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녀 말이 곧 법이다
나는 아이든과 점심을 함께하고 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집사 칼튼과 함께 서재 꾸미기에 돌입했다.
리제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 듯 밝은 모습이어서 안심이었다.
다만 이상한 것이 있었는데 4일이 지나도록 나는 아이든의 머리칼 한 터럭도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너무 이상해서 칼튼에게 물어보자 그는 당황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공작님께서는 일주일 정도 저택을 비우실 예정이십니다. 저는 당연히 마님께 직접 말씀하셨을 거라고…!”
나는 그가 진땀을 빼는 것을 지켜보다 못해 그의 두 손을 맞잡고 싱긋 웃어주었다.
“괜찮아요, 칼튼. 칼튼을 나무랄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니 염려 마세요.”
“마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으로 좀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이 도서들은 저쪽 책꽂이에 꽂는 걸로 할까요?”
“예. 마님.”
칼튼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부리나케 사용인들과 함께 도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인테리어는 워낙 깔끔하게 갖춰져 있었던지라 내가 굳이 손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덕분에 원하는 책들을 대량으로 구해 정리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어느덧 서재 정리는 막바지였다.
그나저나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를 이 낯선 저택에 홀로 남겨두고 첫날 오후부터 외출을 하더니….
그가 돌아오면 출타하는 일정 정도는 내게 일러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았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정원에 파릇한 풀들만 가득 찼다.
완연했던 봄은 어느새 그 얼굴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 올해 여름은 어땠더라.
워낙 오래된 기억이라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고.
“마님. 정리가 다 끝났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책꽂이마다 제국어를 붙여두고 어디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까지 모두 적어놓았습니다.”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칼튼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정리가 끝났는지 칼튼이 도서 목록을 정리한 노트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아. 수고했어요, 칼튼. 고마워요.”
나는 노트를 건네받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 곧 점심시간입니다, 마님. 식사는 어디서 하시겠습니까?”
“아. 다이닝룸에서 하는 걸로 할게요.”
“예. 그럼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칼튼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고, 다른 사용인들도 모두 물러갔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내 인생이 지난 생처럼 똑같이 흘러갔다면 나는 지금쯤 빌과의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었겠지?
내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실제로 회귀 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삶이 나는 아직도 가끔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젯밤에는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그저께는 수발을 들어주는 리제와 수다를 떨며 목욕을 하다가….
나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안감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내 심장에 칼이 꽂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한 릴리아나인게 아닐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나의 꿈이거나 환상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나를 자꾸만 좀 먹고 있었다.
사실 내가 아이든과 결혼해 공작부인이 된다고 해서 회귀 전과는 다르게 마냥 해피해진다는 보장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미래에 불안했고, 그가 내 최고의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가 왜 나를 이토록 필요로 하는 것인지 내가 왜 그의 옆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어떠한 것도 명확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이미 공작부인이 되었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런고로 내가 마냥 너무 행복하기만 해서 더욱 불안에 떠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늘도 나는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을까?
내게는 여전히 내일이 허락되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올해 여름은 많이 덥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리제와 여름 항구를 구경하러 나가야지.
물론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기사를 대동해야 하겠지만.
그리고 이왕 공작부인이 되었으니 아이든과 조금만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그는 오늘처럼 늘 바쁘겠지.
그는 내 하루하루가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고는 있을까?
만약 알게 된다면 나와 하루쯤은 소중한 시간을 보내주려고 하려나.
하지만 나는 절대 그에게 내 사정 같은 건 말하지 못하겠지.
고로, 그와 내가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시간을 허비할 일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지막이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
오늘 점심 식사는 꽤 맘에 드는 메뉴였다.
사이드 디시로 올라온 스위트 펌킨 샐러드와 와인 소스에 졸이고 구운 치즈를 위에 올린 적당히 잘 익은 스테이크는 풍미 가득한 맛이었다.
데일 백작저의 주방장 요리 솜씨도 좋지만 이곳 공작가의 주방장은 일류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맛 표현이 섬세했다.
