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서로를 신뢰하십시오
다행인 일이었다.
결혼식까지 이틀 동안 나는 더 이상 쓰러지지도 않았고, 그 빌어먹게도 소름 끼치는 꿈도 꾸지 않았다.
리제는 내가 너무 아픈 사이 매 말랐다며 매 끼니와 디저트까지 열량이 높은 음식들로 가득히 채워 가지고 와서 나를 알뜰살뜰히도 보살피고 먹였다.
침대에서 웬만하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리제가 옆에 꼭 붙어있는 통에 나는 좀이 쑤셔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제 괜찮다고 여러 번 호소해 보았지만 리제도, 가끔씩 들어와 나를 살피고 돌아가는 마리도, 집사 칼튼도, 그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가끔씩 와서 내 이마에 손을 올려보고 툭 치면 아스러질 것처럼 조심스럽게 대하는 아이든 조차 산책하고 싶다는 내 말에 경악스러운 말을 했다.
[등에 업혀 산책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주지.]
이 무슨 끔찍한 언행이란 말인지.
솔직히 말하면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꿈이 자꾸만 생각나서 소름이 돋아나곤 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지 그를 마주하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꿈은 꿈일 뿐이고 내 눈앞에 그는 꿈속의 그 소년이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 심장은 뇌랑은 다르게 그를 마주하면 끊임없이 쿵쾅거렸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등에 업히는 것 또한 결단코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결국 결혼식 당일이 되고 나서야 나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틀간 아로마 꽃잎 목욕에 오일 마사지까지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 내 피부는 더할 나위 없이 반짝거렸다.
아침부터 거울도 저만치 치워버리고 나를 치장하기 바쁜 리제와, 마리, 다른 시녀들의 손에 도통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예복은 리제의 말대로 정말 아름답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였다.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띌 만큼 미세하고 화려한 글리터로 가득해 번쩍거리는 데다 장미로 수놓아진 자수가 어찌나 섬세한지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들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위로는 목을 감싸고, 아래로는 발목 언저리까지.
기장은 정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등 뒤로 허리에 볼륨감 있게 부풀어 묶인 리본의 끝자락이 드레스 기장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오직 노출된 부위로는 얼굴과 더운 여름날에 걸맞은 팔뿐이었다.
다행히도 섬유 자체가 얇고 시원한 소재라 그런지 코르셋 때문에 답답한 걸 제외하면 그렇게 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예복을 입고 나서는 메이크업과 헤어 치장을 받았다.
시녀들의 손길을 받으면서 나는 의자에 앉아 조금 투덜거렸다.
“이틀 내내 누워만 있었으니 다리에 힘이 없어 걸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는 내 말에 리제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마님.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시녀가 짐짓 엄하게 말했다.
나는 혀를 쯧 차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님. 이틀 누워 있다고 다리에 힘이 없어지진 않을 것 같아요.”
리제가 놀리듯이 말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산책 한 번을 못 하다니….”
“마님.”
메이크업 담당 시녀의 엄한 부름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장작 두 시간에 걸친 치장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시녀들 틈바구니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치장이었다.
리제가 치워 두었던 전신 거울을 가지고 내 앞에 와서 섰다.
“마님… 정말… 여신 같으세요.”
여기저기서 연신 ‘하아….’하고 숨을 뱉어내는 감탄사가 들려왔다.
전신 거울 앞에 선 나 역시 멍해졌다.
틀어 올린 머리 위로 반짝이는 보석이 가득 장식된 장미 헤어핀과 그 뒤로 늘어진 폭이 좁은 베일이 실내 등의 빛을 받아 끊임없이 반짝거렸다.
귀에 채워진 반짝거리는 귀걸이도, 손에 씌어진 레이스 장갑도 예복만큼 화려해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이목구비의 장점을 부각시켜 어찌나 예쁘게 메이크업을 해 놓았는지 도통 나 같아 보이지가 않아서 낯설었다.
