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39)

4. 최고의 선택이라 자부해

오늘은 특별한 외출 계획이 없는지라 아이든은 바지에 편한 셔츠 한 장 걸쳐 입고 머리도 손질하지 않은 채로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었다.

사실 좀 어딘가 지쳐보이기까지 했는데 칼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각하. 그 분께서 각하와 결혼하시긴 하신 답니까? 대답을 충분히 들으신 후에 이런 일을 벌이셔도 충분할….”

“그 입.”

칼은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고 아이든의 눈치를 보았다.

청혼조차 아직 안 하신 분이 이틀 동안 공작부인이 될 사람의 방을 꾸미라 지시하셨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여긴 이렇게 해라, 저긴 저렇게 해라 큰 가구부터 자잘한 포인트까지 다 간섭하고 지시하며 사용인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리곤 자신에겐 결혼식에 필요한 금액과 청혼 패물에 필요한 비용을 계산하고 보고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까지.

뭘 어떻게 결혼할 것이고 패물은 어느 정도 규모로 맞출 것인지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

제 상관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뭔가 얘기라도 해주고 서류를 만들어 와라, 보고를 해라 하면 이렇게 답답하고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칼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자신도 총각이었다.

결혼에 어느 정도 비용이 들어가는지 자신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총각인 것도 서러운데!

칼은 울상이 되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뭐 하는 짓이야. 하도 뇌가 모자라서 이젠 자학까지 하는 건가.”

공작의 날 선 목소리 뒤로 혀 차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칼은 상관을 잘못 만난 제 처지가 가련하고 가엾게 느껴졌다.

저렇게 냉정하게 막말을 퍼부어 대고,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인간과 결혼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봉사하려는 착한 여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칼은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걸 산다고 찾아간 제과점에서 들었던 소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귀족 영애들이 하나같이 다 한 가지 소문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무려 ‘그’ 공작이 데일 백작 영애에게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눈빛을 보내고 사랑스러워 죽으려고 하더라는 내용이었다.

제국에서 ‘그’자가 붙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작이라 불릴 사내는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프세아니아의 유일한 공작.

아이든 딜리아.

그런데 초콜릿보다 달콤한 눈빛이라니? 사랑스러워 죽으려고 한다니?

‘그’ 아이든 딜리아 공작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고 생각했었다.

헛소문이 더 발이 빠른 법이라고.

칼은 눈을 희번덕 뜨고는 벌떡 일어났다.

“누구십니까.”

설마 데일 영애는 아니시겠지.

“뭐?”

칼의 물음에 아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앞뒤 알아듣게 얘기해. 혼잣말을 할 거면 구분할 수 있게 고개를 다시 처박고 말하든지.”

“하….”

저거 봐라.

타인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아니지.

양심이 하수구의 쥐새끼 발톱에 낀 때만큼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막말은 못 할 거야.

칼은 얼굴이 희게 질려 그런 생각을 했다.

“각하. 결혼하시려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어떤 결혼을 원하시는지, 폐물은 어떤 걸 받고 싶어 하시는지 뭐 그런 건 여쭤보셨습니까? 여성분들은 그런 것에 민감하고 예민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예산부터 짤 것이 아니라….”

“칼.”

아이든의 낮아진 목소리에 칼은 등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번 핀트가 나가면 무슨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자였다.

“예… 각하.”

“주제 넘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군. 오늘이 이틀째인가.”

“예?”

“방은 준비가 다 되었나?”

“예. 방은 마무리가 다 되었습니다, 각하.”

비어 있던 공간을 벽지부터 자잘한 소품까지 모든 걸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 일이었다.

온 저택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일주일이 걸릴 일을 이틀 만에 끝내버렸다. 무조건 빨리 빨리를 외치는 공작의 닦달 때문이었다.

칼은 그 막노동을 떠올리면 기가 질렸다.

다신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은 책상에 앉아 서류나 들쳐 보는 것이 적성에 딱인데.

아이든은 책상에 앉아 편지지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더니 봉투에 넣어 실링을 붓고 인장을 찍고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곧이어 시녀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이 편지지 들고 데일가에 다녀 오거라. 무조건 눈앞에서 읽는 걸 확인하고 돌아와야 한다.”

시녀가 곧장 고개를 숙이고 편지를 들고 방에서 사라졌다.

칼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역시 데일 영애였나!

“각하. 데일 백작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무슨 문제라도?”

“설마… 데일 백작 영애를 부인으로 맞이하실 생각인 겁니까?”

아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칼이 평소 같지 않게 말이 너무 많았다.

“도대체 왜 그러지? 이틀 사이에 퍼진 소문을 들었으면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칼 폴쳐.”

“저는 그 소문이 뜬구름 잡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 진짜였다니…! 각하…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이든이 실눈을 뜨고 칼을 바라보았다.

“말해.”

“데일 백작 영애는 그동안에 제국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분이십니다.”

“어떤 면으로?”

“당연히 가장 기품 있고 아름답고 고귀한 분이란 것이지요! 단 한 번 사교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지만, 그 한번 만으로도 그녀를 속으로만 흠모하는 영식들이 많이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애께서만 모르실 뿐이지 사실 정말 인기가 하늘을 치솟습니다!”

기품 있고, 아름답고, 고귀한 분이라….

아이든은 이틀 전에 본 그녀를 떠올려 보았다.

모든 면에서 귀족으로서는 흠잡을 곳이 없는 여자였다.

딱 한 문제를 열외한다면.

사교계에서 정착하지 못한 것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어리숙함 때문일 것이다.

뭇 여자들의 먹잇감이 되기에는 최적의 표적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그 어떤 여자도 그녀를 최대한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군.

아이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인기가 하늘을 치솟아…?”

“예. 정말 하늘을 아주 치솟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각하?”

“…진짜 날파리들이 꼬인단 말이지…?”

아이든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칼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입을 닫았다.

만약 저 상태에서 영애가 더 아깝다는 말을 하면 자신은 죽는다.

일이나 해야겠다.

아이든은 편지를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가로 줄지어 들어오는 마차들을 발견하고 칼을 바라보았다.

“따라와.”

칼을 대동하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현관을 열고 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물건은?”

“아이고, 각하. 나오셨습니까?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리스트 중 한 개도 빠트리지 않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아니. 빼.”

“예?”

남자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아이든은 줄지은 마차 행렬을 보면서 말했다.

“영애에게 보낼 선물 중 구두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은 모두 뺀다.”

“안 보내십니까?”

“그래.”

칼은 어리둥절해져서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뭡니까?”

“데일저로 보낼 패물.”

“예? 제게 패물 비용 계산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던가.”

칼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 그랬던가라니!

아 그랬던가라니!

“이제 결혼식 비용만 계산하면 되겠군그래.”

“각하…!”

“네가 다녀와라.”

아이든은 마차에서 물건이 하나둘 빠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예? 어딜요?”

