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에게 사육당하다-37화 (37/43)

37화

“사실…….”

“응.”

“37 기지에 갔었어.”

윤해는 놀랐다. 이시도르에게 기온의 안부를 종종 듣곤 했는데, 그 사실은 여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뭐? 왜?”

“정리 명령이 내려졌거든.”

‘정리’라니. 무엇을?

윤해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괴물들, 말이야?”

그러자 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땅을 아버지가 매수하셨거든.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셔서.”

“아.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윤해는 이시도르가 야속했다. 미리 알았다면 그 작전에서 기온을 제외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가장 걱정하는 점이 그것이다. 말이 정리지, 소탕하고 파괴하란 말 아닌가. 괴물들과 살아온 게 끔찍하다고 했던 기온이지만, 제 손으로 자라난 곳을 파괴하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기온 너는 운이 좋아서 이시도르의 아들로 재회할 수 있었지만, 운이 나빴다면 저 괴물들과 똑같은 종말을 맞이했을 거라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윤해는 속으로 이시도르를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그사이, 기온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정리하러 가기 전에는 기분이 좀 그랬어. 솔직히 가기 싫기도 했고. 왜 하필 내가 입대한 후에 이런 일이 있는 건지.”

“그럴 것 같아. 진짜 왜 그러신 거지?”

“나는 그때 그 시절이 지우고 싶을 정도로 싫었지만, 그렇게 망가진 곳이라 해도 내 요람이었잖아. 내가 파괴하기는 싫었고, 괴물들을 볼 생각을 해도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어.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살아 있는 놈들은 없었어. 단 한 마리도.”

윤해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가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뼈가 되어 있거나, 아니면 뼈가 되기 직전의 상태로 죽은 애들만 많더라.”

“기온.”

윤해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랐다. 그 어떤 말을 한다 해도, 그가 느꼈을 충격을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산다고 해도 괴로웠을 이들이야.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니까, 무섭더라. 나도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도했지만…… 두렵기도 했어.”

그동안 기온은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암울한 망상에 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시아로파가 자라지 않아서 굶어 죽었을 테지. 그렇게 해골로 변한 괴물들, 또 자칫 똑같은 꼴로 종말을 맞이할지도 몰랐던 자신, 일부러 그런 끔찍한 곳을 정리하라고 보낸 아버지 이시도르에 대한 원망.

왜 그러셨냐고, 군에 널린 게 다른 병사들인데 왜 하필 나를 보내셨냐고 따진 적도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뭐라고?”

“네가 37기지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너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거 아니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살아 돌아온 자의 몫을 쟁취 하라고 하셨어. 분노든 원망이든 그건 당신에게 품지 말고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낸 자들, 그리고 날 거기 버린 어머니라는 인간에게 품으라고. 그게 내 미래를 향한 어떤 지침이 되어 줄 거라고. 처음엔 잘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힘든 훈련으로 도피했지. 그런데 날 무작정 몰아세우기만 하다 보니 알게 되더라. 나는 아니, 인간은 목적이 필요한 존재란 걸. 순조롭게 이어질 미래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윤해는 이시도르가 무엇을 노리고 아들에게 그런 일을 맡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심정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야속해. 너무 심하게 교육하셔. 너를.”

“그래. 그것도 그런데…….”

어느새 기온은 윤해에게 아이처럼 안겨 있었다.

“모르겠어. 지금도 아찔해져. 내가 과연 널, 널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물으면서도 섬뜩해진 기온은 으스러질 정도로 윤해를 꽉 껴안았다. 안긴 감촉, 향기, 호흡의 소리,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고 싶었다.

“지금 이거, 꿈 아니지?”

윤해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확실히 말해 주었다.

“꿈 아니야.”

“정말?”

“그래. 37 기지에서의 일이 악몽일 뿐인 거야. 잊으려면 잊을 수 있는 악몽. 내가 치료해 줄 악몽.”

윤해는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쓸어 주고, 관자놀이도 장난스럽게 꾹꾹 눌러 주며 웃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안아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기온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품과 손길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마음을 달래 주는 것 같았다. 확실히 안도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정말 좋을 것이다. 잠이 드는 순간도, 깨어나는 순간도,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으면 악몽은 가볍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윤해가 소리를 낮춰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랑 자면 불면증이 사라질 거야.”

“흐.”

기온은 황당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말 그대로 잔다는 말은 아니었다. 일종의 야릇한 신호인 셈이었다.

외면하듯 기온은 윤해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걸 막았다.

“기온, 기억해?”

“뭘?”

