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작의 아내로 사는 법 2권
11. 진짜일 리가 없어
우리는 어색하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황궁 연회장에 나를 왜 데려갔었는지 묻지 못했고, 그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침실로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리제를 제외한 모든 시중을 물렸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천근 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몸이 무겁고 한겨울에 매서운 바람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겨우겨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씻고 나온 나는 잠옷으로 환복한 뒤에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이 뭐라고 너무 위로가 되었다.
“나 깨우지 마, 리제… 저녁은 먹지 않겠다고 전해 줘….”
“아가씨. 안색이 너무 창백하세요. 의원을 들라고 할까요?”
리제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됐어.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괜찮아.
하고 더 말하려고 했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낯설지 않은 분위기.
아이든 딜리아 공작과 닮았는데 그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냉기가 풀풀 풍기는 그런 사내.
중년의 남성이 등받이 끝에 피같이 붉고 큰 보석이 박힌 의자에 앉아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이 사냥감을 쫓는 거대한 포식자의 눈 같아 보여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왜 나를 이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치워라. 퍽 귀찮은 존재구나.]
무시무시한 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누군가가 양팔로 나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내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 아버지… ]
내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이건 내가 아니다.
그것을 인식하게 되자마자 몸에서 내가 분리되어 나왔다.
나는 이제 공중에 떠서 방금 전 내가 차지하고 있었던 육신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작은 소년은 아이든을 꼭 빼닮아 있었다.
[아버지…!]
[쯧.]
중년의 사내가 혀를 차고 아이든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눈이 흡사 아이든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정도를 꼽으라면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이 중년의 사내를 선택할 것이다.
[쓸모없는 것. 사랑받고 싶거든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라 그렇게 말했건만. 무능하고 볼품없는 녀석!]
겨우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년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몸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한없이 가엾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 제가… 제가 다시 해낼 수 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아이든 딜리아! 너는 딜리아 가문의 수치다!]
[아버…. ]
[명이 있기 전에 방에서 나오면 어찌 될지 알고 있겠지.]
몸을 덜덜 떨면서도 소년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꺼지거라!]
무시무시한 중년 남성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장면이 바뀌었다.
아기자기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방 안에서 흐느껴 우는소리.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그가 울고 있었다.
철저하게 외롭고 무섭고 추운 이 방에서.
나는 침대로 다가갔다.
가엾은 그는 침대 위도 아닌 침대 옆 구석에 들어가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공포로 얼룩진 그의 얼굴 어디에도 온기는 없었다.
심지어 뺨 한쪽에는 새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가엾게도 제 어미에게 뺨이 부풀어 오르도록 맞은 것이다.
아비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아… 아이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리 위로 살포시 손을 얹어보았다.
그는 어차피 나를 보지도 내 손길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정상일 텐데도.
내 손길에 그는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천천히 떠진 눈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아른거렸다.
“…님…! 마님!”
익숙한 음성이 걱정과 불안을 가득 실은 채로 귓가에 밀려들었다.
나는 천천히 확보되는 시야에 익숙해지고 나서 두 눈을 두어 번 느리게 깜빡였다.
리제가 걱정으로 얼룩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리제를 부르려고 했는데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하려던 걸 포기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님! 저 부르신 거예요? 뭐 필요한 게 있으세요? 죽을 가져올게요! 아, 아니 의원부터… 의원부터 불러올게요!”
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정신없구나, 너는.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일… 으켜 주겠니…?”
목소리가 나왔다.
비록 다 쉬어 버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리제가 부리나케 나를 부축해 일어나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니…?”
“꼬박 24시간 내내 앓으셨어요. 이마는 열이 펄펄 끓는데 몸은 얼음장 같으시고… 아무리 의원이 다녀가도 열은 내리지도 않으시고… 나중에는 눈동자까지 돌아가셔서…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마님은 모르실 거예요….”
“내가…?”
그래서 몸이 이렇게 무겁고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건가…?
나는 고개를 내려 내 왼팔에 꽂혀 있는 링거를 바라보았다.
“의원은… 뭐라고 하니…?”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어요. 열이 날 만한 근거가 아무 데도 없으시다고… 의원을 불러올게요, 마님!”
“…그래.”
리제가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가고 난 후 나는 침대 옆으로 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이었다.