“직접 전해주고, 이게 전부가 아니라 공작저로 들어오면 몇 배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도 꼭 전해. 그리고 나를 보고 싶다고 하면… 분명 그렇게 말할 테니 데리고 와도 좋아.”

분명 선물도 못 받겠다 할 테고, 이렇게 막무가내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겠지.

그렇게 나오면 저 선물이 좋은 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귀족 사회에 자신과 그녀가 씹히고 있는 가십 거리도 도움이 될 테지.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칼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해?”

“예…?”

“가 당장.”

“아, 예!”

칼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이든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로비에 서 있던 집사 칼튼이 아이든에게 다가왔다.

“식사는 안 하십니까?”

“필요 없어. 칼이 돌아오면 집무실로 가서 기다리라고 하고. 눈과 손은 쉬지 말라고 전해. 레이는 어디 갔지?”

“데리고 올까요?”

“응접실로.”

아이든은 꾸벅 고개를 숙이는 집사를 뒤로하고 응접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소파 깊숙이 몸을 맡기고 왼손으로 눈을 가려 시야를 차단했다.

피곤하다.

시야에 담기는 모든 것이 피곤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당장 침대로 기어들어 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질 만큼.

아이든은 이렇게 된 원인을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카페테리아에서 그 여자를 구해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내었으니 다시는 같은 꿈을 꾸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제도, 그제도, 또 그 이틀 전에도… 셀 수 없는 밤을 자신은 또다시 같은 꿈에서 허우적거렸다.

이틀 전까지 꾸준히 꾸었던 꿈은 정말 너무 두려운 것이어서 꿈에서 보았던 장소에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꿈에서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는 눈앞에 불꽃이 튀는 것 같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무방비 할 수가 있는 건지….

도대체 이유가 뭘까.

영문을 알 수 없는 꿈의 반복에 아이든은 지치고 절망했다.

이 이상 더 어떻게 해야 그놈의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평생 이렇게 그 여자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생명이나 구해주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아이든은 그녀를 제 옆에 가두어 두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옆에 두면 구하기도 쉬울 것이고, 어쩌면 위험에 처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꿈을 꾸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을 꾸는 이유 역시 찾을지도 모르고.

벗어날 수만 있다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자신은 양보하고 물러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생각하고 배려한단 말인가.

손에 쥐고 나면,

절대 놓아주지 않으리라.

‘똑똑.’

“칼튼입니다. 레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놓고 나가.”

아이든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칼튼은 조용히 들어와 공작의 몸만한 큰 개를 두고 조용히 나갔다.

아이든은 제 옆 소파로 올라와 엎드리는 하얀 털이 길고 풍성한 개를 쓰다듬었다.

“일이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는구나.”

레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착하구나. 바보같이.”

***

마차를 타고 2시간을 내리 달려 도착한 공작가는 그 외관만으로도 웅장함과 그 위용을 모두 느낄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이곳은 공작저라고 하기보단 공작성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저택 내부는 더했다.

검푸른 대리석 바닥에, 블랙 컬러를 베이스로 골드 컬러가 포인트를 이루고 있었고, 사방 곳곳이 다 화려한 금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건물 바닥과 똑같은 검푸른 대리석에 손잡이 난간이 온통 금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 역시 보석과 금으로만 만들어져서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화려함이었다.

이 음침한 동굴 같은 저택마저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어둡고 위엄이 넘쳤으니 말이다.

“보통은 집을 지을 때 이렇게 어둡게 도색하지는 않지요. 당황스러우셨지요? 공작님께서 밝은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옆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폴쳐 경이 말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다운 저택인걸요.”

폴쳐 경이 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그때, 멀리서 나이가 지긋한 남자 한 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내 앞에 도착해 멈춰 선 그가 눈에 낀 외알 안경을 고쳐 쓰며 웃었다.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어서 나는 그가 공작성에 참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저는 공작성에서 근무하고 있는 집사인 칼튼 로웰이라고 합니다. 부디 칼튼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칼튼. 만나 뵈어서 기뻐요.”

나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가볍게 인사했다.

칼튼은 후후. 하고 낮게 웃고는 저택 안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드시지요, 아가씨.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를 안내하려다가 폴쳐 경을 뒤돌아보더니 급히 생각났다는 듯이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참. 경께서는 집무실로 곧장 가시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손과 눈은 쉬지 말라.’ 하는 명도 있으셨고요.”

“일이나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폴쳐 경은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고는 내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데일 영애.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 폴쳐 경.”

나도 미소 지으며 그에게 인사해 주었다.

“아가씨. 저를 따라오십시오.”

집사 칼튼을 따라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내 방을 2개쯤은 이어 붙인 것 같은 크기의 응접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 보십시오.”

어쩐 일인지 칼튼이 작게 속삭이며 이야기해서 나 역시 작게 속삭여 대답했다.

“예. 고맙습니다.”

나는 칼튼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응접실도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동굴 같은 곳이었다.

응접실 한가운데 그레이 컬러의 폭신한 대형 카펫 위로 블루 그레이 컬러의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공작이 그 소파 깊숙이 몸을 맡기고 앉아서 자기 몸 만한 개 한 마리를 옆에 두고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이틀 전과는 다르게 좀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 바지 위로 입은 흰 셔츠의 단추가 두어 개 풀어헤쳐져 있고, 검푸른 머리칼이 정리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모습이 퇴폐적이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의 모습이 몹시 낯설게 느껴져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공작이 느른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검푸른 눈동자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여전히 나와 눈을 맞춘 채로 아무런 말 없이 소파 옆 협탁에 놓인 벨을 눌렀다.

음침한 저택과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소리가 울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데려가.”

그의 느릿한 저음이 너무 위협적으로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가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 나인지 개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만큼 그는 계속해서 나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잔뜩 겁이 나 어찌할 줄을 몰라서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곧 시녀가 익숙한 듯 공작에게 다가와 목줄을 건네받고서 개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 개였구나.

나는 속살거리듯 중얼거리고 애꿎은 응접실 주변만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입에서는 앉으라는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답답해진 마음에 참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앉으라고 하든지. 가라고 하든지.’

공작이 그런 내 표정에 순간 낮게 웃었지만, 딱 한 번. 그뿐이었다.

그는 위협적일 만큼 느른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맞은편 소파에 가서 앉아버렸다.

어쨌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 위협에 움츠러들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채 하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앉으라는 말씀을 끝끝내 안 하실 것 같아서요.”

공작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일 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내 비아냥거림은 그에게 한 터럭의 타격도 줄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선물이 맘에 안 든 표정이군.”

그래도 내 기분은 정확하게 파악한 모양이었고.

“보통 그런 건 혼인 승낙을 받고 나서 보내주시는 것이 관례가 아닌가요? 편지 하나 달랑 보내 놓고 갑자기 그렇게 들이닥치면…!”

