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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36화 (36/43)

36화

“아…… 이, 무슨.”

이런 접촉은 생각지 못한 거라, 기온은 좀 놀랐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귀의 키스라면야.

“그런데 나 그때, 말이 안 통하긴 해도 딱히 답답하진 않았어.”

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말이 통하고 말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응. 중요한 건…… 네가 날 지켜 준다는 사실이었어. 그때 참 안심이 되었거든.”

기온은 고개를 저었다. 지켜 줬다는 말에 떳떳하지 앉았다. 다른 괴물들에게서 윤해를 지킨다고 나름 애썼지만, 마지막에 윤해가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팠다. 자다가도 몸부림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먹였던 과일들이 윤해의 몸을 상하게 한 것도 그랬다.

괴물, 온전치 못한 인간으로 있으면 그런 게 싫었다. 밝은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것도 암울한데, 좋아하는 사람을 제대로 지켜 주지도 못했던 것.

앞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과거를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했다.

“윤해야.”

“응?”

“예전보다 앞으로,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그러자 윤해는 그의 뺨에 연달아 입맞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 너무 멋져!”

쉴 새 없는 입맞춤에 기온의 얼굴이 빨개졌다.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그는 윤해를 내려 두고 먼저 걸어가 버렸고, 윤해는 그의 뒤를 쫓아갔다.

“아! 뺨에만 뽀뽀하니까 심심해! 이리 와, 기온! 얼른!”

달려가는 그들 뒤로 반디 로봇들이 반짝이며 따라갔다. 한참을 달리던 윤해는 문득 뒤돌아 그 로봇들을 보았다.

예뻤다.

마치 별들이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것 같았다.

* * *

회복 속도가 점점 빨라진 덕분에 윤해는 약을 서서히 줄일 수 있었다. 약을 줄이니 신체 나이도 변했다. 1년 만에 몸은 15세가 되고, 또 1년 만에 18세가 되었으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20세가 넘었다는 소견이 났다.

원래 나이로 돌아가고 있는 몸이 기뻤지만, 아쉽게도 기온과 함께할 수 없었다.

그 시기에 기온이 이시도르의 PMC(Private Military Company)에 입대해 군인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도르의 말에 의하면, 경험도 쌓고 일을 배우기 위해서란다. 대부호의 아들로 안온하게만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느냐며 이시도르가 제의했는데, 기온도 딱히 거절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해는 잘됐다고 했다. PMC에서의 경험으로 그가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입대 바로 전에, 막상 기온은 윤해와 떨어지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는데, 윤해가 타일렀다.

하기 싫은 것도 해야 어른이 된다고.

그 말에 기온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벌써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치고 그만둘 때가 되었다. 세계군으로 치면 전역인 셈이었다.

윤해는 연구소 스케줄을 미루고 그를 만나러 갔다.

다시 본 그는 옛날의 야성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분명 키는 그대로인데 느낌은 더 커진 듯했다. 몸이 더 굵어지고 탄탄해졌다.

그리고 말수는 극히 줄어들었다. 전에는 막 인간의 말을 터득한 기쁨에 일부러 대화를 많이 하며 배운 것을 응용하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필요한 말만 했다.

“근육이 더 붙었어.”

칭찬에도 그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배고프지 않아? 오늘은 내가 요리해 봤는데.”

한때는 기온이 윤해에게 온갖 요리를 직접 해 먹인 적이 있었다. 윤해는 이제 그걸 똑같이 해 주고 싶어서, 집으로 안내했다. 집에는 이미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훌륭한 요리였다. 그것을 찬찬히 보던 기온이 물었다.

“진짜 네가 다 한 거야? 그 작은 손으로?”

윤해는 발끈했다.

“애 취급 하지 마. 내 몸, 이제 스무 살이 넘어도 한참이나 넘었다고.”

확실히 저번에 봤을 때보다 키도, 가슴도 커졌다.

하지만 말투와 목소리는 묘했다.

“난 이제 애가 아니야.”

기온은 윤해의 말에 큭큭 웃고 말았다.

외모가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 같았다, 그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하긴 요새 학생들이랑 많은 시간을 보내니 그들을 닮는 건 당연한 지도 몰랐다.

