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아이든은 그레이스 축제 첫째 날, 사제를 축사 자리에 세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레이스 축제는 아이든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제국의 안전이 중요했고, 두 번째로 릴리아나가 만족할 결혼식이 중요했다.
초대장이며, 예복이며, 연회장을 꾸미는 것까지.
릴리아나가 고생할 만한 그 어떤 일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와중, 사제 행렬이 지나갈 접경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을 들었을 때 아이든은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리볼트 때문에 골머리 앓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폭동이란 말인가.
게다가 결혼식을 앞두고!
아이든은 짧은 편지를 남겨놓고 출정을 하면서도 저택에 혼자 남을 릴리아나가 걱정되어 죽을 것 같았다.
어젯밤에도 아이든은 꿈을 꾸었다.
이제는 매일 꾸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며칠에 한 번씩 꾸곤 하는 꿈에서 릴리아나는 여전히 입에서 피를 토했다.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녀의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아이든은 언제부턴가 울프하운드에서 암살자로 길러져 늘 그림자처럼 자신을 호위하던 기사 둘을 릴리아나 모르게 붙였다.
그런데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 둘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 그녀에게 접근하면 어쩌지?
처음 꿨던 꿈에서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심장에 칼이 꽂혀 죽어버리면 어쩌지?
사실상 암살자가 있는 한 불가능한 일 일터인데.
아이든은 전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신 불안한 듯 입술을 짓씹던 그는 출정을 하다 말고 에릭 슈미트를 돌려보냈다.
에릭 슈미트는 울프 하운드에서 암살자를 제외하곤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그는 제 목숨을 내던질지언정 그녀를 지킬 것이다.
접경 지역에서 폭동 진압은 자신이 있으니 어찌하든 될 것이었다.
아이든은 에릭이 말을 돌려 최고 속도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릴리아나를 신경 쓰고,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는지 깨달을 새 없이 아이든의 머릿속은 다시 폭동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혹여나 그들이 리볼트 집단과 어떤 연관성은 없는지 조사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리볼트는 원래 주기적으로 폭동을 일으켰지만 이렇게 그 주기가 짧지는 않았다.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접경 지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어린아이 우는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광경은 처참했다.
제 어미, 혹은 아비의 죽은 시체 앞에 앉아 넋을 놓고 우는 아이들.
제 부모 형제를 잃고 황망한 표정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건 폭동이 아닌, 명백한 침략이었다.
딜리아 가문은 대대로 제국의 수호자였다.
그 역시 자신의 제국을 사랑했다.
‘축제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내 나라를 이렇게 만든 놈들은 다르지.’
“본거지 파악하고, 뒷배 조사할 한 놈만 붙들어다 놓고 다 죽여버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다.”
“예, 각하!”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그게 누가 되었든.
아이든은 모든 걸 최대한 빠르게 진압하고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붙잡은 놈을 통해 배후를 알아내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게다가 본거지가 한곳이 아니었다.
단순 민간 폭동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축제를 앞두고 완전한 소탕이 아니면 돌아올 수 없었으므로 시간은 갈수록 지체되었다.
붙잡은 놈을 고문한 끝에 알아낸 바로는 그들은 리볼트가 어떤 집단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사주한 무리가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자신들은 맡은 바를 다하고 수당만 받으면 그뿐이었다 했다.
그자는 눈이 흐리멍덩하고 초점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그 정도 뱉어낸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하기야 무언가에 홀리지 않은 이상 같은 제국민을 저렇게 죽이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 수가 있을까.
붙잡은 놈과 알게 된 정보 모두를 황궁 치안대에 넘겼다.
그리고 나서야 말위에 올라탄 아이든은 전속력을 다해 저택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잠을 채 4시간도 자지 못한 탓이었다.
눈을 감으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릴리아나가 아른거렸다.
불안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서 아이든을 집어삼키려 했다.
눈에 보이는 곳에 두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이런 마음을 대체 어쩌면 좋지?
***
응접실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마담 클레어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델리카 의상실의 마담. 클레어 브룩이라고 합니다, 부인.”
낮고 여린 목소리가 상대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아주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족들이 입는 의장들은 대부분이 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아주 수수하고 기품 넘치는 드레스를 입고 어떤 장신구도 하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담.”
“부디 클레어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가 그린 듯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앉으세요, 클레어.”