“이봐… 나는 허락을 구한 게 아니야.”

공작이 내 말을 끊어내고서 말했다.

그는 감정의 동요 없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가 무척 나를 위협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굳은 결심을 세운 지금의 나는 그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딜리아 공작님. 저는….”

“아이든.”

“네?”

그는 소파에 파묻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결혼 후에도 나를 딜리아 공작이라고 부를 셈인가?”

“공작님, 저는 결혼 생각이…!”

“그대에게 동의를 구한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좀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이틀 전이었다면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왔고, 그걸 관철시켜야만 했다.

“제 인생은 오롯이 제 것이잖아요.”

“릴리아나.”

“데일 영애라고 불러주세요.”

단호한 내 말에도 그는 호칭을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이봐…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공작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느른한 모습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더없이 진지했고, 진중한 모습이었다.

“그저 내 옆자리에 그대가 있으면 그뿐.”

“무슨 말씀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는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나를 정말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결혼을 이렇게 강행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날파리가. 너무 많이 꼬이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인데?

그가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해서 나는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그는 속이 터질 것 같은 나와는 무관하게 아주 침착하게 내게 물었다.

“이틀 전 내게 은혜를 갚겠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 말씀드린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공작님!”

분에 찬 외침에도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릴리아나.”

나는 이젠 호칭을 고쳐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절대 나를 데일 영애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대화하는 것이 답답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선의란 없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은 공작님께서 제 목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무엇이든’의 반경 안에 결혼은 없었던 모양이군.”

아니 그걸 말이라고…!

“당연하잖아요! 제가 왜 그날 커티스 백작님을 만났는데요!”

나는 너무 억울해서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궁금해지는군. 그날 왜 그 벌레만도 못한 놈과 함께 있었지?”

“저는 커티스 백작님과의 결혼을 어떻게든 피해야만 했어요! 그 사람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려는 강도나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정말로 잔인한 사람이에요! 결국엔 나마저…!”

그에게 내가 지난 생을 한번 겪고 과거로 돌아온 사람이라고, 그래서 지금은 2회 차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가 아닌 누구에게라도 나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는 결국엔 또다시 나를 죽이고야 말았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내 심장에 다시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이내 정말로 내 심장에 칼이 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릴리아나?”

그의 목소리가 너무 희미하게 들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던 찰나 내 눈앞에, 그가 앉은 소파 옆으로 갑자기 크리스틴이 나타났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대체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가 그녀를 이곳에 들여보냈을까?

그녀는 또다시 이번 생에서조차 나를 죽이려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극도로 공포감에 휩싸였다.

입을 틀어막은 손이 덜덜덜 떨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는데 몸이 공포에 굳어버려 움직여지지조차 않았다.

곧 그녀가 얼굴에 조소를 띄우며 장미가 조각된 단검을 손에 쥐고 내게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소리 질렀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옴과 동시에 귀로 찢어질 듯한 이명이 들려왔다.

삐이이이이--------

입을 막았던 손을 들어 귀를 빠르게 틀어막았다.

점점 더 숨은 쉬기가 힘들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또 이렇게 죽는 것이구나….

그녀에게 죽는 것은 어쩌면 나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아나!”

그 순간, 강하게 몰아치는 해일처럼 공작의 목소리가 귀로 밀려들어 왔다.

그와 동시에 귀를 틀어막은 내 손을 큰 손이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가 공작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그는 왈칵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 꿇고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모두 현실이 아니었구나.

당연히 현실이 아니었는데.

그녀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는데.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안도감이 밀려와 더욱더 하릴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숨죽여 울었다.

거칠어진 호흡에 다 숨겨지지 못한 울음이 섞여 나왔다.

울음을 멈추고 싶었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괜찮아.”

그의 입에서 강하고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릴리아나.”

그가 맞잡은 내 손을 천천히,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귀에서 떼어내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나서도 그는 내게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손이 무척 따뜻해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단호한 눈이 이상하게 다정해서 끅끅거리던 울음도 쿵쾅거리던 심장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의 모든 말들이 내게로 와서 마법 같은 주문이 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로 더없이 안전해진 것만 같이,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것만 같이….

내 안에 휘몰아쳐 나를 유린하던 감정들이 안개가 걷히듯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더없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그의 두 눈이 온전히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그의 진짜 모습은 대체 어느 쪽일까?

그는 뭘 알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는 참 이상한 힘이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도 그랬었지.

이상하게 진정이 되고,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내 고집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에 그의 손수건을 쥐어주었을 뿐이었다.

“내 곁에 있어, 릴리아나.”

“어째서요? 왜 나를 곁에 두려는 거예요?”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보호해야 하니까.”

“…나를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내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대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대 역시 나에게 어떤 의무도 없을 것이고. 그건 더없이 내가 바라는 바야. 내게 어떤 터치도, 간섭도 하지 마. 난 그런 걸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그저 내가 바라는 건… 그대가 내 옆, 바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뿐이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계속해서 명쾌한 답을 해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단호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릴리아나.”

“무슨….”

“그래서 알아가려는 거야. 네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인지.”

그는 계속해서 더더욱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저는 릴리아나 데일인걸요. 제가 다른 무엇이어야 하나요?”

“아니, 잘못됐어. 그대는 릴리아나 딜리아가 될 거야.”

“공작님… 저는 모르겠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지도 모르겠고… 저는 그저 제 삶을 살아가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명확한 이유를 알고 싶은 거라구요.”

“하아.”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네가 필요해, 릴리아나. 다른 이유 따윈 필요 없어.”

“공작님….”

“그리고 그대가 나를 결혼할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지 않았나? 왜 빌 커티스만이 가십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이 사람.

그날 마차에서도 그랬다.

시내가 고요해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나는 표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내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사람의 표정만으로 의중을 파악해 내는데 유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소문이 많이 났나요?”

“그래. 아주 널리, 널리. 내 혼삿길을 막았으니 그에 대한 책임은 져 주어야지. 안 그래?”

그렇구나.

가십거리가 되었구나. 나 역시도….

나는 왜 이렇게 늘 조금씩 어리숙하고 부족하기만 할까.

이렇게 되리라고 정말 생각하지 못하다니….

바보 같아, 릴리아나 데일….

“…죄송해요….”

“내게 오면 해결되는 일이야.”

“공작님… 저는….”

“부모님께서는 선물을 무척 흡족해하셨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그걸 도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그대의 부모가?”

맞는 말이다.

내 마음 한구석에 가장 크게 걸려 있는 부분이었다.

그가 내게 쓴 전략은 바로 나의 욕심 많은 부모를 제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자마자 부리나케 선물 더미를 연이어 보냈던 것이다.

나는 그걸 도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부모는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나 살자고 그의 앞길에 흙을 뿌려 댔으니….

