동시에 소파에서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내 몸을 끌어안으며 아이든이 고함을 질렀다.
“안 돼! 정신 차려! 리안!”
귓가에 파고드는 그의 새된 비명이 아득하게 들렸다.
거친 호흡은 이내 끅끅거리는 신음으로 바뀌었고 나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출발할 때 그토록 강조했던 그의 걱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아이든은 내일 데일가를 방문하려고 미리 집사와 마부에게 언질을 주었다.
그들을 만나 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지켜낼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니 리안은 외출복을 차려입고 1층 로비에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안 그래도 화가 나던 게 더 화가 났다.
의원이 외출을 삼가고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원한다고 말하면 언제든지 데일 부부를 불러다 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고 하기만 하면, 젠장.
제가 무슨 수로, 무엇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황궁에서 꾸었던 꿈이 떠오르자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데일저에 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외출은 당분간 자제하라고 했을 텐데.”
위압적으로 뇌까려 보았지만 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강한 악센트로 따지고 들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공작님.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갈 권리가 있어요.”
저 고집불통…!
하… 저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저를 살리려는 것인 줄도 모르고…!
초조한 마음과 별개로 아이든은 실눈을 뜨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리안은 무슨 말을 해도 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면 함께 가야겠다.
여러 번 쓰러지는 것을 겪었으니 대처는 자신이 제일 빠를 것이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를 데일 부부를 떠올리니 분명 함께 가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이 섰다.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살려야 한다.
그녀와 이혼을 해도 좋고, 데일가에 보내도 좋았지만 죽는 것은 안 된다.
그녀 없는 세상에서 저 혼자 숨 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절망감이 차올랐다.
데일가에 내리자마자 아이든은 마부에게 빠르게 귓속말로 명했다.
“의원을 불러.”
데일 부부가 들으면 걱정할 게 뻔하니 아주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들어선 데일가에서 아이든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자신만 꿈을 꾼 것이 아니다.
데일 백작 부인도 자신처럼 딸이 죽는 꿈을 꾸었다.
확실히 그 꿈들은 계시였을까?
그런데 꿈을 꾸는 것은 막을 방도 또한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백작 부인의 말은 이어졌다.
딸을 소중히 여겨 주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말을 듣고서 아이든은 자연스럽게 손에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랑받고 자라 애정에 목마른 자신과는 다르다고.
부모를 잡아먹고 감정을 지우고 살면서 다른 사람의 목숨도 수도 없이 앗아간 자신과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어머니의 잔재에 시달리며 미쳐가는 자신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이 여자는 고귀한 존재라고.
아이든은 이 잠깐의 이야기만 듣고도 그녀가 어떻게 자라 왔을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아파했을지.
얼마나 애정에 목말랐을지.
그것은 이 잠깐의 눈물 몇 방울과 사과 몇 마디에 해결될 수 있는 결핍이 아니었다.
쏟아진 물을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그것 또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일이었다.
다쳐서 생기는 상처는 치료하면 되었다.
그런 상처는 흉터가 남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부모에게서 얻은 상처는, 흉터가 남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중간한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한번 생긴 생채기는 심장에 큰 상흔을 남기고 다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다른 무언가로 덮어놓고 모른 척하는 것일 뿐.
어쩌면 아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다면 세월에 무뎌져 모른 척을 하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은 아니다.
리안은 아직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긴 여자니까.
내가 지켜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그 세월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상처에 다른 무언가를 덮어야 한다면 그것이 나라면 정말 좋을 텐데.
아이든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좀 더 소중히 여겨주고 사랑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해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충만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리안이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이든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를 잡아채는 동시에 소리 질렀다.
“리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녀의 눈이 감기는 것과 동시에 아이든의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안 돼! 정신 차려! 리안!”
희게 질린 얼굴로 새된 비명을 지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실제로 일어나지 않기를, 그토록 바라왔는데!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백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든은 침착해지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정신 차려.
리안은 괜찮을 거야.
