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책임도 져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빌 커티스를 내 인생에서 몰아내고,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제국 최고의 악당을 만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는 결국 내가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도 왜 마차에 단둘이 타기를 원했는지, 나를 왜 도와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내게서 뭔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마차 안에서 나를 뚫을 기세로 쳐다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나 역시 그 이유가 내내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이제 그를 마주할 일은 내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테니까.
우리는 이대로 각자의 길을 다시 걸어가면 될 일이었다.
어제 빌과의 결혼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셔서 언성을 높이시며 나를 꾸짖으셨다.
어머니는 나를 감싸주고 안아 주기는 하셨지만 나 때문에 무산된 투자가, 아니 벌어들일 그 돈들이 아까우셨던지 온종일 침울해하셨고, 말이다.
[그 돈은 절대 다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아니었어요, 어머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부모님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걱정했었던 나는 빌을 떨쳐낸 기쁨이 더 컸던 것인지 생각 보다 견딜만했다.
이틀 후에 나는 리제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시내 외출을 감행했다.
전처럼 꽃도 좀 사고 구경도 좀 하다가 돌아오고 싶어서였다.
빌과 결혼하기 전에는 리제와 이렇게 시내로 들로 자주 돌아다니곤 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이미 수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즐거움 따위와는 담을 쌓고 지냈던 내가 그때만큼 즐길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내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
“시내 구경은 언제나 옳아.”
내 들뜬 말에 리제가 티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가씨! 게다가 오늘은 날씨까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게 딱인 거 같아요!”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리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구경에 나서볼까?
“드레스 살롱부터 먼저 들러볼까?”
“아가씨, 그 전에 저 잠시만 저기 좀 들렀다가 오면 안 될까요?”
리제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 본가 방향이었다.
아버지 없이 동생들과 어머니만 있다고 했으니 신경이 쓰이는 거구나.
나는 리제의 품에 들린 빵을 내려다보았다.
“리제. 그거 하나로 동생들과 어머니가 나눠 드시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리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리제의 손에 쥐여주었다.
리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서 더 사 오렴. 나는 여기서 기다리마.”
“아가씨….”
“어서 다녀와. 우리 구경할 때 많단 말이야.”
모자를 매만지며 말하자 리제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정말 감사드려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알겠으니 어서 다녀오래도.”
“네! 금방 올게요!”
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하고 빵집을 향해 뛰어가는 것을 보고 조용히 내 뒤에 있는 액세서리 전문점 간판 아래로 뒷걸음질 쳤다.
햇볕이 따가우니 그늘에 있고 싶어서였다.
얌전히 서서 거리를 구경하며 기다리는데 액세서리 가게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소동이 벌어졌다.
“이 처죽일 놈아…! 거기 안 서느냐…!”
그리고 문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복면을 쓴 사람이 나를 흘끗 발견하더니 난데없이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모자가 바람을 타고 뒤쪽으로 날아가고 핀으로 고정했던 머리가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달리면 안 되는데.
아니 왜 나를?
아무 연관도 없는데…!
리제는…?
어쩌지…?
내 손을 붙잡고 한참을 달리던 괴한은 끈질기게 가게 주인이 쫓아오자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품 안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인 거 같았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들었으나 내 눈이 마주한 건 번뜩이는 안광뿐이었다.
고개를 얼른 내려 시선을 피했다.
단순 도둑이 아닌가…?
어떡하지, 너무 무서운데….
“… 이봐.”
굵직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어깨가, 아니 몸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남자에게도 보이겠지?
내가 떨고 있는 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고 빠져나가야 하지?
어떡해야 해?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 남자가 골목 벽을 한차례 주먹으로 가격하며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대답 안 해?”
“네, 네! 네네! 대, 대답했어요!”
남자가 짜증스럽게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운 마음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거기서 살 물건이라도 있었나?”
“아, 아니요! 그,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남자는 낮게 혼잣말하듯이 내 말을 따라 읊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거긴 장사 못 해.”
당연히 그렇겠지!