어제 정오에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나는 다시 해가 뜬 낮에 깨어났다.
왜 아팠을까.
그전까지도 열은 없었는데.
전날에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던 것 때문일까?
그러다 문득 꿈에서 보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저 꿈일 뿐일까…?
그는 그런 끔찍한 시절들을 보내며 성장해온 걸까?
너무 생생하게 떠오르는 어린 그의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아파왔다.
그가 너무 가엾게 느껴졌다.
이러다 정말 심장병이라도 걸리는 게 아닌지….
하지만 이내 나는 자조했다.
꿈속의 그가 가엾다고 한들 내가 뭘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나는 그에게 이미 심장을 난도질당하고 버거울 정도로 아픈 거절감을 느꼈는데.
더 이상의 오지랖은 부리지 말자.
그저 모든 게….
“꿈일 뿐이야.”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후 리제와 의원이 방으로 돌아왔다.
“마님, 두통이 있으시다거나 어디 아프신 곳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의원이 내 앞에 앉자마자 한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멍한 표정으로 의원이 내 손목의 맥을 짚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말 뜬금없는 말을 했다.
“…공작님께서는… 무얼하고 계시지?”
의원이 잠시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리제도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공작님께서는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마님께서 깨어나셨다고 보고는 드렸으니 나중에 찾아오실지도 모르지요.”
의원은 여상히 말하며 내 손목을 다시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그렇구나.
업무… 내가 아프다는데도.
“열이 펄펄 끓는 내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겠지.”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리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데도 나는 입을 멈추지 못했다.
“한 번을 깨어나지 못하고 의식이 없다 해도 찾아오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찾아와? 희망고문 같은 소리는 되었어, 선생.”
“…마님.”
의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님께서는 지금 맥이 느리고 너무 약합니다. 기력이 많이 쇠해지셨습니다. 무조건 안정을 취하시고 잘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알았으니 그만 가 봐도 좋아.”
“약을 처방해 놓겠습니다. 매 끼니마다 식사 후 달인 약을 꼭 챙겨 드십시오. 무리하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업무에서 손을 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의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는 등을 돌려 나갔다.
나는 여전히 잔뜩 슬픈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리제를 바라보며 픽 웃어버렸다.
“인상 풀어, 리제. 누가 보면 동네 건달인 줄 알겠어.”
“마님….”
“그럴 거 없어. 넌 몰랐겠지만 사실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닌 데 뭐. 우린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살고 있는 것뿐이야.”
그리고 귀족 사회에 이런 결혼은 너무나 흔한 것이고.
“일어나는 것 좀 도와줄래? 다이닝 룸으로 가야겠어.”
“마님! 음식이라면 제가 가지고 오면 돼요! 아니면 마리를 시켜도 되고요! 제발 누워 계세요!”
“리제.”
나는 팔을 뻗으며 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나는 그냥 잠시 자고 일어난 거야. 꿈까지 꾸었는걸.”
“꿈이요?”
리제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픽 웃으면서 방문을 열고 나섰다.
“절대 꿔서는 안 될 것 같은 꿈. 그래서 열이 났나 보지 뭐. 의사 말 들었지? 잘 먹고 잘 쉬면 돼.”
“저는 마님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요.”
“나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내가 어떻게 얻은 목숨인데.
“정말 다행이에요.”
리제가 나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제 눈물을 훔쳐냈다.
“너를 여기다 덜렁 두고 내가 죽긴 왜 죽니. 그만 울어.”
“네, 마님.”
나는 피식 웃어주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저택에서 일어났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마침 식사 준비 중이었는지 다이닝룸에서 고용인들을 지휘하던 집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여기까지… 시녀들을 시키시면 되는데요.”
“내가 내려오고 싶어서 그랬어요. 몇 시간 안 지난 거 같은데 오랜만에 뵙죠?”
내가 하하 웃으며 말하자 칼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님.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머나.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이다지 많은 줄은 몰랐는데요?”
집주인도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다.
“저택의 모두가 마님을 걱정했지요. 당연한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그런가요.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그리고 내 말에 뼈가 있음을 알아차린 칼튼이 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며 급히 발랄하게 말했다.
“아주 맛있는 향이 코를 찌르는걸요? 배가 정말 고파요, 칼튼.”
