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결코 무력하지 않아
집사에게 환복도 하지 못한 채 잠옷 차림으로 끌려온 칼 폴쳐 부관은 죽상을 하고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이 쏟아져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아이든 딜리아 공작이 자신을 처죽일 듯이 노려보는 통에 온갖 졸음이 다 달아나고 온몸의 털들이 쭈뼛거렸다.
“적어도 10시 반까지는 끝내야 하니까 쉬지 마. 눈도 깜빡이지 말고 숨만 쉬고 일만 해.”
공작의 목소리가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책상에 자신의 앉은키보다 더 높게 쌓인 서류를 10시 반까지 처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업무처리의 신이 강림한다 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칼은 울고 싶어졌지만, 그 순간에도 눈과 손은 쉬지 못했다.
가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류가 나타나면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공작이 항상 하던 끔찍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뇌는 폼으로 달고 있나? 가지고 태어났으면 사용을 해야지! 내가 일일이 다 처리할 것 같으면 네놈을 그 자리에 왜 앉혀 놨겠어?”
정말 끔찍했다.
그는 상관으로서는 정말로 빵점인 사내였다.
이런 식으로는 누구의 충성심도 얻을 수 없을 텐데.
칼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고는 다시 서류에 눈을 고정했다.
이러나저러나 받는 보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는 금액이었으므로.
11시쯤 되었을 때, 공작과 부관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가 동이 났다.
무려 새벽 4시부터 숨만 쉬면서 일만 한 결과였다.
아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바라보았다.
부관의 눈가는 거뭇거뭇하고 온 얼굴에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안쓰러울 만도 하건만.
아이든은 그런 감정을 일절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을까?
“수고 많았다. 서류들은 한데 묶어서 황궁으로 보내고 돌아가 쉬도록 해. 나는 나가 봐야 하니까 알아서 돌아가도록.”
“예… 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각하….”
탈진이라도 한 듯 말까지 더듬으며 힘없이 말하는 부관을 뒤로하고 아이든은 방으로 돌아와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카페테리아 란즈. 전속력으로 달려.”
“예, 각하!”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아이든은 마차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풍경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시내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 부리나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든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국인들이 딜리아 공작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싫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괴물이라고 불렀을 테지.
그들은 마차에 새겨진 딜리아 공작가 문양만 봐도 사색이 되어 도망부터 쳤다.
그가 웬만한 중요한 일이 아니면 시내에 잘 나오지 않으려 하는 이유기도 했다.
서로 껄끄러울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이든은 그들이 우스웠다.
무슨 양심에 찔리는 일들이 그리들 많아서 도망부터 치는지.
제국에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겁쟁이들.”
탁!
아이든은 가차 없이 창문을 닫아버렸다.
시야가 차단되니 마음은 가라앉았는데 란즈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아이든은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하면서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녀는 과연 오늘 그 자리에 앉아 있을까?
꿈에서 보았던 그 자리에 그 모습을 하고서?
그렇다면 나는 오늘 드디어 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일까?
침착해 보려고 해도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
저 사람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가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한들, 그를 몰라볼 사람이 제국에 존재하긴 할까?
그는 절대 웬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를 도와주지도 않을 사람이고, 도움을 바라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심장이 너무너무 벌렁거려서 막 들어선 손님의 시선을 피해 빌을 바라보았다.
빌은 내내 숨을 참고 있었는지 내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나를 보며 있는 힘껏 숨을 뱉어냈다.
“허어… 미, 미치신 겁니까…?”
그리고 진심을 담아, 내게 속삭였고, 나는 또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의 한마디가 너무나 정겹게 들릴 지경이었다.
빌은 한눈에 보기에도 충격과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가리켜 결혼할 사람이라고 널리 홍보한 그 사람은 이 프세아니아 제국에서… 아니, 위력이 가장 막강하다는 3대 제국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고, 악랄하고, 냉혈한 악당이라고 소문난 아이든 딜리아 공작….
그랬다.
나는 내가 들어갈 지옥문을 스스로 열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빌은 상체를 더더욱 내 쪽으로 기울이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또다시 속닥거렸다.
“미친…! 이쪽으로 오고 있잖습니까…! 당신 진짜였습니까…?”
흠칫.
오… 오고 있어…?
