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다 짊어질게
아이든은 집무실에 앉아 칼튼이 하루 만에 가지고 온 조사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첫 장을 펴자마자 눈이 가는 곳이 있었다.
“…리안.”
“데일 백작부인께서 딸을 늘 그렇게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렇군.”
리안.
맘에 드는 어감이었다.
아이든은 그 이름이 좋았다.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리고 다시 보고서를 넘기면서 읽어 가다가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춘 아이든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칼튼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저도 놀랐습니다만… 보고서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주인님.”
아이든은 다시 시선을 내려 보고서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자벨 디누트]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니까….
“리안이 디누트의 자손이라 그 말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주인님.”
칼튼의 대답을 듣고, 보고서를 보고 있으면서도 아이든은 제 두 눈이 어떻게 되었나 싶었다.
디누트의 자손이라니.
게다가 이자벨 디누트라니.
그 여자는 신성제국 황족 중에서도 가장 신성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당연히 아들들을 제치고 차기 황제로 거론되었을 만큼.
“이자벨 디누트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떠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어. 그런데 그곳이 프세아니아 제국이였다는 말이지?”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주인님? 그녀가 신성제국을 떠날 당시에 신탁이 내려왔었다고 합니다.”
“신탁?”
아이든이 고개를 기울이자, 칼튼이 외 알 안경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그녀의 태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신이 함께할 자녀가 태어난다는 신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흑발의 아이가요.”
“!”
아이든은 커진 눈으로 칼튼을 바라보았다.
흑발!
“리안이… 그 신탁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아닐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마님께서 흑발의 소유자이신 것은 맞으니까요.”
아이든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리안이.
신성제국의 황족.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든은 퍼뜩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칼튼을 바라보았다.
“그 신탁과 리안이 저렇게 된 원인이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의원 말로는 아무런 원인도 찾을 수 없다고 했어. 이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의원인데.”
“조사해 볼까요?”
“그래. 뭔가 나오면 바로 가져와.”
“예, 주인님.”
칼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아이든이 그를 급하게 잡았다.
“집사.”
칼튼이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 랜디라는 아이는 어떻게 하기로 했지?”
칼튼은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만. 리제라는 아이한테 들었어.”
“가 보셨군요.”
따스하게 미소 짓는 칼튼을 보며 아이든은 민망해진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
“자는 모습만 잠깐 보고 나온 거야.”
“그러시군요. 마님께서 지방 잘 사는 귀족가에 급여가 높은 곳으로 알아봐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일단 업무에서 배제시켜 놓은 상태입니다.”“그렇군. 릴리아나는?”
“마님께서는 기력이 많이 쇠해 지신 것 같습니다. 좀처럼 혼자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십니다.”
혼자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면서 용케 다이닝룸까지 내려갔군.
아이든은 쓴 한숨을 뱉어냈다.
“…그래. 그 아이는 부인의 명대로 하도록 해. 옆에서 잘 보필해 줘. 자네가 부인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으니.”
칼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지었다.
“당치 않으십니다, 주인님. 오히려 제게 마님이 큰 힘이 되어 주시고 계시는 것을요. 마님께서 안살림을 맡게 되신 후로 저택이 훨씬 안정적이게 굴러갑니다. 나이만 먹고 우매한 저로서는 늘 마님께 놀라고는 합니다.”
“…자네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모양이군.”
“예. 맞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주인님께서 이렇게 존경할만한 멋진 마님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나를… 아니다. 그만 나가보도록 해.”
칼튼이 집무실을 나가고 아이든은 멍하니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언젠가 떠날 거야, 집사.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옆방에서 달칵 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이든은 집무실에서 옆방으로 바로 연결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익숙한 뒤통수에 깜짝 놀랐다.
리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으아아…!”
뒤돌아본 릴리아나가 비명을 지르며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는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커진 눈으로 달려와 릴리아나를 붙들었다.
“괘, 괜찮아? 어지럽나? 쓰러질 거 같아?”
당황해 버벅거리는 줄도 모르고 물었는데 그녀가 별안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괘, 괜찮아요. 제가 일어날게요.”
거절하는 말과 푹 수그린 고개.
아이든은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눌러 참지 못했다.
“괜찮긴 누가…!”
저지르고 나서야 속으로 놀라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째서 매번 이런 식일까.