“어서 음식을 들이라 명하겠습니다.”
“말간 수프는 싫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예, 마님.”
아무리 아팠다고 해도 겨우 하루뿐이었고, 나는 말간 수프를 정말로 싫어했다.
커티스 백작저에서 내가 주로 먹은 음식이 말간 수프였으므로.
아마도 사용인들이 내게 그런 음식을 가져다 준 것일 테고, 빌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알았다고 한들, 무엇이 바뀌었을까 싶었다.
곧 따듯하고 진득하게 끓여낸 버섯 포타주와 산뜻한 샐러드, 가벼운 와인 한 잔이 나왔다.
나는 샐러드를 한입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내 옆에 도열해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 여섯 명의 사용인들과 리제를 보았다.
도대체 왜들 저러지?
리제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평소답지 않은데?
나는 입에 있는 것을 씹어 삼키고 물었다.
“다들 오늘 한가해?”
내 말에 사용인들이 움찔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서로 눈치 보기 급급하던 그들 중 한 명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님.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요?”
“응. 맛있어.”
“저… 저희가 일전에 저질렀던 일들….”
응?
일전에?
나는 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다시 방금 전 입을 연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뭐?”
“저희가 마님을 기만하고 무시했다고 느끼셨던 일이요….”
아.
리제를 따돌렸던 일.
나는 도열한 사용인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이들이 최초의 근원지였던 모양이지?
내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보자 거기 서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정말 정말 마음 깊이 반성했습니다. 이번엔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어요.”
“…왜?”
내 질문에 그 사용인이 내 앞으로 걸어와 거리를 좁히곤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저희가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존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존중받을 수 있다는 마님의 말이 저희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했어요. 저희가 크게 잘못했습니다. 마님께서는 진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분이세요.”
그러니까 왜?
이제 와서 왜?
그런 말을 하기엔 시기가 너무… 많이 지나지 않았나…?
“사실은 늘 이렇게 사죄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님께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셨다는 말을 듣고 저희 모두 심장이 철렁했어요. 이대로 아무 사죄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봐….”
사과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것일까,
본인을 위해서 하는 것일까…?
사실은 스스로 사죄하고 마음이 편해지지 못할까 봐서.
그 죄책감을 털어내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겁이 났던 건 아니었을까?
그들의 마음에 짐이 이제 곧 가벼워지겠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여기 멀쩡하게 앉아 있잖니. 걱정해 주어 고맙구나.”
싱긋 웃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들고 멍청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파서 걱정이 되었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내 말이, 낯 뜨겁고 부끄럽게 하는 칼이 되었으리라.
“마, 마님께서 무,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나와 내게 다가왔던 사용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조소가 이려는 것을 참아냈다.
이 아이는 전혀 나를 걱정한 것이 아니로구나.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지. 사람 보는 눈이 생기기도 전에 눈을 감으면 내가 얼마나 억울했겠니.”
그녀가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아프고 나니 신기하게도 그런 눈이 생기는 것도 같구나. 재미있지 않니?”
내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아니, 사실은 나는 너무 오랫동안 참고 살아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예쁨 받고 싶어서.
빌 커티스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왜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까?
사랑받고 싶은 이들의 눈치만 보면서 전전긍긍….
나는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리제.”
“네, 마님.”
“칼튼 집사 좀 불러오겠니?”
“네, 마님.”
리제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이닝룸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도열해 있던 사람들을 죽 다시 훑어보았다.
“다들 내 걱정까지 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딜리아저에 이렇게 충직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많아서 안심이 되네. 그리고 사죄라면 한 번 한 것으로 끝난 일이야. 그게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내가 이미 받아들였잖니. 두 번은 필요치 않아.”
그리고 내 앞에 선 사용인을 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움찔하던 사용인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랜디라고 합니다, 마님.”
랜디.
나는 나지막하게 이름을 읊조리곤 싱긋 웃었다.
“업무 담당은?”
“이… 이층 청소를 맡고 있습니다.”
“그래?”
목이 말랐다.
열이 내려가고 난 후유증일까?
나는 눈앞에 있는 와인 잔을 들어 내용물을 한꺼번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곧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전에 파고들었다.
