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제게 명령하지 마세요
공작저로 돌아온 지 이틀.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용인들의 태도가 부쩍 수상쩍었다.
과할 정도로 내게 잘해주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심각하게 어색했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용인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내게 과할 만치 공손하게 인사했다.
내가 다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들 저러지…?”
“공식적으로 공작부인이 되셨잖아요.”
리제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모두들 마님의 사람이라고 저를 부러워하는걸요.”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리제를 바라보았다.
뿌듯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드는 그녀는 꽤 사랑스러워 보였다.
내가 진짜 이 집의 주인이 되었구나.
하는 실감마저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서재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공작님은?”
“외출하셨어요. 점심 전에 돌아오신대요.”
그렇구나.
그는 여전히 내게 자신의 스케줄을 직접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나는 사용인들을 통하지 않으면 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황궁에서 그의 품에 안겨 운 이후로 그가 내게 좀 더 살갑게 대해주길 바랬지만,
그것은 오로지 내 소망일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더욱 내게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행여 마주치더라도 단답형 이상의 대답도,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지 않았으니까.
“공작님 식사하실 때 같이 할 거니까 꼭 일러주렴.”
“네, 마님.”
리제는 내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로 활기차게 대답했다.
서재에 들어선 나는 차를 내오라 지시하고 리제를 물렸다.
당분간 업무에서 손을 떼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의원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책상 위에는 내가 아팠던 동안 쌓인 서류를 잘 정리해 철해 놓은 파일이 놓여 있었다.
단 며칠 아팠던 것뿐인데도 수북이 쌓인 각종 영수증과 서류들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쉬었던 만큼 일해야 했다.
이 일이 모두 끝나고 나면 어머니를 찾아뵈어야 했다.
꼭 들어야만 할 말이 있었으니까.
두 시간가량이 지났을 무렵, 서재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마님. 칼튼입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칼튼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마님을 찾는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나를요? 누가?”
“그것이….”
칼튼이 별안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칼튼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요?”
“황태자 전하십니다.”
“아이든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셨단 말인가요?”
“예. 마님.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낭패다.
오늘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은 포기해야 할 성싶었다.
“알겠어요, 칼튼. 응접실로 차 두 잔 준비해 달라 일러주세요.”
칼튼이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서고 나는 부리나케 서재를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어두침침한 인테리어를 보며 혀를 차고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도대체 저분이 나를 찾아오실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응접실 안으로 침착하게 걸어 들어가 황족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일라즈의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황태자가 나를 돌아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왔군. 앉아.”
제가 집주인이라도 된 양 자리를 권하는 황태자를 보며 실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별안간 황태자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황당해져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미안. 그대가 너무 아이든과 똑같은 거 같아서.”
아.
나는 문득 아이든의 부관, 칼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인께서는 안 그래 보이시는데 이런 부분은 각하와 꼭 닮으셨습니다.]
이런.
또 생각지도 못하고 용건만 간단히를 외치고 말았구나.
안부부터 물었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그대는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군.”
“예?”
“제국의 여인들과 상종했다간 털털 털리고야 말겠어.”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대를 황궁 연회나 행사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여인들은 보통 16살이면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나?”
“송구하게도 저는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전하. 사교적인 성격이 되지 못해서요.”
“그렇군. 그렇게 감정이 다 드러나면 그럴 법도 하지. 감당이 안 됐을걸. 참 지긋지긋한 존재들이야.”
황태자가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도 여인입니다, 전하. 제 앞에서 하실 말씀으로는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저도 말씀에 동의하는 바이긴 하지만요.”
뒤 이어진 말에 황태자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런 면도 똑같아. 그대는 내가 황족으로서 무섭지도 않은가 보지?”
“예?”
“방금 내게 이래라저래라 한 거잖아.”
앗.
나는 황급하게 일어나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가 위치에 합당한 처신을 하지 못하고 주제 넘었….”
“됐어! 됐어. 앉아.”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앉자 그가 묘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정말 묘하군.”
“예?”
“제국의 귀족 여성으로서의 소양을 다 갖춘 것 같으면서도 제국의 여성들과는 판이해.”
“전하. 저도 귀족으로서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은….”
“그대가 귀족답지 못하다고 말한 게 아니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게.”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제국의 차기 황제씩이나 되는 분께서 나를 왜 찾아온 걸까?