스스로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좀 더 잘해주고, 조금 더 챙겨주고, 조금 더 다정하고 싶은데.
하긴.
내 다정함이 고통스럽다고 했지.
그런 사람한테 뭘. 하.
“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어요? 나 아팠어요. 열도 나고 엄청 아팠어요.”
왜 보러 오지 않았냐고?
아이든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서운함을 토로하는 말에 심장이 아렸다.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닌데.
“하루를 꼬박 깨어나지도 못하고 열이 펄펄 끓었대요. 리제는 내가 어떻게 되는 줄로만 알고 너무 무섭고 겁이 났다고 했는데… 공작님은 한 번도 내….”
“갈 수 없었어.”
결국 끝끝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
서운한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도 그럴 사정이 있었던 것인데.
“그 모습을 차마….”
차마 볼 수 없었어.
“그러면 정말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웃게 만든 네가,
누군가를 신경 쓰고 할 말을 고르고 고민하게 만든 네가….
그렇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고통 속에서 더 크게 몸부림쳤을 것이다.
더 큰 죄책감에 잠식당하고 그 빌어먹을 목소리에 눌려 더욱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질까 봐.
그는 두려웠다.
사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이 여자를 의지하고 있었던 건가.
이 여자가 안식처가 되어 버렸던 건가.
어머니에게 거절당했던 것만큼이나,
이 여자가 아픈 게 무섭고 겁이 나.
“공작님은… 내가 아픈 것보다 공작님의 안위가 더 중요하셨어요?”
끝끝내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는 동안 리안은 서운함을 토로했다.
아이든은 그 말을 듣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험한 꼴로 누워있는 나를 차마 볼 수 없었나요?”
서운함 가득 벤 눈동자가 꼭 자신을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든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짓씹듯이 말했다.
“리안, 그런 거 아니다.”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사실상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리안의 말이 맞았다.
나는 또 나만 생각했구나.
내 안위만 중요했구나.
내 공포심은 모두 핑계 거리일 뿐이구나….
가슴이 아팠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아파요.”
흠칫.
아이든은 놀라 리안을 놔주었다.
“저는 공작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구요. 나를 싫어하는 것이라면 차갑게 대하시면 되는 것이고,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래야 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공작님은….”
“…그만해.”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란 말이야.
내 곁에 있어서 네가 아픈 것이면 어떡해?
나 때문에 네가 더, 더 많이 불행해지는 것이면 어떡해?
내가 정말로… 괴물이라서 그런 것이면 어떡해?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어.
아이든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음에 두려웠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제게 거리를 좁혀 오려는 그녀를 위험할지도 모르는 자신에게서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아픈 게 아니라면 그만 일어나 돌아가.”
그는 결단코 그녀가 또 쓰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든은 리안이 힘없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며 멍해졌다.
털썩하고 몸이 바닥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급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 리안!”
안 돼. 안 돼. 안 돼.
아이든은 부리나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며 고함질렀다.
“집사! 집사!”
리안의 침실로 달려가니 침실 정리를 하고 있던 리제가 놀라서 아이든과 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아이든은 침대에 리안을 내려놓고 놀란 얼굴로 달려온 칼튼을 희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의, 의원! 의원을 들라고 해! 당장 다녀와!”
칼튼이 부리나케 달려 나가고 아이든은 리안의 이마에 제 손을 올렸다가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숨도 거칠고, 이마가 불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현상이 다시 또 일어나자 아이든의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하지? 무, 물수건. 물수건!”
“제가 가지고 올게요, 주인님!”
리제 역시 희게 질린 얼굴로 대답하고 침실을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아이든은 리안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면서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안돼, 리안… 제발 정신 차려.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리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얼굴을 쓰다듬어보았다.
손에 닿는 얼굴이 불길이 인 것처럼 뜨거웠다.
마음이 아팠다.
“주인님! 차가운 물이랑 수건 가져왔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리제가 헉헉거리며 달려 들어왔다.
아이든은 리제 손 위에 들린 물이 담긴 그릇과 물수건을 보고 말했다.
“내가 해. 내려놓고 나가.”
리제가 침대 협탁 위에 그릇과 수건을 내려놓고 불안한 표정으로 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주인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눈은 제 주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리제가 방을 나가고 아이든은 수건에 물을 묻혀 짜내고 리안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차가운 수건을 이마 위에 살며시 올려놓고서 리안의 손을 제 두 손 가득히 넣어 잡았다.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는 리안을 보며 아이든은 잡은 그녀의 손에 입 맞추었다.