내 마음의 허전한 한구석이 풍미 가득한 요리 한 접시로 가득히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져서 침실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1층 어딘가에서 사용인들의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아침을 빼면 종일 리제를 보지 못했는데.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야. 조용히 해. 그러다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얘는.”
“오늘 저택에 주인님께서는 안 계시잖아.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우리가 저택에서 숨 쉬면서 말 좀 해 보겠니?”
“그렇긴 한데….”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모양이네.
계단 아래에 위치한 구석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소리는 점점 명확하게 들려왔다.
나는 구두가 아닌 단화를 신고 소리 없이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내가 제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등 돌리고 서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튼, 주인님께서 마님께 안살림에 일체 손도 못 대게 하셨다는 건 그만큼 신임할 수 없다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방도 따로 쓰시는걸. 정말 주인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마님을 들이신 걸까? 볼 거라고는 예쁘장한 미모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 우리 주인님은 원래 아무리 여신이 눈앞에 있어도 관심이 없으신 분이셨는데….”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에밀리!”
“리제 그 아이도 하필 마님이랑 같이 들어와서 팔자에도 없는 따돌림이나 당하고 있잖아.”
“복도 지지리 없는 거지 뭘!”
이… 게….
다 무슨 소리일까?
리제가 뭐가 어떻다고…?
지금 나의 리제한테 뭘 하고 있다고?!
내 앞에서는 항상 밝은 모습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리제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나와 함께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벌을 준다고 해서 이 상황이 종식될 수 있는 것일까?
리제의 괴롭힘이 중지되고 내가 안주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들만 잡는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저들만 벌주고 싶지 않을 만큼 화가 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화를 눌러 참으면서 돌아서는데 멀리서 내게 걸어오는 칼튼이 보였다.
나는 사회적 미소를 가면으로 썼다.
제발 그냥 지나가기를.
지금 그녀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칼튼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님?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칼튼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내 등 뒤 그러니까 계단 아래 구석 어딘가에 숨어서 속닥이던 사용인 두 명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들켰네.
인생은 왜 항상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을까?
그럼… 하는 수 없나.
등 뒤로 부리나케 도망가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미소를 거두었다.
“마님?”
“거기.”
나와 칼튼이 동시에 말했다.
칼튼이 예? 하고 되물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 뒤를 돌았다.
“너희 둘.”
마음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저음이 흘러나와 속으로 좀 놀랐는데 그녀들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딸꾹질까지 하면서 내 앞에 부리나케 무릎을 꿇고 엎드렸으니 말이다.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녀들이 동시에 간절히 소리쳤지만, 그것은 내 마음에 울림이 조금도 없는 애원이었다.
나는 그녀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마님…? 이게 다 무슨…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칼튼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총괄 집사인 그가 이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더없이 차분해졌다.
“칼튼.”
“예, 마님. 말씀하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안절부절못하는 감정이 배여 있었다.
그도 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리라.
“정말 몰랐나요?”
나는 그녀들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칼튼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온화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칼튼이었다.
“마, 마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자초지종을 먼저 말씀해 주셔야….”
나는 다시 눈을 돌려 사용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들은 이제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에밀리 양.”
에밀리라고 불렸던 여자가 흠칫하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얼굴이 희게 질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무섭나요? 이렇게 오픈된 장소에서 뒷말을 할 정도로 나를 쉽게 보던 것이 아니었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다시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 주세요, 마님!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모, 목숨만은…!”
목숨… 목숨이라.
원한다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인 그.
이들은 아이든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첫날 내가 찾아왔던 저택은 쥐 죽은 듯 고요했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중히 여긴다.
허무하게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튼.”
나는 다시 눈을 들어 칼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제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나요?”
나의 질문에 칼튼의 눈은 이전보다 훨씬 더 휘둥그레졌다.
그가 당황하는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
칼튼은 그 즉시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몰랐다는 것이구나.
나는 여전히 떨고 있는 사용인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데려온, 내 아이인데…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들은 이제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울음조차 내 마음에 울림으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녀들은 울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빌어야 마땅했다.