나는 침울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었어요. 서로가 뜨겁게 사랑하고 끔찍하게 아껴주는… 그런 사이 말이에요.”

“애석한 일이네. 하지만 약속해. 나는 너에게 사랑을 제외한 모든 걸 줄 거야.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그냥 하면 돼. 이곳에서 나를 제외한 누구도 너를 막지 않아.”

“…좋아요. 할게요, 그 결혼.”

나는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결혼을 파투 내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모든 의지들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그렇게 흩어져 갔다.

“이제 제가 뭘 어쩌면 되나요?”

“내일 사람을 보낼게. 내가 오늘 보낸 선물 중에 그대의 것은 사실 단 하나였어. 이미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곳에 다 구비되어 있으니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대는 그냥 그거 하나만 가지고 내게 오면 돼.”

그가 내게 청혼서를 보내기까지 이틀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는가 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부터 나를 아내로 맞이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곧 그게 언제부터였든,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제 생각이 났다.

“부탁이 있어요. 리제라는 사용인 아이가 한 명 있어요. 내겐 소중한 아이예요. 그 아이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야. 말했잖아. 그대가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그냥 하면 돼.”

“결혼식은요?”

“하고 싶은가?”

“해주세요. 아주 성대하게요.”

“원한다면.”

“프러포즈는 그 종이 쪼가리가 다인가요?”

그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뭘 원하지?”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작은 알 반지를 하나 받으셨대요. 그 프러포즈 하나로 세상을 선물로 받은 것 같았다고 하셨어요. 비록 사랑 없는 결혼 일지라도… 저도 그 작은 느낌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는 공작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검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

두렵고 무서웠지만 내게만 다정했던 남자.

짜 맞춘 듯 내 연극에 동참해 주었던 남자.

…그리고 이제는 나의 남편이 될 남자.

그는 그날도 이틀 전에도 정말 우연히 나를 도왔던 것일까?

나는 이제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결혼을 승낙한 지금도 여전히,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

아이든은 그녀가 제게 오면 결혼에 협조하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동의를 구할 생각이었다.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게 온 그녀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행동을 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덜덜 떨며 비명 지르는 그녀는 누가 봐도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이었다.

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영문조차 알 수 없었다.

몇 차례나 재차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아예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덜덜 떨며 울기만 했다.

아이든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 꿇고 앉아 소리쳤다.

“릴리아나!”

그리고 귀를 틀어막은 손을 감싸 쥐었다.

그제야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아….”

그녀가 신음했다.

가련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위태롭게 들렸다.

아이든은 그녀의 눈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너는 도대체 뭐야…?

뭔데 이렇게 내 눈앞에서 사람을 미치게 해?

꿈에서도 그러더니 이젠 현실에서조차….

뭐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두려운 거지…?

나는 왜 이렇게 니가… 가엾어 미칠 것 같지?

도대체 뭔데 이렇게… 뭔데 이렇게…!

아이든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통과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가 그의 심장을 찔러오는 것 같아서 아팠다.

곧 그녀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같이 허물어진 표정으로 그렇게 울었다.

입술 사이로 채 숨기지 못해 새어 나오는 흐느낌이 아이든에게는 심장에 꽂힌 비수만큼이나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뭘 해야만 하지?

“괜찮아.”

마치 그녀의 심장이 그의 심장과 연결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녀가 아프니까, 그도 아팠다.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에 허우적대면서도 그는 이 해일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릴리아나.”

다 괜찮을 거야.

우린 괜찮을 거야.

단호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무릎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를 믿어.

그녀는 아이든의 단호한 음성에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울음을 멈추고 거친 호흡도 점차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래도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착각이겠지.

아이든은 속으로 스스로를 향해 비소했다.

그는 그럼에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물러설 생각이 없어졌다.

그는 릴리아나의 손에 손수건을 고이 쥐어주었다.

“내 곁에 있어, 릴리아나.”

그녀를 곁에 두어야지만 그녀도 살고 자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평소의 그답지 못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녀를 놓치면 안 돼.

곁에 두어야만 해.

이것만이 그녀도 나도 평안을 되찾을 길이야.

“어째서요? 왜 나를 곁에 두려는 거예요?”

어째서일까?

처음엔 그저 이 거지 같은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이틀 전의 그녀를 보고는 평생,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면 곁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아이든은 오늘의 그녀를 겪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어버렸다.

이 여자에게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누군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도.

이제는 그녀를 손에 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비단, 악몽 때문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보호해야 하니까.”

네 정체가 무엇인지.

왜 자꾸 나를 고통 속에 밀어 넣는지.

왜 자꾸만 네 꿈을 꾸게 되는지.

아이든은 알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릴리아나를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더 혼란이 가중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더더욱 종잡을 수 없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었다.

이 가엾은 여자를 지켜주고 싶다는 것.

두 번 다시 고통 속에 울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

“…나를요?”

그래, 너를.

지킬 거야, 내가.

이 내가.

***

제국에서는 좋은 신발은 그 주인을 좋은 곳으로 이끌어 준다는 미신 같은 말이 있었다.

같은 맥락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대게 결혼을 앞둔 신부에게 제국인들은 그 남편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이 신부에게 최고의 좋은 선택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쁜 구두를 선물로 주고는 했다.

그가 내게 준 단 하나의 선물 역시 족히 6~7캐럿은 될 것 같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반짝거리는 검푸른 색의 구두였다.

구두 색을 고른 것이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잠깐 웃음이 났다.

그는 내가 딱 보기에도 상상을 초월하게 값이 나갈 것 같은 이 구두를 신고 그를 만나러 와 주기를 바란 것 같았다.

[내가 너에게 최고의 선택이라고 자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부모님은 어제 내 결혼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말로 너무 기뻐하신 나머지 나를 얼싸안고 춤까지 추셨다.

내일 당장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데도, 그 얼굴에 근심이나 슬픔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섭섭함이 밀려들었지만 어쩌랴.

그분들께서는 원래 그런 분들이셨다.

이쯤 되면 내가 포기하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 길이었다.

리제는 함께 가게 되었다는 말에 감격해서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지.

자신을 잊지 않고 챙겨준 내게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참 리제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상을 멈추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고정하고, 발목까지 오는 긴 드레스 대신에 리제가 골라준 무릎까지 오는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입었다.

오프숄더로 되어 어깨가 드러나 보이는 에메랄드 컬러의 원피스였다.

귀에서는 보석 달린 귀걸이가 찰랑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평소에 입는 형태의 드레스가 아니라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해 보였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내 등 뒤에서 감동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는 리제가 거울에 비춰 보였다.

“아마도 세상에서 아가씨께서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어머나.

“거짓말하지 마, 리제.”

“아가씨께서는 늘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신다니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내 뒤에 있는 리제에게 돌아섰다.

긴장으로 호흡이 안정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어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무래도 평소에 입는 스타일의 긴 드레스가….”

“아가씨.”