그녀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자신이 들고 온 가방에서 두껍게 엮은 서류뭉치 비슷한 것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결혼 예복을 맞추신다고 들었습니다. 각하께 어떤 식의 결혼식을 올리시는지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부인. 그에 맞춘 스타일들로만 추려서 들고 와 보았는데, 어떤 식의 스타일을 원하시는지 직접 보시고 고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파일을 내 쪽으로 밀면서 나긋하게 말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게도 말하지 않은 결혼식을 그녀는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배려 넘치는 결혼을 하리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파일을 가져와 펼쳐 보았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클레어. 아이든이 정말 이런 종류의 드레스를 입으면 좋겠다고 하던가요?”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각하께서는 어떤 드레스도 미리 고르지 않으셨습니다, 부인. 그저 결혼 예식에 대해서 언질을 주셨을 뿐이지요.”
“하지만….”
나는 파일로 시선을 내려 몇 장을 넘겨보았다.
그 속에 들어있는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초고가의 새하얀 실크에 진짜 순금으로 장식되거나 펄과 보석이 잔뜩 들어가 눈부시게 반짝여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드레스들이었다.
보통 제국의 귀족 영애가 결혼할 때 입는 드레스는 스타일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모두 적당한 가격대의 칼라가 염색된 실크 원단에 레이스나 프릴을 달거나 아무 장식도 달지 않은 심플한 드레스를 입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렇게 새하얗고 화려한 건 내 평생 한 번도 입은 걸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는 황실의 일원이 결혼할 때에도 금색에 하얀 포인트가 있는 드레스를 입거나 붉은 드레스를 입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금색과 붉은색은 황실의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가 놀란 것은 또 있었다.
하단에 쓰여진 대여 가격.
그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감히 일평생 맛볼 수 없는 돈이 적혀 있었다.
물론 저택 내정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하루하루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 돈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직접 써 본 적이 없으니 체감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확실히 이런 드레스 한 번 입는다고 해서 저택 재정에 실금도 가지 않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또 드레스 하나에 이런 돈을 들이기가….
“부인.”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각하께서는 대여가 아닌 구매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에…?”
이게 무슨 소리야?
결혼식에 한 번 입는 드레스를 아예 사버린다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성대한 결혼식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적합한 드레스이지요. 제가 각하께 전해들은 즉시 디자인한 것이니만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랍니다.”
아니 나는 그냥 결혼식 자체를 성대하게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제국민이 모두 다 내가 공작부인임을 알 수 있도록.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이왕 하는 것이라면 내게 무엇이든 이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런 드레스를 바라고 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마담 클레어는 나와 장장 세 시간 동안이나 드레스 문제로 씨름을 하다가 돌아갔다.
드레스가 너무 비싸다, 전부다 너무 화려하다, 나는 무얼 골라야 좋을지 모르겠다, 눈이 너무 피곤하다 등등 내 핑계는 가지각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든은 대체 마담 클레어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사람 같아 보였다.
결국 예복은 결정이 되었다. 아니 결정이 될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내 체형과 분위기와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디자인을 알아서 고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온 줄자로 팔이며 어깨며 허리, 가슴까지 원하는 모든 곳곳의 치수를 측정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돌아가버렸다.
예복은 식 이틀 전까지는 완성해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보태고서.
그녀는 결코 내게 날카롭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입씨름만 열심히 한 것인데도 기가 다 소진된 기분이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컨디션은 하루가 저물어갈 때까지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 거대한 저택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가 있을 때에도 딱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희희낙락한 적은 없었는데.
그가 자리를 비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빈자리는 참으로 크게 느껴져 왔다.
아무래도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안정감을 얻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저택을 지킨 것은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는데.
나는 이제 리제가 아닌 딜리아 공작을 의지하게 된 것일까?
달만이 고고하게 밤하늘을 밝히는 시간.
나는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나에 대해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
아이든 딜리아 공작이 저택을 비운 지도 꼬박 일주일째였다.
5일 뒤면 리제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그레이스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고 말이다.
서재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봄에 만발했던 꽃들을 대신해서 여기저기서 새파란 수국과 다홍빛의 작약이 꽃봉오리를 어여쁘게 올리고 있었다.
어제 정원사에게 물으니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루윈드 언덕에는 화이트작약이 피었다는 정보도 얻었고 말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 들고 화이트작약을 구경하러 가자고 리제와 마리를 꼬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칼튼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칼튼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공작님께서 저택 정문을 지나고 계십니다.”
그가 돌아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를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내 뒤를 에릭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뒤돌아 에릭을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 돌아오셨는데요?”
그에게 가서 인사하지 않고 왜 아직도 내 뒤에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에릭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명받은 것은 마님을 1분 1초 쉬지 말고 호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무기한으로요.”