만약 나 때문에 정말 그녀가 아픈 것이라면,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도 모를 그 원망 어린 말들을 속으로 쏟아내었다.
어디라도 가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숨이 턱 막혔다.
대체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대신 아파 줄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다 짊어질 게… 제발 일어나, 리안….”
‘똑똑’
“주인님. 의원이 왔습니다. 들일까요?”
아이든은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의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아이든의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같은 증상이신가요?”
“그래.”
의원이 방 앞을 지키고 있던 리제를 보며 손짓했다.
“자네, 따라 들어오게.”
의원과 리제가 방으로 들어가 리안을 진찰하는 동안 아이든은 방에서 나와 마른세수를 했다.
칼튼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아이든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님.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신지 좀 되셨습니다. 좀 쉬시는 게 어떠실지요. 마님께서는 괜찮아지실 겁니다. 분명 털고 일어나시지 않았습니까.”
아이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을 거야.”
문밖에서 기다린 지 10분쯤이 흘렀을 때, 안에서 의원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든이 달려 들어가자 의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리안의 손목을 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각하.”
“무슨 일이지?”
“마님의 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의원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 무,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든이 의원을 밀치고 리안에게 다가가 코밑으로 손가락을 대보았다.
어떤 호흡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이게 무슨…! 어떻게 좀 해봐! 의원이라면 사람을 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아이든은 의원의 멱살을 잡아끌어왔다.
“어떻게 좀 해보라고!”
“워,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마님께선 이렇게 되신 이유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왜 맥이 잡히지 않으시는 것인지 잘…!”
칼튼이 당황해 부리나케 다가와 아이든과 의원 사이에 끼어들었다.
“주인님! 모시기 어려운 분을 모셔온 겁니다. 이렇게 대하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우선 나가 계십시오.”
의원이 도망치듯 방을 나가고 나자 아이든은 몰려오는 절망감에 고함질렀다.
“으아아!”
”주, 주인님.”
“나가. 나가!”
칼튼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충격 먹은 얼굴로 울고 있는 리제를 억지로 끌다시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아이든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리안의 입에 제 호흡을 불어넣었다.
불어넣고 또 불어넣었다.
심장 소리를 들어가면서 열심히 인공호흡을 해 봐도 리안의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든은 절망했다.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 이거 아니야… 이거 아니야, 리안. 제발 일어나… 제발….”
침대 옆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아이든은 리안의 손을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흐느끼던 아이든은 이제 멍한 얼굴로 리안의 손만 붙잡은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두 시간이 흘러도 리안의 손을 붙든 채로 요지부동인 아이든을 들여다본 칼튼은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제 주인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부모를 잃고 형제가 떠나고 난 후에도 한동안 저렇게 정신을 놓았던 아이든이 떠올라 더 비통했다.
가엾은 주인이었다.
어찌 사람 복이 이리도 없을까.
“주인님이 방에서 나오시기 전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말거라. 주인님이 나오시거든 내게 알려다오.”
눈물 콧물 쏟으며 어린아이처럼 울던 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집사님.”
칼튼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리제를 가여운 듯 바라보고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
잠깐의 시간이 영원같이 느껴졌다.
흘러가지 않는 시간 속에 자신과 그녀만이 갇힌 기분이 들었다.
불행만 가득했던 삶에 웃음을 안겨주었던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이제는 이렇게 무 쓸모 한 목숨 따위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괜찮지 않을까.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는 삶이다.
매일같이 누군가를 찌르고, 죽이고, 고문하며 괴롭히는 삶의 연속에 무슨 희망 같은 게 있단 말인가.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
악착같이 쌓아 올린 권력과 명예.
생각해보면 사실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아버지 마음에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렇게 아등바등했던 어린 시절이 허무하리만큼 이 자리는 별게 아니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두렵다는 이유로 제 앞에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치며 눈치 보기 급급했던 황제.
그는 솔직히 그런 것에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좀 웃긴 일이었다.
이토록 허무할 수 있다니.
그래도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던 자리기에 악착같이 살아왔다.