리제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부군이 되실 분께서 아가씨께 선물하신 구두라면서요. 선물한 사람이 신었구나 알 수 있으려면 보여야 하는 것이라구요.”

“너무 어색해….”

애써 치마를 밑으로 끌어내리면서 말하자 리제가 혀를 차더니 내 손을 저지시켰다.

“옷 망가져요, 아가씨. 옷장에만 있던 옷이 드디어 빛을 발해서 저는 기분이 다 좋은걸요. 저는 이제 나가서 준비 다 되셨다고 알려드리고 올게요.”

리제가 방을 나가고 나는 다시 돌아서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아.

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공작 저에 입성하는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안정제라도 하나 먹어야 하나….”

***

공작가에서는 마차와 마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우람하고 든든하게 생긴 기사 세 명을 같이 보내왔다.

우리를 안전하게 모셔오라는 명이 있었다고 했다.

어제 공작가에 갈 때도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왜 기사까지 대동시켰을까?

나는 좀 의아해졌다.

이건 좀 오버가 아닐까…?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셨다.

공작님께서 우리 딸을 정말 아껴주시는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리안. 엄마가 한 번 안아봐도 되겠니?”

나는 공작 저에서 보낸 마차 앞에 서서 어머니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럼요.”

어머니가 나를 품에 살포시 안아 주셨다.

“잘 살아.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너는 모른다. 너는 예쁨 받고 사랑받을 거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사랑한다, 내 딸.”

“저도 어머니를 사랑해요.”

비록 어머니는 돈과 나를 함께 사랑하시지만요… 그래도 괜찮아요.

내게 어머니는 그냥 내 어머니인걸요.

“크흠. 흠.”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머니와 떨어져서 아버지에게 가서 안겼다.

“아버지. 저 갈게요. 건강하세요.”

“너도 건강하거라. 어서 가 보거라. 기다리시겠구나.”

“결혼식 날 뵈어요. 편지할게요.”

“그래, 그래. 어서 가.”

“마님은 저희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공작가의 기사 한 명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맙네. 그럼 부탁하겠네.”

아버지의 말씀을 끝으로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뒤로하고 리제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기사들은 마차 양옆으로 말을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리제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속삭였다.

“공작가의 마차는 정말 화려하네요, 아가씨.”

나는 처음 공작가의 마차를 구경했던 때가 떠올라서 풋 웃어버렸다.

그리고 리제의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리제. 함께 따라나서 주어서 고마워.”

“어머, 아가씨. 제가 아가씨께 드릴 말씀인걸요. 아가씨 없는 저택에서 저는 할 일이 없어요. 금방 잘리고 말았을 거예요.”

나는 지난 생에 시골로 내려갔던 리제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

물론 그 집에도 사용인들은 넘쳐나겠지만….

“공작 저에서 내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힘이 될 거야.”

“잘 보필할게요, 아가씨.”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곳에서나 밝고 명랑했다.

아마도 그 어둡고 칙칙한 공작 저에서도, 그녀는 그녀다울 것이다.

“그런데 마차만 화려한 건 아니더라, 리제.”

“네? 무슨 말씀이세요?”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불어 주눅 들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

리제는 사랑스럽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

“흐아….”

마차에서 내린 리제는 공작저의 위용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벌려 감탄했다.

나는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뒤에 리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정신 차려, 리제. 들어가자.”

“네에, 아가씨….”

리제가 여전히 어딘가 얼빠진 모습이어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어서 나를 보필하지 못한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

“리제? 걸어야지?”

“앗, 죄송해요!”

리제가 급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시야에 저택의 정문이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는 칼튼 로웰 집사가 마중 나와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칼튼이 특유의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작저의 입성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아직 결혼식도 채 치르지 않았는데도, 기사도 집사도 모두 나를 마님이라고 부르니 기분이 이상했다.

청혼서를 받은 후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칼튼은 내게 공작부인을 대하듯 예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감사해요, 칼튼. 공작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나요?”

“들어가 보시지요”

그는 이렇다 할 대답 대신 저택의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양옆으로 도열한 사용인들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다.

“입성을 감축드립니다, 마님.”

그리고 사용인들의 사이, 로비의 한 가운데.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하얀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올 블랙 슈트에 블루 넥타이를 매고 포마드 스타일로 머리를 넘겨 한껏 멋을 낸 사내가 서 있었다.

아이든 딜리아 공작, 바로 그였다.

내 놀란 가슴이 채 진정도 되기 전에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릴리아나.”

그는 아무래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대접이, 이 환영이 너무 어색하고 놀라웠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그는 대체 왜 나를 이렇게까지 대해주는 것일까?

리제는 곧장 내게 거리를 벌려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사용인과 고용주의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쉽게 풀리지 않는 알 수 없는 의문을 머리에 가득히 채운 채로 나는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또각. 또각.

그가 선물한 구두에서 나는 또렷하고 기분 좋은 마찰음이 로비를 가득 울렸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구두에 닿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에 아주 매혹적인 미소가 떠오른 것을 분명히 보았다.

사용인들은 모두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그의 미소를 본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선물한 구두를 신고 온 것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것일까?

혼자 보기 아까운 그 미소를 바라보며 그의 앞에 멈춰 선 나는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환영 인사가 이렇게 성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는데요.”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아서.”

그가 오만해진 얼굴로 말했다.

꼭 [이 정도야 뭘.] 하면서 생색을 내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깔끔하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사실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결혼식을 성대하게 해달라고 한 게 화근이었나?

오늘까지 그렇게 해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가 이런 걸 할 성격은 아닌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날 위해 애써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환영에 감사드려요.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별말씀을. 갈까?”

그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는데 그가 별안간 이상한 질문을 해왔다.

“…오는 길에 별다른 일은 없었지?”

별다른 일?

무슨 일이 있어야 했던 걸까?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앞만을 보고 걷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왜 그러세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야 했나요?”

내 대답에 그는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묻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공작저에 도착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기사를 셋이나 보내셨잖아요. 부모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시던걸요.”

공작님께서 저를 무척이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줄로만 알고 말이에요.

새삼 또다시 내가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는 실감이 나는 것도 같았다.

입안이 씁쓸해졌다.

“기사를 셋이나 보낸 보람이 있군.”

“저는 민망했지만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저렇게 볼 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생각들이 오가고 있는 걸까?

나는 문득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그가 별안간 내 이마에 손가락을 튕겨 나는 그와 맞잡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소리쳤다.

“아얏! 아파요!”

“안 아프게 때릴 거면 애초에 안 때리겠지.”

너무해!

“도대체 왜 때리신 건데요? 이유나 알고 맞아야죠!”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마를 문지르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이마가 너무 따끔거렸다.

“이유를 알고 나면 맞을 생각이라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하지만 나는 이미 맞았는걸!

“맞지 않을 생각부터 해야지, 릴리아나.”