갓 결혼한 유부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황태자가 잘 벼려진 콧날에 주름을 만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예쁜 얼굴을 저렇게 쓰다니.
자각을 못 하는 걸까.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라는 표정이군.”
거친 말에 내가 움찔거리자 황태자는 예의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얼른 용건 말하고 꺼질 게. 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진짜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라서. 아이든 그 녀석에게 물어보면 통 대답을 해주지도 않고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통에… 만만한 게 그대 아니겠나.”
새삼스럽게 아이든이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 그의 말에서 실감 났다.
“그래서 자네들은 사랑 없이 결혼한 연유가 무엇이지?”
“예…?”
나는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멍하게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무슨 질문을 들은 건지 인지조차 되지 않았다.
황태자의 표정이 이전과는 다르게 한없이 진중해졌다.
그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사랑 없이 하는 결혼이 행복한가? 아니지 사실은 그대는….”
“전하.”
우리가 계약에 의한 관계라고….
아이든이 이야기해 주었을까?
황태자가 내게 이런 아픈 질문을 하는 것은 그래서일까?
황태자를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내 생각보다 차가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저는 미령한 백작 영애가 아닌 공작부인입니다.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십시오.”
“어? 잘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네. 이렇게 갑자기요.”
“허. 나는 그대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것인데. 이보다 더 대우받고 싶으면 내 어머니가 되어야 할걸.”
으. 정말 끔찍한 소리다.
“정말 끔찍한 소리지.”
황태자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치를 떨었다.
“그러니 내게 이 이상을 바라지 말게.”
생각해보면 결혼 예식 당일에 처음 보았을 때에도 황태자는 내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했다.
그는 원래 이런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쉽게 납득해 버렸다.
“저는 딜리아 공작 각하를 연모하고 있습니다, 전하. 어째서 사랑 없는 결혼이라 단정 지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하께서는 소문에 귀가 어두우신가 봅니다.”
“나는 소문 같은 건 안 믿어, 공작부인.”
황태자가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를 내려 내 손가락에 끼워진 예물 반지를 바라보았다.
“내 두 눈과, 두 귀를 믿지.”
“무슨….”
“그리고 내 눈과 귀는 사실 두 개뿐만이 아니거든.”
“예…?”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지?
“솔직히 처음엔 황궁에 신방을 차려 달라 요구하는 녀석이 황당했지. 이렇게 어두침침한 건 좋아해도 눈부시게 화려한 덴 관심이 좀처럼 없거든.”
아이든이 먼저 요구했다고?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나는 황제가 아이든의 눈치를 보느라 먼저 제안했다고 여겼으니까.
하긴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더 황당하긴 하다.
황제가 뭐가 아쉽다고 그렇게까지 하겠어. 아무리 아이든의 무력이 무섭다고 해도.
그런데 그가 왜 굳이 황궁에 신방을? 멀쩡한 저택을 놔두고?
“어쨌든 호기심 많은 나로선 재미있겠다 싶었지. 도대체 그 얼음장 같은 놈이 결혼을 승인해달라 요구한 여인이 누구인가 궁금도 하고. 감정이라곤 없을 거 같은 놈이 정말 사랑을 알까 싶기도 하고.”
재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황태자가 붉은 눈을 들어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외모만큼은 참 눈부시게 예뻤다.
하지만 그의 어디에서도 차기 황제다운 위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궁에는 듣는 귀와 눈이 많아, 부인. 그들 중 내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별안간 내게 옷을 가져다주고 환복을 도왔던 시녀들이 떠올랐다.
내가 먹을 약을 달여서 다시 왔을 그녀들이.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을지.
몸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한 감정이 전신을 감싸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전하? 저희를 감시하고 사생활을 침해했다 그렇게 자랑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상하게 말했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아도 와서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던걸. 내 귀를 잘라버릴 순 없잖나.”
하!
황족에게 살의를 느껴도 되나?
“표정 풀어, 부인. 나는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야. 도대체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랑 왜 결혼했나? 그대가 만 배는 더 아까워 죽을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그랬어?”
인간 같지도 않은…?
“전하. 지금 그 말은 몹시 불쾌…!”
“뭐 하는 거지?”