잠깐 열이 나다가 말 수도 있어.
데일 부부는 곧 희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리안!”
“의,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아이든은 고개를 가로젓고 데일 백작을 저지했다.
“의원은 불렀습니다. 리안을 눕혀야 합니다. 방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리안을 안아 들고 일어섰다.
데일 부부가 부리나케 앞장서고 아이든이 뒤따랐다.
리안을 결혼 전 쓰던 침실에 눕혀 놓고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순식간이 열이 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물수건이 필요합니다. 열이 나고 있어요.”
아이든의 말에 백작부인이 부리나케 방을 나섰고, 백작은 안절부절을 못하고 방을 돌아다녔다.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은 아이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백작을 돌아보았다.
“정신 사납습니다. 그런다고 리안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니 앉아 계십시오. 의원이 곧 올 겁니다.”
“하지만….”
“결혼 전에는 이렇게 쓰러지거나 열이 난 적이 없었습니까?”
백작은 연신 눈물을 훔쳐 닦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그렇게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걸 처음 봤습니다. 아내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딸아이는 괜찮겠지요?”
아이든은 혀를 차고 이를 아득 물었다.
딸이 그동안 아팠어도 모를 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말로 들렸다.
이 세상에는 부모 자격이 없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을까.
부모가 자식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말은 어쩌면 순 엉터리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어린 자식들은 언제나 부모를 짝사랑한다.
부모가 세상 제일가는 쓰레기 일지라도.
우리들은 이토록 사랑받기를 원했는데….
그래도 리안의 입장은 자신과는 좀 달랐다.
더 이상 사랑해 줄 부모가 이 세상에 없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녀의 부모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리안을 바라보았다.
열로 달뜬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이든은 리안의 손을 꼭 잡고 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이제라도 사랑받으면 돼.
그러니 제발 힘을 내, 리안.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리안은 괜찮을 겁니다….”
자신은 이제까지 모든 걸 너무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그녀를 멀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쓰러지기만 해도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은데 포기가 될 리가 없었다.
이토록 사랑하는데 그 마음을 접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마음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리안? 대신해서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마음을. 나는 도대체 어쩌면 좋지?’
아이든은 고통 섞인 긴 한숨을 내뱉으며 리안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괜찮을 겁니다….”
***
언제쯤 의식이 돌아왔을까?
까마득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곧 정신이 들어 힘겨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희미한 사람 형체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결혼식 날 축복해 주었던 사제를 본 것 같기도 했는데 그것이 꿈인지 환상인지 실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몰려오는 수마에 정신을 잃었다.
꿈을 꾸었다.
걸음마를 배운 어린 날의 내가 되어 어머니와 아버지 손을 잡고 그레이스 축제를 즐겼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반짝거리는 별은 순간순간 피어올라 터지는 크고 작은 불꽃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불꽃이 어찌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구경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신성제국에서만 난다는 과일로 만든 샤베트는 시원하고 달콤해서 입안으로 끝을 모르고 들어갔다.
감기에 걸린다고 제지당하기 전까지 먹고, 먹고 또 먹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했다.
행복했다.
이 꿈에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일주일의 축제 기간 동안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행복에 취했다.
축제가 모두 끝나고 채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내 손을 부여잡고 웃었다.
“리안.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구나.”
나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나는 여기가 좋아요.”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리안… 사랑하는 내 딸. 너는 더 이상 3살이 아니잖니.”
어머니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3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외형이 변해버린 나는 어느새 어머니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는 나를 여전히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어여쁜 내 딸. 여기서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하면 큰일이 난다. 네 세계로 어서 돌아가. 더는 안 돼.”
“어머니, 어머니. 싫어요. 안 갈래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정말이에요.”
울며 애원하는 나를 살포시 안아준 어머니는 이윽고 내게서 떨어져 미소 지었다.
“우리는 정말 너를 사랑해. 정말이야. 사랑한다, 릴리아나.”
