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39)

그 공작의 아내로 사는 법 1권

1. 행복하고 싶었어

“마님. 백작님께서 응접실로 마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사용인은 말만 높였을 뿐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든 채 귀찮은 짐을 털어내듯 할 말을 끝내고 사라져버렸다.

탁.

손에 들었던 책을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

팔걸이를 잡고 소파에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사용인들의 무시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어차피 철 지난 유행 같은 것이었고, 썩은 동아줄 같은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들로서는 당연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팔려가듯 한 결혼, 그리고 꼬박 10년이었다.

10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남편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이제 이런 대우는 익숙하다 못해 무감한 것이었다.

오히려 평소 같지 않은 남편의 부름이 더 이상하고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언제나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마주치기라도 하면 오물을 밟은 사람처럼 온 얼굴의 근육을 왈칵 구겨 대곤 했으니까.

애써 불안함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가 또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서둘러야 했다.

곧 도착한 응접실에는 남편인 빌 커티스 백작 외에도 그의 사랑해 마지않는 정부, 크리스틴 남작 영애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들은 아무래도 작정하고 나를 부른 모양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선 나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애정행각을 일삼았으니까.

그러나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하는 양을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익숙해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들은 하던 일들을 끝낸 뒤에 사뭇 자연스럽게 나를 발견한 척 다가왔다.

그들은 당당하게 내게 이 저택에서 그만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오는 길 내내 가졌던 불안함이 실체가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는 남편으로 인해 평생을 몸 바쳐 일해 모았던 전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나마저 이혼당해 처가로 돌아가면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유일한 희망이던 딸조차 이혼녀의 꼬리표를 달고 나타난다면…?

버텨야 했다. 허울뿐인 자리라 해도 좋았다.

“백작님. 아버지의 재산으로 이만큼 득을 보았으면 내게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남편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소파 깊숙이 몸을 맡겼고, 크리스틴이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요. 당신이 이 집에서 나가만 준다면 그 이상의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약속할게요.”

헛웃음이 나왔다.

그 이상의 비극적인 일이란 건 대체 뭘까?

내 삶이 이 이상으로 더 비극적일 수도 있을까?

이 이상으로 더 비참할 수도 있을까?

“나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남작 영애.”

내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일순 흉하게 일그러졌다.

“당신만 없어지면! 당신만, 당신만 없어져 주면 모두가 평화롭잖아! 나도, 백작님도, 이 저택도 모두가 평화롭다고!”

모멸감. 거절감. 수치감. 절망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적인 언어를 타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나를 공격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울 순 없어. 이 여자 앞에서 그럴 수는 없어.

“…남작 영애. 나는 아직 백작 부인이고, 이 집의 안주인이예요. 예의를 지켜주세요.”

그녀가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는 어디까지 추락하고,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하는 것일까?

“백작 부인? 안주인? 누가 그래? 이 저택에서 누가 당신을 그렇게 대접해 주는데?”

“…….”

“당장 짐 싸서 나가 줘.”

그녀의 말이 맞다.

그녀는 이 저택에서 남편의 사랑을 등에 업은 기실 실세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나는 남편이 등한시하는 하잘것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녀의 오만한 눈빛보다, 칼날 같은 말들보다 나를 더욱 짓누르고 아프게 만드는 것은 그런 차이였다.

게다가 나는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요, 남작 영애.”

그러니 이건 나의 진심이었다.

여기서 자존심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럼 차라리 죽어! 이 자리에서 없어져 버리란 말이야!”

순간, 악에 받친 고함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어디서 꺼낸 것일지 모를 잘 벼려진 칼날을 손에 쥐고 내게 달려든 크리스틴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내 심장에 쑤셔 박았다.

“!”

피하고 말고 할 새도 없었다.

모든 것은 내가 어쩌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모든 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착각이 일었다.

나는 시선을 천천히 내려 심장 부근에 꽂힌 칼을 바라보았다.

장미꽃이 조각된 칼 손잡이가 참 기괴하게도 예뻤다.

칼날에서 손잡이를 타고 내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순간, 마치 다른 시 공간에 혼자 떨어져 내린 것처럼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삐이이이-----

무언가 말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는데 어떤 것도 뚜렷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이명 소리로 귀가 멎을 것만 같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귀를 막을 수조차 없었다.

이건 꿈일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실감이 나지 않으니 몸이 뚫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나는 죽는 것인가?

“왜…? 어째서…?”

입에서 내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른 고목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트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남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 것은 그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하. 고마워, 크리스틴. 오늘을 절대 잊지 않을게.”

그 후 삽시간에 현실로 빨려 들어오듯 세상의 모든 소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크리스틴이 제 손을 바라보며 뒤늦게 눈에 띄게 온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간 빌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어 입 맞추었다.

살인을 저지른 여자와, 두려워하는 여자의 머리칼에 부드럽게 키스를 하는 남자.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나는 그가 이 칼에 새겨진 장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가시에 찔려 죽어 가는데, 그는 이 순간에도 장미꽃처럼 화려하고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빌은 크리스틴의 머리칼을 그러쥔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을 하며 웃고 있었다.

“드디어 해방이네. 정말 지긋지긋한 여자였는데.”

울컥.

속에서부터 따뜻하고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곧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제야 심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선연하게 느껴져 왔다.