황태자에게 따지려는 찰나 등 뒤에서 묵직하고도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저음이었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든이 슈트 차림으로 서서 죽일 듯이 황태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표정에 움찔하고 아이든의 뒤를 보니 칼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왔군.”
황태자는 여전히 여상한 말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 왜 그래, 아이든. 다 들었어?”
그걸 질문이라고…!
나는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내 질문이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나는 그대를 위해서 한 말이었어.”
도대체 나를 왜 찾아온 거지?
저 웃는 낯짝 뒤에 숨은 저의가 뭔지 모르겠다.
그게 뭐든 나는 그가 달갑지가 않았다.
“카이 드 로데우스.”
아이든의 입에서 황태자의 풀 네임이 흘러나왔다.
“표정 풀어, 아이든.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결혼한 지 이틀 된 내 부인에게 말이지?”
황태자에게 반말을 찍찍 뱉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제국에서 아이든 밖에 없을 것 같다.
황태자는 그 반말들이 익숙한 듯해 보였다.
나는 아이든의 강인한 심장에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황족을 무시하고도 목숨이 붙어있는 유일한 사람.
내 남편은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흠….”
황태자가 나와 아이든을 번갈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만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내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리 생각해, 부인. 다음에 다시 올게.”
황태자의 말에 아이든이 내게로 빠르게 다가와 뒤에서 한 팔로 나를 당겨 끌어안고 짓씹듯이 말했다.
“다음은 없어.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쯧. 무례하기 짝이 없어.”
황족을 기만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아이든도 놀라웠지만, 익숙하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중얼거리는 황태자도 황당했다.
“철없는 애송이에게 차릴 예의는 없다.”
“허. 자네 그러다 잡혀가.”
“여긴 내 편뿐이다.”
“제국민들은 모두 다 원래 내 것이 아닌가?”
하.
둘 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어린애들이야? 편 가르기 해?
도대체 들어 줄 수가 없네!
나는 듣다 못 해서 아이든의 품에서 빠져나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두 분 다 제발 그만하세요. 그리고 전하, 요청 드리 건데 다시 찾아오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남편이 원하지 않는 일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 제 남편을 두고 하신 불한당 같은 말씀. 매우 불쾌했어요. 제 남편은 누구보다 사람다울 뿐 아니라 제게는 너무 좋은 사람입니다. 제 앞에서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두 번 듣는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그만 돌아가 주세요.”
말을 다다다다 뱉어내자 황태자는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경악한 표정을 했다.
아이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돌린 얼굴 옆으로 드러난 귀까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내 칭찬 같은 말이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다.
황태자는 나를 보고 경악했다가 아이든을 바라보고 더 크게 경악해 나와 아이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거… 쌍방인 건가?”
뭐? 쌍방?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황태자를 노려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하게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둘은….”
“전하!”
나는 다급히 황태자의 말을 잘라먹었다.
뒤에 나올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든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그걸 굳이 황태자 앞에서까지 인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돌아가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다급하게 뱉어내는 말에 황태자가 묘한 웃음을 얼굴에 걸치고 비아냥거렸다.
“배웅까지 하는 걸 저 녀석이 허락이나 할지 모르겠군.”
나는 아이든에게 팔을 뻗어 응접실 밖으로 몸을 돌려 밀었다.
“공작님. 이제 막 외출하시고 오셔서 불편하실 텐데 가서 환복부터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서 가세요.”
아이든은 못 이기는 척 떠밀려 가면서도 황태자에게 짓씹듯이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로 입을 놀리면 죽여 버리겠어.”
제발 그 입 좀…!
나는 아이든을 끝끝내 응접실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황태자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방금 각하께서 하신 말씀은 순전히 실수였을 거예요, 전하. 가실까요?”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런 말 한두 번 듣는 게 아니라서. 신경 쓰지 말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으니까.”
그렇겠죠.
지금 그 목이 몸에 잘 붙어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아이든의 언행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감히 제국의 황태자에게.
미친 게 아니고서야.
황태자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서도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부인이 나는 오히려 더 놀랍군. 어지간한 콩깍지가 아니고서야.”
화르륵.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콩깍지라니.
나 그런 거 없거든요!
“가, 가시죠. 하하….”
“배웅은 되었어, 공작부인.”
“예?”
황태자가 문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그대가 내게 했던 말 중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그 빌어먹을 ‘예’인 건 알고 있나?”
