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9)

10. 깊어지는 오해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황궁 안이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건물에서 왼편으로 좀 떨어져 있는 커다란 건물 앞에 마차가 멈추어 서서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든이 마차에서 먼저 내려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그는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해 본연의 포커페이스로 돌아간 후였다.

“잡아.”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대외적이고 명분 있는 배려.

그는 그런 배려만 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저택에선 에스코트조차 안 했으면서.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은 그 배려에 장단 맞춰 그의 손을 잡고 내려섰다.

“여기가 어디죠?”

“따라와.”

그가 나를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 발걸음에 맞춰 걸어주면 좋을 텐데.

그가 만약 나를 향한 연정을 품었다면 당연하게 맞추어 주었겠지.

결혼 준비도 내게 이렇다 저렇다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나를 배려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도….

나는 철저하게 그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발맞추어 걸어 달란 기대를 갖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져서 나는 내 있는 힘껏 빠르게 걸어 그를 뒤따랐다.

누가 우리를 어떻게 보건 그것도 내 알 바가 아니었지만, 다행히 근처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에 가까이 다가서자 문 양옆으로 지키고 선 기사 두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이든을 발견하자마자 각을 맞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문 열어.”

“예, 각하!”

기사 둘이 문을 당기자 거대한 건물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이든이 나를 한번 돌아보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쯧.

나는 혀를 한 번 차주고는 속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상상을 했다.

사랑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기본적인 배려는 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알아서 따라 들어오든지 말든지 하는 태도에 짜증이 치솟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들어가지 않고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문 앞에 지키고 선 기사들이 그런 나를 보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 부인?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기사 한 명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이죠?”

“아…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그렇네요.”

“사교계에 입문한 여성들은 다 아는 곳인데….”

나머지 한 기사가 부리나케 다가와 방금 말한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부인. 이곳은 황궁에서 연회를 열 때나 쓰는 연회장입니다만 평소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황제폐하께서 허가해 주셨지요.”

“아….”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목이 다 아파질 지경이었다.

거대하고 웅장하고 건물 곳곳이 다 금으로 되어 있어 이곳이 황궁의 소유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어찌나 화려한지 눈이 다 아파서 나는 곧 고개를 내려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 고마워요.”

“아닙니다, 부인. 저희야말로 부인을 뵙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나를요?”

“예. 사실 황궁 기사단 사이에서는 부인께서 꾀나 유명하시거든요. 어떤 분께서 딜리아 공작 각하와 결혼하시는 분이신지 다들 궁금해했습니다.”

아….

제국에선 다들 나를 그렇게 생각하겠구나.

‘그 공작’과 결혼하는 ‘소문의 그 여자’.

나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나는 평범한 제국민인걸요.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제국을 수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마지막 말에 기사 둘은 깍듯하게 경례 하면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나는 그들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도 같아서 풋 하고 웃어버렸다.

“…뭐 하는 거지?”

문 안에서 아이든이 나타나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얼른 기사들에게 무릎을 굽혀 가볍게 인사하고는 아이든의 앞으로 걸어갔다.

“별일 아니었어요.”

“…….”

아이든은 말없이 나를 한차례 바라보는가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은 외관보다 내관이 좀 더 화려하고 웅장했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여기서 연회가 열리면 나오는 음식도 모두 황금일 것만 같았다.

번쩍거리는 게 너무 많아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급격하게 눈이 피로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곧 찬찬히 주변 구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쨌든 사교계에 처음 발을 들이자마자 여자들의 등쌀에 치여 다시는 발걸음 하지 않게 되었으니, 기사들의 말대로 나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황궁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식들은 그간 많이 들려왔지만 내게 초대장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맥이 그만큼 없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렴 어떠하랴.

나는 그런 데에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인맥이고 친구고 그런 게 없어도 외로움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주로 저택에서 수를 놓고 피아노를 치고 꽃꽂이를 하고 산책을 나가며 생활했고, 때에 따라 리제와 시내 구경, 부둣가 구경을 하면서 심심함을 달래고는 했다.