아아… 이건 현실이구나… 아파… 너무너무 아파….

고통으로 눈썹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입으로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정부의 손을 빌려 살인을 저지르고 그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남편.

언제나 철두철미한 빌 커티스….

나는 적어도 당신을 사랑했는데… 사랑받고 싶었는데….

“나도… 행복하고 싶었어….”

이젠 당신을 증오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너무 작아 두 사람은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들려주려던 것은 아니었으니.

불쌍한 릴리아나 데일.

나는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애써왔던 걸까.

나를 사랑해 주었지만 그만큼 돈도 사랑했던 어머니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아버지.

아버지가 유일무이한 외동딸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팔아치우듯 결혼시키려 할 때 어머니는 손 놓고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리안. 이 결혼이 우리 가족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최선이란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실은 돈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또 다른 돈으로 만족시킬 방법의 하나였을 뿐이었는데도.

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 내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를 늘 벌레 보듯 했던 그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보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구걸했다.

그가 싫어하는 모습은 다 뜯어고쳐 보려고 노력했고 그가 좋아하는 모습이 되어보려고 안 해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심장에 칼이 꽂힌 지금에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당신에게는 다른 이유가 필요치 않았구나….

그냥 내가 싫었을 뿐이니까.

‘이 결혼은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었어. 나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힘들 때마다 끊임없이 되뇌었던 마법 같은 주문은 내게 결국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내 삶에 아름다운 마법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구차하게 매달리고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더라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당신이 적어도 날 죽이지는 않았을까…?

아니… 당신은 그래도 날 죽였을 거야.

애초에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몰랐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이렇게는 살지 않을 텐데….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아….”

마지막으로 힘겹게 쏟아낸 숨결에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정말 거짓말 같다. 모든 것이.

***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선연하게 느껴졌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여전히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여기가 천국인 건가?

감겼던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흠칫 놀란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으로 심장 부근도 매만져보았지만 만져지는 건 부드러운 실크 잠옷의 촉감뿐.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결혼 전 머물던 내 방이잖아…?’

“이게… 어떻게….”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어안이 벙벙해져 중얼거리는데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 아가씨! 깨워드리려고 왔는데 벌써 일어나셨어요? 도통 안 일어나셔서 아침 식사 가지고 왔어요. 오늘부터 결혼 준비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정말 부지런히 움직이셔야 해요.”

안으로 들어서서 나를 발견하자마자 다다다 할 말을 쏟아낸 사람은 내가 결혼하면서 데리고 가지 못해 이 집에 남겨졌던 나의 전담 고용인 리제였다.

“리제라고…?”

“그럼 제가 리제지 누구겠어요! 왜 그러실까?”

아아. 리제. 리제라니!

출가한 뒤에 얼마 되지 않아, 부당 해고를 당하고 갈 곳이 없어져 마지못해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언젠가 전해 들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뒤 나는 몇 날 며칠을 그녀에 대한 미안함에 괴로워했었다.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나는 살아있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로 돌아왔다는 반증일까…?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리제는 분명 결혼 준비라고 했다.

아직도 이 상황이 선뜻 이해되지도 믿겨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리제가 내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졌다.

리제는 때때로 총 관리인에게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통통 튀는 발랄한 성격이었고, 주체 못 하는 수다쟁이였었다.

나는 그녀의 성격이 좋았다.

그녀의 수다도 좋았다.

그 시시콜콜한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지친 내 심신이 잠시간 평온을 되찾곤 했었다.

비록 빌 카터스와의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내 성격도 점점 변해가긴 했지만, 결혼 전까지의 나는 아주 쾌활하고 밝은 여성이었다.

단언컨대,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결단코 그런 성격으로 자라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널 데리고 갔다면 그곳에서 버티는 게 덜 힘들었을까…?’

포근한 이불을 양손에 꽉 그러쥐었다.

이불에서는 갓 세탁해 햇볕에 말린 섬유 향이 났다.

따뜻하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아침 햇살이,

리제의 활기찬 목소리가,

그리고 방 안의 모든 것이.

이전의 나는 이런 것들에 감사한 적이 없었는데….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신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 간절했던 내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들어주셨으니.

따스한 모든 것들이 방금 전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와 너무나도 달라서 이질적으로 느껴졌음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안도감에 휩싸여 눈물을 봇물처럼 터트렸다.

“어머나! 아가씨 우시는 거예요?! 간밤에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이리 오세요. 안아드릴게요!”

리제가 부리나케 달려와 나를 제 품에 안아주었다.

“리제 답네.”

눈물을 닦아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리 오라고 해놓고 자기가 달려오다니.

“리제. 나 악몽을 꿨어. 아주아주 길고 끔찍한 꿈.”

리제가 내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여주었고, 나는 큰 안도감에 취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줘, 리제.”

어린아이 같은 칭얼거림에도 그녀는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다 잘 될 거예요, 아가씨. 아가씨에겐 이 리제가 있잖아요.”

“푸흐.”

나는 옅게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렇지. 내게는 리제가 있지.”

“그러니까 우선 간단하게 식사부터 하세요. 나머진 이 리제가 다 알아서 해드릴 테니까.”

그래. 이 새로운 삶이 꿈이든 현실이든 나는 또 살아가야겠지.