왜…?
해코지하려고…?
나를 죽이려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위기를 모면하자고 호랑이 굴에 들어갔으니 이 위기는 또 어떻게 피한담?
릴리아나, 너 정말 제정신이니!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돌려, 내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올곧게 나만을 응시하며 다가오는 그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멈춰 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들이켠 상태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경직된 채로 숨을 쉴 수도, 그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어두운 심해 같은 그의 검푸른 빛 눈동자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그를 가리켜 괴물 같은 사내라고 했는지, 황제마저 왜 그를 쉽게 누르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는 모든 신분의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최상위 포식자였던 것이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큰 무례를 범한 나와 내가 속한 가문 따위 가볍게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정도의 수고로도 박살을 내 버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두렵고 숨이 막혀 곧 죽을 것만 같던 찰나 그가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그제야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뱉어내려던 변명의 말들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리제가 보고 싶었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물론 그전에 그가 나를 살려서 보내준다는 전제가 깔려야 할 테지만….
“아아….”
곧이어 들려온 나른한 목소리는 눈동자만큼이나 깊은 울림이 있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그가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온몸에서 피가 삭 가시는 것 같았다.
한 마리의 맹수 앞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 사람은 이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마치 꼭 그가 [귀찮게 왜 나를 찍어서]라고 말하면서 내게 검을 꽂아 넣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번 생에서도 이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일까?
사람을 잘못 가리켜서?
그는 대체 왜 이런 곳에 발걸음 한 걸까….
원래도 딜리아 공작은 악질적이다, 악랄하다, 냉혈한이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평판 이외에도,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음침하기로 소문이 난 사내였다.
그러니까, 그는 이곳에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릴리아나.”
흠칫.
아, 아니 이 남자…!
우린 만난 적도 없고, 하물며 스쳐 지나간 적도 없었는데!
도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혹시 이미 내가 타깃으로 점 찍혀서 뒷조사까지 다 마친 거야?
나는 오늘 빌이 아니었더라도 죽을 운명이었나…?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내 우려와는 달리 그는 내게 검을 꽂아 넣지는 않았다.
오히려 손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려 시선을 맞춘 뒤,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
멍해져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단지 웃어주었을 뿐인데, 그 미소만으로 좀 전의 누군가를 잡아먹어 치울 것만 같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변해있었다.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마치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 같았다.
반짝거렸고, 아름다웠다.
“릴리아나. 오늘따라… 어쩐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아.”
그는 스스로에게 해야 할 칭찬을 내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반말로 말이다.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누구라도 그가 나를 아주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게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는 곧이어 서늘해진 시선을 빌에게로 옮겼다.
그 얼굴에 더 이상 미소는 없었다.
“이 벌레는 어디서 꼬였을까.”
그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화를 참는 듯 낮게 깔린 음성과 눈빛은 순식간에 스산하고 매서운 한겨울의 밤바람 같아졌다.
빌은 눈에 띄게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했다면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누가 화가 난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전에, 그는 왜 나의 연극에 동참해 놀아나 주는 것일까?
그의 일격에 죽임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나는 도저히 그 이유를,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빌이 좀 불쌍하게 보일 지경에 이르렀을 즈음에, 아이든 딜리아 공작은 다시 그 시선을 나에게로 바꾸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릴리아나. 내가 말했던가. 내 것에 벌레가 꼬이면… 내 기분이 아주 별로일 것 같다고 말이야.”
빌이 옆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공작에게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있을 만큼 공포에 절어 있었다.
그 말 한마디로도 이미 빌은 절대 내 인생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공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질투가 아주 심한 남자라고.”
그의 표정도, 두 눈빛도, 그의 말들도 모두 진짜 같아.
이 거짓말 같은 상황에서 진실 된 것만 같은 그 눈빛을 나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좀 무서웠고,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믿어.]
그가 무슨 연고로 나를 돕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왠지 그를 믿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기대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 같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했던 미소를 거두고 진중한 표정으로 오로지 내게 그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신을 믿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작은 내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아름답고 눈부신 미소가 다시 떠올랐으니.
저 미소를 한 번이라도 본 영애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려고 할까?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게, 왜 아직도 혼자인지 알 수 없는 미모인데.