“예?”
“하아… 되었네.”
나는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내가 또 얼마나 되물었다고….
“전하께서는 왜 저런 언행을 그냥 받아 주고만 계세요? 황태자시잖아요.”
민망함을 떨치고자 물은 질문에 황태자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그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저 녀석의 인간다움을 보았으니.”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를 인간 같지 않은 자라고….”
“당연히 인간 같지 않지. 언행을 보게. 불손하기 짝이 없어. 뭐… 그래도 나로선 지루하지 않고 좋아.”
그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인간답다는 건가 인간 같지 않다는 건가.
그때, 별안간 황태자가 몸을 숙여 내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숨을 들이켠 채로 굳어졌다.
“그런데 그거 알아? 아이든 저 녀석 정말 외로움을 많이 타. 늘 애정에 굶주려 있지.”
“예…?”
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철옹성 같은 아이든의 어디에도 애정에 굶주린 모습은 없었는데.
“내가 사람 하나는 기똥차게 잘 보거든.”
황태자는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혀를 찼다.
“그런데 그걸 저만 모르지.”
나는 멍한 표정을 한 채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꿈속에서 흐느껴 울던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정말 외로운 사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째서 나를 그토록 필사적으로 밀어내려는 것일까?
이런 화두를 꺼내면 대화조차 꺼리는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갑자기 문득 모든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포기하지 못하겠지.
“가여운 사람이에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황태자는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기고는 말했다.
“이봐. 정신 차려. 여기서 진짜 가여운 건 그대일 수도 있어. 미리 경고하는데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그에게서 도망쳐.”
“왜… 왜요…?”
황태자의 적안이 정말 루비라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 자 안에 들끓는 광기를 그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나 보군. 그는 괴물이야. 내가 심심치 않아서 좋은 거랑 그대는 다르지. 난 분명 경고했어.”
황태자는 멍해진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만 가봐야겠어. 뒷골이 서늘한 게… 왠지 당장 가야 할 것 같아. 배웅은 필요 없으니 그대는 그만 올라가.”
황태자가 응접실 문을 열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나는 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광기. 괴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회전했다.
내가 본 공작은 광기 있는 괴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
도대체 왜 다들 그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황태자의 도망치라는 경고가 불안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방금 전에 들은 모든 이야기를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이미 그 정도로 아이든을 연모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에게서 결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
가까스로 혼미한 정신을 추스르고 서재로 돌아온 나는 환복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이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인기척에 돌아보는 아이든의 얼굴이 너무나 얼음장 같아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긴 무슨 일로….”
“…앉아.”
나지막한 음성이 협박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아 보여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할 말 없어?”
“무슨… 말을 해드릴까요…?”
“무슨 말이든 지껄여 봐.”
위압적인 그의 목소리에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려고 애써야 했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는 지금 화를 낼 것만 같아서.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든.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났어요?”
헛웃음이 실린 그의 중얼거림이 공기를 타고 흩어졌다.
“왜 화가 났냐고…?”
그리고 불현듯 차갑게 되물었다.
“카이가 뭐라고 지껄였지?”
“…별말씀 안 하셨어요.”
“릴리아나.”
그가 짓씹듯이 뱉어내는 내 이름을 듣는 순간 울컥했다.
치솟는 불쾌한 감정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생각해보면 왜 내가 그에게 일일이 다 고해바쳐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게 애칭이 아니라는 게 아쉽게 느껴지다니….
나도 참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제가 누굴 만나 무얼 하든 사실상 당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게 아니었어요?”
“뭐라고…?”
“우리 결혼은 계약 관계나 다름이 없는 것이잖아요.”
아이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온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릴리아나.”
뒤늦게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신혼 방 밖에서 그 시녀는 우리가 했던 모든 대화와 내가 질질 짜며 울어 댔던 모든 것을 듣고서 황태자에게 낱낱이 고해바친 것이었다.
“사랑 없이 결혼한 소감이 궁금해 오셨다더군요.”
좀 전까지는 정말이지 하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에게 들은 것을 고해바쳤다.
아이든이 놀란 듯 눈이 커다래졌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결혼하자마자 저택으로 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내가 이런 수모까지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제 속이 시원하신가요?”
“…그걸 어떻게….”