나는 그저 지금 이 상황이 꿈이고 깨어나면 또다시 칼에 찔려 죽어가는 비극적인 상황이 펼쳐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리제는 씩씩하게 걸어가 조금 전 가져온 음식이 담긴 그릇을 탁자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따끈따끈하네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아가씨.”

나는 그녀의 말대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손을 씻고 탁자에 앉아 리제가 가지고 온 수프를 한 수저 입에 넣었다.

따뜻한 수프가 입안에 퍼지면서 익숙한 맛과 향이 났다.

그래서 또 울컥하고 말았다.

지금은 결혼 전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커티스 백작저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데일의 자랑, 주방장 아저씨의 손맛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리제가 빵도 아주 맛있게 구워졌다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면 아마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을 것이다.

소소하고 간단한 음식이었지만 지금 이 시간이, 그리고 이 음식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오랜만에 행복한 식사를 끝내고 난 뒤, 씻으러 욕실로 가기 전 리제에게 편지지와 펜을 부탁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결혼식을 치르기 딱 일주일 전이라고 했다.

나는 이 기회를 헛되이 날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커티스 백작님, 데일가의 릴리아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정오에 카페테리아 란즈에서 잠시 만나 뵐 수 있을까 하여서 이렇게 전보를 보냅니다. 빠른 답장 부탁드려요.]

귀족 특유의 문화인 쓸모없는 잡설을 뺀 단도직입적인 내용을 빠르게 적어나갔다.

그에게 보낼 편지에 친절하고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붙일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까.

나는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실링을 부어 인장을 찍으며 말했다.

“커티스 백작저로 최대한 빠르게 붙여줘. 나는 이제 씻고 나올게. 편지 부치고 나면 외출 준비 좀 부탁해.”

“네. 아가씨. 꽃 사러 나가시나요?”

내가 건네는 편지를 받으며 리제가 물었다.

결혼 전의 나는 꽃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자주 시내에 나가 예쁜 꽃을 사 와 방을 꾸미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꽃꽂이는 나의 유일한 취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지.

“아니. 오늘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를 내 인생에서 완전히 치워버리고 말 거거든, 리제.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행복해질 거야.

리제는 별다른 말없이 알겠다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벽면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거기엔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혼생활로 인해 그 빛을 잃고 나이 들어 초라해진 릴리아나가 아닌, 어리고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릴리아나가 서 있었다.

오른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면서, 나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에게 비장한 다짐을 건네었다.

“이전과는 다를 거야. 괜찮아, 릴리아나.”

씻고 나오니 탁자에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온갖 아름다워 보이는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인 기나긴 편지였지만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오에 볼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엔 마치 싱거운 요리에 맛을 내는 조미료처럼, 빠듯하게 바쁜 일정이지만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보겠다는 생색이 가미된 채였다.

생색을 내지 않으면 빌 커티스가 아니지.

그런데, 당신은 결혼을 위해서 온갖 친절을 다 베풀 요량이구나.

‘구역질 나. 더러워.’

급하게 편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리는데 문득, ‘편지지 구석구석에 그의 살갗이 닿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곧 내 손마저 너무나도 더럽게 느껴졌다.

‘으으! 장갑이라도 끼고 열어볼걸! 내가 왜 그랬지?’

나는 빠르게 세면대로 가 따갑고 쓰라릴 정도로 몇 번이고 비누로 손을 벅벅 문질러 씻었다.

그런데 어느새 들어왔는지 리제가 갑자기 내 손을 부여잡아 돌려세웠다.

그녀의 얼굴은 충격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 도대체 이게 무슨…! 손이 너무 빨갛잖아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아아….”

리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에서 서러움의 눈물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마치 엄마에게 서러운 마음을 일러바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나는 눈물을 마구마구 쏟아내며 리제에게 내 괴로움을 토로했다.

“더러워! 내 손이 너무 더러워, 리제! 열심히 닦았는데… 아무리 닦고, 닦고 닦아도 깨끗해지지가 않아…!”

“아아…!”

리제가 나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내 등을 토닥여 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 정도면 됐어요. 충분해요, 아가씨!”

리제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내 마음에는 여전히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손을 내려다보니 눈물로 시야가 흐렸음에도 손이 얼마나 벌게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끔찍해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잔뜩 성난 가시를 세우고 그 대상을 나로 바꾸었다.

그로 인해 잔뜩 망가진 장난감처럼 엉망이 되어 버린 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너무 끔찍해! 모든 게 엉망이야! 하나도 괜찮지 않아! 아파해야 하는 건 그 사람인데… 고통받아야 하는 것도 그 사람인데…!’

억울하고 분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애꿎은 리제를 탓했다.

안으로 자꾸자꾸 파고드는 가시가 너무나도 아파서 그 가시를 밖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넌 어디 갔었어?! 네 역할은 내 옆에 있는 거잖아! 왜 이제야 와, 왜!”

지금의 나는 슬프게도 귀족의 품위를 갖추고 반짝반짝 빛이 나던 옛날의 릴리아나가 아닌 트라우마로 얼룩져 무너져 내린 나약한 릴리아나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편지를 놓고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게…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를 이렇게 만든 그가 끔찍해.

이 결혼을 물러야 해.

어떻게든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해…!

똑같은 삶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

나는 그렇게 또다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

“준비시켜줘. 당장 나가야겠어.”

