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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33화 (33/43)

33화

기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터니티 연구소 사람들 연봉이 제법 높다고 들었고, 연구소에 속해 있는 윤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고작 2주 간 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아주 기쁜 일인 양 생각하다니?

“부업, 꼭 필요한 거야?”

윤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 월급으로는 부족해?”

“아니, 연구소 월급은 과분하지. 하지만 그건 모아서 나중에 이시도르 님께 갚을 거야.”

“갚다니?”

“나 치료한 약,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들었어. 부자들만 먹는 약이란 거, 너도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공짜로 치료받을 생각 없어. 연구소에서 일한 돈으로 다 갚아야지.”

기온은 한참 말이 없다가 제의했다.

“그럼 내가 애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좋은 부업 줄게. 나 가르쳐 줘. 보수는 넉넉히 줄게.”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아무 일도 안 하는 학생한테 돈 받긴 싫은데.”

그러자 기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시도르에게서 엄청난 액수의 용돈을 받고 있긴 하지만, 돈만 많을 뿐 현재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일을 배우는 과정이라 일하는 느낌은 들어도 결국은 학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으…… 젠장.’

기온은 발끈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37기지에서는 그래도 대장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이랄 게 없었다.

그 모습이 윤해는 웃겨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꾹 참고 내색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휴가는 없어. 그렇게 알아.”

기온은 이미 입이 쑥 나와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 *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윤해는 초등학교 기숙사의 남는 방에 머물기로 했다.

기숙사 방에 등록하러 가는 날, 기온이 짐을 챙겨 윤해를 따라가 주었다. 함께 좋은 곳에서 휴가를 보낼 수 없다면, 그녀가 있는 곳에서라도 같이 있을 생각이었다.

“여기 방 많죠? 두 개 주세요.”

기온의 말에 기숙사 사감은 좀 난감해졌다. 사감도 이시도르의 아들과 윤해의 관계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연인이 이런 곳에 같이 온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숙박업소가 아니었다.

뭐라고 지적의 말을 하려는데, 여자 쪽이 한술 더 떴다.

“왜 두 개야? 난 하나도 괜찮은데.”

“미쳤어?”

“미쳤으면 애들 가르치겠어?”

“됐고, 얼른 크기나 해.”

“응. 그래도 방은 하나만 할 거야.”

사감은 이들에게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 게 시간 낭비라는 걸 깨닫고 열쇠를 주었다.

물론, 당연히 2개였다.

* * *

재회의 포옹 이후, 기온은 윤해에게 조금의 접촉도 삼갔다. 가까이 닿는 것은 그에게 금기였다. 그의 마음이 허락한 접촉이라고는 손잡기가 전부였다.

인간들의 룰을 안 이상 그는 윤해에게 그 이상의 스킨십을 할 수 없었다. 설사 윤해가 허락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함께 있는 문제는 달랐다. 외모가 어떠하건 현재 둘은 연인이었다. 연인이라면 함께 있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소중한 법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들에겐 그런 시간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이터니티 연구소 일이 너무 바빴다. 조금 시간이 난다 싶으면 윤해는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군에서 실종 처리된 그녀는 행정적으로 완전히 신분이 세탁되어 원래의 김윤해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김’이라는 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보안상 부모님을 만나는 일도 조심스러웠다. 부모님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만난 직후에도 감정을 달래느라 기온과의 연애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가끔 그녀에게 시간이 났을 땐, 정작 기온의 일정이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시도르의 후계자가 되는 수업은 만만하지 않아서, 빠듯한 스케줄을 겨우 소화하고 나면 윤해를 만날 시간은 길어야 한두 시간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휴가는 그들에게 허락된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윤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더욱더 시간을 쪼개 데이트하는 게 중요했다.

기온은 윤해의 수업이 얼른 끝나길 바랐다. 저녁을 같이 먹길 기다렸고, 그녀가 오지 않아 결국 먼저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기다렸고, 다 먹은 후 잠잘 준비를 하면서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기온은 조르는 성격이 아니라고 자신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보채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멀었어?]

[응.]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애들이 질문을 많이 해.]

[미친 거 아냐? 선생님도 퇴근해야겠다고 해.]

[어떻게 공부하는 애들한테 그래? 그리고 이런 경우 초과 시간마다 수당 준단 말이야.]

[아하. 나중에 참 부자 되시겠네.]

[비꼬는 거야?]

