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윤해는 실험실에서 일하면서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시종일관 웃었다. 작은 몸에서 풍기는 밝은 기운에 실험실 사람들 역시 분위기가 좋았다.
기온은 알지 못했지만, 사실 그녀는 석 달 전 의식이 깨어나 재활을 시작했다. 도중에 이시도르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아 신분을 세탁하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하러 와 주지 않은 군을 미련 없이 버리고 이시도르의 이터니티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간단한 실험 보조는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섬세한 업무도 가능해졌는데, 덕분에 불과 한 달 만에 이 연구센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윤해는 언제든 연구실에 마음껏 드나들며 일할 수 있었는데, 기온과 재회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시도르는 창밖에서 윤해의 모습을 보고 웃다가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연인과 재회했는데도 실험실에서 실험이나 하는 저 작은 사람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몸은 어려도 마음은 어른이고, 연인과 재회를 이렇게 짧게 끝내는 걸 원치 않았을 터였다.
‘기온 이 녀석은 대체.’
그는 곧바로 가장 위층 손님방으로 갔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 * *
노크도 없이 들어갔지만, 기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시도르는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 일이 떠올라서였다.
기온이 노크를 처음 배운 직후, 이시도르가 말없이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기온은 왜 말도 없이 들어오시냐고 버럭 화를 냈었다. 이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어서, ‘아버지는 프라이버시를 너무 지켜 주지 않으신다!’며 투덜거려 이시도르를 재미있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심란하면 그럴까?
그는 아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고 골똘히 하지?”
기온은 천천히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눈동자 가득 원망이 있었다. 기온은 알고 있었다. 윤해를 그렇게 만든 것에는 이시도르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이럴 거라고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이시도르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느긋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아들의 눈에는 더욱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흐음. 말하면 막을 도리라도 있었던 건가?”
부드럽게 묻는 것 같아도 가시가 담겨 있었다.
“망가져 가는 그녀의 몸을 보고 네가 뭘 할 수 있지?”
기온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면 뭔가? 연애하긴 좀 그런 몸으로 태어나 짜증이라도 난 건가.”
“닥쳐요.”
거친 말에 이시도르가 손가락을 올려 주의를 주었다.
“또, 또 거친 말.”
인간 사회에 적응했다고 하지만, 기온은 괴물들과 함께 했던 시절의 버릇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 예가 바로 사람들이 안 볼 때 맨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 그리고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 과격한 단어를 쓰는 것이다.
“말은 골라 가면서 써야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이는 보편적이고도 정상적인 태도에 관해서는 다 알고 있을 텐데?”
기온은 여전히 반항적인 태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이는 보편적이고도 정상적인 태도라. 그렇다면 아들에게 미리 말은 해 주었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미리 말은 했어야 옳은 것이었다.
이시도르는 다가가 기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다. 네 마음. 내가 밉겠지.”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는 아들을 향한 애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녀가 만족한다는 거지.”
기온은 믿지 않았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아버지가 어떻게 아시죠?”
“넌 그럼 그녀가 만족한다는 말이 거짓이란 걸 어떻게 증명할 거냐?”
“하아.”
이시도르는 허리를 숙여 아들과 눈을 맞췄다. 이 말만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에겐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37 기지라지. 너와 그녀가 머물렀던 곳 이름이.”
“그래서요?”
“거기서 인간이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그녀의 장기는 힘을 잃어 가던 상태였어. 넌 몰랐나? 그녀가 지속적인 복통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기온은 충격 받은 듯 이시도르를 보았다.
지속적인 복통이라고? 37 기지에서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이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인간들의 음식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먹여야 연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열매나 식물을 가득 구해 주었다.
그런데 그게 그녀의 몸을 상하게 했단다.
한 번도 알지 못했다. 말이 안 통하면 눈치로라도 알았어야 했는데, 단 한 번도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었다.
“자연적으로 회복하려고 해도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는 약과 함께 수술을 받고 나니 몸이 괜찮아졌어. 37 기지에서 앓던 두통과 통증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잘된 것 아닌가? 그녀는 진심으로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 새로운 신분을 얻었고, 안정된 생활도 누릴 수 있지. 만족하고 있다는데 네가 이렇다 저렇다 할 이유는 없다.”