다급해져서 리제를 거칠게 밀어내고 동여맸던 샤워가운의 끈을 풀어내려 했다.

“이제 괜찮으세요, 아가씨?”

멈칫.

나는 끈을 풀어내던 손동작을 멈추고 되레 날 걱정하고 있는 바보 같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칠게 밀려나면서도 그녀는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내 시야에 그녀의 걱정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들어왔고, 거친 풍랑이 휘몰아치는 것 같던 마음이 다시 급격하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아아아… 고마워, 리제… 어쩜 좋아… 네 잘못이 아닌데… 화내서 미안해. 밀어낸 것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급변하는 나의 감정선에도 리제는 당황하지 않고 웃어주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가씨.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제 업무가 아가씨를 보필하는 것인데 제 잘못이 맞는걸요.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 됐어요. 화장에 신경 써줄 하녀들을 몇 더 불러올게요. 오늘은 아가씨 예쁜 미모에 잘 어울리는 화려하고 더 멋진 드레스를 입어요. 그럼 기분 전환이 될 거예요.”

리제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더 씩씩한 표정으로 예쁜 옷을 입자고 말했을 뿐.

그녀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져 와 어느새 두렵고 분하고 떨리고 그녀에게 미안했던 복합적이고 복잡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고 나니 기가 다 소진된 것처럼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지친 몸을 지탱해 줄 소파를 찾아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리제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리제. 하지만 화려한 드레스는 됐어. 오늘은 수수한 걸로 부탁할게. 나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끔찍하게 싫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거든.”

“어머. 아가씨. 그런 사람을 상대하러 가는 거라면 더더욱 차려입으셔야죠. 아가씨께는 드레스가 전쟁터에 나가는 갑옷이나 다름이 없는걸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리제는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곤 부리나케 방을 나갔다. 방금 전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어 본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갑옷이라니….”

참으로 리제 다운 발상이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입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온갖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드레스와 같은 색감의 레이스 장갑과 절반만 묶고서 길게 늘어트린 머리 위로 좁은 챙 위에 레이스와 꽃으로 예쁘게 장식된 블랙 모자를 쓰고서야 리제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고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카페테리아 란즈는 집에서 삼십 분 정도를 달려야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에 리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생각나는 대로 내게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녀의 짧은 수다 주제가 일단락되었을 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답답한 마음에 나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내 마음과는 달리 아주 활기차고, 평화로웠다.

시내에서는 수많은 인파에서 파생되는 소리들 사이로 어린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려왔다.

듣기 좋은 소음이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간간이 불어오는 살랑거리는 바람까지.

외출의 이유가 빌 커티스를 만나는 것이라는 점만 뺀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했을 텐데.

나는 란즈로 가는 내내 리제의 다시 시작된 시시콜콜한 수다를 들으면서, 속으로는 이번 나의 삶도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했어요, 아가씨.”

어느덧 마차가 멈추어 서고, 나는 리제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리제, 이 근처에 가면 네가 좋아하는 제과점이 있어. 알고 있지? 주변을 구경하고 제과점에 다녀와도 좋아. 란즈에는 나 혼자 다녀올게.”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신이 난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집에서부터 챙겨왔던 돈주머니를 품에서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되고말고. 여기 받아. 오늘 같이 나와 준 팁이야. 여동생이 이제 열 살 이랬지? 넉넉히 넣어두었으니 네 가족들 선물도 사면 좋겠다.”

“어머, 아가씨…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요?”

리제는 몸을 배배 꼬면서도 진심으로 감동받은 표정으로 내가 아닌 본인 손에 들린 돈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반응에 웃음이 났다.

“리제. 말과 표정이 너무 다른 거 아니니. 본심을 얘기하렴.”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아가씨.”

리제는 특유의 귀엽고 발랄한 표정으로 혀를 삐죽 내밀었다.

“풉. 어서 가.”

“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 가는 리제를 뒤로하고, 마부에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해 놓은 뒤에 맞은편 길가에 있는 [카페테리아 란즈]라고 적힌 간판을 바라보았다.

리제 앞에선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심장이 너무 쿵쾅거렸다.

나는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 릴리아나. 넌 할 수 있어.’

***

“그럼 차라리 죽어! 이 자리에서 없어져 버리란 말이야!”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화려한 드레스.

온몸에 구석구석 착용한 치렁치렁한 보석들.

귀를 파고드는 듣기 싫은 날카로운 목소리.

여자는 딱 보기에도 귀족의 품위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모습이었다.

여자가 악에 받쳐 소리 지르더니 단도를 쥔 손을 들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곧 여자와는 대비되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심장에 단도가 꽂혔다.

피가 칼날과 손잡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단도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서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절망감이 가득 밴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어째서…?”

여자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슬픔과 분노, 절망, 후회, 허무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여자는 헛웃음을 뱉어냈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어….”

온 힘을 다해 기나긴 마지막 숨결을 뱉어낸 여자의 몸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몸 주변으로 고여 들었다.

같은 꿈만 벌써 열흘째였다.

여자는 왜 죽었을까…?

그녀를 죽인 화려한 여자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여자로 하여금 살인까지 저지르도록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었다가 꿈일 뿐이라 치부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감정이 든 지도 역시 열흘째였다.