어린애 가르치듯 짐짓 엄하게 말하는 그의 말에 기가 차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지만 저를 이미 때리셨잖아요! 맞지 않을 생각을 할 새도 없이요!”

내 억울함을 토로하는 말에 이번엔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보면 내가 폭력이라도 휘두른 줄로 알겠군.”

“제 이마 멍들면 책임지세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으르렁대자 그는 내가 문지르고 있는 이마를 흘깃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그대를 책임지고 있어.”

윽….

할 말이 없어져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가 또다시 묘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계단 끝. 발 조심.”

그의 말에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마지막 계단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또 계단을 밟겠다고 발을 허우적거릴 뻔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가 생각보다 세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 끝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걸으면서 작게 미소 지었다.

“…기사들이 동행하는 건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앞으로 그대 곁에는 적어도 2명 이상이 항상 붙어있을 계획이니까.”

별안간 꺼낸 이야기에 혼자 흐뭇해하고 있던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외출도 혼자 마음껏 못한다는 거예요?”

“그대는 이제 공작부인이야.”

신분 상승을 했다고 해서 기사를 대동시켜야 한다는 말일까?

나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만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적이 아주, 아주, 아주 많아, 릴리아나.”

“…공작님의 적들이 저를 죽이기라도 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지.”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사실상 그를 따라다니는 소문을 생각해보자면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 정도는 미리 예상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며칠을 연달아 일이 너무 많았던 나는 정신없이 혼인을 승낙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렇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혼인을 승낙하기 전에 그 말씀은 왜 안 해주셨어요? 갑자기 억울해지려고 하는데?”

그는 또다시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껏 턱을 들어 올렸다.

“목숨값만큼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지.”

“허?”

할 말이 없네.

“능력 있는 남편을 가졌네요, 제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그대가 원하면 제국이라도 손에 쥐여줄 수 있는데.”

흠칫.

제… 제국이라니.

맞아, 그라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아.

나는 새삼스럽게 그의 존재감을 다시 의식하게 되었다.

잠시 다정한 대우에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 제국에 어떤 소문을 몰고 다니는 남자인지를.

“…제가 제국까지 손에 넣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모르겠군. 손에 넣고 싶나?”

그가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서, 나는 기겁을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내가 원한다면 정말로 제국을 손에 쥐여줄 것만 같았다.

“절대 사양하겠어요! 어쨌든 적이 많으실 수밖에 없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네요.”

그는 그동안 무력을 사용해 얼마나 많은 적을 만들어왔을까?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제국을 위해 꾸준히 손에 피를 묻혀 온 것이다.

“그래.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당연히 알아들었겠지. 절대 혼자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

그의 말에 백 퍼센트, 아니 이 백 퍼센트 동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좀 겁이 나기도 해서 앞으로 외출은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절대로 혼자 다니지 않겠어요. 제 목숨은 귀중한 것이니까요.”

“…그래. 목숨.”

그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어떤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이제부터 그대가 머물 방이야. 내 방 바로 옆방이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아.”

“한방을 쓰자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그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의외로 앙큼한 구석이 있군.”

“!”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그를 한껏 노려봐 주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큭큭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나를 놀린 것이구나.

분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을 당황시키고야 말 테야.

그렇게 다짐하면서 방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나는 분한 마음이 사라지고 없을 만큼 멍해졌다.

티 테이블, 침대, 화장대, 벽 등부터 하다못해 작은 보석함까지 모든 가구들이 금테가 둘러진 화이트 앤티크로 통일되어 있었다.

게다가 액자나 소품들이 연핑크로 되어 있어 자칫 통일된 색감으로 인한 지루함을 없애 주었다.

그 작은 포인트들이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반투명한 레이스 커튼이 살랑거리며 춤을 추었다.

이 차분하고 고즈넉한 풍경이라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택이 온통 시커멓기에 방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아니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쩜! 다른 곳들도 이렇게 밝게 꾸미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내 취향이 별로라는 뜻인가?”

“너무 어두침침하니까 기분도 덩달아 어두침침해질 것 같아서 그런 거죠.”

“그것 역시 내 취향이다.”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그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난 게 보였다.

그의 반응이 어쩐지 웃겨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물론 그의 미간 주름은 한층 더 깊어졌고 말이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구두를 선물로 받았을 때, 이 사람은 자기 취향이 정말 확고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실 인테리어 역시 확고한 취향대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고.

그런데 이곳은 누가 보아도 나를 위해 신경 쓴 티가 나는 인테리어였다.

나는 더 이상 장난스러운 표정이 아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밝은 색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감사해요, 공작님.”

“아이든이라고 부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제국에서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유일의 공작이었고, 나는 흔해빠진 백작가 중 한 가문의 영애일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만난 지 이제 나흘째, 얼굴 본 횟수로만 따진다면 겨우 세 번째였고 말이다.

그의 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나는 확신이 없었다.

“뭐가 문제지? 우린 부부인데?”

“그렇긴 하지만 제가 감히….”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은 또 있었다.

나는 지난 생에 같은 백작가에 시집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남편을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빌 커티스가 내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더더욱 이런 대접이 내게는 너무 생경한 것이었다.

“…그대와 나는 동등한 관계가 되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감히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 스스로를 낮추지 마라, 릴리아나.”

나는 좀 놀라서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내 무너졌던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만 같아서.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누구도 그대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고, 누구도 그대에게 감히라는 말을 쓸 수 없을 거야. 그게 황제라고 할지라도.”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녹아있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에게 감히라는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황제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게 공작님의 위치시군요.”

“아이든.”

나는 미소 지었다.

“…네. 아이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제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게 나의 위치다. 황제라도 내게 감히 막 대할 수 없는 위치.”

나는 불현듯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5년 전에 제국에 불었던 잔인한 피바람의 역사.

아이든이 그때의 유일한 생존자임을 모르는 제국인이 있을까?

그때의 일인즉슨 이런 것이었다.

모두가 적자인 황자를 다음 보위에 앉힐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선황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서자인 현 황제를 다음 보위에 앉히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선황은 그동안 앓아왔던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서거하셧다.

그의 명령이 유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현 황제인 오스틴 아즈 로데우스가 즉위한 지 1개월.

선황의 적장자이자 황태자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날개 부러진 매 신세가 된 1황자가 시도 때도 없이 반역의 기회를 노려왔고, 오스틴 황제는 이에 크게 분노했다.

그는 황가의 적통 핏줄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 갓 태어난 어린 아기들까지 모두 잔인하게 도륙했고, 선황제의 충신들마저 모조리 죽여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신이 한 명 있었다.

언제나 무시무시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제국이 낳은 괴물.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아이든 딜리아 공작이었다.

오스틴 황제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다가 되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지 않겠다는 맹세의 조건으로 그에게 누구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권력과 부를 안겨주었다.