당신이 죄다 훔쳤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나는 덜덜 떨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피식 웃더니 손가락으로 내 턱을 잡아들어 올려 나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음…? 이거 뭐야. 이쁘장하길래 데리고 뛰었더니, 너….”
용기 내어 눈을 들어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웃긴 거라도 본 사람처럼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왜, 왜 웃으세요?”
순간적으로 질문해 놓고 아차 싶었다.
미쳤다.
나를 납치해 온 남자한테 이렇게 친근하게 물을 일인가?
곧 진정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 그 새끼들이 찾는 애구나. 그렇지?”
그… 새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는 영문모를 말을 내뱉고는 피식 웃었다.
“그 놈들 아주 이를 갈던데. 널 데려가면 나한테 뭐가 떨어지려나.”
데려가…?
이게 지금 다 무슨 소리야…?
누가 날 원해…?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빌인가?
하지만 이 남자는 복수형으로 말했잖아?
머릿속이 어지러워.
“보내주세요.”
“내가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다간 어딘가로 팔려가듯 내던져질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야 해.
“보내주세요. 저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호오. 듣고 보니 그렇구만.”
하고 대답한 남자가 갑자기 복면을 벗어 던졌다.
복면 아래 감춰져 있던 얼굴은 꾀나 호남형 얼굴이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잘못이 생겼네. 내 얼굴을 봤잖아.”
“네……?”
멍해져서 대답하는데 남자가 다시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골목을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 손목을 남자의 손에서 빼내려고 발버둥 쳤다.
“제, 제발…!”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를 더욱 악물었다.
여기서 울음을 터트리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제발 이것 좀…!”
그의 손을 내 손목에서 밀어 빼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강한 악력이 손목을 잡아 올 뿐이었다.
나는 속절없이 타의에 의해 강제로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제발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주변 시내에 나온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까 생각하던 찰나 남자가 우뚝 멈추어 서서 내게 바짝 다가와 짓씹듯이 말했다.
“한 번만 더 소란 피우면 여기서 그냥 죽여버릴 거야.”
“!”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드레스 자락을 적셨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만족한 듯 내 눈물을 손으로 다정하게 닦아준 뒤 다시 나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젠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왜 아버지께 호위하나 붙여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함께 나는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의지를 버렸다.
여기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얼마나 끌려가다시피 걸었을까.
머리는 바람에 마구잡이로 휘날려 산발이 되고, 눈물도 메말라 더는 나오지 않을 때쯤, 손목이 찌릿찌릿하며 아파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너무 세게 쥔 탓인지 멍이 든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본 적이 없던 탓인지 다리도 너무 아팠다.
더는 걸을 기력이 없었다.
내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걷자 남자가 칫. 하고 혀를 찼다.
“고작 이거 걷고 이 꼴이 난다고? 평소에 얼마나 안 움직이고 살면 이래?”
내가 안 움직이고 살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이니….
이젠 모르겠다….
분명 우리 사이가 이상하다는 게 눈에 보일 텐데 그 누구도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서글펐다.
하긴.
내가 이 장면을 봤으면 손을 뻗었을까…?
나는 피식 자조했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곳에 가면 나는 죽을 것이다.
너무 뻔한 결말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
“더는… 못 가.”
기력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남자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녀?”
“그런가 보다….”
“어쭈?”
“제발 좀… 꺼져 줄래.”
이판사판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죽을 거면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자.
“죽고 싶어?”
“너 그러다 찾는 게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니…?”
“뭐?”
“헛수고한 거면 돈도 못 받고… 너는 온전할 것 같니?”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다가와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게 미쳤나. 진짜 뒤지고 싶은 거지?”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눈을 꾹 감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새카만 코트 자락만이 보였다.
방금 그 남자가 검은색 코트를 입었었던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코트의 주인이 옆으로 비켜섰다.
새카만 코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눈에 보인 건 검에 목이 베여 피를 뿜어내며 쓰러져 죽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릿하게 코를 쑤시고 들어오는 피 냄새와 잔인한 광경에 헛구역질을 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타인의 피였고, 처음 보는 시체였다.