그러다가 팔려가듯 빌과 결혼했고.

그 후로는 커티스 백작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피폐해져 있었으니까.

황금과 보석과 꽃.

연회장은 잔뜩 제국의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황홀함에 취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사치에 진절머리를 내던 사람이었다.

결혼해서는 빌의 내연녀인 크리스틴 영애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사치를 부렸다.

그녀는 늘 화려했다. 차림새도, 장신구도, 심지어 구두 하나까지도.

그래서일까?

이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내게는 그저 움츠러들게 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으스스 추워져서 손으로 양팔을 감싸고 느리게 문질렀다.

“추운가?”

뒤에서 듣기 좋은 저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육중한 문이 닫히는 쿵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손을 얼른 내리고 뒤를 돌아 아이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

아이든은 또다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제 슈트 겉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내게 거짓말을 하려거든 들키지 말라고 했잖아.”

아.

[한 가지 미리 말해 두 자면 나는 거짓말을 무척 싫어한다. 굳이 해야 한다면… 티를 내지 마.]

그는 거짓말을 무척 싫어한다고 했지.

이런 눈치까지 봐가며 생활해야 하는구나,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눌러 삼키고 애써 미소 지었다.

“말씀드릴만큼 추웠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감사해요, 공작님.”

“…릴리아나.”

“네. 말씀하세요.”

“왜 다시 공작님이 되었지?”

“네?”

“어째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아….”

나는 한차례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죄송해요.”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으로 부르면 제가 자꾸만… 주제 넘는 행동을 하게 되니까… 이렇게 하면 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공작님. 이해해 주세요.”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 한숨에 마저 나는 움츠러들었다.

이래서는 빌과 결혼했을 때와 결코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 결혼이 진정 내게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잘 선택한 것일까?

나 역시 눌러 삼키지 못한 한숨이 옅게 새어 나왔다.

그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달랐을 것이다.

회귀 전에도 빌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내 운명 또한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는 결국 나 자신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닫힌 입술 사이로 이를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아이든의 곁에서 도망치고 나면 어쩌면 나는 내 운명대로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또한 그에게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서 내 목숨을 유지하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감정 때문에 나는 가슴 깨에서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에게서 벗어나 온전한 나만의 힘으로 내 목숨을 지켜낼 수 있을까?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께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드려야 좋을까…?

이런 오만 가지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이미 그에게서 도망친 나를 상상하고 있었다.

“릴리아나.”

그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그의 고통이 배여 있는 것만 같아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왜 자꾸 주제넘었다고 말해? 그대는 한 번도 내게 주제넘은 적 없어. 나는 그냥… 이건 우리 관계의 문제일 뿐인데….”

그게 고통스러웠구나.

내가 가시를 나 스스로에게 세우는 게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제가 자꾸만… 저는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고 있는 거예요, 공작님. 모르시겠어요?”

“무슨 방법?”

하….

나는 한숨을 뱉어내고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으로 가는 걸 모른 체했다.

“제가 딜리아 공작저에서 평화롭게, 평온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방법이요. 우리 둘 다 계약의 관계 안에서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이요. 공작님께서도 그걸 바라시고 계시잖아요. 저도 그걸 원해요. 공작님과 제 사이의 거리가 적당히 유지되는 것.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자꾸….”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숨을 빠르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공작님께서는 자꾸만 제게 분에 넘치게 잘해주시고 모두가 오해할 만큼 헷갈리게 행동하시니까… 저도 모르게 주제넘는 행동을 하고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고 선을 넘어서게 되고… 그건 제 의지랑은 상관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라서 그래요.”

“…내… 행동이 어땠는데…?”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내 손에 가 있어서 나는 아무리 손이 아파도 힘을 풀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이 그에게 보일까 봐 겁이 났다.

“웃어 주시잖아요. 다정하시잖아요.”

나도 모르게 그를 원망하는 말투로 말하고 말았다.

어쩌면… 나는 정말 그를 원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게 잘해주지 말지.

웃어주지 말지.

다정하지 말지.

