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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29화 (29/43)

29화

숲속의 공터에 이르렀을 때 기온은 하늘을 보았다. 하이퍼 문의 빛이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기온은 자신의 팔을 보았다. 은은하게 빛이 났으나, 그 빛이 전처럼 강하진 않았다.

전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기온은 순식간에 호수의 끝에 가 있으려고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노력했으나, 가능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있는 힘껏 숲을 달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힘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면 사라졌거나.

헬기를 타고 추락했을 때 몸에 이변이 났던 걸까?

기분이 묘했다.

과거와 단절되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서 병원으로 다가갔다.

마침 의사가 호숫가로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최근 의사는 자꾸 기온을 피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윤해의 상태가 전혀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의사는 담배를 얼른 꺼 버리고 기온을 피해 건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기온이 힘껏 뛰어가 그를 잡았다.

‘언제쯤, 언제쯤 그녀를 볼 수 있는지요?’

목소리가 간절했다.

의사는 담배 냄새가 나는 한숨을 낮게 쉰 후, 활짝 웃어 보였다.

‘아, 기온 군. 요즘 학교생활은 어떻습니까? 친구 분들이 잘해 주지요?’

‘말 돌리지 마시고 대답이나 제대로 해 주세요.’

의사는 일부러 밝게 웃음 지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게 기온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한참 고민하던 의사가 말해 주었다.

‘볼 수 있습니다. 단, 건강해지면요.’

언제나 ‘건강해지면요’라는 조건이 붙곤 했다.

기다리는 것에 이골이 나 있던 기온은 다시 의사를 붙잡았다.

‘그냥 보는 것도 안 됩니까? 다가가고, 말하고, 손잡고…… 이럴 생각 조금도 없습니다. 그냥 보게만 해 주세요.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잖아요.’

의사는 고민했다.

전에 이시도르가 부탁한 적이 있었다. 기온을 절망하게 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여자의 위중한 상태를 기온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온이 세상에 적응하고 또 앞으로 이시도르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학업과 사회 경험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도중에 충격 받거나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게 아버지로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온은 윤해 걱정에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걱정이 돼서 다른 것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공부도 어렵고, 학교에서의 생활도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밥맛도 없고 잠도 설칩니다. 윤해를 만나게 해 주세요. 그래야 다른 것을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사는 간절한 부탁을 이기지 못했다. 마침 이시도르도 없는 것 같아서 잠깐, 아주 잠깐만 기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따라오시죠.’

‘고맙습니다!’

기온은 드디어 윤해를 볼 수 있었다. 보여 주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윤해의 상태에 관해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윤해의 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윤해…….’

유리관 속에 누워 있는 그녀는 좀비가 되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피부는 창백했고 눈은 움푹 패었다. 미약한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흡사 시체와 같은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되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기온은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불길이 일었다.

‘왜 이래야 합니까?’

‘기온 군.’

‘난 멀쩡히 깨어났는데 윤해는 왜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요!’

‘기온 군의 몸은 재생력이 뛰어난 편입니다만, 이분은 인간이라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죠. 저희도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아, 으으……!’

혼이 나간 듯 기온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천천히 돌아선 그가 유리관 지지대를 등받이 삼아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한참 동안이나 들썩였다.

의사는 한동안 기온을 그곳에서 나오라고 하지 못했다.

* *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시도르였다.

이시도르는 의사만 따로 불러서 질책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 아이에게 혼란을 주는 일은 하지 말라고.’

물론 이시도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기온이 일상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한다는 걸 의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안 되겠어. 이럴 거면 그냥 깨어나게 해.’

여자를 깨우란 말에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반박했다.

‘저는 자연스러운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만.’

‘자네 소명은 잘 알겠어.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건 곤란해. 그녀를 깨울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왜 망설이지?’