“저도 딱 그렇게 생각했어요.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공작님께서 그새, 나는 내 부인을 새 발의 때만큼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해바치셨나 했죠.”
“리안.”
그가 당황한 듯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누그러진 목소리와 다시 바뀐 내 호칭에 기가 막혔다.
“황태자 전하께서 또 뭐라고 하셨는지 궁금하시죠? 다 말씀드릴게요. 궁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고 그 눈과 귀는 다 황태자의 눈과 귀가 된다더군요. 알고 싶지 않은 것마저 알게 될 만큼이요. 그러니 신방에서 있었던 일인들 전하께서 모르셨겠어요? 아주 낱낱이 알고 계셨습니다, 공작님. 수치스러울 만큼!”
마지막 말을 짓씹듯 내뱉자 아이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먼저 황궁에 신방을 차려 달라 요구하셨다면서요?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부인이 수치감에 죽길 바라셨나 봐요?”
“리안. 그건 그대가….”
“저에 대해 뭘 아세요? 궁금하긴 하세요? 제가 뭘 좋아할지 싫어할지, 뭘 부담스러워할지, 뭐에 기뻐하는지 묻기는 하셨나요? 공작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제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으시죠. 결혼식도 언질 하나 없이 막무가내로 진행할 만큼이요!”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충격받아 정신이 나가든 말든 일절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았다.
“공작님은 걸음이 느린 제게 발맞추어 걸어 주시려는 노력조차 하시지 않으셨고, 제게 그 무엇도 맞추어 주신 적이 없어요! 아. 그렇죠! 계약 관계니까! 제게 일말의 관심도 없으시긴 하시겠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왜 이런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일까지 겪어야 하죠? 제게 되레 미안해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화를 내실 게 아니라요!”
그의 핏기 가신 얼굴이 창백해져서 검푸른 색의 머리카락과 눈이 더욱 어둡고 깊어 보였다.
이렇게 화가 나는 순간조차 그가 잘생겨 보여서 큰일이었다.
더 있다간 마음에 응어리진 화가 얼굴 때문에 풀릴 것 같아 나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를 올려다보던 그가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곧 표정을 굳히며 짧게 명령했다.
“…리안, 앉아.”
이 순간조차.
이 순간조차 당신은…!
나는 그의 명령에 울컥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제게 명령하지 마세요.”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 그를 버려두고 망설임 없이 서재를 나와버렸다.
***
황궁에서 혼인 첫날밤을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칼튼이 공작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일렀다.
아이든은 그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람은, 자신을 수련 사제라고 소개했다.
지나가다가 공작저를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이끌려왔노라고.
아이든은 제 귀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데에 소비하는 것 같아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다.
“각하께서는 그분께서 생명이 왔다 갔다 하시고 계시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녀가 리안의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다면.
“어젯밤 꿈에서도 그분을 뵙지 않으셨습니까?”
아이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너 뭐야.”
노려보자 묻자, 그녀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저는 수행 사제입니다, 각하.”
어제 사제를 만나고 왔음에도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자는 그저 수련하는 사제일 뿐이고.
그럼에도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혹하는 제 마음이 우습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녀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든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그분의 생명을 깎아 먹고 계시는 분은 각하십니다.”
“뭐…?”
아이든은 예고 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각하께서 그분과 더욱 가까워질수록… 그분께서 쓰러지는 빈도가 늘어날 겁니다. 생명이 단축되고 있어요. 종국엔 단명하고 마실 겁니다.”
“!”
증명하려고 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려 했다.
사실은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고.
너 없는 세상에서는 숨도 쉴 수 없게 되었노라고….
이게 무슨 허탈한 결과란 말인가.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닐 것이라 부정해왔다.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가 했던 말은 진실이었던가.
어머니는 제게 진실을 알려주었던 것인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것만이 방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겨두고 사제는 떠나버렸다.
아이든은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눈에서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아이든은 한동안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어젯밤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꿈을 꾸었었다.
리안이 데일 백작저에서 제 옷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다가 종국에는 쓰러지는 꿈이었다.
그녀의 숨이 아스라이 꺼져가는 것을 보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
아니, 사실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무겁고 안개 낀 듯 답답했다.
답을 모르는 혼란함이 가중되어 그녀에게 정체가 무엇이냐 소리 질렀다.