정말이지… 화장발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네. 들어오세요.”
“마님. 저 칼튼입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문밖을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심호흡을 했다.
뒷정리를 시작하는 시녀들을 뒤로 한 채, 리제의 도움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나를 바라보는 칼튼이 숨을 들이켜며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마님. 오늘은 정말… 몹시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칼튼. 공작님께서는요?”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갈까요?”
나는 리제와 칼튼과 함께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불안한 듯 서성이던 아이든이 불현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는 좀 민망해진 마음에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내려와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오늘 머리를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기고, 블랙과 골드가 조화를 이룬 제복 위에 클라미스를 걸친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황홀하게 잘 어울려서 나는 쿵쾅대는 심장과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가… 갈까요…?”
내 말에 멍하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내게 왼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팔에 손을 얹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저택을 나와 마차에 마주 보고 올라타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예뻐.”
그게 끝이야?
멋없기는….
“당신도 오늘 정말 근사해요, 공작님.”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일렁이던 눈과 너무 똑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나를 그다지도 매일같이 밀어내는데.
나를 가지고 싶다고 했던 소년의 확고한 욕망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인데.
그때, 내 상념을 깨고 그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내려 그의 손에 들린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열린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목걸이가 들어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화려한 펜던트 대신 심플한 반지가 두 개 들어가 있었다.
나는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뭔가요…?”
“예물 반지는 따로 있어. 이건… 내가 프러포즈 하면서 주고 싶었던 거야.”
프러포즈 반지 때문에 칼을 시켜 나를 살펴보게 한 게 아니었나?
“고민이 많았어. 반지로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는데… 그럴 시간이….”
그는 그럴 새도 없이 출장을 나가 누군가의 목을 베고 돌아왔었지.
“그래도 이건 특별한 거야. 받아.”
나는 그에게서 목걸이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야.”
“네에?”
아니, 그런 걸 왜 나한테!
나는 너무 놀라서 케이스를 떨어뜨릴 뻔했다.
떨어뜨릴 새라 품에 소중하게 끌어안고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초대 가주 딜리아 부부가 하고 있던 예물 반지였어.”
심지어 예물 반지!
미쳤나 봐!
“아니… 아니 그런 귀한 걸 왜 제게…!”
“그대가 딜리아 가주가 되었으니까. 나와 함께.”
!
나는 정말 더 이상 커지지 못할 만큼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내가 딜리아 가주라니…!
“그건 이제 그대의 것이야. 원래는 하나씩 나눠 갖는 것이 전통이지만… 나는 그대에게 주고 싶어. 둘 다.”
“왜… 왜요?”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딜리아는 그 어떤 것도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니까.”
뭐?
나는 잠시간 멍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 무슨 뜻이지…?
그럼… 당신도 내 것이라는 뜻이에요?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이 났다.
“말했잖아. 그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겠노라고.”
아아….
나는 삽시간에 몰려오는 실망감에 허탈해졌다.
사랑을 제외하면 모든 걸 안겨주겠다고 했던 그의 약속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대에게 모든 걸 다 주고 싶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원할 때까지는…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 릴리아나.”
숨이 턱 막혀왔다.
또다시 그에게서 너무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밀려 들어왔다.
그가 원할 때까지.
내가 필요할 때까지.
또… 내 필요가 다할 때까지.
언제나 들어왔던 기시감, 불안감.
그가 빌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들.
오늘도 나는 여전히 그런 기시감에 시달렸다.
나는 이 남자에게나 그 남자에게나 필요에 의해 옆에 있다가,
필요가 다하면 내쳐질… 그런 여자였다.
그래. 적어도 이 사람은 내가 필요 없다고 해서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
나는 또다시 이렇게 자위하며 나를 안심시키고 그렇게 모든 불안감을 억누르고 그의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일까?
내 인생이 그러면 너무 불쌍하고, 서글픈 건 아닐까?