나는 곧장 내게서 멀어지는 어머니와 모든 풍경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무언가에 의해 강하게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천장이 나를 반겨주었다.
데일가의 여전히 변함없는 내 방이었다.
내 손에 느껴져 오는 낯선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검푸른 머리칼과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든이 의자에 앉아 내 손을 붙든 채로 침대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는데 아이든의 손을 뿌리쳤다가 그가 깰까 염려스러웠다.
도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달라진 차림새와 흐트러진 머리로 하루는 넘게 지났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나를 위해 아버지께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붙여주신 야광별은 그 세월만큼이나 빛을 바래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마치 그것이 부모님과 내 사이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부모님과의 사이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을 마음에서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을 준비가 되었을까?
내가 아닌 보석을 사랑했다 고백한 어머니를…?
제물에 눈이 멀어 나를 빌에게 팔아넘긴 아버지를…?
나는 그 빌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이를 아득 물었다.
그래. 나는 죽임을 당했다.
재물에 눈이 먼 부모 때문에.
처음 어머니의 고백을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상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았다.
꿈속에서 느꼈던 행복감이 어린 날 어느 시절에 먹어 보았던 구름과자처럼 느껴졌다.
구름과자는 늘 입에 넣자마자 아쉬움을 느낄 새 없이 아스라이 사라져 없어져 버리곤 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느낌을 다시 붙잡고만 싶어서 눈을 감았다.
그러면 다시 그 꿈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리안…?”
귀에 선연히 전해져 오는 익숙한 저음에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시 그 꿈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구나….
절망과 슬픔이 내 안을 가득하게 메웠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리안! 괜찮은 건가? 정신이 들어?”
고개를 옅게 끄덕여 주었다.
아이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보니 그의 얼굴이 전보다 야위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눈 밑이 거뭇한 게 보기에 영 안 되어 보였다.
“나 좀 일으켜 줄래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게 손을 뻗은 그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아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산스럽게 일어나 티 테이블로 간 그가 물병을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내게로 돌아온 그가 내 입가에 컵을 가져다 대 주었다.
“마셔, 리안. 천천히.”
그가 하는 대로 물을 천천히 받아먹고 나니 그가 물의 남은 양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죠?”
한숨을 내쉬며 협탁에 물컵을 내려놓은 그가 힘없이 말했다.
“삼일.”
삼일….
멍하니 읊조리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부모님을 모셔올게. 그대가 깨어났다 알려야지. 그리고… 저택에 사제가 와 있어.”
역시.
내가 잘 못 본 것이 아니었구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가 돌아서 나가는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부모님을 모셔온다고…?
어떤… 어떤 표정으로 뵈어야 하지?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에 뒤흔들리고 있는데 방문이 다시 열리고 아이든과 함께 부모님과 사제가 몰려 들어왔다.
나는 사제와 눈이 마주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부인. 몸은 좀 어떠십니까?”
사제가 대표로 내게 다가오더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물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사제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기도 중이셨을 것인데 여기까지 어떻게….”
“주신의 응답이 없었다면 빠르게 데일가에 도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국을 위한 기도는 다른 사제들이 충분히 해내고 있습니다. 지금 제게는 부인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군요.”
“불편하신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신성력을 쓰겠습니다.”
나는 사제에게서 시선을 돌려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부인.”
“예…?”
고개를 들자, 희미하게 미소 짓는 사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동안 잘 버텨 주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어요. 정말 장하십니다.”
나는 멍하니 사제를 바라보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만약 부군께서 결혼식을 제게 부탁하지 않으셨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정말 끔찍하군요. 큰일이 날 뻔했어요. 아까 부인께서는 맥이 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으셨다고요?”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지나지 않았어요.”
“삿된 주술이 너무 오랫동안 부인의 몸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지금 부인은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한 상태예요. 심장이 너무 약해져 작은 충격에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제가 의식을 잃으신 동안 신성력을 써 드리긴 하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인지라….”
“예…? 주… 술이요…?무슨 말씀이신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제는 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보석이었다.