아이든은 그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잠을 청하지 않으려고도 해보았지만, 평소라면 체력이 넘쳐흘렀을 그가 병든 닭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고, 그러면 또 그 꿈이 펼쳐졌다.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마치 꼭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마법에 걸린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든은 그 방법을 포기하고 악몽을 막아준다는 물건들을 제국 각지에서 쓸어 모았다.

덕분에 침실에는 온갖 종류의 해괴한 물건이 넘쳐났다.

그러나 그런 물건들도 악몽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그는 실크 잠옷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티 테이블 위에 놓은 술병을 들어 병째로 들이켰다.

술에 의지해서 잠이 들면 세상모르고 숙면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최후의 보루였다.

이것도 통하지 않으면… 그땐 어찌해야 하나….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 하나도 없는 새카만 밤하늘에 달이 외롭고도 고고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티 테이블을 창가로 옮겨 두길 잘했다.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는 밤이었다.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고 또 마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를.

이 고통스러운 밤이 어서어서 지나가기를.

그리고 마침내 편히 잠들기를.

아이든은 순식간에 한 병을 비워내고 새로운 술병 마개를 따고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그 여자가 떠오르는 것일까.

슬픔과 분노와 원망과 허무함, 절망에 가득 찼던 그 복잡한 눈동자와 새빨간 피, 간절하게 뱉어냈던 마지막 숨결까지….

“하….”

아이든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해 본 적이 있었던가.

제발 누가 이 머릿속에서 그 여자 좀 빼내어 줬으면.

어째서 이토록 괴롭히는 것인가.

이토록….

아이든은 풀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아주 느릿하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그를 침대로 이끌었다.

피곤해. 졸려. 자고 싶어. 아니. 아니야. 나는 자지 않아. 절대….

“젠장… 자… 고 싶….”

풀썩.

침대 위로 떨어진 거대한 몸이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마법의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

아. 저 여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아이든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야위지 않은 몸과 앳된 얼굴. 그러나 자신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그 여자였다.

고통스럽게 죽어갔던 야위고 볼품없던 그 여자.

아이든은 이곳에 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란즈….”

그는 카페테리아를 나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카페테리아 란즈]

여성 귀족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서 돈 좀 벌었다던 유명한 곳.

그로서는 들어본 적도 와본 적도 없는 곳인데 어째서 이렇게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든은 다시 카페테리아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여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여자 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소리쳤다.

“너 대체 뭐야! 오늘은 왜 안 죽고 여기 이러고 있어? 대체 뭔데… 대체 뭔데 자꾸 내 꿈에 나와서 사람을 괴롭히는 거냐고!”

여자가 그와 눈을 맞춘 순간 아이든은 숨을 들이켠 상태로 굳어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 ‘릴리아나’라는 이름 네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게… 도대체 뭐지…?

이 여자 이름인가?

내가 왜 이 여자 이름을…!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가 더없이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는 흠칫 놀라며 여자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너… 도대체 뭐야…?”

아이든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어….”

여자의 목소리에는 고통이 스며 있었다.

마치 그날처럼.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왈칵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그녀가 무언가 간절하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크헉!”

아이든은 고통스러운 숨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는지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숨이 차올랐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식은땀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헉, 헉, 헉, 흐억.”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젠장!”

또다!

그렇게 술을 들이부어 마셨는데도!

그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뭘 어떻게 해야 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건데!

아이든은 눈을 번뜩임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티 테이블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술병을 다시 집어 들어 입으로 들이부었다.

스트레스로 온몸이 부서질 것 같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이 기나긴 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입 옆으로 흘러내린 술을 잠옷 소매로 훔쳐내며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봄의 밤바람이 거침없이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찬바람을 쐬니 머리가 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든은 티 테이블 의자에 털썩 힘없이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 가시지 않은 취기가 다시 올라오고 있음에도 마음은 전보다 더 가라앉았다.

이성적인 사고.

논리적인 언변.

냉정함과 철두철미함.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이외에도 넘쳐났다.

그런데 꿈을 꾸기 시작한 이래 그는 한 번도 냉정할 수 없었고, 이성적일 수 없었다.

점점 거칠고 다혈질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고 한심했다.

이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성적으로 생각해. 머리는 장식이 아니잖나.”

아이든은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항상 부관에게 했던 잔소리 같은 말이었다.

스스로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던 말.

우스웠다.

어린아이처럼 악몽 하나에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꼴이라니.

얼마나 같은 꿈만 반복해서 꿨으면 이제 뭐가 현실이고 꿈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이든은 봄의 밤바람을 의지해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했다.

오늘 꿨던 꿈은 항상 꿔왔던 꿈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이전과는 달리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름다웠던 얼굴이 그렇게나 볼품없어지려면 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가엾은 여자.

아이든은 원래 동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제국을 이날까지 강대한 국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

그 여자에게는 어째서 이토록 동정심이 이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답지 못한 이 감정을.

아이든은 가라앉은 눈으로 달을 올려다보며 술을 다시 들이마셨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어…. ]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마치 그의 옆에 실존하는 것처럼.

“나도 행복하고 싶었어.”

그는 여자의 악센트를 따라서 말해보았다.

귀족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하는 기품 넘치는 부드러운 악센트.

그 여자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고귀한 사람 같은.

아이든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찬바람이 코와 입을 통해 깊은 폐부에 스며들었다.