너는 방금 전 쓰러졌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멀쩡하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지?
이것은 현실인가?
그러다 문득, 그녀가 쓰러진 것이 혹여 자신 탓일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화를 내었다.
저리 가.
내게서 떨어져.
내 곁에 있으면 안 돼.
그러나 상처로 얼룩진 리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이든은 생각했다.
아… 나는 점점 미쳐가는 것인가?
꿈과 현실마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충동적으로 리안을 품에 안았다.
품에 그녀를 가득하게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이든은 태어나 처음으로 차오르는 충만함을 느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아.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제발 누가 내게 답을 알려 주었으면 좋겠어.
아이든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녀를 품에서 놓지 못했다.
오랫동안 품에 안겨 리안은 서럽게도 울었다.
얼마나 제게 상처를 받았으면.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으면 그렇게 목놓아 울었을까?
가슴이 아프다.
매일 같이 그렇게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제 일을 떠올리며 아이든은 결심했다.
그녀를 지키되 최대한 멀리하겠노라고.
이젠, 그녀에게 포기를 말해야 할 때가 왔노라고.
그 뒤로 아이든은 리안을 마주칠 때마다 차게 대했다.
단답형 이상으로 대답을 하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랬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이든은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카이 그놈이 리안을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황태자는 항상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예리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늘 가벼운 마음으로 여자를 끼고 살았다.
놈의 어디에도 진심 같은 건 없었다.
화가 나고 불안했다.
그녀를 멀리하겠다 포기하겠다 마음 먹은 지가 언제인데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가.
내가 갖지 못하더라도 남은 주기 싫다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참으로 치가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가시 같은 말에 상처 입었고 화가 났다.
그 모든 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녀가 아픈 몸을 회복하는 동안 시간에 쫓기며 준비한 것이었는데.
그녀가 기뻐해 주기만을 바라면서 그렇게….
처음부터 성대하고 화려한 것이 좋다 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아이든은 멍해졌다가 기가 막혔다가 황당했다가 종내에는 참을 수 없게 화가 났다.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느 장난에 맞춰야 하는 건데?
***
도대체 내 서재에서 왜 내가 나와야 하는 건지.
오늘 업무도, 어머니를 만나려던 계획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망가진 기분으로 침실로 간 나는 설렁줄을 마구 잡아당기고는 침대에 풀썩 몸을 묻어버렸다.
곧 마리가 들어와 내게 고개 숙였다.
“마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마리. 달달한 디저트 좀 잔뜩 가져와 줄래?”
“예. 마님.”
마리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침대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으으, 짜증 나!
화가 나는 순간조차 잘생겨 보이면 어떡해!
아이든이 이렇게 마치 빌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막말을 하고,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빌처럼 증오스럽거나 밉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가 원망스럽고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미치게 싫었다.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나쁜 남자에게만 끌리는 못된 이상형을 가진 게 아닐까?
[미리 경고하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그에게서 도망쳐.]
[그는 괴물이야.]
“으아아…!”
귀를 틀어막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 질렀다.
그럼에도 꽉 막힌 것 같은 속이 가시지 않아서 너무너무 답답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아… 그는 괴물이 아니야… 나는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이불을 움켜쥐고서 그렇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똑똑.’
“마님. 디저트 가지고 왔는데요. 들어갈까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벗어났다.
문을 열어젖히고 당황한 마리에게 명령했다.
“정원으로 가야겠다. 따라와.”
예쁜 꽃들이나 보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지 모른다.
마리를 대동하고 걸으면서 지나치는 사용인들이 모두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해 왔다.
나는 그들의 깍듯한 대접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일이 인사해 주고 정원으로 향했다.
“리제는 어디 갔니?”
“주방 일을 돕는다고 갔어요, 마님.”
“그러고 보니 아직 축제 기간이구나. 리제가 너랑 구경을 다녀오고 싶어 했는데.”
“외출 허락을 아직 구하지 못했어요. 요 며칠 저택이 무척 바빴거든요.”
“무슨 일로?”
내 질문에 마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돌렸다.
“사실 평소에도 늘 바쁘긴 마찬가지예요, 마님.”
“그렇구나.”
나는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저런 표정을 하고서 대답해 줄 리 만무할 테니.