[응.]

[이야. 비꼴 줄도 알고. 점점 인간이 돼 가는데?]

[그런 말할 시간에 수업이나 마저 해, 얼른.]

[메롱.]

이런 메시지가 몇 차례나 오가다가, 기온은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제 방에 들어가 잠들었다. 자기 전에 학구열이 대단한 학생들을 향한 저주도 차분히 해 주었다.

“성가신 것들.”

* * *

밤이 깊었다.

혼자 잠든 기온의 곁으로 윤해가 살금살금 왔다. 윤해는 곁에 누워 그를 끌어안았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윤해에게 경고만 할 뿐이었다.

“떨어져.”

“하지만……!”

윤해는 그가 야속했다. 떨어지라고 할 거면 학교까지 왜 따라온 건지?

“나랑 가까이 있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니야?”

“같이 있으려고 따라온 거야. 가까이 있는 거랑 엄연히 달라.”

“난 모르겠는데?”

“셋 셀 동안 안 비키면, 이 방에서 쫓아낸다.”

하지만 그의 말이 너무 단호해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치. 비켜 준다.”

윤해는 마지못해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자려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이따금 눈을 떠서 기온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서운한 말을 해 놓고도 잘만 자고 있었다.

어째 맨날 자신만 아쉬워하는 느낌이 별로였다.

‘괴물처럼 들이댈 땐 언제고.’

37 기지에서의 야성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고, 다른 괴물들을 휘두르고, 무엇이든 뚝딱 만들고, 또 키스도 하던,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 종종 떠올랐다.

‘좋았지.’

그때를 생각하면, 이 작은 몸 따위는 버려 버리고 얼른 크고 싶을 정도였다.

어렵게 잠이 들고 다음 날이 밝았다.

깨어난 윤해는 놀랐다.

손에 따뜻한 뭔가가 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기온의 손이었다.

옆에서 기온은 손을 다정하게 잡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사랑스러운 남자.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달콤한 감정을 어쩌질 못해, 윤해는 그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굿모닝, 기온.”

소리를 들었는지 기온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윤해의 손을 끌어 손등에 키스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엔 아주 깊게.

입술이 떨어진 윤해의 손등엔 붉은 꽃이 작게 피어나 있었다.

그의 고요한 아침 인사였다.

* * *

기숙사의 각 실(室)은 3개의 방이 하나의 욕실과 주방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화재 예방 수칙만 잘 지키는 조건 하에 요리도 할 수 있었다.

윤해가 씻고 나왔을 때, 기온은 주방에서 요리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는 소박한 주방에서 마치 소꿉놀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요리할 수 있어서 아주 재미있어 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다. 버섯을 넣어 향이 좋은 스프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다리 살 소테(Saute)는 보고만 있어도 식욕이 끓어오르게 했다. 풍부한 색깔의 채소들, 그리고 신선한 과일과 상큼한 유산균 음료도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했다.

게다가 맛도 좋았다.

윤해는 기온이 먹으라고 하기도 전에 숟갈을 들어 스프를 떠먹어 보고는, 감탄을 내질렀다.

“와! 최고야! 너무 맛있어!”

표정, 목소리, 눈빛, 모든 게 극찬의 표시였다.

기온은 기뻤다.

과거 37 기지에서 구해다 주었던 음식으로 윤해의 몸이 잘못된 것에 늘 마음이 아팠다. 요리를 배운 것은 오직 그녀를 위해서였다. 자신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그런 약을 먹어 몸이 이렇게 작아졌으니, 좋은 음식을 먹고 성장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라는 책임감이 있었다.

“앞으로도 자주 먹여 줄게. 나중에 같이 살게 될 때, 너한테 좋은 음식만 해 주고 싶어. 그래서 배운 거야.”

윤해는 아주 감동적인 말을 들은 듯 눈을 빛냈다.

“같이 살려고, 나랑?”

기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 그럼 안 살려고 했어?”

“청혼이야?”

“그런 거창한 건 몰라. 중요한 건…….”

기온은 제 접시의 고기를 윤해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먹성 좋은 윤해가 금세 다 해치웠기 때문이다.

“네가 다른 남자랑 살려고 해도, 내가 절대 안 놔줄 거란 이야기야.”

“와! 무서운데 멋져!”

“뭐야, 그게.”

“매력적이란 뜻이지.”

“웃겨. 얼른 먹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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