“데일가에 이런 보석이 아주 많았지요. 이것은 문제가 없는 보석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주 많았지요.”
나는 보석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지 못한 보석이란 건 무슨 뜻이지?
“처음은 부적이었을 겁니다. 부적에 붙어 있던 보석에 삿된 주술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는 없으나 아주 기운이 음산하고 어두운 주술이었어요. 게다가 강력했지요. 어머니의 눈을 멀게 하실 수 있을 만큼이요.”
나는 흔들리는 눈을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죄책감과 후회로 얼룩진 얼굴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계셨다.
“부인.”
사제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왔다.
고개를 내려 사제와 눈을 맞추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백작 부인께서는 주술에 걸려 계셨습니다. 보석을 모으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 시작된 일이셨을 겁니다. 그리고 끌어모은 보석 속에 삿된 주술이 걸린 보석이 아주 많았어요. 그것들로 인해 공작부인께서 작은 충격에도 버티시지 못할 만큼 약한 신체가 되셨구요.”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일까요?”
“예…?”
“잘 모르시겠지만, 부인께서는 강한 신성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제, 제가요?”
나는 당황하여 말을 버벅거렸다.
신성력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걸 지녔다고 해도 한 번도 느껴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그 힘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약하긴 하시지만 분명히 아주 강한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최근 그 힘을 사용하기도 하셨고요. 물론 의지와는 상관이 없으셨겠지만.”
“사제님. 저는 지금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제가 무슨 힘을 사용했다는 것인지….”
“부인.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그 마음에서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동안 살아오셨을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 마음이 부인의 몸에 더 화가 되고 있어요. 알고 계시지요?”
“…….”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주술에 걸려 의지가 없으셨고, 그건 응당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원망은 부모가 아닌 그 주술 걸린 보석으로 향해야 마땅했다.
겨우 물건 따위에게.
여전히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다 가시지 않았는데 그 마음이 향해야 할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용서하지 않는다 한들, 내가 뭘 어쩔 수 있을까?
***
나는 또다시 며칠 전처럼 응접실 소파에 앉아야 했다.
아이든은 옆에 앉아 연신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접실에 둘러앉은 부모님과 나, 아이든을 둘러보고 난 후 사제는 낮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부인께서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이전 결혼식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제는 말을 끊고 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야기 해 주었답니다.”
어머니의 대답에 사제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자벨 디누트는 아주 강한 신성력을 지닌 분이셨고, 부인께서 디누트의 후손이자 그녀의 사명을 이어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이요…?”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사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당시 신성제국은 마법사 탄압에 전력을 쏟아붓던 중이었습니다. 마법사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위해 악신과 결탁하고 혼탁해진 영혼으로 삿된 마법을 쓰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신성제국은 이자벨 황녀님께서 그들을 제압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해줄 구원자 비슷한 것쯤으로 여겼지요.”
구원자.
이 얼마나 한 개인이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단어란 말인가.
사실은 그녀도 나처럼 그저 평범한 한 여성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던 그런 여자.
황녀가 황제 계승권을 버리고 제국으로 건너올 정도라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마법사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정보력이 빠른 자들이에요. 어디에나 존재하니까요. 만약 누군가 공작부인의 신변에 큰 위협이 되는 자가 있다면 부인께서는 어찌 하실 것 같습니까?”
사제의 질문에 나 대신 아이든이 대답했다.
“죽여 없애려 했겠군.”
온몸의 털이 쭈뼛이 서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만약 나처럼 그저 평범한 한 여성일 뿐이었다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생각만으로도 참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양팔을 교차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한기가 들었다.
아이든이 빠르게 재킷을 벗어 내게 걸쳐주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제가 빙긋 웃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맞습니다. 죽여 없애려 했겠지요. 황녀님께서 프세아니아 제국으로 건너오실 때에는 이미 아이를 배고 계셨습니다. 임산부가 감당하기엔 벅찬 두려움이지요.”