“칼튼. 사용인들을 모두 집합시켜 주세요. 그리고 저택을 뒤져서라도 리제를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지금 당장.”
“예, 마님!”
나는 이 가해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들에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이 저택에서 누구인지를, 그들과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싶었다.
회귀 전처럼, 사용인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고, 숨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사용인들이 모두 로비로 몰려나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울고 있는 두 명의 시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칼튼의 손에 붙들려온 리제가 크게 당황한 낯빛으로 내 앞에 섰다.
“마님…?”
리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빨래터에서….”
칼튼이 뒷말을 더 잇지 못했지만,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온종일 찬물에 빨래하느라 빨갛게 부르튼 손….
내가 비누로 손을 씻고, 씻고, 씻었을 때 따뜻하게 감싸줬던 손.
나는 고개를 들어 리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봄날에 그녀의 코끝과 눈가가 붉었고 볼 역시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어느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사용인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로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서로가 눈치 보기에 바빴다.
“리제.”
미안해, 리제….
나는 리제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마음이 아팠다.
이 모든 일은 다 나 때문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짜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리제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진 채 돌아갔다.
사용인들의 표정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리제를 바라보았다.
“고개 들어, 리제.”
리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상처받은 눈이 내 시야를 파고들었다.
심장이 저릿하다.
나 역시 아팠다.
“내가 지금 널 왜 때렸는지 알고 있어?”
“마, 마님….”
“네가 수모를 겪는 것은… 내가 수모를 겪는 것과 같은 거야.”
내 말에 리제의 얼굴이 다시 한번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얼굴이었다.
사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하나같이 충격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나를 욕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사용인들 모두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이렇게 큰일이 되리라고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제 기분대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따랐겠지.
나는 다시 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리제. 내가 널 이 저택에 데리고 온 날 마차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니?”
“…네. 네, 마님….”
[공작저에서 내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힘이 될 거야.]
나는 리제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을 붙잡고서.
“너는 내 사람이라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니, 리제?”
리제의 두 눈에서 눈물이 계속해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켜내고 있었다.
“내가 당당하면 너도 당당하리라고 생각했어. 반대로 네가 당당하지 못하면 나도 당당할 수 없겠지. 모두가 너를 깔볼 테니까. 또 나를 깔볼 테니까.”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인들은 이제 눈에 띄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아이든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두려워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바라는 바였다.
“이건 네가! 내 사람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벌이야, 리제! 내가 아끼는 너를 함부로 대하고! 아끼지 못한 벌이고!”
“…으흑… 끄흑….”
리제의 입에서 다 삼켜내지 못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죄송해요, 마님…!”
그녀는 끝내 고개를 떨구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이전 것과는 다르게 내 심장에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여기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아이든은 내가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 저택에서 공작의 아내로 살아가려면 나는 ‘안주인’ 다워야 했다.
그의 말을 어수룩하고 믿고 받아들인 내 잘못이 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용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이제 가해자들에게서 대가를 받아내야 할 시간이었다.
“모두 꿇어. 당장.”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무릎 꿇고 앉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 있는 사람이 나와 리제, 칼튼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칼튼을 바라보았다.
“하루쯤 저택을 청소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칼튼?”
내 질문에 칼튼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마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이겠지요.”
“좋아요.”
나는 리제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리제는 내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나와 함께 있어. 알겠니?”
리제는 어느덧 울음을 그치고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내 명령에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님….”
리제의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져 나왔다.
이따가 목에 좋은 차라도 한잔 마시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리제를 내 옆에 세우고서 사용인들을 둘러보았다.
“리제에게 진심을 다해 사죄하고, 나를 진정한 주인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일어나 나를 찾아와도 좋아. 하지만 가볍고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사과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동안 내가 여러분을 존중하여 대했던 것은, 존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마음의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할 말을 모두 끝마치자, 사용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하나같이 볼품없는 사람들이다.
이게 그들의 됨됨이였고, 그릇의 크기였다.
이런 자들을 고용인으로 쓰고 있는 아이든 공작에게도 실망감이 들 정도로 나는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을 것 같네.”
