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
그녀의 고개가 홱 꺾였다. 숨이 턱 막히면서 배 안쪽이 찌르르 강하게 울렸다. 한 번, 또 한 번 콱 치고 들어올 때마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기온이 짐승 같은 숨을 내쉬며 몸을 꽉 안은 채 더 거세게 들어왔다.
“윤해야, 윤……!”
그가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일체감이 커졌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저절로 허리가 움직였다. 기온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이마 곳곳에 키스하며 감각에 충실하게 내달렸다.
절정은 빨랐다. 펠라티오를 한 후에 삽입해서 그런지 그는 금세 쾌감에 떨었다.
“윽, 으윽!”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윤해의 몸 곳곳에 잔 키스를 퍼붓다가 몸을 세웠다.
“덥지 않아?”
그러고는 갑자기 윤해를 단숨에 안고서 창가로 갔다. 창틀이 제법 널찍했는데, 그곳에다가 기온은 넉넉한 커튼 자락을 이불처럼 깔았다. 의미를 알아차린 윤해가 기겁했다.
“아…… 저기는 누가 볼 텐데.”
“괜찮아. 어차피 아무도 없어. 게다가 봐. 달이야.”
윤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이 보였다. 하이퍼 문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온도 달과 37 기지가 있던 곳을 번갈아 보았다.
왠지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행복을 느꼈다. 아주 평온한, 행복을.
“누가 나에게, 윽, 죽도록 이렇게 있으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윤해의 안쪽에 더욱 세게 박아 넣었다.
“너무, 너무 좋거든 지금.”
기온은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영원한 파도가 될 듯 끝도 없이 윤해의 몸으로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 * *
기온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사방이 시원했다. 내리쬐는 햇빛조차 상쾌하게 느껴졌다. 눈앞엔 바다가 있었고, 등 뒤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이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윤해가 서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온은 윤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아 달라는 의미였다. 윤해가 미소를 짓다가 손을 힘껏 잡아 주었다. 그 순간, 맞잡은 두 손에서 빛이 나더니 두 사람 모두의 몸이 빛이 되었다.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과거의 어둠 따위는 빛에 모두 스러졌다. 세상 곳곳을 마음껏 달리던 기온과 윤해는 어느샌가 지쳐 푸른 풀밭에 누워 있었다.
꿈인 걸 알고 있었지만, 허무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깨어나도 자신들의 앞에 펼쳐진 것이 낙원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 * *
간지럽고 야릇한 감각이 잠을 방해했다.
윤해는 이게 뭔가 하고 눈을 떴다.
기온이 티슈로 아래를 닦아 주고 있었다. 꼼꼼하고 섬세한 손놀림이었지만, 윤해는 그 손길에 어제의 흥분이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닦고 닦아도 몸속의 정액이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하긴. 끝일까 싶으면 하고, 또 하고, 안에 얼마나 퍼부었는지 몰랐다. 온몸이 기온의 체액으로 뒤범벅이 되는 건 아닐까 하며 잠들 정도였으니까.
왠지 부끄러워졌다. 씻을 땐 씻더라도, 지금 당장은 이불로 몸을 가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불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격한 행위로 인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 닦았으면 나 이불 좀 덮어 줄래?”
치사하게 기온은 자기만 말끔한 모습이었다. 부지런하게도 먼저 일어나서 씻었다. 향수도 뿌리고,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고, 심지어 바로 파티에 나가도 될 정도로 옷차림도 말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런 그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굳이 가릴 이유가? 우리,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해 줄 거면서 말은.”
“흐흐.”
그는 윤해의 발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가끔 괴물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게 된다. 재미있었다. 가장 깊게 통하고 내밀한 곳까지 공유한 사이라고 해도, 이럴 땐 낯선 사이처럼 가리려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샴페인 트레이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어제 발정이 나서 완전히 미쳤었네.”
“그러게.”
“그 때문에 못 보여 준 게 있어.”
“못 보여 준 거라니?”
그는 샴페인 트레이 위에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작은 나무 상자라고 해도 섬세한 세공이 색달라 보였다. 윤해는 뒤늦게야 그것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궁금한 눈으로 보았다.
그가 나무 상자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반지였다. 핑크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아름다운 반지에 윤해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기온은 윤해의 앞에 무릎 꿇었다.
“너…….”
윤해는 이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청혼할 때 남자의 자세.
아주 오래전이야 모르겠지만, 요즘 남자들은 이런 자세의 청혼법이 낡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온이 하니 색달랐다. 가장 고전적인 행동이 기온에겐 가장 인간다워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는 반지를 윤해의 약지에 끼우며 나긋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결혼해 줘. 윤해야.”
“기온.”
“이번에 37 기지에 다시 갔잖아. 그런…… 일을 치르고 난 다음에 느낀 바가 있었어. 앞으로 어떤 싫은 일이 있어도 가족이 너라면 나, 담담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반지가 끼워진 윤해의 약지 위에 키스했다.
윤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청혼은 무조건 허락이었다. 또다시 제인처럼 미치광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제 기온이 어두워지지 않을까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와 가족이 된다면.
그의 유일한 그녀가 되어 준다면.
“그러자.”
그녀는 기온과 마주 보고 앉아 그의 입술에 키스해 주었다.
* *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게 맑았다.
비행장에 경비행기가 하나둘씩 내렸다. 주차장에는 이미 차가 빼곡했으며, 파티장에도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시도르의 친척이 중심이었고, 그 외 기업 관계자, 기자들도 보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발표될 이시도르의 후계가 이미 누구인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 변수는 없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나 이시도르의 친척들이 유독 그랬다.
“출신도 불분명한 것에게 그의 사업을 맡길 순 없을 겁니다.”
“그렇다곤 하지만 정말 이시도르와 판박이던걸.”
“봤나요?”
“그럼. 복제품이라고 해도 믿겠던데.”
이시도르는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든든한 아들 기온과 그보다 더 든든한 윤해가 있었다.
“이 모든 걸 다 짊어질 수 있나?”
이시도르의 질문에 기온은 앞으로 나아가 아래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가진 거대한 사업체를 똑똑하게 짊어질 자신이라, 글쎄.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어쨌든 저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윤해와 함께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시도르는 윤해를 향한 기온의 믿음이 경탄스러웠다. 친척도 누구도 믿지 못해 독식하려 했고, 그렇게 모은 재산을 대리모를 통해 얻은 아이에게 주려고 했으니, 자신의 그 마음가짐과 지금 아들의 마음가짐이 자연히 비교 되었다.
어쩐지 자신의 그릇이 아들보다 좀 작게 느껴졌다.
이시도르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윤해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친 후 계단을 내려갔다.
“잘 부탁하네.”
식전 인사에서 이시도르는 모두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를 쏙 빼닮은 기온의 모습에 사람들은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자식이 나타나 일을 돕고 있다, 사실은 복제품이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버리고 간 자식이다, 무성한 소문으로만 듣던 이를 직접 보니 다들 신기한 듯했다.
기온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윤해도 함께 소개했다. 그녀는 단순히 약혼녀일 뿐 아니라 이터니티 재단을 같이 운영해 갈 동반자라고 알렸다.
소개 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시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박수를 보내며, 흐뭇하게 두 사람을 보았다.
인공 달이 약하게 빛을 내뿜었다.
전보다 약해진 게 눈에 느껴질 정도였다. 보통 저러면 얼마 안 가 새 달로 교체된다.
새 달이라.
윤해는 흐린 달빛을 받고 있는 기온을 보았다.
37 기지에 살던 때보다 훨씬, 빛나 보였다.
-<괴물에게 사육당하다> 본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