하긴, 문제는 그가 웬만해서는 웃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 포커페이스로 소문이 자자한 남자가 왜 내게는 이렇듯 헤프게 웃어주는 걸까?
나는 왜 그가 내 장단에 맞춰주며 웃고 있는지,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잡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게 들릴 말들을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잘도 뱉어냈다.
“당신의 눈은 오롯이 나만 담고, 당신의 머릿속에도 늘 나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줄 거지, 릴리아나?”
공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순종적인 반려견이 된 마냥 다시 또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렸다.
만약에 그의 눈빛이 내게 신뢰감을 주지 않는다고 한들, 또 내가 그에게 기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한들, 내가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고 반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건 이 자리에 앉은 사람이 내가 아닌 그 누구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에게 반박하고 나설 수 있는 간 큰 피식자는 없을 테니까.
물론 나는 그런 이유들을 다 재하고 나더라도 그에게 자꾸만 순종적이 되었지만.
“그럼 오늘 꼬인 날파리는… 내가 대신 처단해도 될까?”
“…네? 아… 네.”
하. 방금 뭐였지?
빌을 노려보며 당장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아. 제발 그래줄래요?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예요.
당당하게 대답하며 빌이 어떤 표정이 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야 했는데.
나는 정말로 억울해졌다.
내 우려와는 달리 그는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공작의 눈썹이 크게 치켜 올라갔다.
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나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뭔가를 내게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손을 제 허리에 있는 검 집으로 가져갔다.
나는 놀라서 그와 그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작이 단지 남들 눈에 보여주기 위한 연극만을 한 것이리라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가 실제로 행동을 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빌을 해하려는 걸까? 단지 내가 처한 상황만을 보고서?
“어어어?”
아니나 다를까, 공작의 커다란 손이 검 손잡이에 가기 무섭게 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한 추임새를 넣더니 얼마나 다급했던지 우당탕탕 의자까지 쓰러트려가면서 요란스럽게 줄행랑을 쳤다.
나는 공작의 행동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좀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그가 공작의 검에 아주 살짝이라도 좋으니 피를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빌은 제가 마신 차 값은 지불하고 갔겠지?
내 피 같은 돈을 그에게는 일절 쓰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아무렴, 어떠하랴.
이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오늘 제가 본 일을 귀족사회에 빠르게 소문낼 것이다.
커티스 백작이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약혼녀에게 차였다더라.
게다가 약혼녀 앞에서 공작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얼굴이 희게 질려 꽁무니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더라.
그는 이제 어디에 얼굴을 들고 나타날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오늘 일이 너무 부끄러워서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어쩌면 집에 돌아가면서 바지에 어린아이처럼 소변을 지렸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갑자기 웃음이 날 것 같아서 무릎을 세게 꼬집었다.
나는 공작이 펼친 연극의 결과가 퍽 만족스러웠다.
빌 커티스 백작은 앞으로 다시는 나와 우리 가문에 기웃거리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도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고, 더불어 내 인생도 더 이상 그가 마음대로 가뒀다가 내치거나 죽이는 장난감이 아니게 된 것이다.
통쾌하다.
명백하게도 나를 죽이고 소름 끼치게 웃어 대었던 잔인한 빌 커티스 역시, 결국엔 아이든 공작 앞에서는 한낱 파리한 피식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난 생에 그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던 내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늘의 빌 커티스는 너무나 나약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공작을 먼저 찾아갈 걸 그랬나 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공작은 여전히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 역시 다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그가 마치 내게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곳에 꼭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그가 벌벌 떨릴 정도로 공포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게 만은 착각이 일 정도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록 그것이 진짜 같은 거짓이었을지라도.
그런데 그는 어째서 나를 여전히 이토록 빤히 바라보는 것일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그는 끝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제 나도 돌아가야… 하… 는…?”
나는 용기를 내어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꺼내다가 내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발견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 손은 뭐지…?
“릴리아나.”
그의 부름에 다시금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느새 그는 해사한 미소를 가면으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연극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이미 내 목표는 이루어졌고, 사실상 그와 나는 생판 모르는 남남인데….
그가 다른 이들이 지켜보든지 말든지 가면을 벗어던지고 이 자리를 뜬다고 해도 나는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기실 그에겐 이 연극을 이어갈 의무가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그것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 연극의 대가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돈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라도 그 대가를 내어 줄 수 있니, 릴리아나?