예전에 우연히 했던 교사 일이 제법 적성에 맞아, 이후에 중등부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업도 했는데, 연구소 일보다 업무 시간이 더 길다고 했다. 그래서야 부업이 주업이 된 셈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연구소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게 더 신나고 재미있다고 했다. 예전에 몸담았던 세계군은 분위기가 딱딱해서 싫었고, 연구소는 조용해서 별로였는데, 학교는 활기가 느껴져서 좋았다나.

어쨌거나 귀여웠다. 군대에서 또래의 우락부락한 남자들만 보다가 윤해를 보니 마음이 따스하게 녹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습은 별로 상관없는 건지도 몰랐다. 윤해가 할머니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늘 같은 모습으로 보일 테니까.

윤해의 존재는 전이나 지금이나, 그 자체로 위안이었다.

“좋아.”

“응?”

“아니, 차려 줘서 고맙다고. 잘 먹을게”

“어, 응.”

윤해는 기온의 목소리에서 미미한 변화를 감지했다.

단지 목소리가 지독히 저음으로 변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말투가 차분하다기보다 어둡게 느껴진다.

좋게 말하면 점잖은 어른을 보는 거 같고, 서운하게 말하면 조금 거리감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겠지. 괜한 생각이겠거니 하고 일단 와인부터 들었다.

“있지, 오늘은 나 마실 거야. 그러니까 말리지마.”

단호한 말에 기온은 반발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애도 아닌데 마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래도 조금만 마셔.”

식사하면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윤해가 먼저 자신의 근황부터 알려 주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 사람들이 부모님을 조부모님으로 안다는 것, 이시도르에게 약값을 갚으려 했는데 이시도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 돈으로 자기 회사 주식이나 사라고 했다는 것, 그래서 진짜 샀는데 2배나 벌게 되었다는 것, 덕분에 자신은 이제 부자라는 것.

쉴 새 없이 떠들던 윤해는 너무 제 이야기만 했나 싶어서 무안해졌다.

이젠 그의 안부를 물을 차례였다.

“너무 나만 떠든 것 같네. 기온은 어땠어?”

“음.”

여전히 낮은 톤의 목소리가 나왔다.

“훈련을 참 많이 했어.”

“…….”

“그리고 실제 현장에도 투입됐는데 뭐, 여느 대원이랑 똑같이 지냈어.”

윤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신은 과거 군에서 연구직이라 실제 전장에 투입된 적은 없어서, 한편으로는 기온이 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런 말을 하는 기온의 눈이 좀 슬퍼 보였다.

윤해는 그의 눈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아니, 착각이야. 그럴 리 없잖아.’

일전에 그가 보내 주었던 사진 속 그의 모습을 되새겼다.

활짝 웃고 있었다.

그건 잘 지냈다는 증거니까.

‘괜한 걱정할 거 없어.’

즐겁게 식사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식사 후에는 이시도르의 선물로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 중 기온은 이따금 윤해를 보며 싱긋 웃기만 했을 뿐 역시나 입이 무거웠다.

밤이 되어 잘 시간이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왠지 모를 어두운 기분이 윤해의 발목을 잡았다.

분명 기온에게 뭔가가 있었다.

윤해는 그걸 알고 싶었다.

알아주고 싶었다.

발걸음을 돌려 다가가 기온의 옷을 끌어당겼다.

“안 되겠어. 우리 같이 자자!”

기온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날 때마다 그렇듯, 이번에도 각방을 쓰려고 했다.

“안 돼.”

“왜?”

“안 된다면 안 돼.”

단호함이 가시 돋친 철조망을 보는 것 같았다. 윤해는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따로 자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혼자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오늘 기온의 표정과 눈빛.

웃고 있었지만 한 꺼풀 껍질을 벗겨 보면, 다른 감정이 드러날 것 같았다.

‘안 되겠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숨기고 있는 감정을 보고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벽을 보며 모로 누워 있었다. 문소리가 나도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잠든 건 아니었다. 윤해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다가간 그녀는 그의 넓은 등을 껴안았다.

“자는 거 아니지?”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응. 안 자.”

“무슨 생각해?”

윤해는 그의 너른 등에 뺨을 비비며 물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 나도 알고 싶어. 너, 무슨 생각해?”

한참 동안 기온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도 윤해는 기다렸다. 그가 마음을 터놓기를, 바랐다.

기온이 몸을 조금 웅크렸다.

그런 태도가 어쩐지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덩치가 큰데도 작은 아이를 보듬듯 안아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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