“마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칼튼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칼튼. 내가 이 집의 안주인이죠?”
“예, 마님. 그렇지요.”
“그렇다면 인사권도 내게 있는 것이겠군요?”
칼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저기서 흠칫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선 이와 다른 사용인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마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마님께 있으신 것이 맞습니다.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칼튼.”
나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님을 모실 때에도 뒷말이 붙었나요?”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칼튼이 흠칫하며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명하시면 뜻에 따르겠습니다.”
“랜디. 2층 청소 담당이라더군요. 저 아이가 여기 있는 동안 2층은 누가 청소하고 있나요?”
“예…?”
“나는 식사 후에 더러운 복도 바닥을 걸어 방에 가면 되는 것이군요. 그렇죠?”
“마, 마님…!”
랜디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미소를 거두고 정색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이 저택에서 필요치 않을 것 같군요.”
“어째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게 보였다.
그녀는 나보다, 제 주인보다도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마님.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 아이가 내게 일전에 리제를 따돌린 일을 사과했어요.”
“예? 사과를요?”
칼튼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저 아이 뒤에 도열한 많은 이가 내게 사과했지요.”
“그런데 왜….”
“리제의 따돌림을 주도한 자가 누구일 것 같나요?”
칼튼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빙긋 웃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마님은 그들을 용서하신 것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했죠?”
“그….”
“랜디. 저 아이가 내게 말했어요. 마님께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셨다는 말을 듣고 저희 모두 심장이 철렁했어요. 이대로 아무 사죄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봐….”
나는 이전에 내가 들었던 말을 흉내 내었다.
칼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님을 걱정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이 내게 사과하고 리제에게 사과했어요. 우린 분명 사과를 한 번 들었고, 나는 그들을 용서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모두 해고당하든지 내가 이 저택을 나갔든지 둘 중 하나겠죠.”
그런데 왜…?
딱 그런 표정이었다.
칼튼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둔하군요. 그게 정말 내게 한 사과 같아 보이나요? 이 아이는 그저 제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주인의 마음이 불편해지든 말든. 분명 이 사과도 이 아이가 주도했겠죠. 하녀는 자신의 안위나 감정을 주인보다 위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정말 충성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아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랜디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딜리아를 등질 수도 있겠죠. 그런 무서운 가능성을 곁에 두고 있을 마음이 내게 없어요.”
“아.”
칼튼은 그제야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 서 있는 자들은 각자 자리에 가서 제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해주시고, 랜디 저 아이는 내보내주세요.”
“마, 마님…! 사, 살려주세요! 제가 더 잘 할게요! 제발… .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랜디는 그대로 털썩 무릎 꿇고 주저앉아 울면서 빌었다.
나는 음식을 채 다 먹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랜디를 내려다보았다.
입맛이 사라져 버렸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나는 순식간에 지쳐버렸다.
“멀리 지방 어딘가에 사용인을 구한다는 저택을 찾아서 추천서를 넣어주세요, 칼튼.”
“…알겠습니다, 마님.”
칼튼의 대답 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곤 엉엉 울고 있는 랜디의 목소리뿐이었다.
“랜디… 그만 그치지 못하겠니?”
내 차가운 말에 랜디가 공포에 휩싸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 마님… 저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모두 여기에 있어요. 제, 제발…!”
나는 여전히 무감한 눈으로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정말 걱정했다면 24시간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겨우 식사를 들려는 내게 불쑥 찾아와 이래야 했을까? 너는 하녀의 위치에 대해 내가 한 말… 정확히 알고 있었잖니? 그런데도 이렇게 행동했지. 랜디. 나는 너 때문에 식사를 중단했어. 알겠니?”
“마, 마님… 흐흐윽… 제발….”
나는 고개를 돌려 칼튼을 바라보았다.
“…가족들도 모두 이사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도록 하세요. 나는 올라가서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내 다리에서 이 아이 좀 치워주시고요.”
칼튼이 재빨리 눈짓하자 도열해 섰던 고용인들이 달려와 랜디를 내게서 떼어냈다.
“지방이라도 운이 좋으면 삯을 많이 줄 수 있는 귀족이 있을 테지.”
내 중얼거림에도 칼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아서 그녀를 먹고살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피곤하구나, 리제.”