나는 휙 뒤돌아 칼튼에게 말했다.
“나는 서재에 있겠어요. 체력 회복에 좋은 차 한잔을 올려주면 좋겠군요.”
“예, 마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리제는 따라 오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
서재에 도착한 나는 리제를 책상 앞 소파에 앉혔다.
침실이 아닌 서재로 리제를 데려온 이유가 이 소파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고단했을 이 아이가 편히 쉴 수 있을 만큼 소파는 폭신하고 아늑했다.
“마님… 제가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리제가 한껏 몸을 움츠리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의기소침해진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리제. 어깨 펴고 고개 들어. 명령이야.”
“마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리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대체 왜 내게 말하지 않았니.”
말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신했을까?
그랬어도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었을까…?
나는 리제에게 질문하면서도 스스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이왕 한 결혼이니 잘해보고 싶었다.
사용인들에게도 좋은 주인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의 주체로써 존중해주었다.
그들도 곧 나를 존중하고 존경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실상은 나만 그들을 존중했을 뿐.
이 낯선 저택에 누구의 마음에도 나 같은 건 없었다.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외딴섬에 나와 리제만 떨어져 내린 기분이었다.
몹시 서글프고 외로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리제에게 내보일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나만 믿고 이곳에 온 것이니까.
아이든 그는 왜 하필 이럴 때 저택을 비웠을까?
아니… 그가 이 저택에 있었다고 해도….
그가 날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우린 사랑 없이 결혼한 쇼윈도 부부일 뿐인데.
“…죄송해요. 마님께 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분명 넌 그렇게 생각했겠지.”
리제는 원래도 남에게 피해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 아이였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남에게 떠넘기느니 일하다가 쓰러져 죽더라도 자신의 할 일을 끝마쳐야만 했다. 그녀는 늘 그랬다.
그랬으니 오늘도 종일 빨래를 하고, 하고 또 하고 손이 아프고 죽을 것 같아도 참고 견뎠겠지.
미련스럽게도.
“저는 정말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마님… 제가 생각이 너무 짧고 어리석었어요.”
“앞으로 내게 비밀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렇지?”
“네….”
“리제. 어깨 펴. 넌 내 직속 시녀고 내 사람이야. 아까 내가 한 말을 잊지 마.”
리제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잊지 않을게요.”
나는 리제에게 미소 지어주었다.
사실 내가 내린 결정들이 모두 옳은 것이었는지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두 번 다시 나로 인해 내 사람까지 괴로워지는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 내가 냉정하고 두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심장에 칼이 꽂혀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고 주저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전 생의 바보 같은 릴리아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무시 받고 천대받으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삶은 더 이상 싫었다.
그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빌 커티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복수였다.
‘똑똑’
“마님. 칼튼입니다.”
노크소리와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칼튼이 차를 가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들어오세요.”
칼튼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리제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칼튼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가 내 기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서 나는 곤두선 신경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그에게까지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없어요. 고마워요, 칼튼. 사용인들은 좀 어떤가요?”
칼튼은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나는 그를 길게 잡아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차는 고마워요, 칼튼.”
“예. 마님. 정말 송구합니다. 제 불찰이 큰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칼튼이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그만 나가보세요.”
칼튼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재에서 나간 후, 리제가 찻잔을 드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까 리제의 뺨을 때렸던 일이 계속 생각나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얼마나 세게 때렸던지 내 손바닥도 아직 얼얼함이 다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러니 그녀는 얼마나 더 아팠을까?
“리제.”
나는 리제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애꿎은 창밖을 노려보았다.
“네, 마님.”
“많이 아팠지.”
내 마음도 많이 아팠어.
널 이곳에 데리고 온 사람은 나인데….
리제가 나를 원망한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마님. 정말이에요.”
“…….”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아프지 않았어요.”
엄청 아팠으면서.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마님. 제가 더 죄송한걸요….”
바보 같은 리제.
눈에 결국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희뿌예졌다.
나는 재빨리 떨어질 새라 눈을 비벼 눈물을 없애버렸다.