아. 무기한.
나는 낮게 중얼거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로비에 다다르자마자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
내 시야에 들어온 그의 모습에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가 온 것일까?
저 남루 해진 망토와 덕지덕지 붙은 핏자국들이라니.
아니… 설마 그의 피인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의 행색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곧 그와 눈이 마주쳤다.
“릴리아나.”
그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곧 참을 수 없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왔다.
그가 픽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다녀왔어.”
“네.”
“늦어서 미안.”
“네.”
“…릴리아나. 가까이 와 줄래?”
“!”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그가 싫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아이든이 눈살을 찡그리며 말해서 나는 얼른 다시 그의 앞으로 왔다.
피 냄새 때문에 어지럼증이 올 것 같아.
내가 심장을 찔렸을 때에도 피는 참 많이 흘렸는데.
그땐 왜 이렇게 비릿하고 어지러운 냄새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그는 이 냄새 속에 파묻혀서 일주일을 버텼을까?
새삼 그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짐짓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늦으셨네요.”
“내가 방금 전에 한 말인데.”
아.
그렇구나.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그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또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왜인지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주무시지 못하셨나요?”
“…그래 보이나?”
그는 위태롭게 버티고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치루고 온 일들에 한없이 지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자러 가야겠어.”
그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이마를 문지르다가 푸흐 하고 바보 같이 웃었다.
나는 멋쩍어져서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아이든이 집사 칼튼을 불러다가 말했다.
“칼튼. 시녀를 방으로 불러. 목욕물 받아달라고 하고. 저택으로 칼 폴쳐가 오거든 썩 내쳐버려. 오늘은 그치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예. 주인님.”
어느새 옆으로 온 집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사용인들 휴게실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아이든은 망토를 벗어 아무렇게나 로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내 뒤에 서 있는 에릭 슈미트를 바라보았다.
“일은.”
“없었습니다, 각하. 다만….”
“다만?”
나는 고개를 돌려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나를 힐끗 보는가 싶더니 다시 아이든을 바라보고 각이 잡힌 말투로 대답했다.
“마담 클레어와 좀 다투셨습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의 역할에 감시와 보고도 포함되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이든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피곤이 달라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맘에 안 들었나?”
“가져온 드레스 가격이 너무 비싸서요. 게다가 죄다 너무 과하게 화려하고, 또….”
“릴리아나.”
“네?”
그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한숨을 뱉어냈다.
지금은 그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그냥 방으로 올라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와 언쟁할 시간이 없어.”
“무슨 뜻인가요?”
“…그래서 그녀를 내쫓았나?”
“제게 맞게 알아서 결정하겠다 하고 가던걸요.”
“으름장을 놓은 보람이 있군.”
협… 협박을 했구나?
어쩐지 그녀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싼 드레스들 중 하나로 하려고 하더라니….
“…마담의 안목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공작님께서는요?”
“내 것도 그녀가 알아서 해 올 거야.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닌데.”
맞아….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델리카 의상실에서만 옷을 맞추었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길을 비켜주었다.
이제 그만 방으로 올라가 씻으라는 무언의 언질이었다.
망토에서 나는 줄 알았던 피 냄새는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어서 참고 서 있기가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혹시… 다치셨나요?”
그가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일찍도 묻는군.”
“그… 피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는 나를 보며 그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문득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
옅은 숨소리에 섞인 낮은 웃음소리가 어쩐지 듣기 좋은 울림이 있는 것 같아.
“내게 아니야.”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그렇군요.”
“손톱 하나 다치지 않았어.”
“다행이에요.”
싱긋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가 다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으니까.
그는 놀란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하곤 고개를 휙 돌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계단을 바라보다가 나도 올라가서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계단에 발을 디뎠다.
“각하께서는 마님을 정말 특별하게 여기시는가 봅니다.”
“네?”
에릭이 한 말에 나는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는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준 적이 없었는데요?
에릭은 아이든이 올라간 2층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이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통 피를 보고 오신 날에 각하께서는 아무도 건들일 수 없는 아우라를 풀풀 풍기고 계시거든요. 집사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다가갈 수가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웃어 주신 적이 없으시거든요.”
생각해보니 그는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남자였지.
누구에게도 그렇게는 웃지 않는구나….
나는 그가 올라간 2층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가 원래 그렇게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느낌 자체가 너무나 상이한 것이었다.
그가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분명 의식할 새 없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
나는 역시나 그를 너무나도 의지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내 마음에 그가 이미 들어와 버린 것일까?
그에게 나는 무엇일까?