충격으로 입을 틀어막은 손이 덜덜덜 떨려왔다.
그때, 코트의 주인이 뒤를 돌아 내 손을 잡아 손목에 든 멍을 바라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호위도 없이 혼자 기어 나와! 미쳤어?”
남자의 목소리가 웅웅 거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속이 뒤집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이봐! 릴리아나!”
또렷하게 들려오는 내 이름에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이든 딜리아.
아아….
당신이었구나….
“고… 고마….”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일어나!”
공작이 나를 일으키려고 해보았지만, 힘없이 주르륵 주저앉는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앞에 자세를 낮춘 그가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짓씹듯이 말했다.
“귀족 자제가 호위도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목숨이 열두 개야?”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하지만 회귀 전 리제와 시내에 나왔을 땐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너 대체 뭐야! 니가 뭔데…!”
공작은 분노에 찬 듯 외치다가 주변을 힐끗 둘러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장소는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뱉어낸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도와줬잖아!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사랑 고백해가며 도와줬으면 된 거 아냐!? 나한테 대체 왜 이래!”
공작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가며 언성을 높였다.
몸이 흔들리니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대체 뭘 어쨌다는 걸까?
“가, 각하. 이것 좀 놓고….”
그의 다그침에 겁이 나 개미만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일어섰다.
그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학대당해?! 굶어 맨날?”
여전히 짜증스럽고 화가 난 어조였지만 내가 가벼운 것이 맘에 안 드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고 말았다.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이 밀려 들어오자 그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어졌다.
그는 내가 위험에 처한 걸 어떻게 알고 도움을 준 걸까?
그저 지나던 길에 발견해서?
집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 공작’이?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를, 그도 나를 서로 잘 알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나는 그의 품에 힘없이 얼굴을 묻었다.
“정말 고마워요….”
따라오는 대답은 없었다.
공작은 말없이 자신이 타고 온 말 위에 나를 올리고 내 바로 뒤에 올라타 나를 안았다.
말고삐를 쥔 그가 힘차게 외쳤다.
“이랴!”
그는 의원으로 나를 데려가 치료해 준 뒤 데일 저택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마지막까지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나를 내려 준 공작은 저택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는 나를 향해 한마디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다시 보기 전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마. 명령이야.”
멀어지는 말과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저택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다시 봐……?”
***
그날 저녁 리제는 부모님께 크게 혼이 났고, 나는 리제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공작의 말은 며칠 뒤 정말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가 데일 저택에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응접실로 가자, 공작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가까이 다가가 예를 갖추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공작은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힐끔 보고 고개만 한번 까닥일 뿐이었다.
저렇게 반갑지 않은 얼굴로 대체 왜 찾아온 걸까.
아버지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일어서 나를 한 번 안아주셨다.
왠지 모를 한기가 몸을 타고 흘렀다.
아버지의 기분이 좋다는 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동안 나는 쳐다도 안 보실 것처럼 구셨었는데…?
“좋은 시간 보내거라. 아비는 먼저 가마. 그럼, 각하.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공작이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하자, 아버지는 내 어깨를 토닥여 주시곤 응접실을 나가셨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그가 내 앞으로 걸어와 섰다.
그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집 밖으로는 안 나간 모양이군.”
대체 뭐지, 이 사람?
저렇게 냉기 풀풀 풍기면서도 나를 걱정했다는 건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눈빛만큼은 소문이 헛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데도….
나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해 눈을 옆으로 돌리면서 대답했다.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 있어서요.”
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가서 좀 걷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느린 발걸음으로 정원을 거닌 지 5분쯤 지났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날 언성 높였던 거. 우선 사과하고 싶어.”
어…?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는 사과라곤 할 줄 모르는 사람일 것만 같았는데.
저렇게 감정 없는 표정으로 사과를 한다고?
“그… 하…. 그런 표정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민망한데.”
아.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나.
그는 공작이고 나는 한낱 영애일 뿐인 것을.
그는 아무런 대답이나 잇는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간 우리는 다시 말없이 걷는 데 집중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 꽃이나 경관을 둘러보며 감탄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무슨 용건이 있든 간에 빠르게 볼일을 보고 돌아가 주었으면 했다.