“그들이야 아이가 태어나지 않길 바랬을 테고.”
“예. 맞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황녀님도 아기님도 무사하셨지요. 여기에 부인께서 있으신 걸 보면 말입니다.”
“그 마법사들의 표적이 이제 리안이 되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아이든의 질문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발을 지닌 아이가 디누트 자손 중에 태어났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요. 신성제국이 마법사 제거에 실패한 결과지요. 결국 모든 것은 우리의 탓입니다, 부인.”
그것을 단순히 신성제국의 탓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내 일이 아니었다면,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렇게 착하게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난 생에서도 커티스 백작저에서 주기적으로 열이 나고 몸이 아팠었다.
나는 그것을 단순한 열 감기쯤으로 여겼다.
열이 난다고 해서 그것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빌의 내연녀였던 크리스틴, 아니 정확히 크리스티나 밀란 남작 영애는 늘 화려한 보석으로 몸을 두르고 다녔다.
얼마나 화려한 지 그녀는 그냥 보석 그 자체였다.
그녀가 차고 있던 모든 장신구에도 그런 주술이 걸려 있었을까?
내가 그녀를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생각에 미치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커티스 백작도 밀란 남작 영애도 모두 주술에 걸려 나를 죽여 없앤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살심은 진심이었을까?
문득 제 손을 바라보며 덜덜 떨던 밀란 영애가 떠올랐다.
그저 떠올린 것만으로도 급격하게 몰려드는 두려움과 공포에 두 손이 벌벌 떨려왔다.
나는 양손을 서로 힘주어 맞잡고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이든이 조용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그러쥐었다.
“심장이 잠깐 멈추는 것은 왜 그런지 알고 있습니까?”
아이든이 다시 질문했고,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술 때문에 망가진 신체를 복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의식속에서 계속해서 신성력을 쓰신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육체가 이미 너무 망가져 신성력을 사용하며 빠져나가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계신 데도 불구하고요. 게다가 그것만으로 멈추었다면 좋았으련만… 부인께서는 다른 곳에도 신성력을 쓰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강력하게요.”
사제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꿈을 꾼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아이든에게 힘을 사용한 것.
나는 그게 신성력인 줄 몰랐다.
내가 뭘 하는지도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저 꿈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랬는데.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신성력이 부인의 의지대로 개화해 움직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부인께서 타고났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은 신성력을 사용하고 몸이 축나다니.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아니, 근데.
단지 꿈일 뿐이라면 신성력을 꿈에서 쓴다고 몸이 축날 리가 없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사제는 도대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제가 신성력을 써 드린 것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라 말씀드렸지요? 주술이 걸린 보석은 모두 처분해 불태웠습니다. 딜리아 공작저에도 다녀왔어요. 모든 부적과 보석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앞으로 서서히 몸은 나아지실 겁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이든의 목소리에 사제가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말씀하십시오, 딜리아 공작님.”
“얼마전 저택으로 수행 사제라는 여자가 찾아왔었습니다.”
“수행 사제요…? 금시초문이군요. 신성제국에서는 수행 사제를 외부로 돌리지 않고 또한 스스로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사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나셨습니까?”
“예. 리안이 죽어가는 것이 제 탓이라더군요.”
죽어가…? 누가…? 내가…?
나는 황당하고 어리둥절하여서 입을 벌리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사제가 나를 바라보았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작 각하께서 부인의 병을 만들어낸 주범이라 여기십니까?”
“그럴리가요! 그 무슨 해괴한…! 저는 정말로 멀쩡하고 괜찮아요, 사제님!”
내가 다급하게 대답하자 사제가 빙긋 웃어 보였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인.”
사제가 다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딜리아 공작님. 부인께서는 주술 때문에 몸이 약해지신 겁니다. 사실 그것을 제한다면 누구 때문에 쉽게 아프실 분도, 돌아가실 분도 아니지요. 그 대상이 공작님은 더더욱 아니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나는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안도하는 것도 같고 슬퍼하는 것도 같고 기뻐하는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 빌어먹을 년은 뭐였지…?”