이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행복한 적 한번 없던 나날들이.

그는 겨울의 칼바람보다 더 냉혹하고 설산의 눈보다 더 시린 아버지 밑에서 두려움에 떨며 한순간도 기를 펴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마음 여리고 지극히 감성적인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멘탈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그저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어머니를 구해줄 능력 같은 게 없었다.

형제들은 모두 아둔했다.

어머니보다는 강한 정신력을 지녔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형제들 중 그를 이해하고 지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지독하게 혼자였다.

부모가 죽고 형제들과 덩그러니 남게 되었어도 그는 슬프지 않았다.

원래부터 혼자였으니까.

공작 위를 물려받고 난 후로는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다.

더 강해져야 해.

더 냉정해져야 해.

아무도 나를 밟고 올라서지 못하도록.

아무도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아무도 내게 두려움으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강해졌고 냉정해졌다.

제국에서 그 누구도 그에게 두려움으로 군림하지 못했다.

그가 두려움 그 자체였으니까.

돌이켜보면 살면서 한 번도 마음 놓고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웃게 해드리고 싶어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웃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제국이 낳은 괴물.

국민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그는 괴물 같아지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괴물 같아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누구보다 사람답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다.

그저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를 보호했을 뿐.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를 사랑했을 뿐.

그 여자가 가여운 것은 그래서일까?

그 여자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 시켜 본 걸까?

너무 고통스럽고 끔찍한 꿈이었지만 실은 그 여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웃게 되면 좋겠다고.

만약 이 꿈이 그저 개꿈이 아니라면?

그 여자가 정말 실제 하는 여자라면?

열흘 내내 죽기만 하던 그녀가 오늘 살아서 란즈에 앉아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그건 대체 뭐였을까?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개꿈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확인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그녀가 실존하는 사람이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면, 도움을 주면 될 일이었다.

그는 이제 그럴 힘이 있었다.

그렇게 되고 나면 다시는 이런 꿈을 꾸지 않을지도 몰랐다.

가봐야겠다.

오늘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오늘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것보다 명쾌한 해답은 없을 것 같았다.

모든 해답은 그녀가 앉아 있던 그곳.

그곳에 있었다.

아이든은 몸을 일으켜 시계를 바라보았다.

동이 트면 오늘 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집을 나서야겠다.

아니. 늘 산더미처럼 밀려들어 오는 일을 아침부터 하면 외출할 수 없다.

지금부터 하면 점심에는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가 앉아 있던 시간도 태양이 중천에 뜬 정오였다.

그는 소란스럽게 방을 나서 집사의 방으로 찾아가 문을 쾅쾅쾅 두들겨 댔다.

곧 졸음을 한가득 묻힌 얼굴로 집사가 방에서 나왔다.

“주인님. 이 시간에 저를 무슨 일로….”

“지금 당장 칼 폴쳐를 내 눈앞에 데려와.”

“예…?”

“한 시간 내로 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 움직여 빨리!”

“아, 예, 예!”

집사가 부리나케 방에 들어가 외투만 걸쳐 입고 나와 저택을 달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든은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간절히 염원했다.

자신이 악착같이 쌓아 올린 권력과 힘이 오늘만큼은 큰 빛을 보기를.

그녀를 죽음에서 건져 올릴 수 있기를.

어머니를 보며 느꼈던 무력감을 다시는 느끼지 않게 되기를.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 해방돼 안식을 찾게 되길.

***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후 란즈로 들어서니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빌 커티스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그를 보자니 속이 뒤틀렸다.

기분은 곧 끝을 모르고 저 깊은 바닥 아래로 추락했다.

몸 안에 흐르는 모든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그에게 다가가 내가 당한 것처럼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어째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겠지.

그때의 나처럼.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그를 향해 수없이 칼을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상상 속의 그는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왜…? 어째서…?]

하지만 지금 여긴 상상 속의 세상이 아니고 내겐 칼이 없다.

그에겐 다행이겠지만 나에겐 퍽 애석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목적만큼은 꼭 이루고야 말 거야.

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청아한 구두 굽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커티스 백작님.”

그의 맞은편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그를 불렀다.

나를 올려다본 빌이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순간, 죽어갈 때 나를 향해 소름 끼치게 웃어 대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자 곧 그 시선이 닿은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당장에 이곳을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가서 옷 따위 벗어던지고 온몸을 벅벅 씻어내고 싶은 몹시 괴롭고 끔찍한 충동에 휩싸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너무 힘들 만큼 내 마음은 마구 뒤흔들리고 있었다.

“데일 영애. 지난가을 파티 때 한 번 인사드린 것이 다인데 저를 단번에 알아보셨군요. 그때도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특히 더 아름다우십니다. 오시는 길은 평안하셨습니까?”

‘침착해. 침착해… 침착하자.’

숨을 빠르게 들이켜고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면서 가까스로 모든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예. 감사해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뻗어나간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릴리아나.’

빌은 아주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감정의 변화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닙니다. 저도 금방 왔습니다. 앉으실까요?”

그의 미소 띤 얼굴은 여전히 장미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그 아름다움이 더 이상 내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더욱이 그 가시에 다시 찔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고 그의 미소는 아주 위선적인 것이었으니까.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신에게 속으로 다시 한번 간절하게 기도했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그를 참아내는 마지막이 되기를.