다시 5분쯤 흘렀을까,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따라 나도 걸음을 멈추자 그가 내 앞으로 와 서서 말했다.
“내가 그날 한 이상한 말이 뭐냐고 묻지 않는군.”
어째서 자신에게 관심 가져 주지 않느냐고 묻는 건가?
그날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했더라?
나는 그날 밤새도록 내가 봤던 목 베인 시체가 떠올라 잠도 겨우겨우 청할 수 있었다.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잔인한 광경 뿐이었어서 그가 한 말을 되짚어볼 정신머리가 내겐 없었다.
“제가 궁금해하기를 바라시나요?”
내 질문에 그가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건가?”
“그런 말씀이 아니라….”
“뭐. 됐어, 그런 건. 내가 오지 않은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나?”
뭘 묻고 싶은 걸까, 이 사람은.
나를 보호해 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자기가 아니면 날 보호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뻐기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말투가 조금 퉁명스럽게 나갔다.
그가 생각보다 여성에게는 괜찮지 않은 사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공작은 내 퉁명스러운 어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생각에 잠겼다.
이쯤 되니 나도 더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걸으실 건가요?”
“음?”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되묻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음, 더 걸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 이만 들어가 봐.”
“…제게 볼 일이 있으셨던 게 아니었나요?”
“궁금증은 다 풀렸어.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하…….”
이 남자 진짜 제멋대로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뒤통수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봐.”
뭘 또 봐?
나는 짜증스럽게 다시 돌아서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보세요, 공작 각하.”
“…?”
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게 볼 일 다 끝나셨다면서요! 이제 그만 찾아오세요. 또 보자고도 하지 마시고요! 절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꼭 해드리겠습니다. 혹여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저택 쪽으로 서신을 주세요. 반드시 보답해 드릴 테니까요.”
그는 놀란 듯 나를 내려다보다가 눈꼬리를 접으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앞뒤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그의 미소에 넋을 놓을 뻔했다.
정말이지 무표정일 때와는 너무 다른 남자였다.
“좋아. 원하는 게 있으니 반드시 받도록 하지. 그날까지 부디 안녕하길 바라, 영애.”
“네, 그럼요. 염려 참 감사하네요. 안녕히 가세요.”
그를 한 번 더 노려봐 주고 그에게서 떨어져 몸을 돌렸다.
뒷통수 너머에서 큭큭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저 남자는 처음 본 날에도 꼭 저랬으니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헤어진 지 이틀 뒤에 침실에서 편히 쉬고 있는 내게 리제가 찾아왔다.
“딜리아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다 갔어요. 읽어 보세요.”
딜리아 공작가!
나는 부리나케 리제에게서 서신을 받아들었다.
봉투에 붙어있던 인장 실링이 이미 뜯겨 나간 채였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가 아주 많이 불길하다.
“…이거… 아버지가 보셨니?”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리제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럼요. 지금 난리 난리가… 아무튼 어서 읽어보세요! 백작님께서 편지를 다 읽거든 서재로 오라고 명하셨어요.”
[좋아. 원하는 게 있으니 반드시 받도록 하지. 그날까지 부디 안녕하길 바라, 영애.]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해서 찝찝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 서신에는 원하는 대가의 목록이 적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리제는 또 왜 이렇게 잔뜩 흥분했으며, 아버지께서는 왜 그렇게 급하게 나를 찾으시는 것일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내용에 미사여구 따위는 없었다.
편지를 쓴 주인의 성격만큼이나 지극히 단출한 내용이었다.
[당신의 용기에 감명하였습니다. 결혼할 사이라 소문을 내셨으니 책임도 져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아이든-]
나는 편지를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툭, 하고 편지가 땅에 부딪혀 내는 가벼운 마찰음이 들렸다.
“아가씨…?”
리제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미쳤나 봐.
그 사람이… 미친 게 틀림없어, 리제.
“아가씨…? 백작님께서 찾으신다니까요!”
이… 이걸… 이걸 아버지께서 이미… 보셨다는 말이지…?