제국을 사랑하고 수호하는 것이 제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제 삶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저 그녀가 저와 같은 세상에서 숨 쉬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던 제 바람은, 이토록 이루기 어렵고 불가능한 꿈이었을까?
꿈속에서 죽어간 그녀가 실제로도 그렇게 피 흘리며 죽어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제 힘이면 어떤 위험으로부터든지 그녀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죽음이었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나.
칼에 꽂혀 죽지 못하니 이렇게 대뜸, 어이가 없게,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죽는 단 말인가.
아이든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절망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뿐.
‘죽자. 죽어 버리자. 살아갈 이유가 이젠 없다.’
그때였다.
아이든의 손안에 잡혀있던 리안의 손가락이 순간 꿈틀거린 것은.
아이든은 그 순간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 리안…?”
리안의 손을 놓고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코밑에 가져다 대보았다.
느껴진다.
분명 느껴진다.
아이든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리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쉬었어.
수, 숨을. 숨을 쉬었어.
약하지만 분명 콧김이 느껴졌다.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아이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의… 의, 의원… 지, 집사…? 집사…! 집사! 집사!”
아이든의 떨리는 고함소리에 리제가 퉁퉁 부은 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어… 그래. 너, 너 가서 집사 불러와. 아니, 아니 의원 불러와! 방금 리안이 숨을 쉬었다고 전해! 빨리!”
리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 나갔다.
아이든은 다시 주저앉아 리안의 손을 꼭 붙들고 입 맞추었다.
“리안… 제발 조금만 더 힘내.”
작게 속삭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종교는 없었다. 당연히 신앙심도 없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신이 되었건 제 기도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발 그녀를 살려주세요.
제발 그녀를 살려주세요.
***
또 그 장면이다.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방 안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이든 딜리아.
약하고 어린 소년.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침대 옆 구석에 숨어 흐느껴 우는 그 소년은 이전의 꿈과는 다르게 조금 자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게는 어린 소년일 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는 또다시 새빨간 생채기가 나 있었고, 이번에는 귀밑으로 피딱지마저 앉아 있었다.
가엾은 아이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나는 급하게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들어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동자가 텅 비어 보였다.
나를 알아본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소년의 눈동자에 가슴이 아팠다.
“…요정님이세요…?”
“뭐…?”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나를 구해주러 오셨어요? 아니면 나를 위로해주러…?”
아아….
아아, 아이든….
나는 그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너를 위로해주는 것은 나라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고마워요, 요정님….”
나를 어떻게 불러도 좋아.
어차피 이건 꿈일 뿐이니까.
“매일매일을… 잘 버텨내고 있구나. 기특하게도….”
“…내가… 기특해요…?”
“그럼. 아주 멋있고 기특해. 너는 아주 멋진 어른으로 자랄 거란다.”
그리고 내게 상처를 가져다주겠지.
“누구도 너를 넘어서지 못할 만큼.”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어른은… 어른은 아주 무섭고 이기적이고 나쁘니까요.”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든 어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란다, 아이든.”
“…요정님처럼요?”
“…그래. 나처럼.”
“…아파요. 매일매일 너무 아파요, 요정님….”
나는 그를 더욱 꼭 끌어안고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든.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너를 집어삼킬 수 없을 거야. 넌 괜찮을 거야.”
“…….”
내 위로가 얼마나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것인지 너무 잘 알았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그 어떤 것에도 쉽게 굴복해서는 안 돼… 너는 잘 해낼 거야. 너는… 꼭 살아남을 거야.”
어른들의 폭력에 굴복하지 마.
그들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지 마.
너는 그저 너일 뿐이란 걸 보여줘.
나는 소년의 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너는 사랑받아 마땅해. 너는 행복해져야 마땅해.”
흠칫.
소년이 몸을 떨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이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밤하늘의 그 어떤 별들보다 반짝이고, 깊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보다 더 아름다워.”
내 한마디 한마디에 소년의 커진 눈이 일렁거렸다.
“너는 아름다워, 아이든. 그러니 강해지렴.”
끊임없이 일렁거리던 눈동자가 일순 멈추었다.
그 곧은 시선이 내 입에서 내 눈으로 향했다.
“요정님.”
“그래.”
“요정님은 반짝거려요.”
“뭐?”
“다시 오실 건가요?”
“글쎄….”
그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란다.
이건 그저… 꿈일 뿐이니까.
“다시 와주세요.”