아무리 부와 권력을 가졌다고 한들, 그가 그만한 힘이 있었다면 충분히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위에 앉을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왜 그러지 않았는지, 어째서 이토록 남들이 꺼려하는 일에 나서며 모두의 두려움을 사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 그의 속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뒤로, 아이든 딜리아 공작은 제국의 번영과 이익을 위해 일했지만,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오스틴 황제만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오스틴 황제에게 필요하다면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도 그가 자신에게 충성심에 의해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황제가 아닌 제국 그 자체에 충성하는 사람인 게 아닐까?

그 증거로 지금도 황제는 공작을 쉽게 어쩌지 못하고 쩔쩔맨다고 들었으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그것이 아이든 딜리아 공작. 그의 위치였다.

모두를 가진 것 같으면서도 아무나 곁에 둘 수 없고, 모두의 신임을 얻고 있으나 정작 본인은 아무나 쉽게 믿을 수 없으며, 가장 화려하게 빛나지만 가장 외로운 위치.

그리고 그의 가장 가까운 옆자리.

딜리아 공작부인.

그것이 이제 나의 위치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두 손을 뒷짐 지며 미소 지었다.

“제가 공작가에 부끄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더불어… 어쩌면 제가 당신에게 좋은 벗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썹을 치켜세울 때의 그는 무표정할 때와는 다르게 굉장히 선해 보였다.

표정에 따라 이미지가 확 바뀌는 사람.

나는 그의 그런 점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창가를 통해 불어온 바람이 제법 거세져서 우리 사이를 지나쳐갔다.

내 앞머리가 바람에 엉망으로 흩날렸다.

오늘은 올림머리를 하길 잘한 것 같아.

뒷머리가 엉망으로 흩날렸다면 꽤 당황스러웠을 거야.

이따가 리제가 오면 칭찬이라도 해줘야겠다.

나는 흩날리는 앞머리를 다시 매만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창문은 닫는 게 좋겠네요, 아이든.”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창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택의 안살림은 걱정할 것 없다. 전문가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대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이렇게 이 집의 안주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돼.”

“이해했어요.”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이 이상의 대답은 아끼기로 했다.

하지만 어차피 하게 된 결혼인데, 언젠가는 내가 안살림도 도맡을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냥 놀고먹을 수만은 없었다.

“첫날부터 이 저택에 적응하라고 한다면 무리가 있는 것이겠지. 그대가 데려온 사용인 아이를 불러주겠다.”

“다른 날은 그 아이가 제 곁에 없을 것이라는 뜻인가요?”

조금 불안해져서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문을 다 닫아 잠그고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에게서 그 아이를 데려다 어디에 쓰지?”

“네?”

그의 질문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아아. 방금 표정이 좀 멍청했을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내게 다가와 아까 맞은 이마에 또다시 딱밤을 때리면서 말했다.

나는 이마를 얼른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신음했다.

“그대에게 붙는 사용인이 굳이 한 명일 필요는 없겠지. 오늘은 리제라는 아이와 둘만 있게 해주겠다는 뜻이었어.”

아아… 그런 말이었구나….

나는 작게 속살거리곤 이마를 문질렀다.

“이마에 구멍이 나겠어요.”

“엄살도 심한 것 같군.”

엄살이라니, 나는 정말로 이마가 아팠다.

그는 자신의 힘이 얼마나 좋은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살짝 시늉만 했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시늉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세게 때릴 일인가 이게?

아마도 내일 즈음엔 이마에 피멍이 들어있을 것 같아.

나는 억울해져서 그를 한 번 노려봐 주었다.

아무래도 여자도 아이도 노인도 봐주지 않는다는 그의 소문은 진짜인 것 같다.

피도 눈물도 없…!

“머릿속에 있는 말들이 들린다, 릴리아나.”

그가 다시 오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해서 나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의 앞에서 표정 관리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 같다.

이래선 속으로 그를 흉보기라도 하면 다 티가 날 것 같으니.

“…그렇게 하면 영원히 내게 들킬 것 같은데….”

그가 내게 삽시간에 상체를 숙여 얼굴을 불쑥 들이밀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부인.”

화—악!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떨어졌다.

부인이라는 호칭 때문인지,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치명적인 얼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내 속마음이 또 들켰기 때문인지 이유는 도통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려왔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뭘 들킨다는 건지. 아, 아하하.”

그가 상체를 바로 세우고 내게서 멀어져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까 봐 너무 걱정이 되었던 탓이었다.

곧 그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대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제, 제가 언제 거짓말을 했나요?”

“…지금.”

“아하하….”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데.

“한 가지 미리 말해 두자면 나는 거짓말을 무척 싫어한다. 굳이 해야 한다면… 티를 내지 마.”

…명이 줄어드는 것 같아.

이제 그만 나가라고 할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또 내 생각을 가늠해 보려는 듯이.

나는 들킬 새라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 방 맞은편 방이 드레스 룸이고, 그 옆방으로는 그대의 서재로 꾸밀 생각이야. 서재는 아직 제대로 꾸미지 못했으니 그대가 집사와 함께 취향에 맞는 도서를 골라서 채워 넣으면 좋을 것 같다.”

“네. 그럴게요.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니 그가 나를 잠시간 빤히 바라보았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또 뭘 트집 잡으려고 저러는 걸까?

그는 뭔가 말하려나 싶더니 별말을 덧붙이지 않고 걸어갔다.

나는 맥이 탁 풀리는 느낌에 얕은 숨을 뱉어냈다.

그는 문 앞까지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지금 모습 그대로도, 그대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 릴리아나.”

“네?”

“더불어서… 나는 벗 따위는 필요치 않아.”

그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침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가 나가고 없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그 말은 대체 뭐였을까?

나를 끌어당긴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한없이 밀어낸 말.

그는 마치 철옹성 같다.

그 속마음을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는 지금 전혀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는 벗으로서는 전혀 사용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을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로 인해 마음이 조금 쓸쓸해졌다.

이 저택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쓸쓸한 감정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

그의 정보망에 한동안 잠잠하던 반란 집단인 리볼트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5개월 전에 대대적인 소탕이 있고 난 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그들의 생명력은 참으로 끈질겼다.

제1황자인 알렉스가 반란으로 죽고 나서 와해된 줄로만 알았던 리볼트는 새로운 리더를 세우고 새로운 이상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러나 아이든의 시선에는 그 ‘이상’이라는 것들이 모두 다 핑계 같게만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반역을 위한 반역을 하는 자들 같았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아이든을 증오했다.

제국을 수호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그로서는 리볼트가 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이든이 알기로 그들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만약 릴리아나가 오늘 그의 아내로서 공작저로 온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면?

그동안 눈앞에 나타난 무리들을 전부 처단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보력의 승이 아닌 무력의 승이었다.

그들이 몇 명이 모이든 아이든과 그의 정예 기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 제가 직접 릴리아나를 데리러 가기에는 공작으로서의 체면이 너무 빠지는 일.