리제가 부리나케 나를 부축해왔다.
칼튼의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2층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한숨 주무시겠어요? 아니면… 수프라도 좀 가져다드릴까요? 아까 드시지 못하셨잖아요….”
걱정이 가득 실린 목소리에 나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그냥 한 말 아니야, 리제. 정말 피곤하고 지친다… 좀 잘게.”
리제는 불안한 눈빛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혹여나 다시 열이 오르거나 사경을 헤맬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염려하지 마. 괜찮을 거야. 1시간 뒤에 다시 깨워줘. 알겠지?”
“예, 마님….”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꿈 때문일까?
열이 나서였을까?
랜디 때문에 너무 기력을 소진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로 눈조차 뜨고 싶지 않을 만큼 심신이 지쳐버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다시 거짓말처럼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한 시간 지나면 깨워 달라고 했는데 나를 그냥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깊게 자고 일어나서인지 배도 고프고 기력이 좀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먹을 시간도 이미 훌쩍 지나버렸다.
또다시 요리를 하라고 주방장을 닦달하고 싶지는 않은데….
한숨을 쉬는데, 문이 달칵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리제가 트레이를 끌고 들어오고 있었다.
“리제.”
“아. 마님 깨셨어요? 안 그래도 깨워드리려고 했어요. 저녁을 가지고 왔어요.”
잘 됐다.
정말 배가 고팠는데.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티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못 보던 편지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게 뭐니?”
“아. 그거 공작님께서 두고 가셨어요.”
“…두고 가?”
“마님 주무시고 계실 때 오셨다가 조용히 그것만 두고 돌아가셨어요.”
…오긴 왔구나.
편지 봉투는 실링 처리도 없이 열려 있었다.
나는 쉽게 편지지를 꺼내어 볼 수 있었다.
[다녀온 황실 연회장에서 우리 결혼식이 이틀 뒤에 거행될 예정이다. 축제의 시작 날 말이야. 우린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하게 될 거야. 연회장에서 그대에게 이런 말을 모두 해주고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는데… 릴리아나. 그대를 아프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
그리고 기나긴 공백 끝에는 단 두 글자가 더 적혀 있을 뿐이었다.
[부디.]
뭔가 더 적으려던 것 같은데.
그가 더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부디.
그리고 아무 글도 적지 않으면 내가 그 속내를 어찌 안단 말이야?
게다가 이틀 뒤에 결혼이라니!
이런 건 미리 언질을 주어야지!
정말이지!
나는 손에 들린 편지지를 와락 구겨 버렸다.
리제가 흠칫 놀라며 내 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 마님?”
“정말이지 배려라고는 새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네에?”
이렇게 불친절한 결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리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들!
빌과의 결혼도 이렇게 불친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짜증스럽게 편지지를 두 손에 들고 구깃구깃 구기고 짓이겨 버렸다.
나를 아프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는 그의 사과 아닌 사과 같은 글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난 후였다.
***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아팠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열이 펄펄 끓는다고 했다.
부인이 아끼던 시녀가 달려와 제게 눈물 콧물 쏟으면서 그 사실을 고했을 때, 아이든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가장 뛰어난 의원을 찾아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달려 들어온 의원이 그녀를 진찰하고 제게 와서 고했다.
맥이 약하고 느려졌다고. 원인을 찾을 수가 없노라고.
늘 불면 날아갈 것 같던 그 여자는 결국 그렇게 무너졌다.
아이든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음에 절망했다.
하루 종일 서류는 1장도 넘기지 못했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뭘 먹어도 전부 게워냈고, 결국 그는 아무것도 들이지 말라 고함질렀다.
끝없는 어둠에 먹히는 기분이었다.
찬란한 빛 같던 그녀가 보고 싶었다.
손을 잡아주고, 얼굴을 보고 머리를 쓸어주고 싶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빌어먹게도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차마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너 때문이야, 아이든. 너 때문에 그녀가 저렇게 되었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또 제 머릿속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이든은 괴로움에 두 귀를 막고 침실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너 때문에 그녀가 망가졌어. 너 때문에 그녀가 불행해.]
“아니야… 닥쳐…!”
[너 때문이야. 너 때문. 괴물 같은 너 때문.]
“으흐… 제발 닥쳐…!”
