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이들은 서로 뭔지 모르겠다는 듯 눈빛을 주고받다가 기온에게로 갔다. 기온은 팔짱을 끼고서 아이들을 일렬로 서게 한 다음 다소 엄하게 물었다.
“너희, 아까 선생님 보고 뭐라고 했지?”
“네?”
“분명 같이 체육하자고 했어, 안 했어?”
“했는데, 왜요?”
“이것들이……. 너희 선생님은 수업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심해. 그런데 너희랑 하루 두 시간씩 운동할 여유가 있겠어? 다음부터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마.”
그러자 아이들 중 하나가 못마땅한 듯 맞서 물었다.
“다음부터라고 해도 고작 이 주밖에 안 되는 시간인데요. 그리고 체력 소모가 심할수록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해서 건강을 튼튼하게 다져야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 아이의 양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눈짓했다. 좀 조용하라는 뜻이었다. 그 아이들의 눈에 비친 기온은 너무 무서웠다. 큰 키에 중저음만으로도 위압적인데 새하얀 피부와 날카롭고 차가운 웃음은 무섭기까지 했다.
아이의 맞서는 말에도 기온은 깔끔히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리고 정해진 수업 시간에만 질문하도록. 선생님은 어린이라 일찍 자야 해요. 어제처럼 늦은 퇴근은 곤란하단 말이야. 알겠어?”
어제처럼 늦은 퇴근이라니? 아이들은 이 무서운 아저씨가 윤해 선생님의 퇴근 시간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서우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까 맞섰던 그 아이만 또 질문했다.
“어제 좀 제가 많이 질문해서 늦게까지 수업한 건 맞는데요. 우리 수업은 원래가 그래요.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곤 하죠. 한 번도 제시간에 끝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선생님도 어린이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공부하려고 모인 어린이들인데 수업 시간 좀 늘어나면 안 될 이유라도?”
기온이 그 아이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학구열 좋지. 하지만 그러다가 선생님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음…….”
“네가 책임져 줄 거냐?”
“그건 아니지만…….”
“나는 책임져 줄 수 있다.”
“그, 그렇군요…….”
“뭐든 적당해야 하는 법이야. 선생님은 작은 몸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보통 사람들보다 배는 힘들단다.”
아이들에게 경고하는 기온의 표정과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 아이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정말 누구세요? 선생님 제자가 될 분, 맞으세요?”
그러자 옆의 아이가 대신 답했다.
“멍청아. 좀 조용히 해. 제자가 될 분이니까 이렇게 걱정하시는 거 아냐.”
“아니, 그래도…….”
“그래도, 뭐? 설마 애인이라도 될까 봐?”
뜨끔한 기온은 헛기침한 후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흠흠. 자, 그럼 내 말은 여기까지. 다들 수업하러 들어가라.”
* * *
기온의 경고 덕분인지, 아이들은 제시간에 수업을 마쳤다.
일찍 돌아온 윤해를 반기는 건 기온이 아니라 쪽지 한 장이었다.
[날 어두워지기 전에 숲으로 와. 근사한 걸 준비해 놨어.]
지도를 보면 활 연습장 뒤편이었다.
윤해는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문 채로 바로 그곳으로 뛰어갔다.
숲 사이에 있는 활 연습장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가 보니 기온이 테이블 위에 음식을 한가득 준비해 두고 손수 고기를 굽고 있었다. 숲에서 불을 피우다니? 화재라도 나면 어쩌려고? 윤해는 바로 잔소리를 하려다가, 그의 다리 아래에 보이는 소화기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레이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지요?”
윤해는 입에 넣고 빨던 사탕을 테이틀 위에 내려 두며 말했다.
“그냥 외식해도 됐잖아.”
“섭섭한 반응인데. 이것도 외식이라면 외식 아니야?”
하긴, 솔직히 말해서 이런 멋진 장소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늘에는 드론들이 풍선을 매달아 날아다니고 있었고, 테이블 주변으로는 하얀색과 연보라색 꽃이 가득했다.
테이블 위까지도 꽃이 점령한 건 마찬가지였다. 음식보다 꽃이 더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음식의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은 플레이팅이 참 좋았다. 어제 기온이 보여 줬던 음식 솜씨는 빙산의 일각인 듯했다.
“오오, 이건 와인!”
윤해가 오랜만에 보는 와인 병이 반가워서 손을 대려 했다.
그러자 기온이 그 작은 손을 툭 쳐서 쫓아냈다.
“안 돼!”
시무룩해진 윤해가 따졌다.
“아, 왜?”
“네 건 저기 청포도 주스야.”
기온이 테이블 한가운데 있는 반투명한 핑크색 병을 가리키자, 윤해는 볼을 개구리처럼 부풀렸다. 와인이나 맥주 정도는 마셔도 괜찮은 것 같은데, 연구소 사람들이나 연인이나 다 말리니 좀 성질이 났다. 종일 사탕을 달고 사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이럴 때 와인 맛 좀 본다고 해서 큰일이라도 나나?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는지. 윤해는 따지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기온은 못 본 척 그녀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 주고 있었다.