아이든은 어제저녁 늦은 시간에 데일 백작 부부에게 전서를 보냈다.

[데일 백작님. 내일 리볼트 집단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시내가 다소 소란할 수 있으나 영애께서 불안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함구해 주십시오. 정예 기사를 함께 보내니 염려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든은 전서를 붙인 뒤에는 릴리아나에게 보낼 정예 기사 3명을 차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을 시내에 배치시키며 말했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 릴리아나가 눈치채면 팔다리 멀쩡하리라 생각지 마라.]

릴리아나는 아이든의 계획대로 무사히 저택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별다른 일은 없었지?”

아이든은 혹시나 싶어서 릴리아나를 떠보았다.

시내가 소란 했다면 그녀가 눈치를 채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이든은 그녀를 쳐다보는 대신 앞만 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왜 그러세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야 했나요?”

그녀가 어리둥절한 말투로 되물었다.

아이든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속으로 안도했다.

제 기사들이 본연의 역할을 잘 해낸 셈이었다.

팔다리가 멀쩡하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기사를 셋이나 보내셨잖아요. 부모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시던걸요.”

릴리아나의 이어진 말에 아이든은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그녀 말이 맞았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 그의 목표였으니까.

“기사를 셋이나 보낸 보람이 있군.”

“저는 민망했지만요.”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평생 큰 위기나 위험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일상에 기사를 대동하지는 않았다.

데일 백작저는 그런 위기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가문이었다.

적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계획된 것은 아니었을 테니 차치하더라도….

대체 일전에 공포로 덜덜 떨며 울던 그녀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안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내비칠 수 있는 반응은 아니었는데.

아이든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그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아이든은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겨 딱밤을 때렸다.

릴리아나가 이마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아얏! 아파요!”

“안 아프게 때릴 거면 애초에 안 때리겠지.”

사실 안 아프게 때린다고 때린 것이긴 했지만.

“도대체 왜 때리신 건데요? 이유나 알고 맞아야죠!”

릴리아나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든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노려볼 수 있는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는데.

게다가….

“이유를 알고 나면 맞을 생각이라고?”

아이든의 말에 릴리아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노려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어깨를 움츠린다.

대범한 것인지 겁이 많은 것인지, 강한 것인지 약한 것인지….

릴리아나는 때때로 무척 헷갈리게 했다.

참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맞지 않을 생각부터 해야지, 릴리아나.”

아이든이 짐짓 꾸짖듯이 하는 말에 릴리아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치만 저를 이미 때리셨잖아요! 맞지 않을 생각을 할 새도 없이요!”

억울해하는 릴리아나에게 아이든도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보면 내가 폭력이라도 휘두른 줄로 알겠군.”

“제 이마 멍들면 책임지세요.”

릴리아나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으르렁거렸다.

처음 보던 날엔 두려워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주제에.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고 하더라도 몇 번이나 봤다고 겁도 없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제국에 수많은 영애들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말 한마디 거는 것도 어려워했다.

제 부관도 그에게 이렇게는 하지 못했는데.

이 당돌한 여자는 이제 자신이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녀만큼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여자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든은 그녀의 이마를 힐끔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그대를 책임지고 있어.”

그리고 그의 시선이 의식 없이 그녀의 이마에서 내려가 눈, 코, 입,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녀가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였다.

아이든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만약 이 여자가 사교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을 디뎠을 적에도 이런 식이었다면 당연히 영식들이 그녀에게 넘어가 애가 탈만도 했다.

이렇게 고풍스럽고 신비스러운 외모에 어린아이같이 입술 삐죽이라니.

아이든의 눈에도 그녀가 사랑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낯설고 반갑지 않은 감정에 표정을 굳혔다.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당최 어울리기나 하는지.

아이든은 자조했다.

자신은 그저 철저하게 그녀를 보호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그녀로부터 보호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이 해결되고 그녀가 안전해진다면 언제라도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니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은 뒤로 밀어 넣으면 그만이지.

아이든은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힐끗 보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계단 끝. 발 조심.”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절대로 자신이 감정에 휘둘려 그녀를 배려하고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든은 그렇게 자위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기사들이 동행하는 건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앞으로 그대 곁에는 적어도 2명 이상이 항상 붙어있을 계획이니까.”

리볼트 집단이 언제 완벽하게 소탕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적은 리볼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릴리아나는 그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아이든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적들이 있는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인지시켜 주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타인에 의한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만큼.

두려움 때문이라도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는 외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당연히 알아들었겠지. 절대 혼자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

“절대로 혼자 다니지 않겠어요. 제 목숨은 귀중한 것이니까요.”

목숨이라….

그는 눈앞에 릴리아나가 심장에 칼이 꽂힌 채로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으니,

“…그래. 목숨.”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이제부터 그대가 머물 방이야. 내 방 바로 옆방이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아.”

“한 방을 쓰자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의외로 앙큼한 구석이 있군.”

물론 한 번 그녀를 놀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서.

아이든은 진심으로 웃는 것이 벌써 두 번째임에도 스스로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일평생 그토록 바래왔던 것임에도 그저 ‘정말 재미있는 여자야.’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릴리아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보는가 싶더니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이든은 몹시 긴장했다.

맘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건가.

그는 나름 신경 써서 꾸민 방을 힐끗 둘러보았다.

금테가 둘러진 화이트엔틱으로 통일된 가구들과 새하얀 방.

프세아니아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신성프리온제국의 건물양식이나 내부인테리어가 화이트엔틱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릴리아나와 잘 어울리는 양식이었다.

그녀는 뭐라 딱 꼬집을 수 없는 그녀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굳이 찾아 이야기하자면 신성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전에도 생각했었던 요정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맑고 청아한 눈동자에는 그러한 느낌이 스며있었다.

눈을 맞추고 있노라면 자신마저 정화되는 것만 같은.

음침하고 어두운 자신과는 상반되는 여자.

그가 깊고 어두운 심해라면 그녀는 맑고 높은 하늘이었다.

이 침실은 그런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걱정과는 다르게 방을 꼭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벗이라는 말을 쓰기 전까지는.

벗이라니.

아이든은 아내를 만든 것이지 친우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비록 형태만 갖춘 부부였지만 그래도 부부는 부부일 뿐이다.

아이든은 자신의 기분이 이토록 저조해진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부에게 ‘벗’은 논리적이지 못한 단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벗 따위는 필요치 않아.”

차갑게 말하고 방을 나선 그는 입안이 씁쓸하게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이 불쾌해진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모르겠다.

“각하! 리볼트 녀석들을 몇 붙잡았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명을 내려 주십사, 전서가 왔습니다.”

멀리서 급한 용무가 있는 듯 달려온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그는 찌푸리던 미간을 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찾았다. 화풀이 상대.

“직접 간다고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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