“내가 허락할게. 그러니 내일은 리제와 함께 시내에 다녀오렴. 내 시중은 다른 시녀들 부르면 되니 신경 쓰지 말고.”
마리의 표정이 일순 환해졌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마님?”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너희들 주인이 난데 되고말고.”
정원으로 들어선 나는 의자에 앉아 널따란 티 테이블 위에 찻잔과 디저트를 올리는 마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느샌가 모르게 흐드러지게 핀 여름꽃으로 시선을 옮겼다.
약간은 따뜻한 여름 바람이 불어와 꽃잎이 살랑거렸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좋구나.”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마님?”
“바쁘니?”
“예?”
나는 마리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곁에 있어 주렴. 혼자는 외롭잖니.”
“그 외로움. 제가 혹시 달래 드려도 괜찮을까요?”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칼이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칼.”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을 가슴에 대며 허리 숙여 인사하는 칼에게 미소 지어주었다.
“오랜만이에요. 정말로. 어서 와서 앉아요.”
마리가 의자를 빼내어 주자 칼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마리. 차 한 잔 더 내 주겠니?”
“예, 마님.”
마리가 사라지고 나는 빈 접시에 디저트를 조금 옮겨 담아 칼 앞으로 밀었다.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싱긋 웃으며 내 앞으로도 디저트를 옮겨 담아 가져왔다.
“많이 야위셨습니다.”
“그간 정말 많이 먹었는데요? 제 사용인 아이가 저를 사육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생각해보니 결혼 예복이 생각보다 조금 헐렁해서 안으로 접어 핀을 꼽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었다.
그 이틀간 미친 듯이 음식을 흡입했던 게 효과적이긴 했는지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을 만큼 살이 올랐다.
나는 디저트를 한 입 입에 베어 물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음. 정말 달아요.”
옆에서 칼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다행입니다.”
“무엇이 말인가요?”
“스스로 소소하게나마 행복을 찾고 계셔서요.”
멈칫.
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칼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해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각하께서… 힘들게 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칼은 늘 나를 걱정하고 있군요.”
“늘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모시는 상관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는 괜찮아요.”
“부인.”
나는 애써 싱긋 미소 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를 한 모금 입에 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쉽게 속아주는 사람이 아니구나.
“각하께서는 평범하신 분은 아니시죠.”
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이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을 어려워하실 만큼 말이죠.”
나는 찻잔을 내리고 칼을 바라보았다.
달았던 디저트 뒤로 들어온 차는 비교적 더욱 쓰게 느껴졌다.
“벗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왜요?”
“부인께서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요.”
“제가 그래 보이나요? 나는 정말 괜찮은데. 이상하네요.”
내 미소에 칼이 이윽고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미간에 걸린 주름이 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웃고 계시는데. 괜찮을 리가요.”
흠칫.
내가 어떻게 웃고 있었지?
거울이라도 가져오라고 해야 하나…?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칼. 나는 정말 괜찮아요. 내 컨디션은 내가 잘 알아요.”
자연스럽게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마리에게도 나는 그렇게 어색하게 웃었을까?
그랬다면 그건 좀 민망할 것 같은데.
“사경을 헤매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커진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아이든이 그러던가요?”
“집사님께 들었습니다. 각하께서 좀처럼 일에 집중을 잘 못하셨거든요.”
아….
“제가 죽어버릴까 봐 겁이 났나 봐요.”
내 말에 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인….”
“처음부터 그는 내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혼을 원한다고. 그러니 내가 죽어버리면 그에겐 큰일이겠죠.”
칼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자리했다.
이 주제에 대해 그렇게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아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좋아요. 벗이 되어 주세요. 그렇다면 이제 오후 티타임을 혼자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아주 괜찮은 생각이에요.”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웃어요, 칼. 오늘 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 꽃을 보고, 차를 마시고,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어요. 내 기분을 이 이상 망치지 말아 줘요.”
내 말에 한숨을 내쉰 칼이 옅게 미소지었다.
미간에 주름이 없어지니 보기가 좋았다.
나는 귀족의 품위 따위 잊어버리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눈을 감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다 올려지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풀들과 꽃잎들이 스스스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 중얼거렸다.
“날씨가 좋아요.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봐요, 칼. 더없이 아름다워요.”
“…그렇군요… 아름답습니다….”
넋을 놓은 듯 중얼거리는 칼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