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에게 사육당하다-34화 (34/43)

34화

식사 후, 설거지는 윤해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기온이 앞치마를 홱 빼앗았다.

“그 작은 손으로 지시봉 잡기도 어려울 텐데, 설거지는 무슨 설거지야? 내버려 둬.”

“연구소 사택에서도 자주 설거지하는데!”

기온은 몹시도 불쾌한 말을 들은 양 눈썹을 씰룩였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네가 설거지할 힘이 어디 있다고? 누가 시키는 거야? 누구야, 그놈이?”

“진짜……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자꾸 애 취급할 거야?”

“애 취급하는 거 아니야. 공주님 취급이지.”

“이…….”

할 말을 잃은 윤해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열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아아, 웃는다. 공주님 소리 좋은가 봐. 그렇지?”

설거지는 결국 기온의 고집으로 그의 몫이 되었다.

* * *

두 사람은 산책을 하려고 나섰다.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오늘도 윤해는 수업이 있었으니까. 다만 오늘 아침 2시간은 체육이라, 적어도 그 전까지는 이렇게 기온과 함께 산책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책로로 향하다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평소 이 학교에서 체육 교사보다 정원사이길 더 원하는 체육 교사는 아이들을 방치한 채 잡초를 뽑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저들끼리 놀고 있었는데, 윤해를 보자마자 뭐가 그리 좋은지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다.”

“선생님!”

“윤해 선생님!”

뛰어오는 건 주로 남자애들이었다.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 아이들 같지 않고 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만나러오는 것 같았다.

기온은 고개를 저었다. 2시간만 기다리면 윤해와 수업하는데도 윤해에게 몰려오는 녀석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이터니티 연구단지의 어른들과 다르게 소소한 사정에는 밝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기온을 잘 모르는 듯했다.

“이 남자는 누구야?”

“선생님 삼촌이야?”

“설마 오빠는 아니겠지. 저런 아저씨가.”

연달아 날아드는 물음과 추측에 기온은 머리가 어질했다.

‘아, 아저씨? 누가? 내가?’

태어나서 아저씨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학교나 파티나 모임에 가도 자신을 20대 초반으로 보지, 누구도 아저씨로 보지 않았다.

‘이것들 눈이 삐었나?’

이 와중에 윤해는 아이들에게 뭔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기온은 그런 그녀를 빨리 데리고 애들에게서 좀 떨어졌다.

“뭐야, 쟤들?”

“응? 뭐가?”

“왜 너한테 버르장머리 없게 굴어?”

윤해는 기온이 말하는 ‘버르장머리’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었다. 괴물의 세계에서 살던 그가 어느새 그런 단어를 자연스럽게 쓰는 게 퍽 신기하기도 했다.

“버르장머리 없다니.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거 안 들려?”

“호칭만 그렇지, 말은 안 그렇잖아.”

윤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사실 쟤들은 내가 자기들보다 나이 많다는 거 몰라. 그냥 어린 나이에 연구소에 취직한 천재인 줄 알지.”

“뭐? 왜?”

“왜긴 왜야. 내가 말한 적 없으니까.”

“그래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굳이? 오히려 또래라고 하는 게 더 편해.”

“그럼 쟤들은 내가 네 애인이라는 것도 모르겠네?”

윤해는 기온을 이해할 수 없었다. 10살 여자애와 20대 남자가 연인이라 밝혀서 좋을 게 뭘까?

“기온, 그걸 굳이 말해야 해?”

되물음에 기온은 할 말이 없어졌다.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간 윤해는 아까 하지 못한 대답을 해 주었다.

“으음, 저분은 오빠도 아니고 삼촌도 아니야. 나중에 나에게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뭐, 그러니까 일종의 예비 학생인 셈이지.”

“그렇구나.”

“늦깎이 공부 중인가 봐.”

“맛있는 거 참 잘 사 주게 생겼다.”