“릴리아나.”
그가 다시 나를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왔다.
“네. 듣고 있어요.”
그게 만약 돈이라면 나는 이미 부유한 그에게 얼마만큼을 지불해야 할까?
“나가자. 좀 걷지 않을래?”
“?”
네에? 뭘 하자고요?
이 남자가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한 건지 한 번에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제국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악랄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공작과 뭘 한다고?
산책을 해?
여유롭게?
손을 맞잡고?
아니, 밖에선 연극이 막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도대체 왜?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웃음이 터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크게 웃지 않으려고 끅끅대는 꼴이 얼마나 가벼워 보이는지 이전의 냉랭하던 포식자의 포스 같은 건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 표정이 도대체 어땠길래…?
그렇게 웃겼단 말이야…?
그렇게 웃어 대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나는 온 얼굴이 다 터질 것처럼 화끈거리고 있었다.
“하아. 원하지 않으면 집에 데려다줄게. [사랑해 마지않아 결혼까지 약속한 연인]에게 그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 그렇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그는 크게 날숨을 뱉어내곤 내가 그와 함께 나가야 한다는 말을 [사랑해 마지않아 결혼까지 약속한 연인]이라는 말에 특히 더 강한 악센트를 넣어 강조해 가면서까지 말했다.
내가 뱉어낸 말에 책임을 지라는 압박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러나저러나 결국 그와 손을 다정히 맞잡고 란즈를 나서야 한다는 소리였다.
***
“제가 결혼할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에요!”
란즈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든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다.
그 여자가 실존했다.
게다가 이 란즈에서.
아이든은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저 개꿈이 아니었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꿈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해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주저 없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빠르게 캐치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정인의 역할이라면 이 촌극에 가장 완벽하게 놀아나 줄 작정이었다.
그러면 그 지긋지긋한 꿈에서도 해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든은 그녀 앞에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제국에서 보기 드문 새카만 머리칼에 탄자나이트 색을 닮은 말간 바다 같은 눈동자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앳된 얼굴에 매끈한 피부. 그냥 보기에도 흘러넘치는 기품까지.
놀라울 정도로 오늘 꿈에 나왔던 여자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의상뿐.
아이든의 눈 색과 흡사한 색의 드레스과 장갑, 블랙컬러의 모자까지.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에 나왔던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여자와는 달랐다.
기품과 카리스마가 넘쳐 보일 뿐이었다.
오히려 더욱 고고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릴리아나.”
꿈에서 머릿속에 스쳐 갔던 이름을 꺼내 불러보았다.
모험이었다.
흠칫.
여자가 어깨를 떨며 놀라는 게 보였다.
맞았구나, 이 이름이.
아이든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릴리아나. 오늘따라… 어쩐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아.”
촌극의 시작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연인을 대하듯이.
누구나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리고 가장 차갑고 냉혹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빌 커티스 백작.
쓸데없이 돈 욕심이 너무 많고, 추문이 끊이지 않는 벌레만도 못한 남자.
그는 아이든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류였다.
그래서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그를 벌레 보듯 쳐다보았다.
하등한 생물에게 보일 미소 따위는 없었다.
“…이 벌레는 어디서 꼬였을까.”
절로 목소리에 냉정함이 베어 나왔다.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본 것도 아닌데 빌 커티스는 벌써부터 눈에 띄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참 한심하고 못난 작자.
꼴도 보기 싫어서 아이든은 고개를 획 돌려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해사한 미소를 짓고서.
“릴리아나. 내가 말했던가. 내 것에 벌레가 꼬이면… 내 기분이 아주 별로일 것 같다고 말이야.”
아이든 공작의 말에 빌 커티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숨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의 말은 마치 빌을 해치우고 말겠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질투가 아주 심한 남자라고.”
빌은 이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안 그래도 괴물이라 소문난 공작이 질투에 눈이 멀면 얼마나 더 잔인해 질 수 있을까.
빌은 그런 것을 상상이라도 해 보는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이든은 빌이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아나만을 바라보았다.
릴리아나는 아무 대답 없이 아이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과 눈을 이렇게 오래 맞추고 공포에 질리지 않은 사람은 집사 칼튼 이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 상황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를 믿어. 불안해 하지 마. 나는 그럴 힘이 있어. 결코 무력하지 않아.’