웅크린 몸을 바닥에 엎드리고 괴로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는 이내 실제가 되어 귓가에 나직하고도 강렬한 속삭임이 되었다.
“가엾은 아이든. 그러게….”
아이든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침실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 혼자뿐이었다.
가구의 실루엣을 제외하고는 끝없는 어둠만이 시야에 가득 찼다.
“…계속 혼자였어야지.”
“!”
곧이어 귓가에 파고드는 속삭임에 온몸이 굳었다.
커진 동공에 일렁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어둠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아… 아….”
[넌 혼자였어야 해.]
마지막 속삭임을 끝으로 그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울고 또 울다가 끝끝내 정신을 잃었다.
꿈속에서 아이든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혼자서 용서를 빌며 울고 또 울었다.
그 찰나 이상한 형체를 보았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움켜쥐고 짜내듯 고통스럽던 심장의 아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울며 잘못했다 빌던 어린 그는 그렇게 마법처럼 잠이 들었다.
아이든은 그렇게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아이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이 밝아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방이 환했다.
그는 바닥에 웅크려진 몸 그대로였다.
머릿속에서도 귓가에도 더 이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 따뜻하고 편안한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어기적거리며 티 테이블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창밖으로는 태양이 점점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었고, 정원사가 일찍부터 출근해 가지치기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아이든은 멍한 표정으로 정원사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들이 실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꿈이었던 듯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고요한 방 안에는 그 혼자였고, 창밖으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고 아늑했다.
“…진짜일 리가 없어.”
아이든의 입으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릴리아나가 저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닐 것이다.
세상만사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니까.
“…진짜일 리가 없어.”
헛것을 본 것이다.
아니. 꿈을 꾼 것이다.
불안감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토록 괴로움에 몸을 벌벌 떨었는데.
그 여파로 온몸 구석구석이 아려 왔는데도.
아이든은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칼튼입니다. 의원이 왔습니다.”
의원.
아이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맞아.
릴리아나가 아팠어.
아이든은 몸을 벌떡 일으켜 빠르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
칼튼 뒤로 의원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은 좀 어떻지? 깨어났나?”
칼튼을 본체만체하며 의원에게 묻자, 칼튼은 조용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고 의원이 앞으로 다가와 고개 숙였다.
“딜리아 가문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쓸데없는 인사는 집어치우고.”
“마님께서 정신이 드셨다는 전갈을 받고 왔습니다.”
“! 깨어났어? 그래. 어서 가서 진찰하도록 해. 어… 아. 그리고 나를 찾거든… 어… 업무 중이라고 전해. 어서 가.”
“예, 가주님.”
의원이 릴리아나의 침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아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 폴쳐를 불러와. 오늘은 일하겠다고 전해.”
“마님께 가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는 거야. 칼이나 불러와.”
“…예, 주인님.”
“아. 그리고 집사.”
“예. 말씀하십시오.”
“릴리아나에 대해서 알아 와. 그녀에 관해서라면 그게 뭐가 됐든 상관없어. 전부 다. 조사해서 나오는 건 다 가져와.”
“예…? 조사를요…?”
“조상의 지병까지도 뭐든 나오는 게 있으면 다 알아오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칼튼의 대답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와 겉옷만 주섬주섬 걸쳐 입었다.
그리고 집무실로 향하면서 아이든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를 위해 모든 걸 해 줄 거야.
그게 보석이든, 보물이든.
부이든 명예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 때문에 그녀가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거야.
그게 증명되면… 그렇게 되고 나서 뭘 생각해도 늦지 않아.
아이든은 집무실로 가자마자 미친 듯이 일을 시작했다.
중간에 하녀 한 명이 들어와 의원이 남긴 쪽지를 전해 주었다.
부인의 맥이 어제보다는 많이 안정되었지만, 아직 불안한 상태이고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소견이었다.
여전히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글과 함께였다.
아이든은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일에 몰두했다.
어제 종일 쌓아둔 일이 많아 집중하기도 좋았다.
십여 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 들어온 칼 폴쳐도 제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일만 하기를 다섯 시간.
칼 폴쳐가 지쳐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돌아가 쉬도록 해, 칼.”
“예….”
“수고 많았다. 진심으로.”