아무에게도 그렇게 웃어주지 않으면서.

아무에게도 그렇게 다정하지 않으면서.

내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말에 그가 놀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릴리아나….”

“그러니까… 제가 그 저택에서 평안한 생활을 하려면 저를 채찍질할 수밖에는 없는 거잖아요.”

속에서부터 격정적인 감정이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눈시울이 붉어질까 봐 겁이 나고, 이대로 그의 앞에서 눈물이 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고 싶었다.

우리의 관계에 불만이 없어요.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나는… 그대를 배려한다고….”

그는 말끝을 흐리고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제오늘 상처받은 건 나인데.

왜 당신이 그런 눈을 해요?

그러면 진짜 상처받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내 배려가… 그대를 아프게 했어…?”

그가 처음 내게 계약 결혼을 요구했을 때,

사랑이 아닌 모든 걸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사랑 없는 결혼은 싫다고 고집이라도 부려볼걸.

나를 사랑해 주면 생각해 보겠다고 떼라도 써볼걸.

“네. 공작님의 다정함이 저를 고통스럽게 해요.”

그가 상처로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우리의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은 이제 사정없이 떨려 대고 있었다.

힘을 주어도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을 만큼.

나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에서도 주책맞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너진 표정을 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 심장이 더더욱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방금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 내가 싫어서.

***

사람들이 딜리아 공작가 문양만 보고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릴리아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보지 못하게 할 걸 그랬나.

아이든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그녀가 슬픔에 사로잡힌 얼굴로 말했다.

“이런 거절감을 매일같이… 공작님 마음은 괜찮은 것인가요?”

아이든은 당황했다.

부모에게서 끊임없이 겪어왔던 거절감.

익숙해졌다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

그는 어쩌면 스스로도 제 마음을 끊임없이 속여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말 한마디에 각성한 듯 이렇게 아플 리가 없으니까.

이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울 리가 정말로 없을 테니까.

어린 시절, 감정이 메마른 사막 같고 냉혹하기는 설산 같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그의 어머니는 결국 정신을 놓고 아이든을 향해 매일같이 고함을 질러댔다.

[내가 괴물을 낳았어! 하하하…! 괴물을, 괴물을 낳았어! 넌 괴물이야! 누가 너 같은 걸 사랑할 수 있겠어?! 그놈은 괴물이야…! 그런데 넌 그놈의 자식이잖아! 으흐흐… 괴물… 괴물 같은 놈…!]

그러나 어머니가 아파서 그렇다는 걸 이해하기에 아이든은 너무 어렸다.

사랑받는 것은 생각조차 해볼 수 없었던 냉정한 아버지에게서 느껴왔던 끝없는 공포.

자신을 늘 학대하고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어 발악하다가 결국 미쳐버린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거절감과 절망.

그것들은 문신이 새겨지듯 아이든의 마음속에 새겨져 지워지지도 떨어지지도 않고 그를 좀먹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 내가 쓸모없는 괴물이니까. 쓸모없는 괴물… 쓸모없는 괴물… ]

어린 아이든은 언제나 늘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들은 알았을까?

주문 같은 그 말을 아무리 중얼거려 보아도, 결국엔 너무 시리도록 외로워서 온몸을 덜덜 떨었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부모는 죽고 없는 데다, 기억을 되새길 형제들도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살아오면서 아이든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사정없이 아파오는 마음을 그녀에게 들킬 새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괜찮아.”

그리고 또다시 스스로를 속였다.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만 같아서.

그녀도 속아 줄 줄로만 알고.

그래서 릴리아나가 그를 품에 안았을 때 아이든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법도 알지 못했고, 그렇다 할 위로를 받아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 생경한 느낌에 아이든은 아연실색했다.

“저는 공작님이 두렵지 않아요.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 릴리아나.”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시선에 그녀의 동그랗고 새카만 정수리가 들어왔다.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는데.

모두가 자신을 나쁘다고 말하는데.

모두가 자신을 살인귀라 말하는데.