아이든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릴리아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속 모든 말들을 이해한 것 같아 보여서.
그녀는 곧 고개까지 끄덕여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든이 입 밖으로 꺼낸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믿어요.]
아이든은 속으로 픽 웃어버렸다.
아이러니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우린 지금 방금 처음 만났는데, 이 유대감은 도대체 무엇인지.
그녀도 꿈에서 자신을 보았을까?
꿈을 꾼 것은 정말로 자신뿐일까?
문득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당신의 눈은 오롯이 나만 담고, 당신의 머릿속에도 늘 나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줄 거지, 릴리아나?”
아이든은 다정한 얼굴로 달콤한 말을 뱉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들은 자신 역시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해 준다면, 그건 무슨 느낌일까?
정말로 행복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 수 있는 것일까?
릴리아나는 고개를 또다시 끄덕였다.
긍정의 신호였다. 자신만을 오롯이 사랑하겠다는.
이상한 일이었다.
연극일 뿐인데 그녀의 수긍은 마치 진짜처럼 느껴졌다.
이 연극이 끝나고 나면 모든 건 흩어지고 말 대답이었는데도.
아이든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럼 오늘 꼬인 날파리는… 내가 대신 처단해도 될까?”
“…네? 아… 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더니 흠칫 놀라며 오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분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아이든은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야 돌아서서 이것 때문에 다시 꿈을 꿀까 봐서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보기에 릴리아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이 내가 바라 마지않는 것이에요.]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든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든은 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사람이 수두룩했고 이미지 관리를 하려다가 망한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면 그것을 간파해 내는 것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릴리아나는 간파하기가 더 쉬운 여자였다.
어찌나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는지.
‘정말로 내가 그를 해하길 원하나? 진심인가?’
아이든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그저 할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빌 카터스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말 죽인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었다.
아이든은 허리에 찬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 순간 빌 카터스가 눈치 빠르게 우당탕탕 거리며 일어나 꽁무니가 빠지게 달려 나갔다.
저도 살고 싶었던 모양이지.
아이든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쫓아가 죽일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
그런대로 살다가 어디서 뒤져도 뒤질 위인이었고.
아이든은 빌에게서 빠르게 시선을 돌려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쉬움이 가득 묻은 얼굴을 하다가 빌이 앉았던 자리에 올려진 찻잔을 바라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곧 주변 손님들을 힐끗거리는가 싶더니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고, 마지막으로는 웃음을 꾹 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이렇게 표정 변화가 다양한지.
연구대상 감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든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것만 같아서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관찰을 하고 있노라니 그녀가 슬슬 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다.
그는 이제 이 연극이 막을 내렸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 여자는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어째서인지 심술이 돋았다.
도움을 받았으니 손을 씻겠다는 건가?
‘뭐… 나야 꿈만 안 꾸게 되면 그만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그는 그녀를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든은 그녀의 시간을 어떻게 가져야 하나 고민했다.
해답은 명쾌하고 빠르게 나왔다.
“이제 나도 돌아가야… 하… 는…?”
아이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릴리아나.”
그의 부름에도 그녀는 자신의 손만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
왜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이다지도 다정하게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러나 아이든은 그 어떤 말도 당장 해 줄 생각이 없었다.
“릴리아나.”
“네. 듣고 있어요.”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그녀에게 아이든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자. 좀 걷지 않을래?”
아이든의 말에 릴리아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입이 벌어지고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리얼하게 드러나 보였다.
[너 지금 나한테 걷자고 했니? 미쳤니? 내가 너랑 왜?! 연극 끝났는데? 집에 안 가니?]
딱 이런 표정이었다.
아이든은 자신이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끅끅거리며 웃어 대었을 뿐.
“끄흐흐… 크흑….”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내던 아이든이 겨우 웃음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릴리아나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아이든은 다 주워 담지 못한 감정을 갈무리하고 긴 한숨을 뱉어냈다.
“하아. 원하지 않으면 집에 데려다줄게. [사랑해 마지않아 결혼까지 약속한 연인]에게 그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 그렇지?”
물론 아직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나오긴 했지만.