‘그랬다가 그녀도 생식 세포에 문제가 생길 수 있잖습니까.’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설마 둘이서 결혼해 자식을 낳고 알콩달콩 사는 미래가 있다며 그것을 미리 배려라도 해 주려는 건가?’

의사는 기온과 그 여자가 그런 미래를 꿈꾸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여자를 향한 기온의 관심과 걱정은 연인을 대하는 남자의 모습 그 이상이었으니까.

‘걱정 말지. 설사 둘이 진짜로 그런 미래를 꿈꾼다고 해도, 뭐 어떤가. 사람이 꼭 정상적인 생식 활동으로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아니잖나. 진짜 결혼이라도 해서 애라도 낳으려 하면 그땐 그때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입양이라거나, 음. 이건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지. 어쨌든 지금은 그녀를 깨우는 데만 집중해. 빠른 방식이 있잖아, 응?’

이시도르가 추천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그가 늘 복용하는 회춘 약의 주요 성분을 여자에게 투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의 몸은 강력해진 재생력으로 회복되어 의식이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의사가 말한 대로 생식 세포에 문제가 생기고 개인에 따라 신체 나이가 어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도 이해할걸세. 사람을 죽이자고 한 짓이 아니라, 살리자고 한 일이라는 것을. 그럼 부탁하지.’

의사는 이시도르의 말을 어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넉넉히 일 년은 필요합니다. 몸이 몇 살까지 어려지는지 모르고, 적응 기간도 필요할 테니까요.’

‘길군. 잘 알겠네.’

제12장. 충격의 재회

1년이 지났다.

기온에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다란 금발은 단정하게 쳤고, 평생 의복이란 것과 거리가 멀던 몸은 깔끔한 슈트 차림에 익숙해졌다. 시아로파 액체를 주식으로 먹던 몸도 서서히 변해 이제는 인간들이 먹는 음식 웬만한 건 모두 먹을 수 있었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밤 10시에 잠들어 새벽 4시면 일어나는 생활 패턴에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확인 후 운동을 하고, 독서를 했다. 그리고 평범한 학생이자 이시도르의 아들로서 많은 이와 사교하였다. 칩에 든 정보로 인간 세상의 지식을 받아들였고, 이시도르의 권유로 과학을 믿는 종교에도 신앙을 바치게 되었다.

그는 이시도르의 후계자가 될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이시도르의 약속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1년.

딱 1년만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 준다면, 건강한 윤해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약속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12시에 병원으로 만나러 오라고 했지만, 기온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껏 치료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녀를 멀리서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어차피 오늘 만날 것이라면 12시든 언제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그는 바로 윤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안 됩니다!”

“벌써 오시다니요!”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이 말렸지만, 누구도 그를 끝까지 막을 수 없었다.

벌컥.

문을 열었으나, 새하얀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불은 개켜 정리되어 있었고, 커튼은 조금의 빛도 허락하지 않은 채 굳게 닫혀 있었다. 작은 냉장고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서랍장 위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곳에 사람이 지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온은 허망하게 침대 앞에 앉았다. 그리고 텅 빈 시선으로 침대를 더듬었다.

착각일까.

왠지 아직도 윤해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그때 뒤에서 의사가 천천히 걸어와 기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온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윤해, 어디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간절한 눈빛으로 그렇게 묻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가 웃으며 말해 주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이제 없을 겁니다.”

침대를 만지던 기온의 손이 멈추었다.

의사가 덧붙여 말했다.

기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힘준 턱과 꾹 다문 입술에서 그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천히 일어난 그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올려 조용히, 하지만 힘주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뭐라고?”

“안타깝지만, 이제 더는 그녀―”

“다시 말해 보…… 살릴 수 있다고 했잖아!”

의사는 기온의 외침에 귀가 멀어 버리는 줄 알았다. 다시 말해 보라고,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따지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짐승이나 낼 법한 울부짖음을 닮아 있었다. 미성만 나오던 목에서 이토록 굵고 거친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가?

의사는 기가 찬 눈으로 기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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