이번 생의 결혼도… 망해 버린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이 기뻐해야 할 날에 몹시도, 몹시도 슬퍼지고 말았다.
***
결혼 예식까지 겨우 하루가 남았다.
그전까지 부인이 어떻게든 몸을 회복해야 했다.
성대한 결혼식을 원하는 그녀를 위해 정말 어렵게 만든 자리였다
예물 반지를 위해 리제에게 부인이 자는 틈에 손가락 사이즈를 알아오라 일렀다.
왜 진작 이런 방법을 쓰지 못했을까?
그동안 정말 바보 같은 헛짓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녀를 조사하며 알게 된 생일에 맞는 탄생석인 블루 사파이어가 박힌 최고가의 반지를 샀다.
리안의 눈은 물론 탄자나이트 보석 색에 더욱 가까웠지만 사파이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떠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었다.
아이든은 그것이 맘에 들어 반지를 여러 번 만지작거렸다.
리안은 깨어난 후로 사용인들의 돌봄을 가장한 감시 아래에서 외출하지 못한 채 잘 먹고 잘 쉬고 있었다.
이따금씩 들러 이마를 만져 열을 재보고 밥을 먹여주고 오기도 했는데, 리안은 그런 아이든의 친절을 사뭇 낯설어했다.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던 남자의 태도가 너무 바뀌어 있으니 적응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그래도 그런 건 사실 아주 잠시였다.
깨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자꾸 산책을 나가고 싶다 졸라대는 통에 아이든은 짐짓 엄하게 말했다.
“등에 업혀서 산책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주지.”
리안은 얼굴마저 희게 질릴 정도로 질색팔색을 했다.
그런 결과를 유도한 것이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었다.
그렇게 들이댈 땐 언제고 제가 업어주는 건 또 싫다는 말인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결혼식 당일 아이든의 눈에 비친 리안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워 보였다.
흡사 하늘에서 잘못 내려와 올라가지 못한 천사인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아이든은 그런 걸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이 못되었다.
옛날 그 어느 날 칼이 제 상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연애를 하기엔 아예 글러 먹은 성격이라고.
그땐 똑같은 모태 솔로에게 들은 말이 기분 나빠 두고두고 욕하며 배로 일을 시키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름답다는 칭찬 한번 흐드러지게 못 하는 빌어먹을 성격.
그런 말을 할 생각을 하기만 해도 온몸이 근질거리고 땀이 나 견딜 수 없었다.
아이든은 결국 짧게 예쁘다는 말로 모든 것을 함축해 버렸다.
그녀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에게 초대 가주 반지를 전해 줄 때에는 심장이 쿵쾅거려 견딜 수 없었다.
좋아해 줄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소중히 여겨 주겠지? 잃어버리거나 하진 않겠지?
잡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기뻐해 주지 않을까 했던 기대감은 결국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당황하고 좀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더니 결국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또 자신이 뭘 잘못하기라도 한 것인지.
리안은 끝끝내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복잡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였다.
***
황궁 연회장 옆 건물에 마련된 대기실에 들어가 앉았다.
식이 시작하기도 전에 몹시 피곤하고, 지쳤다.
여자가 단 하루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치장하고 가장 축하받는 날.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결혼 예식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러 연회장으로 가버렸다.
내 부모님께는 일전에 미리 편지를 보내 드렸다는 그의 말에 잠시간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결혼을 알게 되고 난 후로도 이틀 동안 정신이 하도 없어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부모님이 그렇게 고대하시던 날이고, 나는 부모님을 위해서 웃어야 했다.
“마님. 어디 또 아프시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안색이 점점 좋지 않으셔서요.”
리제가 내 시중을 들면서 걱정스레 말했다.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리제.”
나는 중얼거렸다.
정말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벌써 숨이 막혀 죽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회장이 내 인생의 끝을 알리는 문같이 느껴졌고, 필요가 다해 버려질 미래의 내가 불쌍했다.
