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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30화 (30/43)

30화

기온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당황한 의사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온에겐 그 웃음이 미칠 듯한 잔인함으로 느껴졌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젠 없을 거라고? 그럼 그녀는 죽은 건가? 아니, 아니잖아. 이렇게 헤어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보낼 순 없었다. 그러려고 지난 1년을 기다린 게 아니었다.

의사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지난 1년 간 인간들 틈에 섞여 편안히 지냈던 자신을 향한 분노.

그리고 웃고 있는 의사를 향한 분개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그 순간, 의사의 등 뒤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기온, 일찍 와서 무슨 행패냐?”

하나는 이시도르였고, 또 하나는 이제 겨우 10살쯤 돼 보이는 동양인 여자아이였다. 소녀는 새빨간 막대 사탕을 입속에 넣고 굴리고 있었다.

의사의 멱살을 놓아준 기온은 뒤로 물러나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분명 처음 보는 아이였다. 새까만 단발, 새까만 눈동자, 하얀 피부에 쌍꺼풀 없는 눈매와 웃고 있는 표정.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나 동양인 보기가 어려운 도시 생활을 한 후로는 더더욱.

그러나 왜일까.

기온은 눈앞의 그 여자아이를 언젠가 본 것 같았다. 어제도 그제도 본 듯 익숙한 무엇인가가…….

“나야, 기온.”

소녀가 다가와 입에서 사탕을 빼고 말했다. 의사는 소녀의 뒤에서 웃으며 친절히 설명하려 했으나, 이시도르가 그것을 막았다.

“이제부턴 내가 설명하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저는 이만. 참, 기온. 아까 제 말은 농담이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없을 거라던 말은, 전의 그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었어요. 보다시피―”

“내가 설명한다고 했을 텐데?”

이시도르의 말에, 의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완전히 물러났다.

방 안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이시도르는 기온을 침대에 앉혔다. 기온은 그가 이끄는 대로 앉았으나 시선은 여전히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 아이는 시종일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있다가 기온의 옆에 앉아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달라진 기온을 평했다.

“이렇게 보니까 참 멋져.”

“넌―”

얼떨떨해하는 기온을 향해 이시도르가 말했다.

“그래, 네가 늘 그리워 마지않던 그녀야. 젊어지는 약은 만병통치약이나 마찬가지더군. 병을 앓기 전으로 몸을 되돌릴 수 있으니. 어쨌거나 지금은 이런 모습이라도 금방 성장할 거다. 넉넉잡아 한 십 년만 더 크다 보면 말이다.”

그러자 윤해가 조금 불만인 양 받아쳤다.

“어리니까 몸도 가뿐하고 좋은데 그냥 이 모습 그대로 유지하면 안 될까요?”

“약이 좀 비싼데, 갚을 자신 있는가?”

“얼마면 되죠?”

“음. 돈 보다는 노동이 좋은데. 가령 우리 기온을 평생 보살펴 준다든가.”

“오. 그거 좋네요!”

윤해와 이시도르는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친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진담인지도 몰랐다.

당혹스러워 침묵하는 사람은 오직 기온뿐이었다.

기온은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시도르가 젊은 몸으로 지내려고 회춘 약을 복용 중이라 20대 남성의 모습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비싼 약이 치료를 위해 윤해에게 쓰였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 또한 그로 인한 것이었다.

이런 결과를 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꿈에도.’

윤해는 반쯤은 넋이 나간 그가 못마땅해 팔을 꼬집었다. 그리고 체리 맛 사탕을 입에서 뺀 채로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야? 재회의 인사가 이렇게 조용해도 돼?”

그래도 기온은 멍하니 허공만 보았다.

대답과 반응을 포기한 윤해는 고개를 저으며 창밖을 보았다. 햇빛이 좋았다. 기온과 함께 산책을 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이시도르는 슬슬 이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대충은 기온도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지. 그럼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눈치 있게 비켜 주는 그를 향해 윤해는 눈인사를 한 후 기온을 보았다. 그리고 기온도 윤해를 보았다.

‘말도 안 돼.’

그는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늘 생각했다.

건강한 모습의 윤해를 만나면 할 말도 보여 줄 것도 많을 거라고, 내가 인간 세상에 이렇게 적응했다고, 나 이렇게나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 옷도 가장 신경 써서 멋있게 입고 왔다. 변한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좀 유치하긴 해도 그러고 싶었다. 우리는 동화 속 왕자나 공주님처럼, 아니면 영화 속 행복한 연인들처럼 사랑할 일만 남았다고. 그러니 우리 둘이서 실컷 기뻐하자고 하려 했는데…….