그녀는 어째서 제게 이토록 아리도록 따뜻한 말들만 하는 것일까?

어째서 이토록 생경한 말들만 하는 것일까?

그 작은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 자신이 낯설면서도 두려워졌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곧 이어진 그녀의 말에 아이든은 정신이 번뜩 들어 그녀를 밀쳐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그를 덮쳐왔다.

[아무도 너를 사랑해 주지 않을걸. 그녀는 거짓말쟁이야.]

아이든은 머릿속에 울려오는 자신을 괴롭히는 목소리를 무시하려 했다.

릴리아나는 절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으니까.

[누가 널 사랑할 수 있겠니? 그는 괴물이야. 그런데 넌 그놈의 자식이잖아!]

하지만 또다시 기어코 얼굴을 들이민 기억에 휩싸이는 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맞아.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

내가 괴물이니까.

그런데 그녀는 도대체 왜 나 같은걸…?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제게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대충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바가 그럴 뿐,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감정이 진짜가 맞을까?

그녀가 나 따위를 도대체 왜?

이토록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자가 도대체 왜 나를?

아이든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내 곁에서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거야.

어머니도 불행했으니까.

형제들마저 나를 떠났으니까.

모든 일이 해결되면 그녀를 놓아주어야 해.

그녀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죄책감이 그를 뒤덮었다.

아이든은 짙은 한숨을 내뱉고 마른세수를 했다.

어쩔 수 없어.

이건 우리 둘 모두를 위한 거야.

목표한 일만 해결하면 돼.

그러면 돼.

“거칠게 대한 것에 사과하지.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다, 릴리아나.”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당장 상처받게 된다 할지라도.

이 고귀해 보이는 여자는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니까.

불행의 씨앗인 자신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심장에 아릿한 통증이 왔다.

이것은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일까?

요동치는 심장에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애초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결혼이 아닌걸요.”

그녀의 아픈 마음이 목소리에 실렸다.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티 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위태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를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걸로 됐어요, 공작님.”

이왕 곁에 데려온 것이니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서로 사랑 없이 이해관계만 맞으면 그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심장을 옥죄어 오는 고통에 아이든은 결국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야 말았다.

이것으로 되었어.

그녀에겐 잘된 일이야.

아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생각해도 변명 있는 비겁함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랬는데.

그녀가 자신을 끊임없이 계속 이름이 아닌 공작님이라 부르는 것에 충격과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느껴졌을 때.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잘하지도 못하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불현듯 깨닫고야 말았다.

제가 상처받고 말았다는 것을.

그녀를 상처 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인데.

비겁한 것도 자신이 맞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그녀의 말에 되려 자신의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팠다.

아이든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제 와 갑작스레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깨달았다고 한들,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자신이 뭘 어쩔 수 있을까?

아이든은 무의식 속에서 늘 불안감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누구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과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는 반드시 불행해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

아무것도 정립되지 않은 백지 같은 어린 시절,

끊임없이 세뇌당했던 결과는 그렇게 참혹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그 어떤 자세도 취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쉽사리 그 마음을 받아줄 수도 자신의 마음을 내보일 수도 없었다.

이런 괴물 같은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보고도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줄지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모험을 하기에 아이든은 이미 너무 오랜 세월 사람에게 상처받아 지쳐있었고, 그녀는 상처받고 불행해지기에는 너무 고귀하고 깨끗했다.

그래서 고개를 수그리고 우는 그녀를 달래줄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다.

나쁜 건 자신이었다.

자신은 상처받을 자격도 없었다.

[넌 괴물이야. 그녀에게 네 오물을 묻혀야겠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제 머릿속에서 속삭여왔다.

아이든은 우는 그녀 앞에서 두 손을 부들부들 떨리도록 그러쥐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곳에는 두고 싶다.

눈앞에서 사라지면 불안감이 덮쳐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이든은 스스로의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그래. 맞아요, 어머니.

나는 괴물이에요.

이 여자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나는 놓아줄 수가 없잖아.

나는 끔찍한 괴물이에요. 오물 덩어리야.

- 2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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