그래서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이 탁하고 막혀 입 밖을 나오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지 못하면 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마님. 저는 늘 마님 곁에 있을 거예요. 언제까지나요.”
리제가 눈물까지 그렁거리면서 말했다.
“…고마워.”
심호흡을 해.
괜찮아, 릴리아나.
빌 커티스와도 산 나야.
그보다 악당이라 불린 아이든이 훨씬 인간답지.
괜찮아.
나중 일은 나중에….
나중 일은… 나중에….
“크흠.”
그때 입구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앞을 바라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일라즈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황태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남자임에도 꾀나 예쁘게 생긴 외모였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나는 황태자를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이전 생에서 그의 소문은 많이 들었다.
웬만한 영애에게 곁을 내주지 않아 태자비를 맞이하는 데에 꽤나 애를 먹었다고 했지.
“자네가 바로 제국의 유일한 공작부인이 되는 이로군.”
황태자는 아이든과 비슷한 또래 정도로 보였다.
그러니까 그 역시 이제 황태자비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전 생처럼 그는 아무나 그 자리에 앉히지 않으려 애를 쓰겠지만.
“예. 그렇습니다, 전하.”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끼고 단 한 번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말이지?”
“예?”
“그대에 대한 무수한 소문들은 익히 들었지. ‘그’ 공작이 좋아 죽고 못 산다는 영애.”
아하하….
그는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전하.
안타깝게도 말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품에 끼고 한 번도 데려와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겠지.”
“민망스럽습니다. 공작 각하께서도 사정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이내 다시 그 예의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를 먼저 만났다면 그대의 위치도 달라졌을 텐데.”
“예…?”
“농담이야.”
무슨 그런 살벌하고 무서운 농담을. 하하….
나는 태자비 같은 부담스러운 자리를 탐하는 여자가 아닌데.
“…맘에 쏙 들어.”
나는 연신 당황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어쨌든 축하해. 그대는 오늘부로 제국의 유일한 공작부인이 되었어.”
“예… 감사합니다, 전하.”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이리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게. 오늘의 주인공들에게 황궁의 일부분을 양보하고 나는 그만 사라져야겠군.”
“예? 아… 예.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전하. 살펴 가십시오.”
그는 예를 갖춰 인사하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아이든 그 녀석에겐 내가 여기 온 거 비밀이야. 그대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 믿어 보겠어.”
“예. 전하….”
멍한 사이 폭풍이 휘몰아치듯이 황태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 정신없는 하루였다.
“이제, 식이 시작될 거예요, 마님. 제 손 잡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제의 손을 잡았다.
“갈까요?”
“응, 리제.”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고 발걸음을 떼었다.
리제의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오니 문 앞에 에릭 슈미트가 서 있었다.
그는 항상 내 곁에서 나를 호위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요 며칠 그를 볼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내가 나온 기척을 느끼고 바로 돌아선 에릭이 나를 보자마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에릭. 오랜만에 보네요.”
내 말에 에릭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가 아니더라도… 아, 아닙니다. 명받은 일이 있어 그간 마님을 호위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연회장까지 모시겠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무슨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에릭의 팔을 잡고 걸었다.
연회장 앞까지 와보니 벌써 하객은 안에 들어가고 문을 지키고 선 기사들과 아이든을 제외하고는 한적했다.
연회장 안에서 듣기 좋은 음률이 흘러나왔다.
에릭이 아이든에게 거수경례를 하였고,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이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을 잡고 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필요에 의해 옆자리에 있게 되는 것.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되는 것.
그러나 결국 언젠가 버려질 패가 되는 것….
“리안.”
그의 입에서 내 애칭이 흘러나왔다.
별다른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 나게 다정한 목소리로 들렸다.
또다시 심장이 요동쳤다.
당신의 다정함이 내게 고통이라는 말.
도대체 제대로 알아들은 건 맞는 건지.
