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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40화 (40/43)

40화

구 37 기지에는 한때 파괴에너지가 흐르는 죽음의 선이 둘러져 있었다. 그 선 때문에 괴물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사람들도 그곳에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시도르에 의한 개발을 시작으로 죽음의 선은 깔끔히 사라졌다.

자동차는 죽음의 선이 있던 자리를 지나, 더 깊숙한 곳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인적이 드물어진 지는 한참이나 되었다. 이쯤이면 차를 멈출 법한데도 기온은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동주행 모드가 있는데도 그는 직접 운전했다. 제인은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고, 윤해는 그런 제인을 감시했다.

제인은 윤해에게 끊임없이 눈짓했다. 그것이 풀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적어도 입에 물린 재갈이나마 없애 달라는 것인지, 윤해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지면 윤해는 이따금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며 딴청을 부렸다.

협곡이 보였다.

한때 기온이 살았던 곳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차가 멈추었다. 윤해는 기온에게 뭔가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기온은 굳은 표정으로 삽을 챙겨 어디론가 향했다. 윤해에겐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윤해는 기온의 뒷모습을 보다가, 슬슬 괜찮지 않나 싶어 제인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빼 주었다.

제인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윤해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윤해.”

윤해의 표정에 놀라움이 확 드러났다.

“나를 알아?”

제인은 자신에게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큭 하고 가볍게 웃었다.

“왜 모르겠어? 이터니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니, 아니, 이시도르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랄까.”

제인은 윤해의 예상보다 많이 윤해를 알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거대한 자금줄과 많은 연구자들을 수족처럼 부리려던 그녀였다. 그런 정보를 아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제인이 또 물었다.

“시아로파를 심은 것도 너지?”

“그래.”

“날 꾀려고?”

윤해는 더욱더 놀랐다. 그런 속셈까지 알면서, 제인은 구 37 기지 근처에 실험실을 세워 활동했단 말인가? 겁도 없이?

황당했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려 했다.

“시아로파의 뿌리에서 나오는 물질이 인두의 생장을 활성시킨다는 걸 알아냈어. 그거면 당신을 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큭. 크하하! 굳이 왜 그렇게 나를 찾았지? 다른 방식으로 잡는 게 더 빨랐을 텐데.”

“그걸 기온이 안 해 봤겠어? 게다가, 겨우 그런 이유로 시아로파를 키운 건 아니야. 나는 시아로파를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는 그 무언가로 만들어서 쓸 거야. 당신처럼 이상한 걸 만들기 위해 그러진 않을 거니까.”

“아아, 어련히 그러시겠지. 누구의 연인인데.”

심지어 제인은 윤해가 기온의 애인이란 것도 아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기온의 삶도 알지 않았을까?

윤해는 분노를 느꼈다. 아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들 같은 생명체를 또 만들려고 시도했던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랬어? 왜 그 애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러자 제인이 태연히 대답했다.

“왜냐니. 원하는 모델이 있으니 그런 거지. 너처럼 올바르신 과학자들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불쌍하지도 않아?”

“글쎄. 세상에서 제일 돈이 많은 자의 아들로 살아가게 된 그 아이를 굳이 불쌍해야 할 이유가? 불쌍하다면 일생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잡힌 내가 더 불쌍하지.”

윤해는 할 말을 잃었다. 제인이라는 작자에게 보통의 마음가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 묻고 싶었다.

“기온을 보고 싶지 않았어? 한 번이라도, 창조자가 아닌 부모로서 말이야.”

“글쎄. 실패작에 일일이 관심 두지 않는 편이라.”

그때 차 문이 열리고 기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뭘 하고 왔는지 땀으로 흥건했다. 차의 창문이 줄곧 열려 있어서 그런지, 그는 제인이 한 말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냉소적인 말이 나왔다.

“실패작이어서 참 미안하군.”

그는 제인을 단숨에 들어 안았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윤해도 그를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5분쯤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흙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구덩이가 보였다. 제인은 그 구멍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고, 기온은 걸음을 멈추었다.

윤해가 그들을 열 걸음 정도 뒤에서 지켜보았다.

제인은 기온이 파 놓은 땅에 커다란 쓰레기처럼 떨어졌다. 고통에도 그녀는 커다란 눈으로 기온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인제 와서 살려 달라는 애원이 의미 없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온은 덤덤하게 첫 삽을 떴다.

