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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39화 (39/43)

39화

“민망하잖아. 게다가 나 몸살 날 것 같다고.”

“그것도 치료해 줄게.”

“너는 정말…….”

윤해는 못 말리겠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표정엔 웃음이 가득했다.

이리 와, 기온이 다정하게 손짓했다. 하지만 윤해는 외면한 채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런데 창틀 아래로 문득 시선이 갔다.

“응? 이건…….”

창틀 아래 화단에 누가 두었는지 덩굴 식물과 꽃이 한가득 피어나 있었다. 흔하디흔한 콩도 심겨 있었다.

콩 껍질은 금방이라도 초록색의 싱싱한 콩을 토해 낼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있으니, 불현듯 뭔가가 번뜩였다.

윤해는 제 뒤로 다가오는 기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창문이 열렸는데도 가운은커녕 몸을 가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주 당당히 나신으로 걸어와 윤해의 등을 다시 껴안고 있었다.

윤해는 그런 그를 살짝 떼어 낸 채 올려다보았다.

“기온.”

왠지 어제 섹스할 때보다 더 진지한 눈빛이라 기온은 살짝 긴장했다.

“응?”

“그러고 보니 그 털 열매 있잖아. 작은 인간이 나오던 커다란 콩.”

“갑자기 그건 왜?”

“그것들, 시아로파가 잔뜩 나는 데서만 자랐지?”

“응. 왜?”

윤해는 희망을 느꼈다. 기온의 어머니, 아니, 어머니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그 잔인한 괴물을 꾀어낼 수 있는 희망을. 게다가 시아로파를 통해 연구를 하는 것도 덤이라면 덤이었다.

“나, 좋은 생각이 났어.”

“좋은 생각?”

기온은 고개를 끄덕이는 윤해를 보고 궁금해졌다.

대체 그녀가 말하는 좋은 생각이란 게 뭘까?

제14장. 괴물의 종말

윤해는 37 기지의 시아로파가 점점 힘을 잃고 소멸하게 된 이유를 밝혀냈다. 범인은 인공 달의 파장이었다. 인간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인공 달의 파장이 살짝 변했는데, 그게 시아로파 생장에 해가 되었던 것이다.

윤해는 그 점을 알아내어 새로운 시아로파 재배법을 개발했고, 연구 목적으로 그것을 대량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시도르도 기꺼이 협조해 주었다.

윤해가 시아로파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기온도 열심히 살았다.

군에서의 경험 이후,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속도가 더 붙었다. 전역 3년 만에 이시도르의 일을 보조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아니, 이제 이시도르에게 기온은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비서이자 아들이 되어 있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시도르는 본래 친척들에게 그리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먼저 가문의 파티를 주최하기로 했다. 이 파티에서 기온을 정식으로 모두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 하나뿐인 자식이자 후계자로 세상에 당당히 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 기온이 먼저 찾아왔다.

이시도르는 아들을 반겼다.

“오, 마침 왔구나. 할 말이 있었다. 이번 파티에…….”

“그전에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시도르는 놀랐다. 기온은 아버지의 비서가 된 후 웬만해서는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직감하며, 이시도르가 물었다.

“무슨 말이지?”

“파티를 며칠 늦춰 주십시오.”

파티 연기, 라.

다행히 아직 초대장은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이시도르는 아들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들의 심각한 표정도 마음에 걸렸다.

“이유를 말해 주겠니?”

“가족 파티에 가기 전에 꼭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일이라니?”

질문을 들은 기온이 잔잔히 웃었다.

이시도르는 어쩐지 그런 아들의 웃음이 날카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일종의 ‘청소’랄까요. 아버지는 굳이 다 알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아들에게 처음으로 비밀이 생긴 듯한데.

이시도르는 웃으며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 * *

구 37 기지 주변 신생 소도시.