그리고 곧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크게 흠칫했다.
사제님과 부모님 앞에서 이 무슨…!
아이든은 의식도 못 하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찾으면 얼굴을 아주 갈아버려야….”
“아악. 아이든! 나 아픈 거 같아요!”
내가 급하게 소리지르자 아이든이 방금 전의 나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나를 붙들었다.
“괜찮아? 어디가? 어떻게? 의원 부를까?!”
“아니요… 그냥… 무서운 말씀을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아….”
아이든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사제님이 웃음을 참지 못하시고 고개를 돌려 쿡쿡 대시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은 왜 쳐다보지 않는 곳까지 보이는 걸까… 정말 수치스럽다.
아이든은 꼭 비 맞은 늑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사과했다.
“미안….”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내 어깨를 붙든 그의 양손을 향해 눈짓했다.
“아파요.”
“아, 미안.”
풀 죽어 고개를 돌리는 그를 바라보며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프기만 하면 깨질 것처럼 조심스레 대하기에 써본 방법이었다.
진짜 먹힐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서.
사실은 어째 좀… 통쾌한 것 같기도 하고.
사제님은 얼른 웃음을 갈무리하시고는 정중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수행 사제에 관해서라면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제국에 들어온 사제가 있는지 알아보고 편지 드리겠습니다. 저는 내일 고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곳에서 남아 함께 조사에 임해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사제님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난다면… 문제가 좀 커질 수도 있겠군요.”
“저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사제님.”
내가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제가 또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아카데미 학생 같으시네요. 말씀해 보십시오.”
아, 아카데미 학생….
왼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어색하게 매만졌다.
제국에서 여성은 아카데미에 갈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 같다는 말이 낯간지럽게 들렸다.
“사제님께서는 일라즈를 섬기는 사제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왜 주신께서는 당신께 반대되는 마법사 무리들을 빨리 처단하지 않으시고 저대로 놔주시는 것일까요? 왜 세상에는 고통받는 이들이 넘쳐나는 것일까요? 왜 자식이 부모에게 학대받아도… 그 인생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인가요? 저는 왜 이렇게 살아온 날의 대부분을 암살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요?”
학대의 이야기에 옆에 앉은 그가 움찔대는 것이 느껴졌다.
가엾은 아이든.
그 꿈이 정말 그의 과거라면 그의 인생은 정말 터무니없이 불행한 것이 아닌가.
“이해합니다. 부인께서는 지금까지 참으로 잘 견뎌 오셨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그렇지요. 사람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역으로 질문 한 가지 하겠습니다. 부인께서 향후 낳을 자녀분께서… 부인의 말에만 절대복종하는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나요?”
“아…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당연히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죠. 사람이니까요.”
“맞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이랍니다, 부인.”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 있지?
우매한 나로서는 그녀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지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신성제국에서 부인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반드시 데려가려고 혈안이 될 겁니다. 저는 우선 입을 닫고 있겠습니다. 부디 신변을 조심하시고 호위 없이 외출하지 마십시오. 일라즈의 보호가 함께하시기를.”
사제는 상냥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그렇게 돌아갔다.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계시던 부모님은 나를 한 번씩 품에 안으며 토닥거려 주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게 진심으로 사죄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마주 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정말 괜찮지 않았어요. 하지만 노력할게요. 용서해 볼게요.”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용서되었을 마음이었다면 그렇게 커다랗게 응어리가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죽을 뻔한 위기를 한번 겪고 회귀한 나로서는 더더욱 용서가 머나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다만, 머리로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이해하기에, 노력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제는 정말 내 집이 되어버린 공작저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내 집이 될 수 없었다.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달리 아이든은 내 손을 맞잡고 함께 마차에 올랐다.
아이든은 맞은편이 아닌 내 옆자리에 앉아 다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변할지도 모를 미래의 그가 두려웠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