애칭을 부르는 건 정말이지 반칙이잖아.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살포시 얹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든.”
그래요.
이젠 나도 모르겠어.
당신이 그렇게 반칙을 하니까.
야생마처럼 날뛰는 내 감정을 나도 어찌할 수 없단 말이야.
나도 이제부터 막 나갈 테야.
공작님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나를,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이든.”
애절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갈까요?”
내 물음에 사정없이 흔들리던 그가 결심한 듯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그의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걸었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니 웅성거림이 일순 멈추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발판 삼아, 그와 나는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저기서 우리를 보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배경 음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연회장에 나와 그의 구둣발 소리만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앞에는 단상이 놓여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놀랍게도 신성 제국의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보통 제국에서 결혼식을 거행할 때에는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공표하는 자리에 가문의 원로원이나 신랑 측에서 준비된 자를 세웠다.
신성 제국의 사제가 아니라.
“사제가… 왜 여기에…?”
작게 속살거리는 내 목소리는 큰 배경음에 묻혀버렸지만 아이든은 명확하게도 들은 모양이었다.
“사제의 축복을 받는 결혼이야말로 가장 특별하고 성대할 테지. 맘에 안 드나?”
그레이스 축제 첫날, 갓 도착한 사제에게 결혼식 축복을 내리게 하다니.
이 남자는 정말이지…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했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특별하네요.”
평생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았다.
이윽고 바로 앞에 멈춰 선 우리를 사제가 번갈아 바라보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두 분 모두 아름다우시군요.”
나는 사제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어 예를 표했다.
사제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들린 작은 크기의 서류를 펼쳐 보았다.
“오늘 결혼식을 거행할 아이든 딜리아 공작님과 리… 릴…?”
사제가 놀란 듯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내가 바라보자 사제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릴… 릴리아나 데일 영애의 혼약을 주신 앞에 맹세하는 자리입니다. 두 분께서는 이 시간 주신 일라즈의 앞에 서로를 평생의 반려로 인정하고….”
점점 목소리가 떨려오고 느려진다.
뭔가 잘못되었나?
왜 저러지?
“사제님…?”
내 목소리에 사제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데일 영애께서는 모친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해 계십니까?”
“…무슨…!”
아이든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뭐라 하려던 찰나, 내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사제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요?”
“…그대는 그 이름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별안간 사제가 내게 되물어왔다.
하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 이름이 왜?
“아니요. 저는 잘….”
“릴리아나. 그대의 이름은 주신께서 내려주신 이름입니다.”
“예…? 저희 어머니께서는 신앙이 없으신데요?”
신앙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사치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대는 고결한 사람. 신께서 그대와 함께하고 계시군요. 주신의 안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헛되이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해? 내가? 내 삶을?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내가?
그보다 나는 고결한 사람이 아닌데.
이 무슨 부담스러운 상황이란 말인가.
아이든이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누구보다 편안하게.
그는 이 모든 말들이 하나도 놀랍지가 않은 것일까?
나는 사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일평생 신앙을 가지고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제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군요.”
사제는 그저 미소 지었다.
“신성 제국에서는 강력한 신성을 타고난 황녀님께서 계셨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요. 그녀 이후로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만한 신성력을 지닌 황제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모두가 인정한 차기 여황제였지만 어느 날 홀연히 신성 제국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프세아니아 제국으로 말이지요.”
사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신성 제국의 역사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는 것일까?
“[그녀의 핏줄에 주신의 강력한 보호가 함께할 자가 흑발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릴리아나라고 불릴 것이다.]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 미사에서 내려진, 주신의 신탁이었지요.”
아!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게 나일 리가….
그게 나일리가…!
어떻게 그런…!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사제는 한 손을 치켜들었다.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사제의 한마디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사제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들었던 손을 거두었다.
“릴리아나. 그대는 이미 주신의 힘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여러 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회귀라면 말이 되었다.
