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거짓말을 하세요?
이틀 후, 집사가 나를 찾아와 외출 준비를 하시라는 전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전까지도 아이든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리제와 마리의 손을 빌려 외출 준비를 마쳤다.
별로 꾸미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는 하지 않은 채였다.
1층 로비로 내려가니 칼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 주인님께서는 이미 마차에 타 계십니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하….
아무리 계약관계라고 하지만.
에스코트조차 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건 좀 심한데?
심장에 또 한 번 생채기가 나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됐어요. 저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라고 먼저 가신 게 아니겠어요?”
칼튼은 내 가시 돋친 말에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했다.
“마, 마님. 주인님께서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제가 에스코트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혼자 나가시면 마님의 체면이 엉망이 되십니다.”
하… 그 놈의 체면.
나는 짙은 한숨을 뱉어내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튼과 함께 저택을 나서 마차로 걸어갔다.
나를 발견하고 마부가 훌쩍 뛰어내려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시지요, 마님.”
칼튼이 손을 내밀어 말했다.
나는 열린 문 안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심장이 아픈 것 같아.
차라리 이게 병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금 이 순간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옷이라도 좀 더 예쁘게 입을걸.
나는 이를 악물고 애써 미소 지었다.
칼튼의 손을 잡고 올라 아이든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문이 닫히고 금방 마차가 덜컹거렸다.
나는 곧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속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익숙해져 버린 저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안색이 창백하네.”
당신과 마주 앉아 있으니까요.
“어디 아픈 것이라면 다음에 외출해도 괜찮아.”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미소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공작님.”
“…….”
그는 놀란 듯 눈이 커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계약관계에 합당한 처신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하루 종일 외출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정말로 괜찮아요.”
다시 한번 싱긋 웃어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여름치고는 바람은 여전히 선선했다.
혹시라도 더울까 봐, 여름 드레스를 꺼내 입었는데도 춥게는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었다.
그와 함께 마주 앉아 마차를 타고 있으니, 그와 란즈에서 처음 만나 함께 마차에 올랐던 날이 떠올랐다.
딜리아 공작가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제국민들이 그의 마차를 보고 자취를 감추었다던 일은 정말 진짜였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공작가를 벗어나 시내에 들어서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내 한 명이 공작가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보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외쳤다.
“딜리아 공작가의 마차가 나타났다!”
그 외침을 기점으로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각각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거리는 한산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일사불란할 수 있다니.
나는 멍해져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뒤늦게 인식되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국민들은 딜리아 공작을 싫어한다.”
익숙한 저음, 익숙한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날에도 그는 꼭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는 도대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심정이었을까?
나는 처음에 마음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고개를 돌려 아이든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요…? 어째서 저렇게까지….”
아이든은 순식간에 손을 뻗어 창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내가 제국의 사형 집행인이자 죄를 묻는 고문관이기 때문이다. 이 마차가 떴다는 것은 오늘 누군가가 죽어나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게 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두려운 것이다. 저들은 제국에 충성심이 없어.”
아이든은 마지막 말을 짓씹듯이 뱉어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사형 집행인….”
“오늘 누군가를 죽이러 가는 건 결코 아니고.”
그의 입에서 죽인다는 단어가 전혀 이질감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제국이 이만큼 번영하기까지 수많은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제의 머리를 베었을 것이다.
물론 적국의 사람들뿐만은 아니겠지만.
죄 값을 치러야 하는 수많은 제국민의 피가 그의 손에 닿았을 테니까.
당장 어제만 해도….
역시나 그는 죽음과 너무나도 밀접한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늘 죽음을 경험해 온 사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단어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프게 들려왔다.
“…공작님께서는 누군가를 베어내는 일이 정말 즐거우신가요?”
처음 그를 보았던 날, 그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오늘 전혀 다른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전 날에 대답을 회피했던 그와는 상이한 모습이었다.
“나는 살인귀가 아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맞다.
그는 살인귀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소임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가 피를 뒤집어쓰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사실은 무척 괴롭다고.
이 거대한 거절감이 내게는 너무 버거운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자 한 명과 사용인 십여 명에게 거절감을 느껴왔던 나와는 절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크기였다.
나는 슬픔에 사로잡혀 그를 바라보았다.
“끔찍한 일이에요.”
“무엇이 말이지?”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거절감을 매일같이… 공작님 마음은 괜찮은 것인가요?”
아이든은 눈썹을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마음?”
“네. 공작님 마음이요.”
그는 잠시간 당황하는 듯하더니 급히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괜찮아.”
그리고 거짓말을 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내가 어떻게 해야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마음 깊숙히 새겨져 쉽게 지워지지도 않을 상처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서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왜… 거짓말을 하세요?”
그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사실은 괜찮지 않으시잖아요.”
“…….”
아이든이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그는 가엾은 사람이었다.
“안아주고 싶어요.”
그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 같이 커다래졌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그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안아주었다.
“…!”
“저는 공작님이 두렵지 않아요.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 릴리아나.”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그날에 그가 내게 그렇게 물었었다.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 놔.”
“아이든. 저는….”
“놔!”
탁!
그가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볼품없이 밀려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언가 눌러 참는 것 같아 보였다.
한숨을 짙게 내뱉은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거칠게 대한 것에 사과하지.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다, 릴리아나.”
“아….”
[그대는 내 부인이잖아.]
어제 그의 표정과 말이 그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나는 또다시 심장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느끼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말했다.
“죄송해요.”
“아니, 그렇….”
“선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잘라내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실제로 그가 내 심장에 생채기를 내는 것도 아닐 텐데.
진짜 타격이라도 입은 것처럼 아파오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나는 고통을 눌러 삼키면서 고개를 들어 그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실수했어요.”
그의 얼굴이 다시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릴리아나.”
“저마저 공작님을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앞으로도 결단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지금은 당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나 따위가 뭐라고.
“릴리아나. 나는….”
“제가 주제넘었어요.”
“하….”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마차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와 불편해지지 않으려면 나만 내 감정을 추스르면 되는 것이었다.
내 가슴에 밀고 들어왔던 그에 대한 마음을 하나씩 밀어내야 했다.
그게 나와 그가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일 테니.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알고 있어요, 공작님.”
심장이 아파서 당장 마차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심장을 꺼내 진정시키고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숨고 싶었다.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그와 마주 앉아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게 비참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순간만 버텨내면 돼.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테고, 나 역시 그를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거야.
“애초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결혼이 아닌걸요.”
아이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도 여전히 무감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저를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걸로 됐어요, 공작님.”
내 목숨은 소중하고, 언제 갑자기 회귀 전처럼 죽음을 눈앞에 둘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늘 그것이 불안했다.
그가 내 곁에 있다면 그 뛰어난 검술로 나를 지켜주겠지.
나는 그것으로 되었어.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제도 그는 저런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표정 따위.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을 피하고 나서야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