눈가가 내 마음처럼 따끔거렸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맹세해.”
“예, 마님.”
나는 뒤를 돌아 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로는 내가 리제를 지켜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가 리제에게 너무나 기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이렇게 나를 안심하도록 만드니까.
“미안해.”
“그런 말씀 마세요, 마님. 죄송해야 하는 것도 감사해야 하는 것도 저인걸요.”
너의 아픔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니.
게다가 나는 널 또 아프게 만들었지.
나는 정말 볼품없는 주인이야.
나는 소파로 다가가 리제 옆에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네가 아파하는 건 내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야.”
“마님. 저는 그저 시녀에 불과한 사람이잖아요. 마님께서 그런 저로 인해 아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넌 내게 그저 시녀 나부랭이 따위가 아닌걸.
나는 리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내 품에서 위로받기를 원했다.
그때, 또다시 서재 문을 다급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칼튼입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만… 1층으로 내려오시라는 명이….”
뭐? 누가 와?
나와 리제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님… 어쩌죠…?”
일주일 동안 저택을 비운다던 그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빨리 돌아왔을까?
나는 잠시 잠깐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한 일들은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 일들이었다.
“따라와, 리제.”
***
1층 로비에 내려가니 아이든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가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아이든은 되레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겨울날 서리 앉은 아침 창가만큼이나 서늘해 보였다.
“고작 한 명 때문에… 내 사람 30명을 무릎 꿇렸다는 말이로군.”
“네…?”
나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멍해졌다.
당연히 내게 모든 것을 일임해 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해주겠다던 그의 약조는 다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녕 제국의 흔해빠진 말뿐인 남자인 걸까?
나는 그에게 크게 실망감을 느꼈다.
“모두 일어나. 당장.”
아이든은 내게 의사도 묻지 않고 명령했다.
곧 사용인들 전부가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아이든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의 사용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못했나 보다.
듣기에 좋은 대로 듣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더없이 편협하고 비겁했다.
나를 이 집에 기어코 들여놓은 사람은 바로 그였다.
나는 분명 싫다고 했는데.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없이 좋다고 말했는데.
여성이 이전에 사용했던 성을 버리고 남성의 성을 따르며 그에게 속하여지는 것이 제국의 문화였다.
여성들은 오로지 남편만을 믿고 낯선 곳에서 낯선 모든 것에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 하나만을 보고 이 낯선 저택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약속들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집에 리제를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해 줄 의무 또한 내게 있듯이, 내가 그를 믿고 이 집에 들어온 이상 그에게는 나를 배려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막무가내로 보낸 청혼서 달랑 하나 보고 이 집에 들어와 주니 내가 그다지도 쉬워 보였을까?
그에게 나는 그 정도일 뿐이었을까?
그래서 며칠 전 내게 벗 따위 필요 없다는 말을 한 것이구나.
내게는 그런 여지조차 주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어.
나는 만만하면서 허울 좋은, 자리만 메꿔 줄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나는 이제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진 손가락이 저릿저릿했다.
그래도 내 다친 마음보다 아프진 않았다.
그는 사용인들 앞에서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다.
내가 이 이상으로 그를 참아 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나는 결코 제국의 흔해빠진 수동적인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 어떤 날보다 당당하게 아이든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좋아요. 나는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을 것 같군요, 아이든. 당신이 먼저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밀어내는데 당신의 사용인들이 나를 무시하고 같잖게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걸 미처 나만 몰랐네. 지금이라도 알게 해주셔서 매우 감사해요. 저는 당장 제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여긴 내 집이 아니라 당신의 집이니까. 다신 내게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않기를 바라요.”
내 차갑게 뱉어낸 말들에 아이든의 표정이 점점 당황으로 물들어가더니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는 내가 이렇게 나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아도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순종적이리라고 생각했을까?
이제 와서 그의 반응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를 조금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그의 품에 던져버렸다.
그가 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신발을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 더욱 당황하는 기색이 짙어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이것도 당신의 그 대단히 잘난 재물로 산 것이니 제 것이 아니네요. 최고의 선택? 웃겨서 정말. 그럼 잘 있어요. 리제, 따라와 당장.”