“37기지, 풀이 가득 자라났던 낙원에서 어떤 작은 생명체가 죽은 걸 본 후 우리가 마구 몸을 섞었던 것.”

“응, 당연히 기억하지.”

“난 그렇게 생각해. 죽음이나 파멸 앞에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변한다는 걸. 아니, 근원으로 돌아가려 한달까.”

“…….”

“우리는 다 짐승이야. 생을 느끼며 즐길 줄 알고 그 쾌락을 이용할 줄도 아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짐승이지. 네가 인간의 삶을 산 뒤로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이제, 이제는…… 위로를 받아야 할 때야.”

“윤해야…….”

“이제 그만 허락할 때도 됐잖아?”

윤해는 눈웃음을 치며 조금은 칭얼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그 모습에 기온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흐렸다.

“이…….”

“응?”

“이…… 짐승. 짐승아.”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윤해가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짐승? 짐승이라고? 재미있는데? 배를 잡고 웃던 그녀가 웃음을 겨우 사그라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큭, 하아, 그래…… 짐승이라 해도 좋아. 자자. 우리.”

“안 돼. 아직은.”

“왜?”

왜냐니. 육체적인 나이가 몇 살이 되었든, 기온에게 윤해는 여전히 성장이 한참이나 남은 아이로 보였다. 몇 년 동안 그렇게 봐 왔기 때문에 그런 시선을 바로 엎어 버리기는 곤란했다.

“답답해. 이미 진짜 나이는 서른이 넘었는데 이런 문제로 주저해야 해? 알잖아. 솔직히 나 기온 너보다 더 나이 많다는 거. 아. 몰라. 내 멋대로 할래. 네가 이렇게 나올 거면 차라리 여기서 나 혼자 하겠어.”

말뜻을 생각하던 기온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혼자 하다니, 그것도 여기서? 곱씹을수록 자극적이고, 그래서 민망했다. 그는 뜨거워진 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아. 사람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진심인데?”

“너…….”

기온은 얼굴만 빨개진 것뿐 아니라 윤해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입술을 말았다가 깨물고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원망하듯 노려보기도 하는 그 모습엔 당황이 짙게 녹아 났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윤해는 방방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키스가 아니었다.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깊고 진한 키스였다.

키스 받는 기온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가, 다시 감겼다. 들어오는 혀가 심상치 않았다.

‘젠장. 이렇게 나오시겠다?’

천천히 휘젓는 혀끝이 간사했다. 깊게 찌를 듯 힘을 주다가도 도망가듯 뒤로 뺀다. 그러다가 다시 깊게 뻗어 나왔다. 밀어 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입맞춤의 형세가 될 뿐이었다.

기온은 어느 순간 자신이 능동적으로 그녀와 혀를 엉키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런 자신에게 놀랐는지 갑자기 그는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고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따졌다.

“너.”

“응?”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뭐가. 나 원래 잘해. 몰랐어?”

기온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모르긴. 모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그녀와 나눴던 키스와 몸짓을 잊지 못해 괴로워한 적이 많았으니까.

다만 윤해의 몸이 상황에 여의치 않으니 참아 왔던 것일 뿐.

윤해도 그걸 알고 자꾸만 도발했다. 그녀는 자신의 잠옷 단추를 스스로 끄르기 시작했다.

“더 하고 싶은데, 협조 좀 해 줄래?”

순식간에 잠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해맑고도 가뿐한 모습인데, 모순되게도 더없이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기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윤해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알몸으로 이런 접촉을 감당할 수 없는 그인 걸 뻔히 알면서 부러 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기온이 더 못 보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의 바특해지는 숨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윤해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의 눈동자를 찾았다. 눈동자 속에 감춰진 욕망을 탐색해 냈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협조 좀 해 주겠냐고, 기온 씨.”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의 심장이 쿵쿵 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해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스몄다.

“으음. 난 너무 오래 기다려서 미칠 것 같은데. 그쪽은 안 그런가 봐?”

기온은 답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를 다듬으며 대답할 과감함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시간, 이런 욕망의 순간.

그녀가 어느 정도 앳된 티를 벗을 때까지 육체적인 욕심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가짐을 스스로도 지킬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군대에 다녀와서 너무 오랜만에 윤해를 보고 반가운 탓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으로 위안을 얻고 싶은 나약한 마음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수컷으로서 그녀의 몸에 부딪치고 싶은 저급한 욕구 때문일까.

이제는 모르겠다.

더는 방어할 수 없었다.

방어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조차 지쳤는지도 몰랐다.

그는 천천히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진한 정염이 녹은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안 그렇긴. 나도…….”

그는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너 못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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