듣고 있던 기온은 발끈해서 외칠 뻔 했다. 예비 학생이기 전에 이 사람 애인이라고, 나중에 결혼도 할 거라고, 그러니 말조심하라고.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간…….

‘뭐야, 페도필리아야?’

‘정신병자 아니야?’

‘멀쩡하게 생겼는데 알고 보니 우리 선생님 스토커라거나?’

그러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기온은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때마침 그때 체육 교사가 잡초 정리를 마치고 아이들을 불렀다.

“너희! 수업 시간에 뭐 하는 거야? 얼른 이리 와라!”

아이들은 윤해와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으으. 난 체육이 싫어.”

“두 시간만 참자.”

“선생님! 이따 봐!”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윤해는 그들을 향해 더욱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응, 얘들아! 이따 봐!”

목소리가 어려진 건 당연한데, 말투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어려진 것은 착각일까? 기온은 아이들에게 유난히 다정하게 말해 주는 그녀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윤해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다시 돌아보며 외쳤다.

“다음엔 선생님 너도 같이 체육하자!”

“그래! 같이 뛰자!”

“재미있을 거야!”

윤해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 그럴까? 그래!”

잠잠해지자, 기온은 윤해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아, 그럴까? 그래!”

빈정거리는 태도에 윤해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좋겠어? 아저씨라는 말을 들었는데.”

윤해는 고개를 저었다. 기온이 기분 나쁜 이유가 단지 그거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그게 뭐냐고 물으려는데, 이미 기온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게다가 저 녀석들, 너한테 쓸데없이 생글생글 웃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선생 대할 때 웃지, 울어?”

“그리고 같이 체육하자고 하는 것도 웃겨. 상식적으로, 그럴 시간이 있으면 교사가 수업 준비를 하거나 쉬어야지. 안 그래?”

“그런가.”

윤해는 대답하면서, 내심 놀랐다.

‘상식적으로…… 라는 말을 써? 기온이?’

사람처럼 옷을 말끔하게 입고, 자연스럽게 사람의 말을 쓰고, 사람이 먹는 음식도 능숙하게 요리하는 그의 모습 자체로도 이미 놀라웠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라는 말을 쓰기까지 하니, 참된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듯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왜 이렇게 화난 얼굴과 뾰로통한 목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온.”

“왜.”

“너, 혹시…….”

“혹시, 뭐.”

“애들 상대로 질투해?”

그 말에 기온은 몇 초간 답을 생각하다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뭐래. 난 그런 유치한 어른 아니거든.”

* * *

산책은 30분 정도만 했다. 후에는 함께 학생들의 활 연습장으로 가서 활을 쏘며 놀았고, 교내 매점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먹으면서 기온이 푸념했다.

“기껏 하는 데이트가 학교 안에서라니.”

“학생 때 연애하는 기분인데. 좋지 않아?”

기온에게 ‘학생 때 연애하는 기분’이란 각종 매체를 보고 배운 장면에서 얻은 감성이 대부분이었다.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으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다.

“응. 좋지 않아. 좋진 않지만…….”

말끝을 흐리던 그는 그녀의 뺨에 아이스크림을 살짝 묻혔다.

“싫지도 않아.”

“큭.”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 그는 아쉬워하며 물었다.

“슬슬 수업 준비해야지?”

“아, 좀 이르긴 해도 미리 하면 좋지.”

“먼저 들어가 봐.”

“기온, 너는?”

“난 학교 구경 좀 더 하려고.”

“그래. 우리 오늘 저녁은 꼭 같이 먹자.”

“그래.”

기온은 윤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운동장으로 갔다.

아직 아이들은 체육 수업 중이었다.

벤치에 앉은 기온은 수업이 끝나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마치는 종이 울렸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윤해에게 쪼르르 달려왔던 남자아이들을 불렀다.

“어이! 너, 파란 옷. 그리고 검은 옷에 뽀글머리. 그리고 빨간 운동화에 까까머리, 무테 안경 쓴 녀석, 다들 이리 와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