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외전. 하얀 동화
나는 늘 내 미래가 궁금했다. 매사에 너무 심심해 보이는 사람이라는 평을 자주 듣는 편이었고, 나 자신도 그걸 부정하지 못했다.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기 어려워서인지 만사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부모님이 다니던 학교에 입학했고, 전공도 부모님과 똑같이 선택했다. 장래희망도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외모가 아주 눈에 띄게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싱거운 삶.
이렇게 시시하게 살다가 늙어서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딱히 반갑지만은 않은 생각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게 깨졌다.
학교에서 재환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수려한 외모에 첫눈에 반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마법이었다. 그의 다른 부분마저도 다 좋게 보였으니까. 누군가에게 흥미를 갖는다는 게 즐겁다는 걸 알았다.
졸업이 다가오자, 그가 말했다.
“군 연구소에 지원할 거야.”
“군 연구소요?”
“응. 세계군 연구소.”
뜻밖의 말이었다. 그에게 손을 내밀어 오는 기업과 연구소가 많았는데, 하필 군대라니.
“왜요?”
“짜릿하잖아. 군인이 되면 37 기지에 드나들 수도 있다던데. 괴물들 보는 맛이 재미있을 것 같아. 그리고 거기서 데이트해도 스릴 넘칠 것 같고.”
그 생각은 퍽 재미있었다. 군 연구소에 합격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군에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며 37 기지에 꼭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미리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신기했다. 아이 같은 호기심과 무엇이든 해내고 말겠다는 자신감도 보였고, 위험을 즐기는 성향도 느껴졌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너도 거기 가 보고 싶지 않아?”
“네?”
“게다가 거긴 일이 여유롭대. 난 딱히 돈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좋을 것 같은데, 넌 어때?”
같이 가자는 말로 들렸다.
솔직히 좋았다. 몇 년 간의 짝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나 했다.
“좋아요. 저도, 저도 군 연구소에 가 보고 싶어져요.”
군에 가고 싶다던 재환의 꿈은 자연스럽게 내 꿈으로도 옮겨졌다. 남자를 따라 미래를 정한다는 생각이 좀 그럴 때도 있었지만, 뭐 어떤가. 나 혼자서 결정하는 미래는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하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확정된 미래로 가기만 한다면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는 내가 처음으로 관심과 흥미를 느낀 존재이지 않은가.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갑자기 군대? 당황스럽네. 연구직은 다른 데도 많은데 왜 굳이 군대니?”
“그냥요. 뭔가 새로운 경험이 필요할 거 같거든요.”
“아무리 새로운 게 좋다고 해도……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대체 왜?”
부모님은 당혹스러워 하셨다. 두 분은 자식인 내가 당신들과 똑같은 길을 걷길 원하셨다. 군이 아닌 기업에 속한 연구실에서 성과를 내는 길을 바라신 듯했다. 그게 덜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단 다른 것도 시도해 봐. 그러고 나서 말해. 그 이후 가도 늦지 않으니까.”
단호한 말에 나는 괜히 부모님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켰다.
다른 것을 시도해 보라는 부모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나는 부모님에게 한 교수를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 교수는 인생에 좋은 등대가 되어 줄 거라 하셨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교수는 지금은 은퇴해서 진짜 교수는 아니었다. 부모님을 예전에 가르쳤던 분이라 했다. 현재는 한 기업에서 맡긴 실험에 열중이라는데, 동료 겸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좀 괴팍한 노인이긴 해도 거기서 일하면 영감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거야. 조건도 좋다고 하더라.”
결국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인가. 권유에 못 이겨 그분을 만나러 갔다.
“아, 자네가 김영한의 딸인가?”
“네.”
괴팍하다고 들었지만, 인사를 하면서도 딱히 그런 건 느끼지 못했다. 나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 달라고 해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 여겼지만 또 한 번 말해 주었다. 이후 일에 관한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아니, 듣는 척했다.
지루한 시간이 얼마간 흘러갔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백인 여자였다. 금발에 미모가 상당했다. 커다란 상자를 양손에 들고 있었는데, 상자는 담요가 덮여 있어 가려진 채였다.
“제인! 누구 맘대로 여기에 왔어!”
교수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왠지 여자에게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교수님, 조언이 필요합니다.”
“글쎄 누가 네 교수야! 난 너처럼 괴물을 가르친 적 없다! 저리 가!”
제인은 급한 대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교수는 그런 그녀를 밖으로 쫓아내듯 데려갔다. 바깥에서 고성이 들렸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교수가 제인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배신자, 혹은 끔찍한 괴물을 취급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 모두를 속이고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냐, 넌 인간도 아니다,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등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이 퍼부어졌다.
혼자 남은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제인이 가져온 상자에 시선이 갔다. 상자가 바닥에 놓이면서 담요가 스르륵 미끄러졌기 때문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였다.
투명한 상자 속에는 작은 아이가 있었다.