나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그를 지나쳐 현관문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이 모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와 아이든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모두 다 깔끔하게 무시하고 현관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잠깐!”
현관문 밖으로 한발 내디디려는데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멈춰 서서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한 채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인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지만 더 이상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두렵기는커녕 그에게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의 발을 뾰족한 구둣발로 한번 밟아주고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주고 싶었다.
물론 지금 나는 맨발이라서 그럴 수 없겠지만.
“당신만 믿고 이 낯설고 어색한 집에 들어온 내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어요. 더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고 싶은데, 할 말이 남아 있으신가요?”
나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면서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그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고개를 돌려 사용인들을 노려보았다.
“당장 꿇어.”
사용인들이 크게 당황하여 술렁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을 하고서 아이든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제 보니 믿는 구석이 있어 한 명도 내게 오지 않았던 것이었나 보다.
공작이 돌아오면 우리를 구제해 줄 것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번이나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긴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몸에 한기가 든 것처럼 춥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아이든이 특유의 오만함이 가득 밴 얼굴을 한껏 치켜들었다.
그는 내가 본 이래 가장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말이 곧 법이다. 불만 있는 자는 내 집에서 꺼져.”
나는 입이 딱 벌어져 그를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늦봄의 어느 날,
제국 최고의 악당이 고작 여자 한 명에게 굴복한 최초의 역사 현장이었다.
***
아이든은 잡아들인 리볼트 소속의 십여 명의 사람들을 직접 한 명 한 명을 조사해 처분을 결정하는 일과 국정 회의, 대회의 등등 연이어 일들이 겹쳐 5일 동안이나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아직 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그녀를 너무 빨리 홀로 둔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에는 리볼트 녀석들에게 화풀이나 제대로 해주고 와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했던 것이었는데 국정 업무까지 연이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어떻게 해야 집에 홀로 남겨진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만나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해서 마음을 먼저 풀어 주어야겠다.
그러고 나서 프러포즈까지 한다면 릴리아나도 좋아하겠지.
아이든은 온갖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막히고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지.
“칼튼. 릴리아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집사가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님께서는 서재에 들어가 계십니다. 모셔올까요?”
“그래.”
칼튼이 급히 2층으로 올라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아나가 내려와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초지종을 묵묵히 들은 아이든은 한숨을 내쉬고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 같아.
내가 없는 새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고작 한 명 때문에… 내 사람 30명을 무릎 꿇렸다는 말이로군.”
“네…?”
릴리아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아이든은 이를 감지해내지 못했다.
“모두 일어나. 당장.”
오히려 사용인들을 일으켜 세웠을 뿐이었다.
그로서는 별 같잖지도 않은 이유로 릴리아나가 너무 일을 크게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 문제가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좋아요. 나는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을 것 같군요, 아이든. 당신이 먼저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밀어내는데 당신의 사용인들이 나를 무시하고 같잖게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걸 미처 나만 몰랐네. 지금이라도 알게 해주셔서 매우 감사해요. 저는 당장 제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여긴 내 집이 아니라 당신의 집이니까. 다신 내게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않기를 바라요.”
그리고는 신고 있던 구두까지 벗어 그의 품에 집어 던졌다.
“이것도 당신의 그 대단히 잘난 재물로 산 것이니 제 것이 아니네요. 최고의 선택? 웃겨서 정말. 그럼 잘 있어요. 리제, 따라와 당장.”
릴리아나는 그 길로 아이든을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갔다.
아이든은 크게 당황했다.
근래 한 번도 누군가로 인해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그를 웃게도 하고 당황하게도 만드는 이상한 존재였다.
게다가 파혼 통보라니.
아직도 악몽을 매일같이 꾸는 그에게 파혼 통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사용인들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당장 꿇어. 그녀 말이 곧 법이다. 불만 있는 자는 내 집에서 꺼져.”
릴리아나가 이 길로 도망가는 순간 너희도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
아이든은 그런 뜻을 담아 한 명 한 명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것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지배자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