그리고 흙을 뿌리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어차피 곧 죽겠지만, 갇힌다는 게 어떤 건지는 알고 가길 바라.”

제인의 몸 위로 검은 흙이 뒤덮였다.

* * *

이시도르는 뜻밖의 보고를 들었다.

“기온이 그녀를 죽였다고?”

기온은 그 사실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비서를 통해 알려 왔다.

그런 아들에게 살짝 벽을 느끼며, 통화를 마쳤다.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마음속을 더럽히고 걸리적거리던 매캐한 연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시원해진 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창밖을 보았다.

창밖은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 잔디밭이 아름답게 꾸며지고 나면, 이제 가문의 모든 사람이 와서 기온의 존재를 알고 축복해 줄 것이다.

아들을 찾은 뒤로, 한동안 그 미치광이 과학자를 찾는 것에 소홀했다. 아들을 찾아서 더는 그녀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죄책감 때문이다.

이시도르는 기온에게 제인을 향한 원망을 삶의 동력으로 이용해 보라고 했지만, 사실은 핑계일 뿐이었다. 그는 단죄의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라고 아버지로서 잘한 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기온이 37 기지에 버려지는 불상사는 충분히 막았을 테니까.

그래서 이시도르는 늘 기온에게 미안했다. 아버지로서 교육의 기회를 주고 어마어마한 부를 물려준다고 해도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워 줄 수는 없을 테니까. 기온에게 제1의 가해자가 제인이라면, 그 다음 가해자는 바로 아버지인 자신이라는 생각에 늘 괴로웠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제인을 직접 찾아낼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내뱉는 담배 연기마저 무거워질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알아서 잘하는군.”

아들에게 하는 칭찬이었지만, 그건 자신에게 던지는 한심하단 말도 되었다.

“파티가 끝나면 여행을 가야겠어.”

이시도르는 담뱃불을 새 재떨이에 비벼 껐다.

* * *

가문의 파티가 하루 전이었다. 윤해는 기온과 함께 참석하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드레스를 고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다. 다른 일로도 아주 바빠 파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온과 함께 제인의 건을 해결하느라 미뤄 뒀던 연구실 일이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를 모조리 확인해야 했다. 윤해는 보고서와 몇 시간이나 씨름하다가, 피곤해져 안경을 벗고 기지개를 켰다.

“흐아음.”

제인을 땅에 묻은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기온은 파티 준비와 일에 바빠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지금 기온의 마음은 어떨까?

감히 짐작해 본다.

미워하고 원망해야 할 존재인 제인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잡혔다. 단죄도 허무하게 끝났다.

이제 기온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 존재는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괜찮을까.

제인을 없앴고 제인을 돕던 이들도 이시도르가 처리해 주겠지만, 그들 아닌 다른 미치광이들도 제인과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인두의 존재가 알려진 이상, 누구라도 그런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기온은 달갑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윤해는 답답한 가슴에 물을 한 잔 마셨다. 마침 그때 누군가가 노크했다.

“누구세요?”

“샴페인 배달 왔습니다.”

노크한 이의 목소리를 들은 윤해는 웃고 말았다. 능청스럽게 사용인 흉내를 내며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는 기온이었다.

“팁은 키스로 받을게요.”

샴페인 트레이를 침대에 내리고 풀썩 앉는 모습이 가벼워 보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밝은 미소의 표정, 생각보다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저런 밝은 모습 역시 가면일지 몰랐다. 연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배려라면, 참 서글플 것이다.

“뭘 그렇게 빤히 봐?”

기온이 샴페인을 채운 잔을 건네며 물었다.

윤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잔을 받아들면서도 시선은 그에게 향해 있었다.

“예쁘게.”

“예쁘다고 해 줘서 고마워.”

“웃어 줘서 고마워.”

“하여간.”

기온은 저를 보는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잔을 들면서도, 샴페인을 마시면서도, 맛을 음미하면서도 뚫어지게 보는 윤해의 검은 눈동자는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야릇함을 일깨우는 것만 같았다. 다른 생각일랑 하지 못하게 하는, 그래서 마약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자꾸 그러면 키스보다 더한 걸 받고 싶어지는데.”

윤해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까치발을 들어 기온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기온이 고개를 살짝 숙여 주니 수월했다. 그녀가 코를 기온의 코에 부딪치며 되물었다.

“아니. 나는 키스보다 더한 걸 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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