그는 나를 여전히 필요에 의한 공작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왜 내게만….
그는 왜 내게만 웃어주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한마디도 밖으로 뱉어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해봐야,
“…그만 올라가 봐야겠어요.”
이런 것뿐이었다.
***
서재로 올라와 읽을 만한 책을 찾아 책꽂이 앞을 서성거린 지가 벌써 10분 째였다.
도통 책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의미가 머릿속에서 제대로 해석이 되기도 전에, 기분 좋은 울림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낮은 웃음소리와 그와는 대조적으로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과 피범벅이 되었던 옷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게다가 서재로 올라와서 좋아하는 책 냄새를 실컷 맡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짙은 한숨을 뱉어내면서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피범벅이 되어 돌아온 그의 모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긴 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상 이제부턴 익숙해져야 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되었고, 그가 하는 일들이 그런 것들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산책이라도 좀 하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니면 정원에서 티타임이라도 한차례 갖던지.
어떤 방식으로든 바람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내리고 뒤로 돌아섰다가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서재 문간에 아이든이 팔짱을 낀 채 기대고 서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머리가 젖어 제멋대로 흩날려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서 있었던 걸까?
어디부터 내 행동을 관찰했을까?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 질문에도 아이든의 입은 꾹 다물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을 열어 말로 해주면 참 고마울 텐데.
“들어오시지 않으실 건가요?”
재차 물었다.
관찰당하고 있는 느낌이 썩 좋은 것은 아니어서 나는 그가 들어와서 용건을 이야기하던지 빨리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까는 자러 가야겠다고 했으면서.
도대체 나는 왜 찾아온 거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그는 여전히 내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잠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말인가요?”
“그랬었지.”
“그랬었지?”
그의 악센트까지 따라서 말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요?”
“안색이 좋지 않군.”
아….
피 냄새를 맡은 이후로 계속해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중이라서 아마도 안색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대처할 새도 없이 내 이마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저는 괜찮아요, 아이든.”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내 이마에서 떼어냈다.
아이든은 눈썹을 치켜 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와락 미간을 구겼다.
“내가 저택을 비우기만 하면 그대에겐 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야. 이번엔 대체 뭐지? 괜찮은 척이라면 집어치워. 안색이 창백한 게 꼭 살아있는 시체 같으니까.”
말을 좀….
하….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이든. 그러라고 호위까지 붙이신 게 아닌가요?”
“그런 의….”
“저택을 비우신 동안 불상사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모두 맞은 바 일을 각자 자리에서 잘해주고 있고요.”
“이봐.”
그가 이를 악물고 나를 불러서 움찔했다.
“아… 말을 자르고 대답한 건… 죄송해요… 싫어하시는 것인데.”
“하… 싫다고 한 적 없어.”
“하지만 전에도 제게 아무도 그러는 사람이 없다고 강조하셨잖아요. 어쨌든 죄송해요. 혹시라도 막 고용인들을 자르고 그러실까 봐 맘이 너무 급해서 변호한다는 게 그만….”
아이든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아나.”
“네.”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그대에게 일임하겠다고 했잖아.”
“그러셨죠.”
“그따위 일들은 이제 내 머리 안에 없어. 다 그대가 알아서 할거고 나도 그게 편해.”
“…다행이네요.”
“나는 그대의 건강에 무슨 큰 문제가 생겼느냐고 물은 거야.”
전혀 그렇게는 들리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대체 뭐 때문이지?
“저는 괜찮아요. 처음부터 괜찮다고 말씀드렸는걸요.”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좋겠는데?”
“그… 죄송해요. 혹여 기분 상해하실 수도 있고 괜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무슨 소리야.”
“피 냄새… 때문에요, 아이든….”
내 말에 그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는 거칠게 자기 옷소매를 걷어 팔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행동에 무척 당황해서 손을 뻗은 채 그를 잡지도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하고 안절부절을 못했다.
“아, 아니요. 공작님 그게 아니라…!”
“젠장.”
인상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아이든이 욕설을 내뱉고는 내게서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너무너무 당황스러웠다.
지금 피 냄새가 난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어쩜 좋지?
“아이든, 그게 아니라…!”
그에게 다가가며 내 뜻을 정정해 주려고 했다.
“가까이 오지 마.”
그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지 않았다면.
나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자조 섞인 말투로 그렇게 중얼대고는 그대로 서재를 나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가 나가고 없는 자리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창백해졌을 것만 같았다.
그를 화나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역시 기분이 상했나 봐.
피 냄새가 나는 건 그가 원한 게 아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심장에 생채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