“먹자. 우리 처음으로 이렇게 분위기 낸다. 그렇지?”
부드럽게 달래는 말투에 윤해는 금세 뾰로통한 표정을 풀었다. 그러곤 아주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럴 때 보면 아이 같다며, 기온은 웃었다. 그가 윤해의 잔에 청포도 주스를 따랐다. 맑은 액체가 쏟아지는 소리조차도 맑다. 풍선이 내뿜는 빛에 투명한 청포도 주스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녀의 잔을 먼저 챙긴 기온은 이후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두 잔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인간들은 건배를 할 때 무언가 축하할 말, 소원 등을 빈다.
그걸 배운 기온의 말은 심플했다.
“네 건강을 위해.”
윤해는 싱긋 웃었다.
“네 건강을 위해 주는 널 위해.”
식사가 시작되었다. 소스를 얹은 고기를 맛본 윤해는 눈이 동그랗게 떴다. 고기 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맛도 최고였다. 태어나서 먹은 소스 중 가장 맛있었다.
표정으로도 그녀의 칭찬이 들리는지, 기온이 먼저 말했다.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정말?”
“불에 고기를 굽는 건 요령만 알면 간단한 일인데, 소스는 비율과 조리 순서에 따라 맛의 차이가 오묘해진다더라고. 윤해의 입맛에 맞춰 맛있는 걸 만들려고 하다 보니 집중하게 되더라. 섬세한 작업이야. 그래서 요리는 재미있는 거고.”
왠지 심오하게 들리는 말에 윤해는 칭찬했다.
“잘했어.”
“칭찬 받으니 기분 좋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 음식을 먹고, 먹여 주는 등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37 기지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것을 맨손으로 먹다가 이렇게 제대로 꾸민 자리에서 훌륭한 요리를 포크와 나이프로 먹는다. 그 간극이 두 사람의 기분을 기묘하게 만들었다.
다 먹은 후에는 숲길을 걸었다. 낮과는 달리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하늘에 떠 있는 인공 달만이 두 사람을 소란스럽게 비춰 줄 뿐이었다.
“아무도 없어.”
갑작스러운 윤해의 말에 기온이 물었다.
“그게, 왜?”
“기온. 있잖아, 우리 키스할까.”
기온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연인으로 아무리 서로 좋다고 해도, 10살 아이 모습의 연인에게 키스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그녀의 정신이 어딘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키스하자, 기온.”
“시끄러워.”
“키스, 키스, 키스.”
“그, 참.”
혀를 찬 기온은 갑자기 윤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업히라고 손짓했다.
“뭐해? 업혀.”
“갑자기 왜?”
“높은 곳의 상쾌한 공기를 쐬게 해 주고 싶어. 꼬맹이에게.”
“이…….”
윤해는 싫은 듯 소리를 냈지만 결국 그의 등에 업혀 주었다. 그의 등은 보기에도 넓고 단단했는데, 실제로 업혀 보니 더 든든했다.
“위쪽 공기가 어때?”
이미 윤해는 기온이 묻기도 전에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향이 좋았다. 기온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샴푸 냄새와 숲 향기가 어우러지니 묘하게 들떴다. 이 기분은 곧 짜릿함으로 온몸을 살짝 떨게 할 정도였다.
“황홀할 정도야.”
“과장은.”
“과장 아닌데?”
윤해는 그렇게 되물으며 기온의 목을 확 끌어안았다. 기온의 귀가 빨개졌다.
그는 헛기침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걸 느꼈다. 자각한 후로는 최대한 천천히 걸으려 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걸음마저 상냥함이 느껴지자 윤해는 그의 목덜미에 뺨을 댄 채 나른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꼈다. 이 밤, 이 공기, 그의 숨소리와 향기까지.
키스 대신에 이렇게 업힌 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별말을 하지 않아도 맞닿은 체온으로 대화가 되는 듯했다.
곤충이 날아다녔다. 숲길이 어두우니 일부러 풀어 둔 반디 로봇이었다. 윤해는 과거 지구에 이런 로봇처럼 빛이 나는 곤충이 있었다는 걸 설명했다. 사실 이런 말들은 37 기지에서부터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때와 다르게, 말해 주고 싶은 걸 다 말할 수 있으니 속이 아주 시원했다. 진지하게 들어 주는 기온의 반응도 좋았다.
“이렇게 우리밖에 없고 조용하니까, 꼭 그때 동굴에 있는 느낌이 들어.”
“그러게.”
“그때는 몰랐지. 우리가 이렇게 말이 통하는 날이 오는지.”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거라더군.”
“맞아. 그리고 이건 알아?”
“뭘?”
“내가…… 곧 네 귀에 키스할 거라는 거.”
윤해는 기온의 귀를 물 듯이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