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제 상관이 제게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한 적이 한 번이나 있던가?
달라진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든의 입에서는 익숙하고 살벌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일도 죽은 듯이 일만 해야 하니까 무조건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돌아가서 뱃속에 기름칠이나 해 두던지.”
“아아… 예….”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칼이 대답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뭉그적거리고 있으니 아이든이 대뜸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뭐해?”
“예?”
“꺼져.”
“아, 예!”
칼이 벌떡 일어나 모자를 들고 방을 나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이든은 발걸음을 떼 집무실에서 나왔다.
자신의 침실 앞에 멈추어 선 그는 선뜻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지 못하고 옆방을 바라보았다.
잘 쉬고 있으려나.
깨어났다고 하니 잠깐 얼굴만 보고 나와도 되지 않을까?
아이든은 망설이듯 제 방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다가 이내 다시 손을 거두었다.
잠깐만 보고 오자.
옆방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리제가 안에서 제 주인을 지켜보다가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벌떡 일어나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상태가 좀 어떻지?”
아이든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제게 예를 갖추고 인사한 리제가 그의 물음에 쓰게 웃었다.
“점심을 드시지 못하셨어요. 몇 사용인들과 소란이 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잠드셨는데 다행히 편안해 보이세요.”
“소란…?”
아이든은 커진 눈으로 리제를 내려다보았다.
리제는 낮에 있던 일의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릴리아나가 어떻게 대처하고 올라왔는지까지도.
아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만 가봐. 부인 옆에는 내가 있을 테니.”
“예, 주인님.”
리제가 기쁜 얼굴로 인사하고 사라졌다.
아이든은 침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곤히 잠든 그녀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아이든은 릴리아나의 볼록한 이마, 정갈한 눈썹, 길고 새카만 속눈썹, 오똑하고 선이 예쁜 콧날과 한없이 여려 보이는 하얗게 부르튼 입술까지 얼굴의 구석구석에 시선을 맞추었다.
마치 아주 오랜 세월 보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진득한 시선이었다.
그러다 문득 리제가 했던 소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없이 여려 보이면서도 놀랍도록 강한 여자구나, 너는.
그날도 그랬다.
처음 이 저택에 입성한 그녀를 남겨두고 긴 외출을 하고 돌아온 날.
뒤늦게 칼튼에게 그날 있었던 모든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에 아이든은 솔직히 좀 많이 놀랐었다.
제 전담 시녀, 그것도 친정에서 데려온 아이에게 손찌검까지 할 정도의 강단이라니.
이렇게 여려 보이기만 하는데.
어쩌면 겉은 강해도 속은 그렇지 못한 자신보다, 릴리아나가 더 강하고 멋진 여자 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가 제 과거와, 제 새카만 괴물 같은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어떤 반응을 할까?
더럽고 무섭다고 자신을 피할까?
아니면… 이런 나라도 너는 감싸 안아 줄까?
아이든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의 침대에 이마를 기대었다.
누구라도 제발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건 모두 허상일 뿐이라고.
거짓이라고.
“구원받고 싶어….”
***
리제가 가지고 온 음식은 연어 스테이크와 카프레제 샐러드, 꽃차였다.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마님. 델리카 의상실에서 예복을 보내왔어요. 다 드셨으면 한 번 보러 가시겠어요?”
멈칫.
델리카?
“보러 가실래요? 마님께서 주무시고 계셔서 드레스 룸에 가져다 놓았어요. 정말 황홀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아름답던걸요?”
어쩐지 들뜬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제를 바라보았다.
리제는 그런 내 눈을 발견하자마자 빈 그릇을 트레이에 올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왜, 왜 그러세요, 마님…?”
나는 이내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보다 네가 더 들뜬 것 같아 보여서. 예복은 됐어… 아이든을 보러 가야겠어. 설마 벌써 침실에 들진 않았겠지?”
“아하하… 그렇게 티가 났나요…?”
리제는 멋쩍어하면서 빈 접시와 찻잔을 모두 트레이에 올렸다.
“공작님께서는 아직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마님. 어서 가보세요!”
의자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리제의 머리를 토닥여 주고 말했다.
“오늘 밤엔 잠이 안 올 거 같아. 읽을 만한 책도 가지고 와야겠다. 이따 11시에도 내가 깨어 있으면 캐모마일차라도 한잔 올려줘, 리제.”