풀 죽어 있는 기온을 향해 이시도르가 다시 말했다.
“솔직히 난 처음 네가 윤해를 보고 연인이라 했을 때는 믿지 않았지. 괴물 밭에서 살아온 벌거숭이와 연인 사이라고 할 인간 여자가 어디 있을까, 의심도 했다.”
“……이해해요.”
“그런데 윤해가 깨어나 간절한 얼굴로 너부터 찾는 걸 보고, 둘은 진짜다 싶더군. 기온 네가 아니었다면 자기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이렇게 살려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삶 자체에 고마워하고 있었어. 그런 그녀가 널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기쁨을 나누려고 했을지는 생각 안 해봤나?”
“아…….”
“기온. 네가 진짜 그녀의 연인이라면 이렇게 골방에 틀어박혀 있을 시간에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좋을 듯하구나. 잔소리가 길었다. 난 이만 잠에 들도록 하지.”
이시도르는 그 말을 남기고 나갔다.
혼자 남은 기온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연구실에는 윤해와 동갑의 연구원이 있었다. 어린 몸의 윤해에게도 진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윤해를 보았다. 연인이랑 재회한 날에 연구실에서 너무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거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만 들어가 보라는 말 대신 농담을 건넸다.
“일찍 자야 쑥쑥 크지.”
그러자 윤해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너도 일찍 자야 피부 좋아지지.”
“피부 좋아지려고 노력 안 할 거야. 열심히 벌어서 너처럼 약 먹고 젊어질래.”
“그것도 좋겠네.”
“난 갈게. 수고해. 윤해 양!”
동료가 연구실에서 나간 뒤로도 윤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요즘은 주로 시아로파에 관해 연구했다. 대체 이터니티는 어떻게 구했는지, 군 연구소가 그토록 확보하려던 시아로파를 참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이 시아로파만 아니었다면 37 기지에 갈 일도 없었고, 괴물들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기온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군 연구소보다 좋은 자리에 취직하지도 못했을 테지.
인생은 한 가지 면으로만 판단할 수 없었다.
‘운명인가 봐, 진짜.’
언제부턴가 일은 하지 않고 창밖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달콤한 감상에 빠져 들어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지났을까.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동료가 연구실을 떠난 지도 꽤 된 듯한데,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문에 누군가가 있긴 있었다. 경비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그는 기온이었다. 낮에 보았을 때 입었던 재킷은 어디 가고 없는지 셔츠 차림이었다. 춥지도 않을까? 윤해는 걱정되었다.
그는 눈을 마주쳤을 때 시선을 잠깐 피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윤해를 제대로 보았고, 그때 그의 눈시울은 붉어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눈빛이지만 많은 말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윤해는 밖으로 나갔다.
“기…….”
그를 다 부르기도 전에 와락 안겼다. 행여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격정은 고스란히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고백했다.
“상처를 주려던 게 아니었어.”
윤해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기온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안긴 기분이었다. 어른의 몸을 가진 건 자신이었지만, 그녀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 아직 많이 모자란가 봐. 나름대로 인간의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괴물로 살 때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 부족해서 미안해.”
윤해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피식 나오는 웃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온의 등을 툭 치며 짧게 말했다.
“기특하기만 한데.”
재회에서 칭찬을 들을 줄이야. 벅참과 부끄러움, 그리고 기쁨에 기온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나라고 해도, 그래도…… 나랑 함께하자. 앞으로도.”
윤해는 기온의 등을 또 툭 쳤다. 아까는 장난스럽게 친 거였다면, 이번엔 제법 아팠다.
“뭐야. 그럼 아까는 나랑 함께할 생각 아니었어?”
잠깐 떨어져 본 윤해의 얼굴엔 생글생글 웃음이 가득했다. 귀여운 아이의 얼굴이었지만, 기온에겐 37 기지에서 짓던 그 미소로 보였다.
“윤해…….”
기온은 윤해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윤해는 그가 끌어안은 것보다 더 세게 그를 껴안았다.
못 다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진정한 재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