홀딱 벗은 몸의 아주 작디작은 여자애였다. 키는 70cm 정도인데 사지가 길쭉해서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형이 아닌, 분명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신기해. 넌 뭐니?”
손을 넣을 수 있다면 넣어서 만져 보았을 것이다.
인간의 몸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건가? 피부가 아주 희고 머리카락은 눈부신 금색이었다. 눈동자도 거의 흰색에 가까운 하늘색이라 시선을 빨아들였다.
“인형이야, 사람이야?”
나도 모르게 눈을 맞춰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대답을 듣기엔 너무 어리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는 유리 상자 안에 있어서 설사 소리를 낸다고 해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자꾸, 말을 걸고 싶었다. 아이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너 같은 애 처음 봐. 되게 귀엽고 예쁘다.”
커다란 눈이 나를 보고 한 번 깜빡였다. 내가 웃으니까 아이도 따라 웃었다. 귀여워서 껌뻑 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아이의 미소가 찌릿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아이가 투명한 벽에 손을 댔다.
나는 아이의 눈에 눈을 맞췄다.
“밖으로 나오고 싶어? 나오게 해 줄까. 아니, 안 돼.”
내가 고개를 젓자,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뭘 뜻하는지 알긴 아는 듯했다.
“넌 너무 작고 여려서 안 될 거야. 그러니 네 엄마가 여기 두는 거겠지. 행여 바람이라도 맞을까 봐. 그런데 옷은 왜 홀딱 벗겨 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얼른, 조금만 더 크자. 그럼 나올 수 있을 거야. 걸을 수도 있고.”
말하던 도중 나도 모르게 상자를 들어 아이에게 창밖의 세상을 보여 주었다. 하늘을 보라고 상자 각도를 올려 주기도 하고, 나무를 보라고 높이를 맞춰 주기도 했다. 또 저 멀리 있는 꽃밭을 보라고 창가에서 뒷걸음쳐 주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이는 내가 보여 주는 것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듯했다.
아이의 눈은 교수의 책상 그것도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캔들에 가 있었다.
아로마 캔들이었다. 방향을 위해 피워 둔 듯한데, 신기한 건 아이가 그 물건의 쓰임을 귀신같이 알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진짜로 향을 맡을 수 있기라도 하는 듯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가둔 상자 양쪽에 구멍이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향을 맡기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자를 아로마 캔들에 가까이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확 돌았다.
그걸 보는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향 좋지? 반짝거리는 부분도 예쁘고. 그런데 이 향은 좀 점잖은 편이네. 더 좋은 향 많은데. 음.”
으으음. 아이도 그런 소리를 내며 향을 만끽하는 듯했다.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지은 표정이 그 증거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제인이 내게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나는 황급히 상자를 부드러운 소파 위에 올려 두었다. 아이가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멋대로 담요를 벗기래? 당신, 내 실험체에 책임질 거야, 응?”
실험체라고? 자식이 아니고?
하긴. 자식이면 그렇게 벌거벗겨 놓을 리도 없을 거였다.
당황한 중에, 교수는 제인에게 여전히 화를 내며 외쳤다.
“너야말로 작작해! 애초에 네가 내려놓을 때부터 담요는 떨어졌다고.”
“교수님은 제 일 도울 것도 아니면서 그런 태도로 나오지 마시죠!”
“말했지? 내가 네 일 도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그럼 전 이유가 있어서 교수님을 도왔던가요? 저도 교수님께 몇 년을 바쳤다고요!”
“누가 도를 넘으랬어? 난 위험한 인간과는 상종하지 않아. 골치 아프거든! 이 애를 보라고, 세상에! 이런 괴물이나 만들고!”
다투는 그들에게 내 존재는 점점 옅어졌다. 고성이 오가자 아이도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내겐 좀 어색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나는 교수가 줄 일자리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더는 여기서 시간 낭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저 그럼 갈게요. 이만.”
나는 인사를 받아 주는 둥 마는 둥 하는 교수와 날 노려보는 여자를 뒤로하고 그곳을 나섰다.
으음. 왠지 직업에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아까 내가 그 애를 대한 것을 생각하면, 유치원 교사를 해도 잘할 거 같은데?
그러나 잠깐의 생각일 뿐.
역시 재환 오빠를 따라서 군대에 가는 걸 택해야겠다.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유리 상자 안 그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 애, 제대로 인간으로 큰다면 엄청난 미녀가 될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작은 아이를 볼 일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귀여운 빵 반죽 같이 생겼는데 그 애는 달랐다. 나는 그 작은 인형 같은 생명체를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아까 그곳을 돌아보았다.
창문엔 여전히 박사와 여자가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
다투는 어른들을 보고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사라진 날 찾는 건 아닐까? 아까 그 언니는 어디 갔는가 하고 두리번거릴지도.
“흐음.”
돌아가는 길, 왠지 웃음이 나왔다.
-<괴물에게 사육당하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