이시도르는 구 37 기지의 땅을 대규모 식물 공장 겸 연구 단지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윤해도 이터니티의 대표 연구원이 되어 그 계획에 참여했다. 윤해는 특히 시아로파를 중심으로 연구했는데, 시아로파의 물질이 인간의 삶 전체에 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는 그것을 위해 지은 건물에 공장식 농장을 만들어 시아로파를 대량 재배하고 있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정부도 37 기지 주변에 소도시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3년 만에 그곳은 비록 인구는 적지만 그럴싸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인은 그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5층 건물 전체를 빌려 쓰고 있었으며, 게다가 혼자도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에겐 자금을 대는 자들과 실험을 보조하는 과학자들이 함께했다. 그들은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생명체에 대한 환상에 동조했고, 언젠가는 그 생명체를 소유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더 나아가 그것으로 큰 부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애초에 이 건물도 그 환상 실현의 연장선이었다. 물주들은 제인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원했다. 실험이 장기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노화를 늦추는 약도 주었고, 실험실을 지어 달라는 요구에 이 건물을 통째로 지어 몇 달 전에 완공을 마쳤다. 필요한 장비나 보안 팀도 지원했다. 실상 이곳에서 제인은 리더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지금 제인은 자신을 돕는 이들을 앞에 두고 축배를 들고 있었다. 본격적인 연구 준비가 완료된 지금, 그것을 축하할 겸 프로젝트의 순항을 비는 파티인 셈이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인두(人豆)’라 불리는 콩의 재배였다. 콩 껍질 안에 작은 인간형 생물체가 들어 있는 그 특별한 식물은, 오직 시아로파가 가득 자라나는 곳에서만 컸다. 시아로파의 뿌리에서 나오는 물질이 인두의 생장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시도르가 시아로파의 상업적인 쓸모를 발견했는지 구 37기지에 대규모 식물 공장을 세운다고 했고, 이미 대량의 시아로파를 재배하고 있었다. 제인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제인은 이곳에 있는 후원자들을 이용해 그 시아로파를 합법적으로 조달받을 생각이었다.

인두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 자신뿐이었다. 이 신비로운 씨앗만 있으면 이시도르도 부럽지 않았다. 인두에서 태어날 강한 생명체는 인간들의 훌륭한 도구가 되어 줄 것이고, 나중에는 영생을 위한 부품 공장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야심에 불탄 제인이 잔을 들며 말했다.

“동지들이여! 지금까지도 힘내 주셨지만, 조금만 더 끈기를 가지고 저를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고지가 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비상벨이 울렸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웬만한 일로는 벨이 울리지 않을 것이었다. 사람들이 동요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웅성거리는 가운데, 문 바깥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신음과 총성이 들렸다. 사람들은 탁자 밑으로 숨어들어 가기 시작했고, 제인은 일이 심각하게 어그러지고 있다는 걸 느끼며 품속의 총을 꺼내려 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동양인 여자가 들어왔다.

“너는……!”

제인은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일전에 동지들이 구해 준 이터니티 조직 관련 자료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윤……뭐라고 했던가.

이터니티의 연구원이자, 이시도르의 예쁨을 받는다는 여자.

한 번쯤 만나고 싶었다. 납치를 해서라도 시아로파를 재배한 비법을 알고 싶었으니까.

제 발로 찾아 온 윤해가 제인은 그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당장 사병들에게 지시했다.

“뭐 해? 다들 잡아!”

하지만 그런 명령을 내리자마자, 윤해의 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검은색 군복으로 무장한 그들은 전부 이시도르가 소유한 부대의 사람들이었고, 통솔자는 기온이었다.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기온이 총을 들었다. 그는 감정 없는 얼굴로 제인의 보안 팀을 하나둘씩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눈 깜짝할 사이에 제인의 사병들이 총에 맞았다. 제인은 놀란 눈으로 기온을 보았다.

“죽였어?”

피식. 기온은 싸늘히 웃었다. 죽인 듯이 보였지만, 다들 급소는 피해 맞혔다. 기온과 같이 온 군인들이 신음하는 이들을 끌고 밖으로 하나둘씩 나가기 시작했고, 기온은 제인을 제압해 사지를 꽁꽁 묶어 바닥에 두었다.

“뭐 하는 거야아아아!”

윤해는 죽어라 소리를 지르는 제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기온에게 물었다.

“어쩔 거야?”

“어쩌긴.”

그동안 제인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애썼다.

이시도르보다 더 집요하게 찾고, 또 찾았다.

이시도르야 그토록 원하던 자식을 찾았으니 제인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온은 달랐다.

제인이 살아 있는 한, 자신과 같은 생명은 또 태어날 것이었다. 그건 견딜 수 없었다. 비극을 끝낼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끝내야 하고 또 그런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기온은 생각했다.

“없애야지.”

그러자 제인이 기온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난 네 어머니야.”

윤해는 제인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저 뻔뻔한 입을 그냥 둘 수 없어 재갈을 물렸다. 끔찍한 과거를 지녔던 기온에게 그 끔찍함을 안겨다 준 장본인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염치가 없는 짓이었다. 제인은 어머니라는 구실로 일말의 자비를 바라는 건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틀려도 한참이나 틀렸다.

윤해는 기온을 보았다.

기온이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라…….”

그의 눈빛에는 분노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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