“예, 마님. 다녀오세요.”
내 토닥거림에 리제가 사랑스럽게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는 방을 나와서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니 여전히 일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다가 들려오는 저음에 멈칫했다.
“릴리아나는?”
“마님께서는 기력이 많이 쇠해지신 것 같습니다. 좀처럼 혼자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십니다.”
으아, 칼튼!
이게 무슨 소리야!
나 여기까지 혼자 왔어요!
나를 어디까지 병자로 만들 셈이에요!
“…그래. 그 아이는 부인의 명대로 하도록 해. 옆에서 잘 보필해 줘. 자네가 부인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으니.”
“당치 않으십니다, 주인님. 오히려 제게 마님이 큰 힘이 되어 주시고 계시는 것을요. 마님께서 안살림을 맡게 되신 후로 저택이 훨씬 안정적이게 굴러갑니다. 나이만 먹고 우매한 저로서는 늘 마님께 놀라고는 합니다.”
“…자네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모양이군.”
“예. 맞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주인님께서 이렇게 존경할만한 멋진 마님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나를… 아니다. 그만 나가보도록 해.”
나는 부리나케 집무실 옆방으로 쏙 들어왔다.
방을 나온 집사와 마주쳐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기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벌렁거리는 심장 언저리 옷을 부여잡고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로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칼튼이 지나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사라지면 그의 집무실로 가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런데 등 뒤에서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으아아…!”
나는 뒤돌아 그를 보고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 지르며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의 옆을 보니 집무실과 이 방을 잇는 문이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숨을 방을 잘못 들었던 것이었다.
그가 곧바로 놀라서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급하게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괘, 괜찮아? 어지럽나? 쓰러질 거 같아?”
나는 당황해 버벅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았던 숨이 터지면서 거칠어진 호흡을 안정시킬 새도 없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에게 들킬 새라 고개를 숙여 호흡을 가다듬었다.
“…괘, 괜찮아요. 제가 일어날게요.”
“괜찮긴 누가…!”
그는 뭔가 더 화를 내려고 하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어요? 나 아팠어요. 열도 나고 엄청 아팠어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하루를 꼬박 깨어나지도 못하고 열이 펄펄 끓었대요. 리제는 내가 어떻게 되는 줄로만 알고 너무 무섭고 겁이 났다고 했는데… 공작님은 한 번도 내….”
“갈 수 없었어.”
그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내 말을 잘랐다.
“그 모습을 차마… 그러면 정말 내가….”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더욱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걸까?
털어놓아야 편해지는 것들이 있는 법인데….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마음 문을 닫고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공작님은… 내가 아픈 것보다 공작님의 안위가 더 중요하셨어요?”
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험한 꼴로 누워있는 나를 차마 볼 수 없었나요?”
그가 짓씹듯이 말했다.
“리안, 그런 거 아니다.”
리안.
그건 어머니만이 부르는 나의 애칭이었다.
그는 내 애칭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사실 그런 의문보다도 그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내 애칭이 너무 듣기가 좋아서, 그런 마음을 품는 내가 또 싫어져서 나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의 손에 잡힌 팔이 아파왔다.
“아파요.”
내가 팔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흠칫하며 내 팔을 놓아주었다.
“저는 공작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구요.”
나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싫어하는 것이라면 차갑게 대하시면 되는 것이고,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래야 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공작님은….”
“…그만해.”
그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면서 몸을 일으켜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아픈 게 아니라면 그만 일어나 돌아가.”
하….
나는 도대체 그의 어떤 반응을 바라고 여길 온 걸까.
나는 짓씹듯이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질근.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 작은 혈향에도 어지러워져서 잠시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기력이 너무 쇠했으니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곧 깨질 듯 위태로운 유리를 보는 듯 일렁이는 그의 눈빛이 내 모든 행동을 쫓았다.
벽을 짚고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데 순식간에 훅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 찰나 시야가 일그러지며 흐릿해지는데 덜컥 겁이 났다.
“아, 아이드….”
순식간에 몸이 휘청였다.
저녁도 든든하게 먹었는데 몸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털썩.
“…! 리안!”
그의 처절한 외침을 끝으로 시야가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