나도 신이 분명 있다고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여러 번이라니?
도대체 언제?
아이든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대는… 주신의 힘을 사용할 곳을 이미 정하셨군요.”
내가 아닌 내 안의 그 어떤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사제는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걸 어디에 쓰겠다 정한 적도 없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사제가 손을 내밀어 나와 아이든이 잡고 있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놀라서 사제를 바라보다가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분. 잘 들으십시오. 제가 본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꼭 아셔야 합니다. 일라즈의 실이 두 분을 연결해 묶고 있습니다. 쉽게 끊어지지 않을 아주 강력하고 단단한 실이지요.”
나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일라즈의 실이라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릴리아나. 주신이 안배한 힘을 사용하리라 결정한 것은 그대의 선택이었지만, 그 모든 길을 이끄신 것 역시 주신이십니다.”
내 의지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서로를 신뢰하십시오.”
아이든이 흔들리는 눈으로 사제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곧 내게서 시선을 돌린 사제가 아이든과 눈을 맞추었다.
“아시겠습니까? 공작님. 서로를 신뢰하셔야 합니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는 고개를 돌려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앞줄에서 입을 틀어막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럽게 일렁이는 눈빛.
이 상황을 납득하기가 버거웠다.
나는 단지 그와 결혼식만 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왜 이렇게 되었지?
이게 대체 뭐야?
“릴리아나.”
사제의 부름에 고개를 내렸다.
아이든에게서 사제로 옮겨간 시선이 흔들렸다.
“그대 안에 내재된 그 힘이 너무 불안합니다. 그대의 몸을 갉아 먹고 있어요. 이대로는 그대의 약한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나는 며칠 동안 연이어 쓰러졌던 일이 생각났다.
“어… 어떻게….”
아이든의 어린 시절을 꿈을 통해 들여다본 것.
그것은 혹시 일라즈의 힘이었을까?
사제는 우리의 손을 놓아주고 자세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주신이 강력하게 함께한다는 것은 그 앞에 펼쳐진 삶이 평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앞에는 평범한 이들보다도 더 무수히 많은 고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아무도 경험하지 못할 힘을 경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그 앞에 펼쳐진 장애물에 절망치 마십시오. 주신께서는 이겨내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끝에 찾아올 영광을 목도하십시오. 그것이 일라즈의 축복입니다.”
사제는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망설이던 그녀의 입이 마침내 열리고 충격적인 말을 뱉어냈다.
“너는 아름다워. 그러니 강해지렴.”
나는 머리를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제가 한 마지막 말은 내가 꿈속의 소년에게 했던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또다시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당장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몸에 기운이 다 소실된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역시, 내가 아이든의 어린 시절을 꿈으로 꾸었던 것이 주신의 힘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 내가 그런 꿈을 꾸어야 했을까?
꿈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내 의지가 살아있고, 모든 것이 진짜 같았을까?
나는 아이든이 잡아준 손을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아이든 역시 내 손을 강하게 잡아 왔다.
사제는 그런 우리의 손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어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들의 앞에 일라즈의 영광이 함께할 것입니다. 이로써 둘이었던 몸이 주신 앞에 진정한 하나가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정표를 나누십시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제에게서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자마자 일말의 고민 따위 없이 품에서 예물 반지를 꺼내 내 약지에 끼워주었다.
사파이어가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였다.
9월의 사파이어.
그것은 공교롭게도 나의 탄생석이었다.
그는 벌써 내 생일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내 손가락 사이즈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런 터무니없는 의문이 들 수가 있구나.
나는 스스로의 정신력에 감탄하면서 그에게서 남은 한쪽의 반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의 약지에도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로써, 나는 완벽하게 그의 삶에 침범했다.
그의 평화로웠던 삶에 어쩌면 평화롭지 못할 내가 한 발짝 발을 들이민 것이었다.
이내 그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강하게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며 내게 입 맞추었다.
그와 나의, 강렬한 첫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