‘이런 모습이면 어쩌잔 거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윤해를 보았다. 뭐가 좋은지 이 작은 여자는 먹고 있던 체리 맛 사탕을 빼서 내밀며 속 편하게도 묻고 있었다.

“먹을래?”

기온은 이질감을 느끼다가 혹 그런 마음이 드러날까 어설프게나마 웃었다.

“……아니.”

그러다가 다시 굳은 표정이 되었다. 첫 대화 주제가 사탕이라니. 기온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런 모습에 윤해는 조금 서운한 듯 다시 물었다.

“왜?”

“안 먹어.”

“더러워?”

“…….”

“키스도 했으면서 되게 낯가리네.”

언제나 몸짓과 눈빛, 그리고 눈치로만 통하곤 했다. 이제야 인간의 언어로 제대로 대화하게 되었는데, 키스 이야기라니. 그것도 이렇게 작은 몸으로.

기온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겨우 입을 열어 한 말이 구시렁거림이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대체 애처럼 왜 사탕이나 먹는 거야.”

그러자 윤해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런 말 하지 마. 약 부작용이야. 뇌 에너지 소모가 많으니 몇 년 간 당분을 많이 먹으라고 했어, 안 먹으면 어지러워.”

몸이 어리고 말투도 가벼워 정신까지 애가 된 줄 알았는데, 지금의 말은 이제야 좀 성숙하게 들렸다.

기온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고 들었다. 윤해는 어려지는 약으로 상처를 고쳤지만, 그만큼의 불편함도 감수하고 있었다. 하루 몇 번씩 사탕을 먹는 것은 물론, 밤마다 둔통도 앓아야 했다. 고통이라고 해도 견딜 만한 정도였지만, 그래도 걸리적거리는 건 당연했다. 같은 약을 먹고 있는 이시도르도 겪는 고통이라 기온도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조금 늦더라도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보채서 그녀가 성급한 방식으로 회복한 거라면, 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녀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사람으로서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온은 묻고 싶었다.

“좋아? 그러니까 지금…… 만족해?”

윤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쁠 게 없다는 듯한 태도. 그건 듣는 사람을 안심하게 하려는 것일까?

“난 좋아. 만족해. 수명도 길어진다면서? 내가 군 연구원 소속이라니까, 이시도르가 능력자라며 좋아했어. 그리고 평생 약 줄 테니 자신의 연구소에서 일해 달라고 했어. 그럼 나 이시도르의 밑에서 일하는 동안은 몇 백 년이고 살 수 있단 말이잖아? 남자친구 잘 둔 덕에 이게 무슨 호사야.”

재잘재잘 말하는 모습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기온은 뜻하지 않은 부분에서 설렜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도 얼떨떨한데, ‘남자친구’라는 말을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들뜬 가슴은 가슴인데,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격하게 안고 싶었던 마음은 접은 지 오래였다. 작디작은 몸은 안으면 부서져 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윤해의 정신은 어른이었으니까, 아이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악수를 신청할까?

그것도 아니었다.

등을 가볍게 두드릴까?

그것도 아니었다.

기온은 사탕을 들고 있는 윤해의 작은 손, 자그마한 발목을 보고는 결국 눈을 돌리고 말았다.

“이건 아냐. 이건.”

윤해의 얼굴에서 미소가 멈췄다.

“……기온?”

“깨어나 줘서 고마워. 건강하게, 이렇게 무사히 깨어나 줘서 고맙고……, 아. 음. 저기, 그러니까, 맞아. 애들은 보통 낮잠 시간이 필요하다지? 좀 자고 있어. 난, 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기온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윤해는 사탕을 쓰레기통으로 홱 던졌다.

“바보네. 열 살짜리가 무슨 낮잠을 자?”

솔직히 기대하던 재회와 동떨어졌다. 밝은 얼굴로 얼싸안고 기뻐할 줄 알았다. 뭐가 됐든 무사히 깨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너무 큰 걸 바란 모양이었다. 그는 닿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더니 결국 저렇게 도망갔다.

섭섭하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저렇게 멋지게 변할 줄은 몰랐잖아.”

그동안 이시도르가 짓궂게도 사진 한 장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온의 모습을 상상에만 그쳐야 했다. 인간 세상에 왔으니 어느 정도 보편적인 멋을 추구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그는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짧게 친 머리와 슈트를 입은 차림, 그리고 손목을 멋지게 장식하는 클래식한 시계, 또 그에게서 나는 샴푸 냄새까지. 모든 게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가 섭섭하게 하는 것까지 모두 싹 잊힐 정도로.

“이런 식으로 설렐 줄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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