빌 커티스가 나를 위해 얼마나 바쁜 시간을 빼내었는지에 대한 지겨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꼿꼿하게 앉아 고개를 앞으로 향한 자세 그대로 탁자 위에 오른 찻잔을 시선만을 내려 지그시 응시했다.

따듯한 홍차가 담긴 찻잔에 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비춰 보였다.

그를 떨쳐내지 못하면, 내 삶도 이렇게 엉망으로 일그러질 테지.

나는 자리에 앉은 이래, 처음으로 눈을 들어 빌 커티스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오늘 나랑은 다르게 기분이 퍽 즐거워 보였다.

“백작님. 할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이제 제가 오늘 백작님을 뵙기 청한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빌은 즐겁게 생색낸 것이 무안해질 만큼 차가운 내 말에 잠시간 당황하는듯하더니 이내 빠르게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다정다감한 미소를 가면으로 뒤집어썼다.

그런 가면은 당신의 사랑스러운 크리스틴한테나 가서 쓰면 좋겠는데.

“아아. 예. 말씀하십시오, 영애.”

나는 그 미소를 본 내 눈알을 파 버리고 싶었다.

“파혼해 주세요.”

만약에 내 말이 칼의 형태를 갖추었다면 나는 이미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을 것이다.

“예…?”

그는 마치 심장에 칼이 꽂혔을 때 현실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당황한 내 모습 같았다.

“무슨…!”

빌은 크게 동요했다.

눈앞에 드러나 보이는 이득이 없다면 선뜻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였다.

형태도 갖추지 못했고 시작도 하지 못한 그의 사업을 위해 절대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이전의 아버지는 그의 사업이 잘되리라는 낮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셨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셨다.

아버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투자를 해야 하는 명분이 필요하셨고, 빌 커티스 역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전 생의 빌은 자신이 원하는 투자금을 얻기 위해 원하지 않은 결혼을 강행했다.

아버지 앞에서 마치 그 마음이 진심인 척, 사랑스러운 따님을 제게 주시면 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해드리겠노라는 생색을 내면서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그것을 덥석 물었다.

그것은 끝내 투자하고 싶다는 포기 못 할 일말의 마음에 사위의 사업에 투자한다는 명분이 더해진 아버지에게나, 필요한 투자금을 얻을 수 있게 된 커티스 백작에게나,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그로서는 파혼 요구가 퍽 당황스러울 터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구제하고, 미래에 그다지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그의 사업에 버려질 아버지의 전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칼로 확인 사살을 했다.

“도대체… 결혼 일주일 앞두고 이게 무슨… 하… 이유가 뭡니까? 저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만큼 잘 알지도 못하잖습니까?”

잘 알지.

당신에 대해.

“이유를 꼭 들어야만 하나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일 텐데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빌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아주 다급하고 간절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의 그에게선 귀족의 기품 따위는 정말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납득이 필요합니다, 릴리아나!”

“저를 아시나요? 우리가 파티에서 제외하고 어디선가 만났던가요?”

당황하고 흥분한 그와는 달리 나는 침착했다.

아니, 사실은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지만 그 저조하고 끔찍한 기분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의 앞에서 귀족의 품위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내 자존심의 문제였다.

“예? 지금 무슨…!”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빌은 한층 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데일 영애라고 불러주세요, 백작님. 우린 친구가 아닐뿐더러 부부는 더더욱 아니지 않나요?”

“하.”

빌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하….”

“아뇨. 제겐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그의 말을 자른 칼 같은 대답에 빌은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좋습니다. 데일 영애.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셔야 할 겁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처음의 다정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위협에 이번에는 내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른세수는 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마셨을 뿐.

이건 두렵고도 답답한 이 상황에서 정신 줄을 부여잡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내가 이렇다 할 말이 없자 이내 빌의 간절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데일 영애. 나는… 나는 영애를 최고의 자리에 앉혀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 사업만 잘된다면 당신께 모든 걸 안겨드릴 수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결혼 후 당신의 사생활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영애와의 결혼이 꼭 필요합니다. 내게는 너무 중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놓치면 나는… 하… 말씀해 보십시오! 원하시는 걸 다 해드리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저 영애는 결혼식만 치르면 됩니다…!”

그는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간절하고 또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결혼을 구차하게 구걸하고 있었다.

내가 이전 생에 그에게 사랑을 간절하게 구걸했던 것처럼.

아이러니하다.

그가 내게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저 나의 작은 선택 하나가 불러온 파급력은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이전 생에도 나는, 팔리듯 하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었는데.

그는 마치 보는 이로 하여금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실패한 예술품 같아 보였다.

계속해서 떨려왔던 심장은 어느새 진정된 채였다.

이번 생은 정말 다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신이 내게 애원하고 있잖아.

“나는 백작님께 기대하는 바가 없어요.”

내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그의 얼굴에 깊은 절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지금 비참해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결혼 후에도 당신께 손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다른 이를 만나셔도 좋습니다! 그저 나와 결혼만 해주십시오! 당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이번엔 그와 결혼한다 해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아주 몹쓸 생각을 했다.

이전 생과 다르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테고, 그래서 구차하게 매달리지도 않을 테니까.