“리제… 나 이제 어쩌면 좋아…?”
나는 울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서재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실까?
그는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일까?
대체 내게 뭘 원하고 이러는 것일까?
따위의 고민들이 머릿속을 미친 듯이 헤집고 있었다.
그리고 서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그가 내게 대가로 원한 것은 이런 것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예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놀리듯 바라보았구나.
삶을 살인마에게 저당 잡히지 않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또다시 그로 인해 삶을 저당 잡히는구나, 나는….
그것도 무시무시한 소문이 뒤 따라다니는 최고의 악당에게.
물론 나는 그가 완전한 악당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 완전한 악당이었다면 나를 두 번이나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을 그에게 송두리째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목숨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정말 그가 순수하게 내게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저 돈이나 대가로 조금 받고 말 만큼 그가 선하다고 생각했을까?
우리 가문보다 몇 배는 더 부유해서 부족할 것 하나 없는 그가?
너는 여전히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였구나, 릴리아나.
탐욕적인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실지는 사실 물 보듯 뻔한 것이었다.
절망감이 내 안을 가득히 메웠다.
나는 또 이렇게 사랑 없는 결혼을 하는 것이구나.
서재의 문이 마치 지옥문처럼 보였다.
***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서재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서재 책상 앞으로 놓인 손님용 소파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계셨는데, 일전에 우울해하셨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였다.
내가 서재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해맑게 웃으시면서 내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그래. 그래. 우리 귀한 따님이 이제야 왔구나. 앉거라, 앉아.”
“아버지….”
당신은 정말 속물이에요.
“그래, 아가. 어서 와서 앉아라. 엄마 옆으로 앉으려무나.”
어머니. 그렇게 행복하세요? 딸이 행복하지 않은데도요?
부모님의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그대로였는데도 나는 입안이 너무나도 쓰게 느껴졌다.
지난 생에도 겪어본 바 있는 일인데, 나는 왜 매번 이렇게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은 왜 이리도 약하디약한 것일까?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먼저 앉으세요.”
그래, 그래, 우리 딸.
하고 중얼거리며 아버지는 소파 상석에 앉으셨다.
나는 쉽게 소파에 앉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모님께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까?
나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것일까?
속이 답답해져 와.
얹힌 듯 꽉 막힌 속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시야에 어머니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는 알이 박힌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 날의 아버지가, 젊은 날의 어머니께 청혼하실 때 사 주셨다던 그 반지였다.
반지에 박힌 것이 그렇게 값비싼 알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그때 너무 행복했다고 하셨었지.
마치 온 세상을 선물로 받은 것 같으셨다고.
그렇다면 두 분께서는 서로 사랑하셔서 결혼하셨던 것일까?
어머니께서는 그래서 행복하셨던 것이겠지?
내가 꿈꿔왔던 것도 그런 것이었는데….
설령 알이 박히지 않은 반지일지라도….
어머니의 말씀처럼 온 세상을 선물 받은 듯 기뻐할 수 있는… 그런 결혼 말이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도 나를 사랑하는 관계.
그런 것은 정말, 그다지도 어려운 것일까?
이대로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마는 것일까 봐서 겁이 났다.
내 삶을 원하지 않는 남자로부터 지켜낼 기회는 정말로 없는 것일까?
아니야.
아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야.
그를 만나야겠다.
이대로 또다시 내 인생을 원치도 않는 결혼의 굴레에 빠지게 둘 수는 없다.
나는 기적처럼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었고, 이 기회를 이렇게 속절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 사람은 일방적으로 결혼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아직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는걸요.”
“그게 무슨 말이냐? 상대는 무려 공작이란다, 릴리아나. 이 기회를 차버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아버지께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미련한 것이지. 그리고 청혼이야 이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니겠니?”
어머니는 당연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고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 제 의견은 물어보지 않으시는 거예요…? 제 마음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는 황망한 마음이 되어서 물었다.
돌아오는 답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 것이라는 걸 알지만, 부모님께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아이 같은 투정이리라.
“얘야, 사랑하는 리안.”