나는 커진 눈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꼭… 나한테 와 줘요.”
“나는….”
“…나한테, 꼭 와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저 꿈일 뿐인데…
어쩌면 이다지도 실제 같을까?
그의 곧은 눈빛이 어쩌면 이다지도… 진짜 같을까?
“기다릴 거예요. 몇 시간이라도, 며칠이라도, 몇 년이라도… 내 옆에 나타날 때까지.”
“그래.”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었다.
“강해질게요. 이겨낼게요. 누구도 나를… 넘어서지 못할 만큼.”
“그래.”
“그래서 가질 거야.”
뭐…?
“…당신을요.”
지금 무슨 소리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의 당신보다 더 반짝거리고… 더 빛나게 클게. 반드시 그럴게.”
둔탁한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지금의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혼란했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 릴리아나.”
!
온몸의 세포가 발작을 일으키듯 소름이 쫘악 끼쳤다.
소년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널 가지고 싶어졌어.”
흐릿한 시야 속에 소년의 눈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잘 가, 요정님. 다시 만나.”
새끼 범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시야가 점멸했다.
“으헉…!”
나는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 마님!”
울먹이는 리제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손에 물수건을 든 채로 리제가 내 팔을 붙들었다.
“괘, 괜찮으세요?! 정신이 드세요?!”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리제와 방안을 둘러보았다.
내 침실이었다.
“…어떻게….”
“주인님께서 마님을 안고 오셨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의원이 다시 다녀갔어요. 맥이 짚이지 않으신다고 정말 쩔쩔매고 어쩔 줄을 몰라 하셨어요! 돌아가신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맥이 짚이지 않아…?
내가…?
“겨우 맥이 잡혀 얼마나 놀랐는지… 주인님께서 끼니 거르지 말고 간식까지 무조건 잘 챙겨 먹이라고 신신당부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주인님 얼굴이 어찌나 사색이 되셨는지….”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니…?”
“네 시간 정도 된 것 같아요. 다행히 금방 깨어나셨네요. 온몸이 얼음장 같고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셔서 이불도 한 채 더 가져와 덮어드렸어요.”
나는 어두운 방을 밝혀주는 등을 올려다보고 창밖을 돌아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어스름한 하늘 아래 모든 풍경의 실루엣이 아스라이 보였다.
시야가 아직도 좀 흐릿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불을 꽉 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간헐적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내 방금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그저 꿈일뿐이건만 그 순간에 느꼈던 소름 돋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 곁에 있어, 릴리아나.]
그 아이가 한 말은 내가 파혼을 위해 그를 찾아왔을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게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눈빛은 절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가엾다고만 생각했던 소년은 보호받아야 할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채로 몸을 한껏 웅크려 때를 기다리던 범 새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포문을 내가 열어버렸다.
잘 됐다고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 어린 나이에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소년을 가엾어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마님께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맥은 다시 잡히지만 너무 약하다고 하시니 좀 쉬실 수 있도록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제 주인을 침실로 데려간 칼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십 년은 못 잔 사람처럼 초췌해 보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마님께서 깨어나시면 보고드리겠습니다. 우선 좀 쉬십시오. 주인님께서 건강하셔야 마님도 돌보실 수 있습니다.”
칼튼의 말에 아이든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앉았다.
“알았으니 나가 봐….”
“뭐라도 드십시오.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올려보내겠습니다.”
“됐어. 그냥 물이면 돼. 리안 깨어나면 끼니 거르지 않게 하고 디저트까지 잘 챙겨 먹여.”
“예, 주인님….”
“잘 테니까 나가.”
칼튼이 방을 나가고 나서 아이든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맡겼다.
안도의 마음이 들어 긴장이 풀어졌는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안도한 것도 잠시, 또 다른 불안감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번이 지나갔다고 그녀에게 죽음이 또 찾아오지 않을까?
마냥 안전하다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지켜야 할까?
어떻게 해야 리안을 죽음에서 건져 올릴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지켜내고 싶어.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녀가 없는 세상 따위에선 살아갈 수조차 없을 터였다.
죄책감에 짓눌려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어쩌면 그녀가 죽어가거나 피를 흘리는 꿈을 꾸는 것이 힌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위험을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아이든의 문제는 꿈의 괴로움 따위가 아니었다.
몰려오는 피곤에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리안이 건강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