아이든은 그녀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그와 함께 마차에 타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곧 그녀가 마지못한 듯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아이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
아이든 공작은 내가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타고 함께 돌아가기를 원했다.
리제는 백작가의 마차를 타고서 돌아가기로 했다.
그가 우리 단둘이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리제가 옆에 없는 게 불안하고 불만스러웠다.
그녀는 내게 시녀이면서도 언니였고 엄마였고 친구였기 때문에 그녀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심이 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오늘 그는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 너무 큰 선행을 내게 베풀어 주었으므로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 목숨만 아니라면 내어줄 생각이었다.
공작가의 마차는 백작가의 마차와는 확연히 차이나는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천지사방이 금, 은, 보석으로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나는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신없이 마차를 구경하고 있는데 공작이 나를 요상한 생물을 쳐다보듯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대 의상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 것 같은데.”
이건 오늘 리제가 다른 시녀들과 합심해 고심하고 고심해서 고른 갑옷인데….
내 갑옷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의 오만한 눈빛이 며칠은 잊히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마차에 올랐다.
뒤에서 낮게 큭큭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저건 비웃음인 것이 분명하다.
하. 누가 그를 두고 냉혈한이라고 했을까?
함께 마차에 오른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그는 입은 굳게 닫고,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하기도 하고 그의 무표정은 아직도 조금 무섭기도 하여서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란즈로 올 때에 시내는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사위가 고요했다.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풍경에 의아해졌다.
“제국인들은 딜리아 공작을 싫어한다.”
적막을 깨고 들려온 낮은 음성에 고개를 돌려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
“내가 저택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이유기도 하지.”
그의 말에 너무 놀라서 뭐라고 대답할 바를 금방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전부 숨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 시내에 있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군.”
“저도 제국인인걸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모르겠다.
나는 오늘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소문만 무성한 공작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해 왔더라…?
생각해 보기는 했을까?
그와 내가 서로 마주치고 인연을 쌓고….
그를 싫어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오늘 그와 내가 만난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일지도 몰랐다.
이전 생에선 나는 그의 머리칼 한 터럭도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적어도 그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국인들은 정말 모두 그를 싫어할까?
그를 두려워하기는 하겠지만….
사실 깊게 생각해보자면, 그는 남들이 나서기 싫어하는 일을 해왔던 것뿐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가차 없이 베는 일.
혹은 누군가를 냉정히 쳐내는 일.
어떤 나라를 제국에 복속시키는 일….
그런 일들이 과연 그라고 마냥 좋은 것이었을까?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계속해서 웃을 수 있었고 또한 계속해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제국의 평화는 그에게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제국인들은 그에게 감사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는 참 가여운 사람이었다.
“제국인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건 모두 공작님 덕분이에요.”
아이든 공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눈이 커다래졌다.
“…그건 그대의 생각인가?”
나는 공작의 눈을 올곧게 응시했다.
그는 정말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사악하고, 악랄하고, 잔인하기만 한 사람일까?
“…공작님께서는 누군가를 베어내는 일이 정말 즐거우신가요?”
“질문은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공작은 또다시 가면을 썼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어떤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의 대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해왔던 잔인한 일 중 그 어떤 것도 그가 원한 것은 없었음을.
나는 그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저는 공작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오늘 일이라면….”
“아니요.”
나는 용감하게도 제국 최고의 냉혈한의 말을 끊어냈다.
“공작님께서 지나온 삶의 모든 길이요.”
공작은 내 대답이 놀랍다는 듯 또다시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나 곧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마차에 탄 이래 처음으로 내게서 고개와 시선을 거두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무표정한 모습인데도, 나는 그가 아주 머쓱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용감하군.”
“네?”
“내 말을 끊어 먹는 자는 그대밖에 없다.”
어머나.
나는 손을 입으로 가리고 놀란 흉내를 내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죽는 것인가요?”
“…….”
공작의 눈썹이 왈칵 일그러졌다.
“나는 그런 자가 아니다.”
“그럼요. 공작님께선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이제 그가 무섭지 않았다. 완전하게.
***
마차를 타고 그녀를 데려다주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든은 마차에서 내내 그녀를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표정에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이든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그녀가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국인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건 모두 공작님 덕분이에요.]
제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칭찬 같은 말에 아이든은 눈썹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대의 생각인가?”