어쩌면 결혼 후에도 그는, 내게 이렇게 내내 구걸하고 잘 보여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만 되면 나도 그에게 끝없는 불안감을 안겨줄 수 있을 텐데.

누가 더 위에 앉아 있는지 보여줄 수도 있을 텐데.

아버지의 재산이 그에게 도움 되지 않는 날이 오기 전에, 이 남자의 옆에 크리스틴이 서게 되면 나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에 스쳐 간 생각에 불과했다.

곧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쓸모없고 끔찍한 생각이었다.

나는 커티스 백작저에 들어가 그와는 한시도 마주 보고 앉아있지 못할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역겨웠다.

머리가 다시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잠깐의 흔들림 끝에 나는 다시 냉정해졌다.

이전 생에 내게 칼을 꽂아 넣고 웃어 대었던 그의 표정이 다시 한번 떠올랐기 때문에.

그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어야겠다.

“백작님. 사실 제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와 결혼하기로 서로 약조까지 하였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와의 약조를 깨고 당신과 결혼할 수 없을뿐더러 그를 그저 정부로만 두고 싶은 마음 역시 추호도 없어서요.”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었는데.

속으로 스스로에게 놀라고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 영식의 이름을 말씀해 보십시오! 저와 같이 작위가 있는 사람이긴 합니까? 당신에게는 언제 작위를 물려받을지 모를 한낱 애송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혹 그가 영애에게 나보다도 더 많은 부귀영화를 가져다주겠다고 하던가요?!”

그의 흥분한 말들에 그의 등 뒤로 앉은 사람들이 우리를 힐끗거리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정말 오늘만큼 그가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빌의 말에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오류가 있었다.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애송이도 언젠가는 작위를 물려받는다는 사실과, 사실 그는 한 번도 내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그만 모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이전 생의 그가 아니므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봐요, 데일 영애. 입이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말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이 조금 거만해져 있었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그의 강압적이고 오만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이제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심지어 이전 생의 나처럼 또다시 움츠러드는 것만 같았다.

급히 생각해낸 거짓말은 틈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내가 사랑하고 있고 결혼까지 약조한 그 사람의 이름도, 작위도 알지 못했다.

‘진정해. 움츠러들 필요 없어, 릴리아나. 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빌에게서 고개와 시선을 돌려 란즈의 입구를, 정확히 말하자면 입구 쪽 바닥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영애! 영애의 말이 혹 거짓이라면 책임을…!”

그의 분노에 차 흐려진 뒷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빌은 내가 예상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집요한 사람이었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던 나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눈앞이 캄캄해졌다.

손바닥에는 땀이 차기 시작했고, 테이블 아래 다리는 침착함을 잃고 떨리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져 왔다.

혹여 그가 내 떨림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겁먹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빌은 원래도 교활함에 있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이미 한차례 결혼생활을 해 봤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성급하게 그를 만나자고 했을까?

이곳에서 눈을 뜨고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나서 빌을 만나러 오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했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만큼 대비를 철저히 해야 했는데.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내 만용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다소 충동적인 성향을 끊임없이 지적받곤 했었다.

그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인가 보다.

내 대단한 어리석음에 정말 찬사라도 보내고 싶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호기롭게 리제에게 선심을 쓴 것조차 후회가 되었다.

그녀라도 내 곁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불러 달라고 도움이라도 요청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와선 다 소용없는 것이겠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빌의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꼭 나를 불태워 없애버릴 것만 같이 번뜩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엇이든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거짓말이죠? 그렇죠?”

그가 재차 물어왔다.

마치 이빨을 드러내고 다가오는 맹수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도망도 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압박감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심호흡을 해가며 가졌던 용기라는 갑옷은 해진 걸레짝만큼이나 갈가리 찢어져 제 형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습관처럼 입술이라도 짓씹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의식적으로라도 그의 앞에서는 그 어떤 티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건 나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명예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러니 나는 결단코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누구라도…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내 앞에 나타나 주었으면….’

“하… 파혼 때문에 거짓말하는 거 맞지 않습니까?”

계속되는 그의 공격에 꼭 내가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감이 된 참담한 마음으로 카페테리아의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기적적으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파티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보았을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 찰나, 카페에 들어서는 검은 재킷의 끝자락과 구김 없는 검은색의 정장 바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검은 구두가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그는 혹시 알고 있을까?

방금 내가 심장을 토해낼 뻔했다는 것을.

혹여나 그가 눈치챌까 겨우 속마음을 숨기는 데 성공했지만, 너무 다급한 나머지 미처 더 생각할 겨를 따위 없이 그냥 혀끝에 맴도는 말을 마구 뱉어내 버렸다.

“저, 저 사람이요!”

아… 귀족의 품위 따위 개나 줘버리고 방정맞게 대답한 바보 같은 릴리아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창피함과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도 채 확인하지 않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친 내 생애 가장 큰 거짓말이 불러올 파급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제가 결혼할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에요!”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카페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았던 빌마저 아무 말이 없어서,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노인일까? 아니면 성인인 척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소년일까? 그래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내가 도움의 눈길을 보내면 분위기를 짐작해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불안감에 휩싸여 쉽게 용기가 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용기를 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

저게 누구야…?

아아… 아아, 릴리아나….

미친 거니…?

인생 이렇게 막살면 안 되는 거잖아….

너 이제 어떡할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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