어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셔서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다.
어머니의 품이 따뜻했다.
따뜻한 품처럼 따뜻한 말씀을 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의 작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말이다.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와 살아야 하는 것이란다. 네가 사랑하는 남자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니? 물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같다면 더욱 좋겠지만… 딜리아 공작님은 귀족 영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꿰차고 싶어 하는 남자란다. 그런 남자가 너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데 엄마가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니?”
어머니….
그는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하아….”
어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해서 청혼을 했을 리가 없으니 어머니의 말이 내게는 틀린 말이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똑똑.’
그때, 서재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아버지의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저택에서 40년을 일해 온 집사 아론이었다.
“백작님. 딜리아 공작저에서 또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번엔 온 것이 편지 한 장이 아니라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너무 놀라서 어머니를 밀어내고 아론을 지나쳐 뛰기 시작했다.
“리안! 그렇게 뛰면 안 된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뛰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보니 온갖 커다란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서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이게 다 뭐예요…?”
하인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있던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미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하고는 회색 페도라를 벗고 상체를 숙여 인사해왔다.
그는 회색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회갈색 머리를 한 사내였는데, 의류 재질이 결코 저가로 보이지는 않아서 딱 보기에도 평민 같아 보이지는 않는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일 영애. 듣던 것만큼이나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저는 공작님을 모시고 있는 부관, 칼 폴쳐라고 합니다. 폴쳐 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안녕하세요, 폴쳐 경. 그런데 지금 이게 다 무엇인가요?”
자신을 칼 폴쳐라고 소개한 남자가 해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작님의 혼인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곳에 온 것은 극히 일부입니다, 영애. 공작저로 들어오시게 되면 몇 배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공작님의 말씀을 꼭 전하라고 하셨지요.”
선물이라니?
혼인 승낙도 받지 않았는데 선물부터 보내는 경우가 도대체 어디에 있지?
청혼서 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그는 아직 나를 충격받게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충격에 허우적대는 동안 뒤를 이어 도착한 부모님께서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어머나. 이게 다 몇 개야… 무슨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공작님께서 저희 아이를 정말로 아끼시는가 보네요.”
어머니….
선물에 홀라당 넘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하. 그렇지요.”
폴쳐 경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어색한 미소가 공작이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부모님뿐 일지도 몰랐다.
폴쳐 경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저는 명을 다 수행하였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폴쳐 경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공작님을 뵙고 싶은데, 가능하겠지요?”
칼 폴쳐 경은 손에 든 페도라를 쓰려다가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영애.”
그리고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작님께서도 분명히 영애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하셨지요. 원하신다면 모시고 오라고 하셨으니 함께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까지도 다 염두에 두었구나.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까지도 이미 전부 다 파악해 두었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공작의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처음 만났고, 친분이 있다고 말할 만큼의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두 번이나 구해주고 했던 알 수 없었던 말들도 그렇고….
나는 도통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공작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세간의 평판들이 떠올랐다.
절대 그 어떤 것에도 실패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악랄하고, 거침없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속을 봐주지 않는 잔인함.
공작가에 혹은 제국에 척을 진 이들에게는 받은 것의 열 배를 돌려주는 냉혹함….
제국의 황제는 전쟁이 나거나 외교적인 전략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딜리아 공작을 애타게 찾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는 황제 외에 그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는 권력의 끝에 있었으며, 프세아니아의 가장 강력한 작전참모였고 지략가였다.
이렇게 권모술수에 능란한 그가 자신의 두뇌를 하등 쓸데없이 내게 쓰고 있다는 생각을 왜 지울 수가 없을까?
과연 이렇게 무시무시한 꼬리표를 달고 사는 그를 그저 평범한 백작가 영애일 뿐인 내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솔직히 자신이 없어졌다.
“가시겠습니까?”
나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사용인들을 불러서 선물을 옮기는 부모님의 모습이 그렇게 탐욕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짙은 숨을 뱉어냈다.
청혼을 물러 달라고 하자.
모두 없던 일이 되게 하자.
은혜를 갚는 건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폴쳐 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