아이든의 물음에 그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춰왔다.
말간 바다만큼이나 영혼도 순수하고 맑을 것만 같은 눈동자.
그녀의 눈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요정처럼 신비스러워 보여서 지긋이 응시하고 있노라면 온갖 피를 묻히며 살아온 죄 많은 자신의 영혼조차 구원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작님께서는 누군가를 베어내는 일이 정말 즐거우신가요?”
그녀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되레 질문으로 맞받아쳤다.
아이든은 생각해보았다.
검 끝으로 흘러내리던 수많은 이들의 검붉은 핏방울.
그속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소리들과 울음소리들.
그 곳에는 절망과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아이든이 검을 들고 지나는 모든 길이 그랬다.
필요에 의한 사살이었다.
그것에 그 어떤 동정심도 동요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이든은 필요하다면 노인과 갓난아기를 죽이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늘 전장에서 잔인하고 냉정했다.
제국에는 없는 말이지만 그가 함락한 적국들에서 아이든은 다른 명칭으로 불리웠다.
피의 사신.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불결한 피조물.
그런 명칭으로 불리우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누군가를 베는 것이 즐겁다면 그건 사람이라 불리울 수 없는 게 아닐까?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엔 제가 그렇게 비추어질 테지만.
그러니 제국이 낳은 괴물이란 소리나 듣는 것이겠지.
그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
아이든은 죽음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녀가 나오는 꿈이 그다지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갓난아기를 죽인 날엔 고통에 신음하며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변명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스스로 결정해서 행한 것들이었다.
누구도 자신 위에 두려움으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두려움 그 자체가 되리라 다짐했던 지난날처럼.
아이든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질문은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쓸데없는 질문은 치워라.
더 이상 그에 관해 묻지 마.
가시를 세우고 철저하게 벽을 쳤음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미소 지었다.
마치 그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저는 공작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오늘 일이라면….”
“아니요.”
아이든은 오늘 일에 관해서라면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어차피 자신도 순수한 마음만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가는 충분히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님께서 지나온 삶의 모든 길이요.”
아이든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나온 삶이 대체 어떤 길인지 그녀는 알고 저러는 것일까?
얼마나 잔인하고 악하고 냉정한 길을 걸어왔는지 그녀가 알까?
이 손에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생명의 피를 묻혀 왔는지 그녀가 알까?
그런 의문이 들었음에도, 아이든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타인의 순수한 호의와 칭찬.
아이든은 동요했다.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파도가 휘몰아치듯이,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이 그렇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표정을 굳히며 애써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그렇게 하면 이 알 수 없어 불안한 감정도 다시 가라앉기라도 할 것처럼.
“…용감하군.”
“네?”
“내 말을 끊어 먹는 자는 그대밖에 없다.”
그리고 애써 다른 말로 주제를 전환시켰다.
굳이 그녀를 겁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저는 이제 죽는 것인가요?”
그녀가 정말로 겁먹은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자신을 죽음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기분이 상하면 쉽게 목숨을 취하는 그런 자로 보는 것인가?
그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들어왔던 말들과 이미지였음에도 아이든은 왜인지 너무 기분이 상해버렸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런 자가 아니다.”
“그럼요. 공작님께선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그녀가 조금 전 표정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죽음의 신 따위로 보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새에 그는 야트막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심장의 따뜻한 울림이 낯설기만 하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림과 위로로 다가온 그녀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는 그동안 보아왔던 날파리같기만 했던 제국의 여자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대체 뭘까?
왜 어째서 내 꿈에 나타난 것이며, 란즈에 앉아 있었던 것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여자와 엮이게 된 것일까?
아이든은 그 끝도, 해답도 알 수 없는 의문을 품으면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옅게 픽 웃어버렸다.
아무렴 어떠랴.
이젠 꿈을 꾸는 것도 이 여자와 엮이는 것도 끝이다.
자신은 오늘 충분히 할 만큼 모든 걸 해주었으니까.
이 여자가 다른 영애들과 뭐가 좀 다르다고 한들 지나갈 인연이었다.
오늘 받은 이 위로만큼은 가슴에 담아 주겠지만.
그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충동적인 외출을 감행한 봄날은 그렇게 가느다란 울림이 되어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